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박재진이 자신만만하게 안내한 카페는 입구부터 꽤나 그럴듯했다.
“와아…!”
들어서자마자 형우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네모반듯한 벽돌과 입구를 크게 만든 건물의 양식은 교과서 같은 데서 자주 보던 것이다. 미술 교과서나 세계사 교과서가 아니라, 한국사 교과서 말이다.
“이거… 일본식 서양 건축양식이잖아요. 혹시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건물이에요?”
“눈썰미 좋네.”
박재진이 칭찬했다.
“그 당시 세워진 건물이 맞아.”
“용케 살아남았네요.”
“뭐, 딱히 의미 있는 건물은 아니었으니까.”
민속촌의 한옥 카페라던지, 홍대에 있는 이태리풍 카페는 가 봤지만,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카페라. 꽤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영화 세트장 같아요.”
“그런가?”
“보통 이런 곳의 주인은 일본어를 엄청 잘하는 조선인 마담이고, 겉으로는 친일파처럼 굴지만 사실은 독립투사의 뒤를 지원해 주는….”
“좀 더 하면 작품 하나 나오겠네.”
박재진이 피식 웃었다.
“카페는 나중에 들어선 거야. 원래는 우체국이었다던데.”
“그래도 세워진 지 백 년이 넘은 건물이네요.”
“거의 문화유산이라고 봐도 될 정도지.”
형우가 잠깐 시선을 올렸다.
“어어… 그런 말 해도 되는 거예요? 일제 건물인데?”
“문화유산이라는 말이 뭐 어때서? 폴란드는 아우슈비츠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잖아.”
“그건 그러네요.”
“역사를 잊는 건 안 될 말이지만, 그렇다고 과몰입할 필요는 또 없지. 들어가자고.”
카페 안쪽의 인테리어 또한 당시의 느낌을 잘 살렸다. 벽에는 넓적한 빵모자가 걸려 있었고, 그 옆으로는 오래되어 보이는 커피용품들과 손때 묻은 타자기 같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늦은 시간이니 커피는 좀 그렇지?”
“이제 고작 열 시잖아요.”
지원이 손사래 쳤다.
“사장님이 잘 모르시나 본데, 저희 회사에서 9시면 커피 먹기 딱 좋은 시간이거든요.”
“혹시 블랙 기업 할 때 블랙이 커피를 뜻하는 거 알아? 밤늦게 커피 먹이는 기업이야말로 최악의 기업이라는 거지.”
“저희가 먹인 건 아니고, 알아서 먹던데요?”
“블랙 기업이 아니라 미친 기업이로군.”
그렇게 말했지만, 박재진도 결국 커피를 시켰다.
“가비 네 잔 나왔습니다.”
가비는 커피의 예전 이름이다.
나름대로 컨셉에 충실한 카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한 시간 정도 여유야.”
“바쁘시네요.”
“주총이 코앞이잖아.”
박재진이 쇼파에 몸을 뉘었다.
“잡담이나 하자구. 그래서 뭐, 듣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어?”
“회사 이야기요.”
그 말을 꺼낸 건 지원이었다. 박재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회사 이야기는 오면서 다 했잖아?”
“그거 말고요, 예전 C&N이요. 그 이야기 듣는 거 참 좋아했거든요.”
“아, 회장님 이야기 말이지? 너한테는 안 해 준 이야기가 없는 것 같은데.”
“그때 저는 직원이었잖아요. 지금은 같은 CEO니, 감회가 새로울지도 모르죠.”
“나 참. 나는 사장 되어 보려고 아등바등인데 한참 늦게 입사한 녀석은 벌써 CEO라니. 나도 회사나 하나 차릴 걸 그랬어.”
너스레를 떤 박재진이 그대로 자세를 고쳐잡았다.
“회장님은… 가족보다 회사를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이었지.”
* * *
잠시 후, 카페에서는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말요? 손바닥만 한 점이 있어요?”
