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69화 (169/200)
  • #168

    “제 생각엔 좋은데, 여러분들은요?”

    지원의 손에 들고 있는 건 형우가 이번에 30화까지 완성한 무협 소설, <권객>이었다.

    “저도요.”

    “나도.”

    소설을 읽어 본 안재욱과 천우희도 동의했다.

    “캐릭터들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기분이라 읽는 데 저절로 몰입이 되는 느낌이에요.”

    “확실하게 그래. 예전에 네 작품들은 주인공은 좋았지만 그 외에는 좀 애매한 느낌이 있었거든. 하지만 이번엔 그런 게 없네. 0.8천우희 정도는 된 듯?”

    주연도, 조연도, 심지어 악역 캐릭터까지도 캐릭터성이 뚜렷해서 소설을 읽는 재미가 확 살았다.

    낚시터에서의 경험을 통해 드디어 무협의 가장 큰 힘인 ‘속도감’이 살아난 것이다.

    “저도 좋아요.”

    마지막으로 동의를 표한 것은 스페셜 위크의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혜선이었다.

    “아직 한 권 분량뿐이긴 해도, 100화… 아니, 75화까지만 이 정도 퀄리티가 나온다면 메인 배너나 단독팝업도 문제없을 것 같아요.”

    대게 메인 배너와 단독팝업은 ‘우리 플랫폼엔 이런 소설이 있어요!’라고 해당 기간 플랫폼에서 팍팍 밀어주는 대박작이 자리한다.

    네이비 시리즈의 <중혼황후>라던가, 커피콩 페이지의 <나 혼자만 파워 업>같은 것들 말이다.

    그 말을 들은 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아이언 타이거>가 스페셜 위크 메인 배너에 있는데 뭐.”

    “스페셜 위크를 말하는 게 아냐.”

    “그러면?”

    “네이비 시리즈나 커피콩 페이지, 어디를 가도 메인 푸시작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그 말은 곧, <권객>이 <나 혼자서 파워 업>이나 <중혼황후>만큼의 포텐셜이 있다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아니, 무협 장르니만큼 <비뇌도>나 <무당귀환>에 비교하는 게 더 옳으려나?

    “…정말?”

    “난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해.”

    하긴, 형우 또한 대학교 1학년 때 혜선을 만난 이후로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안 해서 문제였지.

    -형우야, 이번에 네가 쓴 소설은 정말로 구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쓴지 모르겠어.

    -문장은 조금 더 다듬는 게 낫겠다. 조금 더, 조금 더, 아니… 사실은 좀 많이 다듬어야 할 거야.

    …그녀의 지적은 도움이 됐지만, 상당히 썼다. 다른 사람의 조언이 딸기향 해열제라면, 혜선의 말은 웅담이 잔뜩 들어간 보약 느낌이랄까.

    ‘그런 애가 칭찬을 해 준 거니까.’

    아마 그 말은 100% 사실이라고 믿어도 될 테다.

    “와, 나 이번에 진짜 잘 썼나 봐. 네가 그런 말도 다 하고.”

    “3질이잖아.”

    혜선이 일축했다.

    * * *

    1질은 시작의 장이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지만.’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시기이자, 소설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즐거움이 앞서는 순간. 작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즐겁고 재밌었던 모든 것들을 소설 속에 담아낸다. 그렇게 1질은 완성된다.

    2질은 시험의 장이다. 저주의 장이라고도 한다.

    1질이 ‘누구나 소설가가 될 수 있지만.’이라면, 2질은 그 뒷말인 ‘누구나 오랫동안 소설가를 할 수는 없다.’라는 말로 대표된다.

    무엇을 시험하는가?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를 시험한다. 1질을 쓰며 자기 내면의 흥미로운 것들을 모두 끌어낸 작가들은 2질을 바라볼 때 막막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계속 쓸 수 있을까? 무엇을 써야 하지? 1질보다 더 나은 걸 쓰고 싶은데?

    더 이상 끄집어낼 이야기가 없으니, 이제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2질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수많은 1질 작가들이 이 벽을 넘지 못하고 무너진다.

    그렇기에 저주의 장이다.

    그리고 3질. 흔히 행운의 장이라고들 한다.

    왜 이런 별명이 붙었느냐, 대부분의 작가들의 대표작이니 인생작이니 하는 것들이 보통 3질에 나오는 경우가 가장 많은 탓이다.

    “존(Zone)을 경험하기 좋은 시기거든요, 3질은.”

    존이란 긴장감과 자신감의 적절한 평형상태에서 발생하는 각성 현상이다.

    “1질은 자신감으로 쓰고, 2질은 긴장감으로 쓰죠. 그렇기 때문에 존을 경험하기 힘들어요. 하지만 3질은 다르죠.”

    2질 때의 긴장감을 극복하면서, 자신감을 채워나가는 시기다. 밸런스적으로 알맞다.

