#184
“일이 이 지경이 났는데 누나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윤정식이 씩씩거렸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번 사안에 가장 큰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누나인 윤정아다.
해명 또한 그녀의 몫이었을 텐데, 별다른 말 없이 사라져서는 나타나지 않는 탓에 윤정식은 기자와 주주들의 쏟아지는 질문을 홀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역시 누나가 돌아와야 뭔가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앉는 순간, 윤정식은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높이가 조금… 변한 것 같은데?’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지만, 윤정식은 그러지 않았다. 본래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의심이 많아야 하는 법이니.
드르륵-!
그대로 서랍장을 열어 안쪽을 확인했다.
대부분의 서류들은 그대로였지만… 몇몇 서류가 비는 게 눈에 들어왔다.
“…누나가 알아챘나 보군.”
사라진 것은 윤태준의 마약에 관련해서 보고받은 자료였다.
“…귀찮게 됐군.”
며칠 전 미국에서 통화가 한통 걸려왔다. 조카인 윤태준의 전화였는데, 마약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중독될 정도로 한 것도 아니고, 대마가 합법인 주에서 잠깐 한 게 전부에요, 삼촌!
-참으로 자랑스럽구나, 조카야.
-진짜, 삼촌이 몰라서 그래요. 이 새끼들, 인종차별 존나 심해요! 제가 이렇게라도 센 척하지 않았으면 이 새끼들이 분명 저를 무시했을 거라고요!
-그래. 하지만 경찰은 피했어야지, 한심한 놈아.
-그것도 제 잘못은 아니예요. 그냥 같이 피던 놈이 갑자기 도로에 달려든 게 문제라고요!
-그래, 그래서 전화는 왜 한 거지?
-엄마가 알면 난리가 날 게 분명하니까. 삼촌, 한 번만 눈감아 주세요. 제발요.
-나 참.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대화였지만, 일단 윤정식은 조카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 윤정아가 맡고 있는 일도 벅찬데, 아들 일까지 알게 되었다가는 일처리에도 지장이 생길 테고… 그냥 인간적으로도 귀찮아질 게 분명했으니까.
-좋아, 한 번은 봐 주지. 하지만 똑같은 소식이 내 귀에 들려왔다가는 쥐뿔도 없을 줄 알아.
-고, 고마워요, 삼촌!
- 그리고 다음 학기 성적표는 반드시 A를 받아라.
-여긴 미국인데요? 한국 대학교랑은 다른….
-개소리 마라 조카야. 누가 들으면 네가 하버드에 다니는 줄 알겠어.
-그래도 미국인걸요?
-미국의 학위 공장(Degree mil)이지.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겠지만, 날 속일 생각은 마라. 거기서조차 A를 받지 못한다면 그때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대로 끊었던 간단한 대화가 떠오르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뭐.’
가져간 게 그것뿐이라면 별 탈은 없을 테다. 가슴을 쓸어내린 윤정식은 그대로 노트북을 켰다.
“중요한 건 다 여기에 있으니까.”
노트북에 여덟 자리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한 파일을 켰다. 그중 하나는, 주식 보유 현황을 간편하게 계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엑셀 파일이었다.
“나랑 누나가 가진 주식과 이사 중 공고히 내 편인 사람을 합치면….”
한참을 계산에 몰두하던 윤정식은, 후우, 하고 기쁜 숨을 내쉬었다.
승률은 90% 이상이다. 사실상 주주 전체가 등 돌리지 않는 한은, 자신들의 승리나 다름없다.
“하긴. 일단 나랑 누나가 가진 것만 해도 30%가 넘어가는데. 질 수가 없지.”
하지만 그 누나가 지금 옆에 없다는 것이 윤정식을 약간 불안하게 만들었다.
‘혹시 아들 일 때문에 나한테 앙심을 품었을까? 그래서 저쪽에 붙는다면?’
생각하던 윤정식은 고개를 저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대로 윤정식은 노트북을 덮었다.
* * *
“와우, 살벌한데요?”
“그러게, 박재진 사장님 말 진짜 잘해. 저번에도 느꼈지만.”
“맞다, 선배는 직접 만났다고 했죠?”
형우를 바라보며 연수가 눈을 빛냈다.
서울에 위치한 유명 대학병원의 대기실.
대기실에 앉은 형우와 연수는 TV로 방송되는 C&N의 주주총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이다 보니, 몇몇 공중파 방송에서도 해당 주주총회를 특보로 내보내고 있었다. 이번 사건이 얼마나 큰 파급력을 가진 사건인지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었다.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글쎄….”
지금까지 보여준 기세만 봐서는 박재진의 승리가 당연한 것 같지만… 아직까지는 판단이 힘들다. 주주총회는 민주주의와 달리 1인 1표가 아니라, 갖고 있는 주식 보유량에 따라 표 수가 결정되니 말이다.
