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하지만, 이걸론 부족할 것 같은데.”
좋은 분위기를 깨트린 것은 천우희였다.
“우리한테 지금 중요한 건 C&N을 이기는 건데, 일러스트 이벤트로 역전이 될까?”
“아마… 힘들겠죠.”
기똥찬 표지가 있으면 당연히 유입이 증가한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소설의 내용이다.
좋은 소설은 일러스트가 개판이어도 사람이 모이고, 나쁜 소설은 일러스트를 빈센트 반 고흐가 그려도 결국 사람이 빠져나가는 법이니.
“어찌저찌 좋게 말해서 이게 상승의 기회가 될 수는 있겠지만… 역전의 기회는 안 될 것 같은데.”
“맞아요.”
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우희가 말을 이었다.
“물론 차근차근 조금씩 좋아지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지금 영 느린 느낌이야. 시간이 얼마 안 남았잖아.”
최종 배틀까지는 1주일이 남았고, 거기서 1주일이 더 지나면 결과와 함께 스패로우 팩토리 아카데미는 종료를 고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편법이 필요해. 내실을 다지는 것도 좋지만, 눈에 확 띄는 것도 필요하다고.”
“눈에 확 띄는 거라면….”
“소설에서 눈에 확 띄는 건 하나밖에 없지. 장면 말야.”
천우희가 말했다.
“캐릭터나 문체, 혹은 에피소드 구성이라면 내공이 꽤 많이 필요하겠지만… 잘 짜인 한 장면 정도라면 지금으로도 충분히 가능해. 예를 들자면.”
갑자기 말하던 천우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액션씬이라던가.”
“액션도 결국 잘 쓰려면 내공이 필요하잖아요.”
“지속적으로 잘 쓰려면 당연히 내공이 필요하지만… 한 장면 정도라면, 어떻게 단기간에 되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며 천우희가 바라보는 건 연수였다.
“액션씬은 누구나 좋아하잖아.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 중에 액션씬을 제일 잘 쓰는 사람이 있고.”
“저요?”
“…잘 쓰는 것뿐만이 아니지. 날아차기도 잘하고 공중제비도 잘 돌고 발차기로 날아가는 파리도 잡고, 또….”
“어라. 두 분이 따로 만난 적이 있으시던가요?”
지원이 고개를 갸웃 꺾었다.
“마치 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어어?”
천우희가 손을 내저었다.
“보, 보기는 무슨! 그냥 들은 거야! 들은 거!”
그 눈에 묘하게 공포가 어린 듯한 느낌은 단순한 착각만은 아닌 것 같았다.
* * *
밤사이 비가 내렸다.
아스팔트 사이사이에 고여있는 웅덩이 위로 네온사인 빛들이 명멸하는 모습이 퍽이나 퇴폐스럽다.
분주하게 걷는 사람들조차 눈앞의 물웅덩이를 보면 저도 모르게 정신을 차리고 보폭을 크게 뻗어 피해 가기 마련이지만.
철벅-!
고유민은 그러지 못했다.
“에이 씨, 다 젖었네.”
밟고 나서야 물웅덩이의 존재를 눈치챈 고유민은, 아스팔트라는 건 평평해 보이면서도 사실 여기저기 균열이 참 많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
지나치게 감상적인 생각이지만.
사람이 감상적으로 되는 데에는 필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고유민에게 그 이유란, 지금 C&N 내부에서 벌어지는 몇몇 일들 때문이다.
-고유민 선생님, 저 매니저가 답장을 안 해줍니다.
-퇴고본이 왔는데요, 기본적인 맞춤법 수정도 안 되어 있어요.
-하… 저 또 꼴등 했어요. 재능이 없나 봐요.
오늘 오기 전에 학생들에게 들었던 말들.
학생들은 지금 완전히 두 갈래로 나뉘었다. 그것도 정 가운데가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친 선. 그 선을 그은 건, 도수형과 윤정아다.
-패배한 애들을 끌고 갈 필요는 없죠.
통계만 보고서, 그렇게 선을 긋는다.
그자들은 아마 학생들의 이름조차 모를 테다.
하지만 고유민은 다르다.
학생들의 모든 이름과 얼굴을 알고, 그들의 고민을 안다. 첫날부터 그랬다.
-선생님, 팬입니다!
-선생님 밑에서 배울 수 있다니 영광이에요!
첫날에는 그렇게 즐거워하던 아이들이 점점 패배주의로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건, 생각 이상으로 꽤 힘든 일이었다.
대체 언제 패배했는가.
원하는 성적을 이루지 못했을 때?
‘…아니지.’
그건 거짓말이다.
실패는 희망의 반대말이 아니다. 실패 속에서도 희망은 빛날 수 있다.
