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월드 배틀>의 룰은 예전에 방송되었던 <프로듀스 108>의 룰과 비슷했다.
“각 팀의 대표들은 팀을 이끌어서 높은 성적을 내주면 된다는 거죠.”
팀의 대표는 당연히 형우와 천우희, 안재욱이다. C&N 측에서는 고유민이라는 작가가 나왔다.
“고유민 작가, 누군지 아세요?”
“알긴 아는데…….”
형우의 질문에 지원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분명 잘 쓰는 분이시긴 한데…… 좀 약한데요?”
졸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명장도 아니다. 지금 지원의 머릿속에 떠오른 고유민보다 나은 작가만 해도 다섯은 훨씬 넘었다. 고민에 빠진 지원을 형우가 제지했다.
“일단은 룰 설명부터 계속해 주세요. 고민은 그다음에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아, 그렇죠.”
지원이 재빨리 설명을 이었다.
“120명 중 팀장을 제외한 참가자 116명은 자신의 선작 수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웹타쿠 님의 방송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어필할 기회를 한 번씩 갖게 될 거예요. 아, 중간중간 이벤트도 준비해 놨고요!”
지금까지 준비한 이벤트로는 일러스트레이터를 열댓 명 정도 초청해 마음에 드는 작품의 표지를 그려주게 한다거나, 성우들을 초대해 작품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녹음시킨다던가 하는 것들이 있었다.
“와, 그것들은 언제 준비했어요?”
“일러스트는 빙그레게임즈쪽 도움을 좀 받았고, 녹음은 MBS 오디오북 팀이 도와주기로 했어요.”
“예전에 인연을 맺었던 분들이시네요.”
“인연을 일회용으로 쓰면 아마추어 사업가죠.”
지원이 다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개인 점수는 선작 수로 매겨지고, 그다음은 팀 점수가 매겨진다고 해요. 팀 점수는 말 그대로 세계관이 받는 점수입니다.”
레이드물을 베이스로 한 C&N의 <포탈 서울>.
판타지를 베이스로 한 천우희의 <영웅들의 섬>.
현대판타지를 베이스로 한 안재욱의 <콜센터>.
그리고 무협을 베이스로 한 형우의 <무림유사>.
“최종적으로는 팀 점수 20%에 개인 점수 80%를 합쳐서 순위가 매겨지게 되는 거죠.”
“20%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수치.
“……협업이 중요하겠군요.”
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에서 협업이라, 어쩌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지만 지금은 절대 아니다.
작품이 작품으로 끝나던 시대는 이제 슬슬 지나고 있다.
기존의 시대가 자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만이 최고로 존중받았다면, 앞으로의 시대는 소스source로서 기능하는 작품들이 최고의 작품이라고 불리게 될 테니.
웹소설은 이미 그런 식으로 기능하고 있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서로가 만든 것들을 공유하고, 교류하고, 나눈다.
그렇게, 오리지날리티중 가장 좋은 것들이 클리셰가 되고, 그 클리셰의 밭에서 또 새로운 것들이 자라난다. 시장은 빠르게 변화하고, 따라가지 못한 것은 도태되지만,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한다.
‘수많은 돌연변이들로 풍족한 문화적 대지.’
그리고 이번 <월드 배틀>은 그런 교류 과정을 조금 더 빠르고 크게 만들어 줄 거라고.
그런 확신이 들었다.
* * *
“허어.”
고유민이 남몰래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왜…….”
절반은 파랗고 절반은 하얗게 질린 고유민의 얼굴은 마치 잘못 탈색한 데님 청바지처럼 보였다.
“저기, 어떻게 된 걸까요…?”
판교 근처의 음식점 중에서 가장 비싸다는 한식집 청류정淸流亭의 VIP룸.
오늘 그곳의 손님은 고유민을 포함해 총 셋이었다. 고유민이 그중 유일한 여자를 향해 재차 공손하게 물었다.
“사장님. 말씀 좀 해 주세요.”
한가로운 표정으로 값비싼 술을 홀짝 마신 윤정아의 시선이 고유민을 향했다.