10대 90의 상황이 나왔어도, 10명의 사람이 가진 주식의 수가 90명이 가진 것보다 많으면, 주주총회는 10명의 손을 들어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형우가 알기로 윤정아와 윤정식은 이 회사에서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었고, 심지어 회사를 세운 윤태형의 자식들이기도 했다.
권력의 제도적인 세습이 완전히 사라진 21세기임에도, 유능한 이의 자식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꽤 강한 믿음을 주는 법이니.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옆 나라만 봐도 그렇잖아. 너도 알지? 입만 열면 헛소리하는 그 정치인.”
“아아, 예전 수상 아들인가 하는 그 사람이요?”
“응. 심지어 그 수상조차도 그리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지. 뭐, 우리나라한테 일본 수상이 욕먹는 거야 그럴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은 자국민한테도 욕먹던 사람이니까. 근데, 중요한 건 그런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만으로도 정치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거지.”
혈연이라는 건 그만큼 강한 힘이다.
“하물며 윤태형 회장은 회사 내에서 입지가 공고한 전설적인 인물이잖아. 그런 사람의 자식이니까… 아직도 믿는 사람이 많겠지.”
무엇보다 박재진 본인부터가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말했을 정도니, 확률은 낮다고 보는 게 맞을 테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가 오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C&N의 대가리가 윤정아와 윤정식이라면, 어찌 됐건 스패로우 팩토리는 망할 수밖에 없다.
10%건 1%건, 배팅해야만 하는 순간이라는 거다.
“저기에 선배도 있어야 하는 거 아녜요? 아군이잖아요.”
“…내가 저기를 왜 가냐? 나는 주식도 없어.”
대신 지원이 갔다. 들어보니, 이런 날을 대비해서 회사 여유자금으로 꾸역꾸역 C&N의 주식을 사 놓은 모양이다.
“사 놓은 게 4억 원 정도라고 들었어.”
C&N의 시가총액이 3천억 상당 규모니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쥐꼬리라도 보탤 수밖에 없다.
그 순간, 띠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위에 71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71번 환자분 들어가세요!”
간호사의 외침을 들으며, 형우는 자기 손에 들린 번호표를 확인했다. 무려 93번이다.
“내 차례는 언제 오나.”
“여기 유명한 병원이라 사람 되게 많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많을 줄은.”
형우가 손목을 주물럭거렸다. 요즘 글을 쓸 때마다 종종 손목이 시큰거렸던 것이다. 그냥 놔두면 그대로 손목터널증후군으로 발전할까 싶어, 형우는 만사를 제쳐두고 일단 병원부터 찾았다.
스포츠와 재활에 관련한 지식이 풍부한 연수의 도움을 받았다. 좋은 병원을 소개받은 것도 그 일환이었다.
“도와줘서 고맙다.”
“뭘 이런 걸로요. 많이 다녀봐서 아는 거죠. 처음 다쳤을 때는 서울에 있는 병원이란 병원은 다 찾아다녔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좋은 병원을 찾기보다는 좋은 말을 해 주는 병원을 찾았던 것 같다. ‘수술 한 방이면 나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주는 그런 병원을 말이다.
“뭐, 당연히 그런 병원은 없었지만요.”
“나 때문에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네.”
“아녜요, 다 지난 기억인걸요.”
이렇게 담담하게 ‘지난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절반 정도는 형우 덕분이었다. 괜히 더 말했다가는 부끄러운 상황이 올 것만 같아서… 연수는 대신 싱긋 웃었다.
“그나저나 선배는 박재진 사장을 직접 만났다면서요. 무슨 이야기 했어요?”
“뭐, 대부분은 윤태형 회장님 이야기였지.”
“저도 들려줄 수 있어요?”
“윤태형 회장님은 특이한 점이 있대.”
“특이한 점이라? 뭔데요?”
“등에 특이한 점이 있다고.”
“그게 뭐냐니까요?”
“점이 있다니까?”
답답해진 형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등에 특이한 점이 있다고! 손바닥처럼 생긴 점!”
“아, 그러니까 등에 점이 있다고요? 그 점이 손바닥처럼 생겼고?”
“그래, 그거야.”
“그렇게 말했어야죠.”
“넌 주변머리가 없구나.”
“선배는 머리가 없어질지도 몰라요. 계속 그렇게 말하다가는요.”
“흐음.”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발언이었다. 연수의 질문은 계속됐다.
“아무튼 그분이 어디에 계시는데요?”
“여기.”
형우가 천장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연수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돌아가셨어요?”
“아니, 혼수상태셔.”
“근데 왜 하늘에 손을…?”
“…이 병원이랑 같은 이름의 병원이 서울에 하나 더 있는 게 아니라면, 아마 여기에 있을걸.”
“아, 그래서….”
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형우에게 추천한 병원은 세 개였는데, 지금 둘이 있는 곳은 그중에서도 형우의 집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뭔가 한번 와 보고 싶더라고.”
“왜 여기를 골랐나 했더니 그거였군요. 아무튼, 여기 VIP실에 누워 있으시다는 거잖아요. 그, 등에 엄청 큰 점 있으신 분이요.”