“그래. 나는 그걸 사우나에서 처음 봤는데, 내가 그 전날에 실수로 회장님 등을 서류철로 내려찍었었단 말이지? 그날 짤리는 줄 알았지 뭐야.”
“허어, 가슴이 철렁했겠네요.”
“내 말이. 영락없이 멍인 줄 알았거든. 나 참, 그렇게 큰 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라도 했겠어? 그게 너무 웃겨서 며칠간 회장님 이름을 점쟁이 회장님이라고 저장해 뒀었지.”
“안 들켰어요?”
“들켰는데 별말은 없었어. 알고 보니까 회장님도 나를 왕코라고 저장해 뒀더라고.”
“와하핫!”
지원과 형우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뭘 어떻게 돼, 그걸로 끝이지. 그런 걸로 직원한테 뭐라고 하시는 분은 아니셨어. 말했잖아. 가족보다 회사가 우선이었다고. 어느 정도였냐면….”
즐겁게 말하던 박재진의 혀가 갑자기 굳은 듯 멈췄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회사 앞에서 울부짖던 군복을 입은 청년이었다.
-아버지, 군대만 다녀오면… 결혼이든 뭐든 맘대로 하라고 하셨잖아요!
-난… 어쩔 수 없었다. 회사를 위해서였어. 너만 그런 것도 아니지. 나도 네 누나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그래서 그러셨어요? 그래서 죽게 놔뒀나요?
-그만! 직원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놈의 직원, 회사! 아버지는 늘 그게 먼저죠! 절대로, 죽어도… 아버지처럼은 안 될 겁니다!
기억이란 녀석은 눈치도 참 없다. 이토록 즐거운 순간에 나타나서 방해하다니.
“괜찮으세요?”
“…미안해. 좀 피곤했나 봐. 이제는 괜찮아.”
박재진이 다시 몸을 살짝 일으켰다.
“나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아버렸군.”
“사장님이 띄운 분위기인데요 뭘.”
“아냐, 회사든 술자리든 똑같아. 옆에서 거들어 줘야 올라가거든.”
이것 또한 회장님이 해 줬던 이야기다.
“…회장님만 멀쩡하셨어도 C&N이 이 꼴이 나진 않았을 텐데.”
“많이 존경하셨나 보네요.”
형우의 질문에 박재진의 눈빛이 깊어졌다.
“당연하지. 조조와 전위의 이야기를 아는가?”
위나라의 왕이었던 조조는 자신의 아들이 죽었을 때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나, 아끼던 장수였던 전위가 죽었을 때는 쓰려져 곡을 하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회장님이 꼭 그런 분이셨지. 그러니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나. 뭐, 다른 것까지 조조를 닮은 건 좀 애석하지만.”
삼국지를 몇 번이나 읽은 형우는 이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윤정아와 윤정식을 돌려 까는 말이다.
뭐든지 잘하던 조조였지만, 자식 농사만큼은 대실패를 하고 말았으니. 조조의 뒤를 이은 조비는 삼국지 최대의 암군이자 싸이코패스였던 것이다.
“그래도 뭐, 이왕 분위기 다운된 김에 조금 진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 말하다 보니 생각난 게 있어서 말입니다.”
박재진은 존댓말로 말미를 맺었다. 그것만 봐도, 다음 대화의 타겟이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고유민 작가님.”
“예?”
고유민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소심한 성격 탓에 지금까지 한마디도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걸려온 말에 적잖게 당황한 것 같았다.
“가, 갑자기 왜… 앗, 앗뜨뜨!”
급기야 고유민은 커피까지 테이블에 흘렸다.
“세상에, 진정하세요.”
박재진이 품에서 티슈를 꺼내 들었다. 행사장 같은 데서 으레 주는 싸구려 물티슈가 아니라, 편의점 같은 데서 파는 항균 물티슈였다.
그 모습을 본 형우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가성비 좋은 자기 어필이야.’
보통, 사업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명품을 사용하는 것이다.