“어떤 걸요?”
“사장님, 갑자기 저한테 통보식으로 <월드 배틀>에 참가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맞아요.”
“‘맞아요’가 아니라 설명을 해 주셔야죠! 저도 연재하는 글이 있는데요.”
“설명이라….”
윤정아는 그대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톡톡, 두드렸다. 설명을 바랐던 고유민은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고유민의 주머니 속 휴대폰이 부르르르, 떨렸다.
“확인해 보세요.”
“확인이요?”
“빨리요.”
윤정아의 재촉에 고유민은 재빨리 휴대폰을 꺼냈다. 그의 두 눈이 터질 듯 커졌다.
“이건….”
“고유민 작가님 저번 작품 수익이 딱 230화 완결에 오천만 원 정도였죠? 그래서 그만큼 드렸습니다. 이 정도면 작품을 접을 만하죠?”
“…아무리 그래도.”
“일천 더 드리죠.”
그대로 천만원이 더 꽃혔다.
“오천에 천 더 드렸습니다. 이 정도면 일을 맡아주실 수 있을까요?”
“…일은 맡겠습니다. 하지만.”
고유민은 그대로 윤정아의 옆에 앉은 사람을 노려봤다.
“저 인간은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저 인간이라니, 사람한테.”
소주를 연신 꿀떡거리며 가자미식해를 손으로 뜯어먹던 사내, 도수형이 고유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고유민이. 요즘 돈 좀 벌었나 봐? 그래, 얼마나 벌었어? 일억? 이억?”
“……그건.”
“소심한 건 여전하네. 그러니까 네가 돈을 잘 못 버는 거야!”
도수형이 혀를 쯧 찼다.
“지금까지 몇 질 쳤지? 7질? 8질? 한 작품에 삼천도 벌고, 오천도 벌고, 일억도 벌었나? 하지만 이걸 어쩌지?”
도수형이 비웃었다.
“내 기준에서는 그것도 돈인가 싶은데?”
“이봐요, 당신…….”
고유민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뭔데 말을 그따위로 합니까?”
“말을 먼저 개판으로 한 건 당신이잖아. 나보고 이 인간이 왜 여기에 있냐며?”
“당신은 욕먹어도 싸지!”
고유민이 언성을 높였다.
“표절로 웹소설판을 뒤집어놓은 주제에 무슨 염치로?”
“이보쇼, 고유민 씨.”
도수형이 늘어지는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방금 윤정아 사장님이 오천 주고 천 줬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뜻이라뇨?”
“하나는 네 작품 값이고, 하나는 비밀유지 값이야. 나 덕분에 받은 돈이라고. 그게 싫으면 돈 반납하고 가던가?”
“…….”
대답하지 않는 고유민을 보며, 도수형은 새 술병의 마개를 퐁, 하고 땄다.
이번엔 샴페인이었다.
“그래서 내가 너를 고르자고 한 거야. 겉으로는 정의로운 척하지만, 사실 속물이라는 걸 알거든. 물론 남들은 널 모르니까 네가 정의로운 줄 알겠지만.”
“…….”
“그 침묵도 마음에 들어. 괜히 여기서 돈이 급해서 그런 거다, 이번 한 번만이다, 그딴 소리 지껄이는 것보다야, 그냥 입 꾹 닫는 게 보기 좋지. 술이나 받아.”
그대로 도수형이 술잔을 기울였다.
꼴꼴꼴꼴.
고유민의 술잔 안에 술이 넘실거렸다.
“1등은 무조건 내가 할 테니까, 너는 최소한만 해 주면 돼. 아, 그 입은 꼭 다물고.”
도수형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과도한 자신감인가?
그럴 리 없다.
-신이었죠, 소설의 신.
-전설.
표절 논란이 터지기 전, 다른 동료작가들이 그에게 했던 평가들이다. 표절을 하지 않았어도 분명 성공했을 작가. 희대의 재능.
“그게 바로 당신이었죠, 글로리 작가님.”
