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77화 (177/200)
  • #176

    “그냥 놔둔다고요?”

    “그래.”

    도수형이 소설 한 부분을 짚었다.

    “이 부분은 확실하게 잘 썼잖나.”

    “당연하죠! 배낀 거니까!”

    “피카소가 그랬지. 좋은 예술가는 배끼고 훌륭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그런 의미에서 이 아이는 꽤 좋은 예술가라는 거지.”

    “그건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피카소가 들었으면 무덤에서 일어날 이야기다. 도수형이 허허 웃었다.

    “당연히 농담이고. 현실적인 이유가 있지.”

    “현실적이라는 이유라면.”

    “일년에 나오는 책이 몇 권이나 될 것 같나?”

    도수형의 표정은 뭔가를 꾸민다기보다는,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는 듯싶었다.

    “그 사이에서 몇 문장을 표절한 것 정도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지. 아예 대놓고 배껴도 태반은 안 들켜. 솔직히 말하면, 들킨 놈이 아주 재수가 없는 쪽에 가깝지.”

    “하지만 당신은 들켰잖아요?”“독자들은 몰랐어. 박재진 놈이 알아차린 거지. 그리고, 나나 박재진도 그 작가가 어떤 스타일인지 알고 있으니까 알아차린 거지, 그걸 몰랐으면 표절했다는 걸 죽어도 몰랐을걸.”

    도수형이 낄낄거렸다.

    “만약 최악의 상황이 와서 들킨다고 해도 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들키겠지. 그리고 그때는… 이미 <월드 배틀>이 끝나고 모든 것을 손에 쥔 후일 테고. 그러니 이건 문제가 없어. 오히려 문제가 있는 건… 이런 거지.”

    다른 학생의 작품으로 넘어간 도수형이 눈을 찡그렸다.

    “이 자식은 웹소설을 쥐뿔도 모르는 것 같아. 봐봐, 웹소설에 철학이라니, 가당키나 한가?”

    “그 학생이라면….”

    고유민이 토를 달았다.

    “며칠 전부터 이런저런 책을 열심히 읽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였군요.”

    “그래도 철학은 안 돼.”

    도수형이 딱 잘라 말했다.

    “괜히 어려운 길 가려고 하지 말고, 사이다나 잘 터트리라고 조언해. 이 부분은 싹 다 지우라고 하고.”

    “지우라고요? 표절은 놔 두고 노력은 지우라고?”

    “어쩌겠나? 그게 현실인 것을.”

    고유민은 순간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통장 속에 들어있는 육천만 원이라는 거금이 마치 무거운 닻 같아서. 자신을 깊고 깊은 심연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 * *

    -월드배틀 참가작도 풋풋해서 좋지만, 역시 기성은 못 따라감. 특히 참새치 클래스 ㅎㄷㄷ

    ㄴㄹㅇㅋㅋ 온몸으로 내가 작가다 주장하는듯한.

    ㄴ주인공 설정 개 멋짐.

    ㄴ주인공만 좋냐? 난 조연도 좋더라. 캐릭터들이 다 살아있는 느낌임. 특히 점소이 캐릭터 매력 터짐ㅋㅋㅋ

    ㄴ무협 20년차 고수로 말해줌. 그 점소이 5화내로 죽을확률 99%

    ㄴ헛소리 ㄴㄴ

    -참새치 소설은 뭔가 가끔 보면 100년전 고전문학 그대로 번역해 놓은 듯한 느낌임. 촌스럽다는게 아니라 뭔가 세련미가 오짐.

    ㄴ순문학 쓰던 사람이라 그런듯ㅋㅋ

    ㄴ꼭 그런건 아님. 그냥 글을 맛깔나게 씀.

    ㄴㄹㅇ 무슨 3대 내내 내려오면서 비법 전수 받은 할머니가 쓴 소설 같음.

    ㄴ위에건 욕이냐 칭찬이냐?

    ㄴ칭찬이지 당근

    ㄴ당근 겁나 오랜만에 듣네. 아저씨 혹시 춘추가?

    ㄴ어허 무협은 원래 어른의 장르다.

    ㄴ전 초등학생인데요?

    -<권객>은 언제 웹툰으로 나오나요?

    ㄴㅋㅋ아직 30화인데 웹툰 찾는거 보소.

    ㄴ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이건 되는 나무임.

    “휴우!”

    소설가로서의 삶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 형우였지만, 댓글창을 확인할 때만큼은 늘 긴장이 된다.

    하기야, 살면서 흠 잡힐 일 하나 한 적 없는 걸로 유명한 국민 MC 유지석도 자기 댓글 창 확인할 때는 무조건 긴장이 된다고 했으니까.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자리에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 욕은 거의 없네.”

    물론 소설이다 보니 아예 욕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다.