아예 대놓고 큼지막한 로고가 찍힌 명품을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졸부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어 역효과고, 그보단 시계나 만년필처럼 작지만 눈에 띄는 것이 좀 더 효과적이다.
여기까지는 직장을 다니는 셀러리맨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박재진은 거기에서 한술 더 뜬 느낌이었다.
‘일제시대 카페와, 품 안의 고급 물티슈라.’
회사원으로서의 정석과 예의를 지키면서도, 자신에 대한 약간의 궁금증을 남겨두는 걸 잊지 않는다. 모든 행동이 계산 하에 이루어지는 느낌이다.
박재진이 C&N을 지금까지 이끌어 왔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제 대충 닦였네요. 작가님, 다치지는 않으셨나요?”
“저, 정말 죄송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하하.”
그나저나, 커피를 먹다 뿜는 사람과 그걸 닦아주는 중년인이라. 어디서 본 듯한 데자뷰가 드는 장면이다.
“아무튼. 이야기를 마저 해도 될까요?”
박재진의 말에, 고유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말씀하세요.”
“큰 부탁은 아니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조만간 주주총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서 고유민 작가님이 조금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제가요?”
고유민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저는 정치 같은 거랑은 진짜로 안 어울려요. C&N을 나온 것도….”
“아뇨, 뭘 해 달라는 건 아닙니다.”
“그러면요?”
“그냥. 그날 서 있어 주시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 대신….”
박재진의 왼손가락 몇 개가 순차적으로 접혔다.
기억의 궁전인가? 아니면 신체 기억법일 수도 있고. 아무튼 뭔가를 계산한 건 분명해 보였다.
“…고유민 작가님의 차후 활동은 제가 보증하지요. 솔직히 요즘 좀 애매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박재진이 커피를 홀짝 마셨다.
“C&N의 잘못을 폭로했으니, 윤정식은 어떻게든 당신을 밀어내려고 들 겁니다. 지금에야 스패로우 팩토리와 계약을 맺었겠지만… 가치란 건 아무래도 입찰자가 많을 때 늘어나는 법이니까요. C&N이 당신을 보증해 준다면 어떤 출판사도 당신을 꺼리지 않겠죠.”
“정말….”
고유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가서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으음, 걱정하실까 봐 말을 안 했는데… 사실 아까 누가 저희 모습을 찍어 가더군요. 아마 윤정식 쪽 파파라치겠죠.”
“파파라치요?”
모인 사람들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도망갔거든요.”
“그,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사장 후보가 라이벌 회사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건 꽤 커다란 흠집이 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박재진은 별 상관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저쪽에서 뭘 할지는 뻔히 보여서 말이죠. 보나 마나 그렇게 말하겠죠. 저자는 파렴치하게도….”
* * *
“…저희 회사인 C&N을 뒤로한 채 몰래 스패로우 팩토리와 내통했습니다. 이것은 그 정황입니다.”
윤정식이 버튼을 누르자, 커다란 화면 위로 박재진과 서지원, 그리고 김형우가 은밀하게 만나는 사진이 큼지막하게 떠올랐다. 며칠 전에 파파라치를 시켜 얻은 사진이다.
‘그나마 다행이었지.’
이사진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 꽤 걱정했었는데, 이 정도면 판을 한 방에 뒤집을 수 있을 만한 아이템이었다.
여기가 재판장이었으면 불법적으로 얻은 사진이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없었겠으나, 지금의 상황은 주주총회다.
불법적으로 얻었건 예의에 어긋나건, 주주들의 마음을 움직여 지지를 이끌어내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거다.
“저 말이 사실입니까?”
“말씀해 보세요, 지부장!”
성격이 급한 주주들 몇몇이 성을 냈다. 이윽고, 대답하기 위해 박재진이 연단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두 사실입니다.”
“그 말은 C&N을 배신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배신이라니요. 그런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 사진은….”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 분을 모셔야겠군요. 고유민 작가님, 들어오세요.”