“사석에서 무슨 필명이야. 그리고 술은 안 마실 거? 혹시 주종이 문젠가? 한식에 샴페인이라, 좀 그런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 마셔 보면 꽤 괜찮다니까?”
“그게….”
잠깐 망설이는 순간,
“고유민 작가님.”
윤정아의 손끝이 고유민의 술잔에 닿았다.
그리고.
“거절하지 마세요.”
살짝, 아주 살짝, 1cm 정도 술잔을 밀었다.
권유라기에는 움직임이 작고, 선택을 종용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은근한 압박이 느껴진다.
그렇게 속으로 셋을 셀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마셔요, 마신다고요.”
고유민은 그대로 술을 벌컥 마셨다.
“어때, 괜찮지? 안 어올리는 것 같아도, 실제로 먹어 보니까 죽이잖아. 안 그래?”
그 모습을 보며 도수형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나저나 말야, 글로리라는 필명을 계속 쓸 순 없고, 뭔가 바꿔야겠는데. 괜찮은 필명 있나? 유민이 네가 지어줬으면 좋겠는데.”
“필명이라…… 리본(reborn)은 어때요?”
“리본이라….”
다시 태어난다는 뜻.
“약간 적나라하기는 한데…… 나쁘지 않네. 옛날이야기 같잖아.”
도수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C&N의 회의장.
요즘 이런저런 일로 예전만 못하다 평가를 듣고 있다고 해도, C&N은 C&N이다. 이곳에 모인 25명의 지망생은 그 증명이나 다름없다.
“으음……. 사람 많네.”
“그런데 처음에 서른 명이라고 하지 않았어?”
“다 못 왔나 보지. 지방에 산다거나.”
“하긴. 갑자기 부르기는 했으니까. 그나저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투덜거리던 C&N 지망생의 말이 뚝 멈췄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등장한 사람 때문이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윤정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허억.”
그 얼굴을 알아본 몇몇 지망생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보통 출판사의 사장쯤 되면, 일반적인 작가가 직접 만날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그게 C&N같은 대기업이면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윤정아는 직접 이 학생들 앞에 나왔다.
꿀꺽.
여기저기서 긴장한 사람들이 침을 삼켜대는 소리가 들렸다.
“유, 윤정아 사장님 맞죠?”
사회성이 높은 지망생 몇 명이 얼굴도장을 찍기 위해 까치발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윤정아가 피식 웃었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어……. 여, 영광입니다!”
지망생 몇 명이 감격의 겨운 표정을 지었다.
이래서 지위란 놀라운 것이다. 다른 곳, 다른 장소였으면 그냥 지나쳐가는 사람이었을 텐데.
이곳이 C&N이고, 그녀가 C&N의 사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저 간단한 말 몇 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것이니.
“제가 오늘 여기에 온 것은, 여러분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기 위해서예요.”
“도움이요?”
“이겁니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회의실 문이 열리며 편집부 막내인 윤진이 한아름의 계약서를 들고 들어왔다.
“허억.”
계약서를 읽는 지망생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100% 수익이라는 게…….”
“출판사에서 수수료를 안 떼가겠다는 거지?”
이번에 <월드 배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작품은, 후에 C&N과 계약을 할 때 수수료를 일절 물지 않는다. 라는 조항이 있었다.
“그 말은…….”
“C&N은 돈을 벌지 않겠다는 뜻이죠.”
윤정아가 강조점을 찍었다.
돈을 받지 않고도 소설의 수정 작업을 해 주고, 플랫폼과의 계약을 대리해 주고, 프로모션을 제공하며, 플랫폼으로부터 정산을 받아주겠다는 뜻이다.
“이건 시작일 뿐입니다.”
윤정아가 한번 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위이이잉-!
그곳에 모인 스물 네 명의 주머니가 동시에 울렸다.
휴대폰을 꺼낸 지망생들의 눈이 커졌다. 너나 할 것 없이 일괄적으로 250만 원이 입금된 것이다.
“선인세라고 생각해 주세요.”
“서, 선인세요?”