    “그러니 당연히 존에 드는 일도 많아진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이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뭐랄까, 찬란하게 타오르는 태양을 보고 ‘우주 먼지로 이루어진 수소헬륨 덩어리.’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남녀 간의 사랑을 ‘종족번식을 위한 호르몬의 과민반응’으로 일축하는 것 같다고 할까요? 그래서 저는 이걸 ‘2질의 저주를 헤치고 나온 작가에게 주어지는 달콤한 신의 선물.’ 정도로 부르기로 했어요.”

    “…그 이야기를 지금 하는 이유가?”

    “저는 그 3질을 치다가 망해버렸잖아요.”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윤정식을 보며 씨익 웃었다.

    남자의 이름은 도수형, 과거 C&N의 간판을 담당하던 작가였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C&N에서 팽당하고 작가 생활마저 그만둔 사람이다.

    “뭐, 전부 제 탓이죠. 제 소설이 표절이었다니. 저도 몰랐지 뭐예요. 아마 필사를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적은 게 아닐까 싶어요.”

    “그렇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수형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C&N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죠. 표절 논란이 터지자마자 저와의 모든 관계를 끊었으니까요. 그 이후로 저는 뭐, 편의점 알바도 하고 공사장 삽질도 하고 온갖 것들을 다 해봤습니다.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런데.”

    반어법이 지나치게 심했다.

    “그런 C&N이 왜 갑자기 저를 찾아온 겁니까?”

    “간단합니다. 솜씨 좋은 작가가 필요해요.”

    “작가라면 C&N에도 많잖아요?”

    “저희가 필요한 건 기성이 아니라 신인이라서 말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괴물 같은 신인이라면 더 좋고요.”

    “아.”

    수형이 낄낄거렸다.

    “그러니까, 필명을 세탁하고 새로 소설을 시작해라? 그 말인가요 지금?”

    “이해가 빠르시니 좋군요.”

    “그게 됐으면 제가 진작에 필명 갈아치우고 연재를 하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제 신상을 모르는 출판사는 없습니다. 이미 블랙리스트라고요. 전부 C&N 덕분이죠.”

    “C&N이 한 게 아닙니다.”

    윤정식이 딱 잘라 이야기했다.

    “박재진 사장이 그런 거죠.”

    “박재진, 맞아요. 제가 활동할 때는 사장이 아니라 편집장이었는데. 요즘 그 사람은 잘 지낸답니까? C&N에서 잘렸다는 소식은 들은 것 같은데.”

    “안 잘렸습니다.”

    윤정식이 이를 까드득 갈았다.

    며칠 전, 인사부에서 연락이 왔다. 박재진이 다시 회사에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윤정식은 바로 박재진에게 연락했다.

    -오랜만입니다, 윤정식 부회장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낚시터에 다니신다더니, 회사에는 왜 돌아오신 겁니까?

    -그냥 낚시나 하려니 영 적적해서 말입니다. 회사 이야기에 귀가 간지럽기도 하고요.

    -지금 와서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습니까?

    -뭐, 발령난 지방에서 숨죽이고 있는 것 정도 아니겠습니까? 그러다가 기회가 온다면… 혹시 모르는 일이죠.

    상식적으로 보자면, 박재진은 예전만 못하다. 서울이 아니라 지방으로 발령이 났고, 내부 기반도 죄다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재진이다.

    윤정식의 아버지인 회장 윤태형과 함께 C&N을 이끌어 온 살아있는 역사이자, 존재만으로 위협이 되는 인간.

    괜히 윤정아와 윤정식이 실권을 잡자마자 박재진부터 쳐냈던 게 아니다.

    단순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윤정식은 자신의 뒤통수에 누군가 칼을 겨누고 있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내 목을 치려 들겠지.’

    최근에 있었던 몇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들 덕분에, C&N내부에서는 윤정아와 윤정식의 자질에 대한 의심이 약간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구심점이 없어 그저 의심에 그쳤으나, 박재진이라는 구심점이 생긴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는 거다.

    의심은 논란이 되고, 논란은 파도가 될 테다.

    ‘그 전에, 어떻게든 주도권을 확고하게 해야 해.’

    만약 박재진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윤정식이 표절 작가였던 도수형 같은 인간을 직접 찾아오는 일 따윈 없었으리라.

    “……제가 오늘 부탁드리는 건, 박재진과도 관련된 내용입니다.”

    “박재진이랑?”

    “네. 도 작가님이 도와주신다면 C&N 내에서 박재진의 세력을 완벽하게 잘라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바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겠죠. 아, 물론 도 작가님의 블랙리스트 또한 풀어드릴 겁니다. 부회장 자리를 걸고 약속드리죠.”

    “오호.”

    마음에 든다는 듯 도수형이 흡족하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적어도 들어는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 * *

    “그래서, 이번에 <월드 배틀>하는 것도 이 소설을 베이스로 한 무협 세계관으로 승부하려고 하는데요.”

    “무협 세계관이라….”