    ‘대박이야.’

    30화에 선작 2만.

    성장세만 보면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수치다.

    지금까지 쌓아온 네임벨류에, <월드 배틀>이라는 커다란 행사로 인한 이슈몰이 등등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진짜 초반부 미쳤네.’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형우에게는 슬럼프가 딱 그랬다.

    소년만화의 주인공이 고난 후에 레벨업을 하듯이, 형우의 소설 또한 궤도에 올라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슬럼프 때 겪었던 고통조차 웃으며 넘어갈 수 있을 정도다.

    “그게 없었으면 이토록 실감 나는 캐릭터들을 만들 수가 없었겠지.”

    요 며칠 <권객>을 쓸 때마다, 형우는 황계백이 말했던 그 경험을 그대로 했다.

    캐릭터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고 저절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신비로운 경험 말이다.

    문득, 웹소설 독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고구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고구마도 종류에 따라 좀 다르다.

    ‘전개적인 고구마가 그냥 커피라면… 캐릭터적인 고구마는 TOP지.’

    독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건 역시 캐릭터 붕괴다. 갑자기 똑똑한 캐릭터가 멍청한 짓을 하거나… 혹은 강한 캐릭터가 뜬금없이 패배한다거나.

    그런 식으로 ‘캐릭터성’이 훼손되는 것이야말로 캐릭터 산업을 하는 사람이 가장 피해야 할 일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캐릭터가 알아서 움직이는 지금 상황에서는 캐릭터 붕괴가 절대로 발생할 수 없다는 거지.’

    그야말로 소설적인 유토피아!

    그렇게 히죽거리고 있던 차,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김형우, 일찍 왔네.”

    “아, 천우희 작가님 오셨네요.”

    스패로우 팩토리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천우희를 확인한 형우가 노트북을 덮었다.

    “뭘 보고 있기에 나 오자마자 덮어?”

    “댓글이요. 아, 그나저나 축하드려요.”

    “아, 그거.”

    천우희가 씨익 웃었다.

    이번 3주 차 결산 때, 천우희 팀의 세계관인 <영웅들의 섬>은 드디어 형우의 <무림유사>를 넘어 1위를 탈환했다. 빡글방 덕분이었다.

    “2위가 저고, 3위가 콜센터. 그리고 4위가 C&N의 <포탈 서울>이죠.”

    상위권을 죄다 차지하고 있는 C&N이지만, 정작 C&N이 담당하는 세계관 자체는 꼴등이다.

    그 부분을 지적하는 댓글도 꽤 많았다.

    -<포탈 서울>은 개별 작품으로 보면 좋은데, 세계관이라는 느낌은 거의 없지 않아?

    ㄴ좀 옛날 축구 보는 느낌임. 개인기 좋은 선수들이 서로 개인기는 잘 펼치는데, 정작 중요한 팀플레이는 안 되는 느낌.

    ㄴ사실상 말만 세계관이지 같은 장르 개별작품임. 난 좀 ‘머블 코믹스’같은 거 기대했는데.

    ㄴ그런 거 보려면 <영웅들의 섬>보면 됨. 거기는 진짜 세계관같음. 이 소설 주인공이 저 소설에서 등장하고 그럼.

    ㄴ천우희 팀은 개별선수는 그저 그런데 팀플레이가 진짜 끝내주는 느낌.

    ㄴ진짜? 당장 보러 간다.

    그런 연유로, 지금 천우희의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형우와 만난 이후 처음으로 형우와의 배틀에서 승리한 셈이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세계관의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형우가 물었다.

    “천우희 작가님. 세계관을 견고하게 만드는 팁 같은 게 있나요? 저도 나름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약간 잘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지금 <무림유사>가 2등이라도 하는 건… 솔직히 <권객> 덕분이잖아요.”

    조금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팩트는 팩트다.

    만약 <권객>이 지금만큼 재밌지 않았다면… <무림유사>는 아마 4등에 처박혀 있을 테다.

    “결국 세계관을 어떻게 잘 키워내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너 혹시 애들이랑 단톡 같은 거 해?”

    “단톡은… 딱히 안 하는데요?”

    “그럼 단톡방부터 파. 이거 봐봐.”

    천우희가 자신의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30명의 학생들이 모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준구 형! 나 형이 만든 캐릭터 내 소설에 좀 넣어봤는데 한번 봐 주셈.

    -야, 다른 건 다 좋은데 내 캐릭터는 피망 못 먹는다. 그것만 빼면 될 듯.

    -헉, 큰일날 뻔 했네.

    -천우희 작가님 설정 좀 가져다 써도 되나요?

    -무슨 설정?

    -마탑 설정이요. 그 부분이 좀 특이해서 마음에 들던데….

    -야

    -그 정도는 허락 안 받아도 돼.