보통 신인에게는 선인세가 잘 지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윤정아는 그런 것 따위는 상관도 하지 않는다는 듯이 굴었다.
‘……C&N의 네임벨류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수수료 면제에 선인세까지?’
말도 안 되는 파격적인 조건에, C&N에 모인 지망생들의 눈에 열의가 반짝거렸다.
* * *
250만 원을 받아든 25명의 지망생들은 희희낙락하며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가 회의실의 안쪽으로 걸어들어왔다.
“25명에 250만 원이라, 숫자가 딱 맞네.”
“그런 건 맞추는 게 예뻐 보이잖아.”
“하긴, 그렇지.”
C&N의 부회장이자 윤정아의 동생인 윤정식이었다.
“그나저나 돈이라니. 동기부여치고는 좀 불확실하지 않을까?”
“나는 그것 말고 동기부여 하는 방법을 몰라.”
“모를 만도 하지.”
윤정식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나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효율성을 칭찬하는 것에 가깝다.
“미국의 전설적인 영화배우 브루스 리가 그랬지. 나는 만 개의 발차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무섭지 않으나, 하나의 발차기를 만 번 수련한 사람은 무섭다고.”
그러니, 자기가 제일 잘하는 것만 갈고 닦으면 된다. 윤정아의 경우에는, 분위기를 휘어잡은 뒤 원하는 방향으로 거래를 진행하는 걸 즐겼다.
적당한 카리스마와 그보다 조금 더 많은 돈.
하지만 너무 많으면 안 된다. 너무 많은 돈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드니까.
꾸준히, 여러 번 반복해야 한다. 마치 파블로프가 강아지를 조련시키듯이 말이다.
“아무튼, 다른 작가들은 구했어?”
“당연하지.”
윤정식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다 이런저런 일로 소설을 접었던 작가들이야. 이번에 신인인 척 내보낼 거고.”
“으음, BL드리프트에 독자랑 키보드 배틀…… 실존 인물 비난에 특정 정치인 비호라. 전적들이 아주 화려하시군.”
“거꾸로 말하면, 그것만 아니었어도 고꾸라지지 않을 사람들이란 거지.”
그 목록을 살피던 윤정아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도수형만 한 사람은 없네.”
“걔는 급이 다르니까. 실력으로든, 저지른 일의 스케일로든.”
“뭐, 그렇지.”
서류를 내려놓으며 윤정아가 씩 웃었다.
“일단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한 명의 팀장, 24명의 A급 예비 작가들.
그리고 필명을 세탁한 다섯 명의 전직 작가까지.
지는 게 더 어려울 정도로 막강한 전력이었다. 윤정아가 피식 웃었다.
“고마워, 정식아.”
“미리 말해 두는데, 도와주는 건 여기까지야.”
“뭐 하는 일이라도 있나?”
“뭐…….”
잠깐 고민하던 윤정식이 피식 웃었다.
“부회장이잖아. 이런저런 일이 많지.”
“하긴.”
“그러니까, 말 나온 김에 난 이만 가 볼게. 누나도 수고해. 그럼 이만.”
“음, 그래.”
윤정아는 환한 미소로 나가는 동생의 뒤를 배웅했다. 하지만 사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그 미소는 마치 거짓말처럼 녹아 버렸고, 살짝 깨문 아랫입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뭘 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라…….’
그건 그럴 수 있다. 윤정식은 부회장이고 자신은 사장이니. 회사에 관련된 일 중에서는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나, 혹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 있을 테니.
하지만 문제는, 마지막에 했던 말이다.
-말 나온 김에 난 이만 가 볼게. 누나도 수고해. 그럼 이만.
짧은 문장에 이만-이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쓰였다. 그것도 같은 방식으로.
‘당황했나?’
그렇다면, 정식이 숨기고 있는 무언가는 ‘부회장이 사장에게 숨겨야 하는 일.’이 아니라, ‘윤정식이 윤정아에게 숨겨야 하는 일’ 쪽일 가능성이 높다.
‘조사해 봐야겠네.’
윤정아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