희망이 꺼지는 순간은, 누구도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을 때다.
-별 것 아닌 애들한테 신경쓰지 마세요. 시간 낭비잖아요.
-강한 사람만 끌고 갑니다.
그러니, 희망을 꺼트린 건 도수형과 윤정아.
그리고 고유민, 바로 자신이다.
물론 이유라면 있다.
이윤을 추구한다던가, 혹은 승리의 공식이라던가 하는 것. 하지만 때로는… 그런 것들이 너무 매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매정해지라고, 고유민.
도수형은 그렇게 말했지만… 매정해지라는 건 달리 말하면 자신은 매정하지 않다는 뜻이다.
매정을 노력해야 하다니.
고유민에겐 그 모든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쉽지 않음에도 해야 하는 건….
“유민 오빠!”
멀리서 달려오는 자신의 여동생 때문이다.
“뭐야, 오다가 물 밟았어? 바지가 다 젖었네?”
“뭐 좀 생각하다가….”
“아하, 또 소설 내용 생각하면서 멍 때렸구나. 그래도 걸으면서 그러지 말라니까? 그러다 사고 나!”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고유민의 여동생, 고유진이 짐짓 핀잔을 준다.
“학교는 일찍 끝났나 보네?”
“응응.”
그렇게 말하며 동생이 팔짱을 껴 왔다.
남매는 보통 사이가 안 좋다던데, 유진과는 나이 차가 많이 나서 그런지 별로 그런 게 없었다.
“맞다. 오늘 그린 거 보여 줄까?”
“으음….”
동생은 미술에 재능이 있어서 미대를 다니고 있다. 아무래도 돈이 많이 드는 학과였지만… 다행히 고유민은 그 정도의 돈을 벌 능력은 됐다.
“보나 마나 잘 그렸겠지. 어차피 현대미술 같은 건 봐도 잘 몰라.”
“오빠는 예술 하는 사람이 뭐 그래?”
“예술은 무슨….”
그렇게 말하는 건, 웹소설을 무시한다기보다는 최근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한 회의감 때문이다.
웹소설 시장이라는 게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추악한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니… 감히 자신이 하는 걸 ‘예술’이라고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에이, 현대미술 아니야. 그냥 일러스트인데… 오빠, 내 말 안 듣고 있지?”
“어? 아냐.”
“에휴.”
유진이 아랫입술을 비쭉 내밀고 한숨을 푹 쉰다.
“됐어. 안 보여 줄래.”
“어어? 아니야. 보여줘.”
“어차피 지금은 그리는 중이니까, 채색까지 끝나면 보여 줄게. 아니, 내가 안 보여줘도 알게 되려나?”
“…응?”
뭔가 알쏭달쏭한 말이었지만, 고유민은 그냥 요즘 애들 또래의 특이한 말투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유진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어… 난 떡볶이! 로제 떡볶이 먹고 싶어.”
“로제 떡볶이라. 근처에 하는 데가 있나?”
“나 잘하는 데 아는데!”
뭐라 말하기도 전에, 유진이 토도도도-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밤거리를 가로질렀다.
“너, 그렇게 떡볶이 좋아해서 어쩌려고 해? 유학 가면 먹지도 못할 텐데.”
“유학은 무슨 유학. 나 안 간다니까?”
“안 가기는 무슨.”
미술이란 건, 유학파가 아니면 국내시장에서 인정받기 힘들다.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가라.
무명 시절을 오래 겪은 유민은 그게 얼마나 힘들고 짜증 나는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니까.’
동생에게만은 그 멸시를 겪게 하지 않을 테다.
더러운 일이든, 손가락질당할 일이든 뭐 어떠랴.
‘아픈 건 내가 다 할 수 있어.’
동생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민이었다.
* * *
퍼억-!
“우아아아악!”
연수의 주먹에 얻어맞은 정주현이 스파링장 위로 나동그라졌다. 그 모습을 본 형우가 핀잔을 줬다.
“연수야! 팔은 때리지 마, 팔은! 글 써야지!”
“맞다, 그러면 얼굴만 때릴게요!”
그 기상천외한 대화를 들으며, 정주현은 숨을 씨익거렸다.
“…너도 안 되냐? 근육 쓸모없네.”
“그눅이고 모거….”
“마우스피스 빼고 말해라.”
“아, 마따.”
조준구의 말을 들은 정주현이 마우스피스를 퉤, 뱉었다.
“근육이고 뭐고, 운동 배운 사람을 어떻게 이겨요?”
“…하긴.”
조준구는 삶은 달걀로 허벅지를 박박 문지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게 도움이 될까?”
오늘 아침, 형우는 지저귐에서 액션씬을 잘 쓰고 싶은 사람을 모집했다.