“…점이요?”
그 순간,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연수가 아는 체를 했다.
“수간호사 언니?”
“예. 근데 방금 무슨 말씀 중이셨어요?”
“아, 윤태형 환자 이야기였어요. 여기 병원에 계시잖아요. VIP실에!”
“맞아요.”
원칙적으로는 VIP실에 입원한 환자의 명세를 밝히는 건 문제가 되는 행동이지만… 그게 지켜지는 일은 별로 없다.
대한민국 기자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억척같은지, 전직 정치인이든 기업인이든 입원하기만 하면 하루도 안 돼서 온 세상에 소문이 쭈욱 퍼져버리니 말이다.
“5년 전엔 꽤 시끌벅적했죠. 요즘엔 그마저도 사람이 영 안 오지만.”
심지어 C&N에서 대형 이슈가 터졌는데도, 병원에 찾아오는 기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미 잊혀진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윤태형 회장님은 왜요?”
“아, 그분을 아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서요. C&N의 사장님이던 사람인데… 언니, 그거 아세요? 윤태형 회장님의 등에는 커다란 손바닥 모양 점이 있다던데….”
“손바닥 모양 점이요?”
그 말을 들은 수간호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라, 이상하다? 그런 건 본 적이 없는데? 윤태형 회장님 말하는 거 맞아요?”
“잠깐만요.”
형우가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윤태형 회장의 등에 점이 없다고요?”
“네. 저는 본 적이 없는걸요?”
아무리 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지?’
박재진은 분명 윤태형 회장의 등에 커다란 점이 있다고 했으나… 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수간호사는 그런 게 없다고 이야기한다.
‘왜 둘의 말이 엇갈리는 거지? 점이라는 게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나?’
그런 이야기는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다. 손바닥만 한 점이라면 착각했을 리도 없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
이곳에 입원한 사람은, 윤태형이 아니다.
‘비슷한 일을 들은 적이 있어.’
한 회사가 주가가 떨어지는 것을 염려해서 죽은 회장을 살아있는 것처럼 꾸몄다는 이야기나, 혹은 반대로 대역을 입원시켜 기자들의 몰매를 피했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일의 범인은 십중팔구 상속관계에 위치한 친족이었다.
‘윤정아인가?’
아니다. 윤정아가 C&N에 복귀한 것은 6개월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 바꿔치기를 진행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확률이 낮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윤정식!”
그가 윤태형 회장을 바꿔치기한 것이다.
그 순간, 병원의 TV에 새로운 화면이 떠올랐다.
[속보입니다. 방금 C&N 경영진 교체에 대한 최종투표가 시작되기 앞서, 드디어 윤정아 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 * *
C&N의 주차장으로 고급 외제차 한 대가 들어섰다. 열리는 문으로 다가가는 사람은 정 상무다.
“고생하셨습니다.”
“뭘요. 아직 안 늦었죠?”
“이제 막 투표 시작했습니다.”
“알았어요.”
선글라스를 살짝 내린 윤정아가 정 상무를 향해 싱긋 웃었다.
저 멀리, 활짝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빛이 뭉텅이로 새어 나왔다.
“엘리베이터까지 잡아놓다니. 역시 정 상무님이 최고라니까요.”
“과찬이십니다.”
“아무튼, 저 먼저 올라갈 테니, 모시고 와 주세요.”
“알겠습니다.”
정 상무를 뒤로한 채, 윤정아는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띠링- 하고,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대회의장이 위치한 층이다. 내리기 전, 투명한 엘리베이터 바깥을 쳐다보며 정말 높네- 라고 생각한다.
C&N에서 이곳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은 회장실과 부회장실밖에 없으니 말이다.
“유, 윤정아다!”
“윤정아 사장이다!”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영화 <말레나>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영화의 끝은 비극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을 것 같다.
“시간 맞춰 잘 온 것 같네요.”
주주총회에는 비밀선거의 원칙이 없으므로, 대충 무슨 상황인지 보인다. 자신의 동생이 조금 유리한 상황이다. 여기에 윤정아의 표까지 합세한다면…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해임안이라….”
그녀가 생각하기에, 오늘 해임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쏟아지는 플래시를 받으며 투표장으로 걸어 들어간 윤정아는, 사회자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박재진 지부장을 지지합니다.”
“뭐라고?”
뒤에서 듣던 윤정식의 눈이 커진다.
“누나,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미쳤어?”
“미치지 않았단다, 동생아.”
그 순간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정 상무가 누군가와 함께 들어왔다. 휠체어에 탄 노인. 그 모습을 본 윤정식의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아, 아버지? 어떻게…!”
“정식아.”
휠체어에 앉은 윤태형이 윤정식을 노려봤다.
“이제 끝났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회의장의 문이 열리면서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윤정식, 당신을 납치 감금 및 주가조작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자신의 두 팔에 수갑이 걸릴 때까지, 윤정식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