그 말에 맞춰,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고유민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저 사람은 내부고발자잖아?”
“여기가 어디라고!”
주주들 사이에서 원망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박재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유민 작가님. 제가 작가님을 여기 모신 건 몇 가지 질문을 하기 위해선데, 괜찮겠습니까?”
고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재진이 말을 이었다.
“지금은 어디에 소속되어 계시죠?”
“스패로우 팩토리입니다.”
“역시! 스패로우 팩토리와 짜고 C&N을 물 먹인 거군!”
이사 중 한 명이 언성을 높였다.
“박재진, 당신도 한패고 말야! 보나 마나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해 꼼수를 쓴 거겠지!”
“전후 관계가 뒤집혔습니다.”
박재진이 차분하게 말했다.
“고유민 작가님이 스패로우 팩토리와 짜고 C&N을 내부고발 한 게 아닙니다. 내부고발자를 받아주는 데가 스패로우 팩토리 뿐이었던 거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고유민 작가님?”
“맞습니다.”
고유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른 출판사도 알아봤지만,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C&N의 입김 때문이었습니다.”
“들으셨습니까? 이사님?”
아까 질문을 던졌던 이사의 몸이 움찔했다.
“이사님이 물으셨죠, 왜 스패로우 팩토리를 찾아갔냐고. 말씀드리죠. 사과하려고 찾아갔습니다.”
“경쟁사에게 말입니까?”
“아뇨. 작가들한테요. C&N에게 피해를 본 작가들 말입니다.”
이 부분이 박재진이 노린 지점이었다.
“C&N이 강한 출판사일 수 있는 건, 저희를 믿어 준 독자들과 작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둘 모두가 위태롭습니다. 그러니 이사님께 묻고 싶군요.”
박재진의 시선이 유달리 날카로웠다.
“작가도 독자도 등을 돌린다면 저희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합니까? 뭐, 지금에서라도 요식업 사업이라도 해야 할까요? 카툰 앤 노블에서 치킨 앤 누들로 바꿔야 할까요?”
“푸흡!”
“쿡!”
기자들 몇 명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주주나 이사들 사이에서는 웃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저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은 탓이었다.
묘한 분위기 속, 박재진의 목소리만이 뚜렷했다.
“5년 전 제가 장르소설 편집부의 편집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당시, 저는 제 손으로 편집부에서 제일 잘 나가던 작가를 잘라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지요. 그 작품이 표절이라는 걸 알아버렸거든요. 그리고 다음 날, 저는 회장님께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때 회장님이 뭐라고 하셨을까요?”
박재진은 윤정식을 노려봤다.
“회장님께서는 그러셨습니다. 잘했다고. 그리고 책을 산 사람들에게는 즉시 환불을 해주어라. 만약 환불하지 못한 돈이 있으면, 그 돈은 차라리 기부해라. 그건 우리 돈이 아니다.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때의 C&N은 정말 자랑스러운 기업이었죠.”
몇몇 주주와 이사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억나. 분명 그런 일이 있었지.”
“양심 기업이라고 말이 자자했었지, 아마.”
그 순간 박재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분명한 노기였다.
“그런데, 지금의 C&N은 어떻습니까? 5년 전 직접 잘라냈던 작가를 불러들여 삼류 연극을 꾸미고, 그 병폐를 용기 있게 지적한 작가를 블랙리스트로 지정해 업계에서 매장하려고 했습니다.”
목소리는 크다기보단 오히려 약간 작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 집중했고, 집중했기에 그 목소리 안에 들어있는 강한 힘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니 묻겠습니다. 회장님과 회사의 의지를 배신한, 진짜 배신자는 누굽니까? 여러분께서는 그 답을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이상입니다.”
박재진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내려왔다. 웅성거리는 내부가 약간 진정된 후, 사회자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세 시간의 휴식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주주분들께서는 그 시간까지 자리로 돌아와 주시길 바랍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났음에도, 바로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