-아주아주아주아주 ‘입체적인’ 액션씬을 배울 기회랍니다!
확실하게 입체적이긴 했다.
‘그게 3D가 아니라 4D인 게 문제지만….’
체화라는 단어가 있다.
말 그대로 몸으로 배운다는 뜻이다.
“서연수 작가님이 액션 소설을 잘 쓴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은 틀렸다.
서연수가 쓰는 액션은 소설이 아니라 수필이었다.
직접 스파링장에서 구르고 굴렀던 경험을 토대로 쓴 액션신이니만큼 재미 없기가 오히려 힘들다는 거다.
“그래도, 뭔가 묘사에 디테일을 팍팍 붙일 수 있을 것 같기는 해요.”
정주현이 피식 웃었다.
오늘만 해도 꽤 많은 걸 배웠다.
태클을 걸기 위해서는 정면이 아니라 45도 측면을 노려야 한다는 거나, 상대가 훅을 치면 주먹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 등등.
글이나 영상으로 배웠으면 깨닫지 못했을 것들이다.
“휴식 더 할래? 아니면 이게 끝이야?”
연수가 스파링장에서 방방 뛰었다.
“설마요.”
정주현은 다시 마우스피스를 꼈다.
“더 하려고?”
“에.”
“독한 놈.”
조준구가 질렸다는 듯이 정주현을 바라봤다. 그대로 링에 다시 올라가려는 순간.
위이잉-
주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라?”
그대로 휴대폰을 확인한 주현은 그대로 마우스피스를 벗어던졌다.
“죄송합니다! 저는 여기까지만 해야겠어요!”
“막 몸 달아오르던 참인데, 왜?”
“일러스트 왔대요!”
안타까운 표정으로 글러브를 팡팡, 치는 연수에게 정주현이 밝게 웃으며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광대가 약간 부어 있어서 바보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확실하게 밝은 미소였다.
* * *
제목 : 작가님! 일러스트 3차 수정본 보냅니다.
첨부 : <정통무협을 여행하는 21세기인을 위한 안내서>의 3차 수정본
내용 : 저번에 말씀하셨던 부분 수정해서 보내드렸습니다! 빠른 답장 부탁드려요!
정주현은 재빨리 일러스트의 변동사항을 확인했다.
“주인공 눈썹 부분도 확실하게 바뀌었고… 다리도 조금 길게 그려주셨네.”
자신의 요구사항이 모두 반영된 일러스트에 흡족한 기분을 느끼며, 그대로 답장을 보냈다.
-일러스트 너무 마음에 들어요! 역시 프로!
-아직 프로 아니예요 ㅠㅠ 아마추어입니다!
-아무튼요! 잘 쓸게요!
-저 그런데요 작가님 여쭤볼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혹시 독자들이 일러스트를 못그렸다고 하거나… 그러면 어쩌죠?
질문을 받은 정주현은 살짝 고민에 빠졌다.
과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려진 그림이지만, 자신의 취향과 대중의 취향이 현격하게 다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거야 뭐, 어쩔 수 없는 거죠.
자신이 그려달라고 했고, 자신이 OK한 일러스트인데. 거기에 대고 독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며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따지고 든다면….
‘…인성에 하자가 있는 거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고, 일반적인 사회 통념일 테다.
당연한 것을 물어야 하는 때는 대체 언제일까?
그건 아마도….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을 때일 테다.
-무슨 일 있었어요?
질문을 던지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일러스트레이터로부터 답장이 왔다.
-혹시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 * *
[안녕하세요, 웹타쿠입니다! 오늘이 바로 지난 한 달간의 월드 배틀이 끝나고 최종 순위를 매기는 날인데요!]
[그래서 이번 주는 특별히! 녹화 방송이 아니라 생방송으로 무대를 준비했습니다! 생방송! 밑줄 쫙 그어주시고요!]
[앞으로 한 시간 뒤에 투표를 마감할 테니, 마지막 투표 부탁드려요! 그리고, 이번에는 특별히 소설 다섯 편이 한 번에 업로드됩니다!]
[한 작가님들의 말에 의하면 ‘월드 배틀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끝내기 위해 내 모든 것들을 갈아 넣었다!’라고 하시네요!]
[후후후, 그리고 저! 웹타쿠가 단독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좋은 액션씬을 쓰기 위해서 직접 스파링장에서 굴렀다는 소문까지 있더라고요! 말 그대로 맞아가며 쓴 소설이랍니다!]
[최종 투표 마감까지 50분 남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투표 마감 5초 전!]
[4, 3, 2, 1…]
[투표 마감입니다!]
길고 길었던 <월드 배틀>의 마지막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