    단톡 내에서 주고받는 소설에 대한 회담들.

    그것이 천우희의 <영웅들의 섬> 세계관이 1위를 달리고 있는 비결이었다.

    “이게 바로 캐릭터 프렌차이즈의 힘이지. 너 <해리포터>봤지? 소설 말고 영화.”

    “봤죠.”

    “4, 5, 6편 봤어?”

    “아….”

    형우가 쯧, 소리를 냈다.

    해리포터의 1, 2, 3편은 진짜 엄청나게 재밌다. 하지만, 4, 5편은 그보다는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6편은 거의 혹평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하지만 그 별로라던 6편조차 상업적으로는 꽤 성공했거든.”

    “캐릭터의 힘이군요.”

    “맞아.”

    서사와 연출이 별로더라도, 자신이 애정하는 캐릭터가 나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작품을 볼 이유가 생겨난다.

    “평소라면 별로인 영화를 안 보는 사람이라도, 거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나온다면 ‘아무리 그래도 한 번은 봐야지.’라고 생각하기 마련이거든. 그게 세계관의 힘이고, 캐릭터 산업의 힘이라는 거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형우는 귀를 바짝 세우고 천우희에게 몸을 굽혔다. 그렇게 한참이나 천우희가 신나서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관에 대한 지식들을 전수하고 있던 차.

    “저기요.”

    열린 문 사이로, 스산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사이 좋아 보이시네요?”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지원의 호출을 받고 사무실로 달려온 연수였다.

    * * *

    “제가 제일 늦었네요, 죄송해요. 그런데….”

    조금 늦게 도착한 지원은 오자마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었다.

    “무슨 일 있었나요?”

    “무슨 일이라뇨. 아무 일도 없었어요.”

    연수가 빙긋 웃었다.

    “그렇죠, 여러분?”

    “마, 맞아. 아무 일도 없었어요, 언니!”

    “음. 그렇고말고요. 편집자님.”

    형우와 천우희가 질린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천우희 작가님, 땀이 많이 나시는 것 같은데요? 어디 아프세요?”

    “아프다뇨, 하나도 안 아파요. 하하….”

    “뭐, 그러면 다행이기는 한데….”

    뭔가 기묘한 분위기를 느꼈지만, 지원은 일단 모른 척하기로 했다. 할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큰일부터 말하는 게 좋겠죠. 일단, 이참에 회사 규모를 좀 키워 볼까 해요.”

    “법인 전환인가요?”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역시, 이런 쪽으로 아는 것이 많은 천우희였다.

    “네,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요. 미리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법인이라니! 그럼 주식회사 되는 거예요?”

    “일단은 그렇게 되겠죠?”

    연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 이제 인터넷에 스패로우 팩토리 검색하면 그래프 나오는 거 맞죠?”

    “그건 상장이라는 건데, 지금보다 회사 규모가 몇 배는 더 커져야 해요.”

    “엥? 그러면 주식이 무슨 소용이에요?”

    “투자자를 얻기가 훨씬 용이해지죠. 주식이란 게, 따지면 효율적인 투자금 분배 방식인 셈이니.”

    “아하.”

    이해했다는 듯 연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월드 배틀>의 결과가 좀 중요할 것 같아요. 거기서 그럴듯한 성과가 나오기만 한다면, 투자자들의 이목을 끌 수 있겠죠.”

    형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으로서는 조금 빠듯하네요.”

    “맞아요. 상위권이 죄다 C&N인 판이니.”

    지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1등은 아니더라도, 뭔가 저력을 보여줄 만한 게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지금도 애들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지금보다 더 굴리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형우가 딱 잘라 말했다.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낫죠. 그래서 말인데, 3주 차 이벤트는 뭐였죠?”

    <월드배틀>은 서바이벌이라는 특성에 맞춰, 매주 하나씩의 이벤트를 벌였다.

    1주 차에서는 유명 작가들을 동원해 신인을 응원하는 이벤트를 했고, 2주 차에는 모든 작가들에게 1분가량의 소설 어필 시간을 제공했었다.

    “그리고 3주 차는 상위권 작품의 일러스트를 제작해 주는 이벤트를 할 거예요. 빙그레 게임즈의 유지태 팀장님이 도와주시기로 했어요.”

    “허어, 120명분의 전문 일러스트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 텐데요.”

    “전문 일러스트라면 그랬겠죠.”

    지원이 설명했다.

    “유지태 팀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월드 배틀>의 취지가 신인 발굴이니까, 일러스트레이터들도 신인이나 지망생을 기용해 보면 그게 더 취지에 맞지 않겠냐고요.”

    과연 그럴듯한 제안이었다. 역시 지원이나 유지태나, 돈 아끼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

    뭐랄까.

    변명도 능력이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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