    “세계관의 이름은 <무림유사>입니다.”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교와 새외궁.

    수많은 이익집단들이 얽힌 중원의 이야기를 다루는 세계관이다.

    “무협은 보통 구파일방과 사파라는 비슷한 키워드를 공유하지만, 그 내용은 조금씩 다릅니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대부분 대동소이하게 묘사되는 키워드가 하나 있습니다.”

    “으음, 천마天魔요?”

    “천마는 대부분 최종보스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천마가 주인공인 소설도 많잖아요? 그런 경우는 오히려 소림이나 무당 같은 정파 세력이 악당으로 나오죠. 제가 말하는 곳은 개방입니다. 거지들이 모인 집단이죠.”

    형우가 설명했다.

    “개방은 무림세기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취급하는 정보기관으로 묘사됩니다. 따지자면 무림판 국정원이랄까요.”

    “비슷하네요.”

    “<무림유사>의 세계관을 꿰뚫는 인물은 개방의 분타주인 한 거지입니다. 이 거지는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무림의 모든 이야기들을 모아 새로운 책을 만들어 보자, 라는 생각이요.”

    “모티브가 누군지 알 것 같은데요. 일연 스님이군죠?”

    “맞아요.”

    일연 스님은 고려 시대의 실존 인물로서, 평생 전국을 유랑하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삼국유사>를 편찬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무림유사>인 거고요.”

    “흐음, 확실하게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해서 그런지, 군더더기가 없네요.”

    이렇게 되면, 서로 비슷한 세계관을 가진 다른 이야기가 튀어나와도 위화감이 없어진다.

    ‘다른 데서 구전된 이야기.’라던지, ‘다른 방식으로 퍼진 이야기.’라는 설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도 그렇죠. 거기에 보면 가끔 시대가 뒤죽박죽이거나 서로 합치되지 않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 태클을 걸지 않잖아요.”

    “맞아요. 같은 인물이 여기저기 튀어나오기도 하죠. <삼국유사>에 나온 동해 용왕만 봐도, 그 이후 기록에서도 종종 얼굴을 비추잖아요.”

    여기서 동해 용왕이란, 죽어서 용이 되었다는 신라의 문무왕을 말하는 거다.

    “용왕이 이순신 장군을 도와 일본군을 침몰시켰다는 구전도 있을 정도니까요.”

    “좋아요, 좋습니다.”

    지원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능력을 주는 경이로운 신을 중심으로 완성된 안재욱의 <콜센터>.

    영웅들의 항해라는 하나의 서사를 공유하며 수많은 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천우희의 <영웅들의 섬>

    ‘구전’이라는 이름 아래 전설과 역사를 동등한 위치에서 써 내려갈 수 있는 <무림유사>까지.

    드디어 세 개의 세계관이 완성되었던 셈이다.

    “거기에 기존에 이미 있었던 <포탈 서울>의 세계관까지 합치면, 일단 구색은 갖춘 셈이네요.”

    웹소설의 장르는 꽤나 많은 키워드를 아우르고 있지만, 크게 보자면 네 조각으로 쪼갤 수 있다.

    신무협과 구무협을 아우르는 ‘무협.’

    서양적 세계관을 베이스로 한 ‘판타지.’

    사회인의 성장담을 다루는 ‘현대 판타지.’

    그리고 한국식 히어로물인 ‘레이드물’.

    각각 <무림유사>, <영웅들의 섬>, <콜센터>, 그리고 <포탈 서울>인 셈이다.

    “다른 건 작가님들이 하나씩 맡아 주시면 되니까 괜찮은데, 문제는 <포탈 서울>이로군요. 다른 작가님을 알아봐야겠네요.”

    “정진욱 작가님은 어때요? 저번에 저 대신 수업도 몇 번 맡아 주셨잖아요.”

    “벌써 말씀은 드려 봤는데, 아쉽게도 7박 8일로 뉴질랜드 여행을 가신다고 하시더라고요.”

    “으음, 여행은 어쩔 수 없죠. 아쉽네요, 레이드물 쓰시는 분들 중에서 정진욱 작가님만큼 괜찮으신 분이 또 없을 텐데.”

    “그러게 말이에요. 누구 좋은 사람 없을까요?”

    그 순간,

    끼이익-

    창밖으로 유달리 큰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 많이 왔다갔다 하는 곳이니 차 소리가 들리는 것 정도는 당연할진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뭐죠?”

    “엄청 좋은 자동차에요. 누가 내리는지까지는 못 봤어요.”

    인간에게는 오감 외에 또 다른 육감이 있다고 한다. 직감이라고도 부르는, 야생성 같은 것.

    그 육감이 지금 곤두서 있었다.

    또각또각.

    계단을 올라오는 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대로, 스패로우 팩토리의 문이 벌컥 열렸다. 노크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자기소개 또한 필요 없었다. 모두가 아는 얼굴이었으니까.

    “……윤정아 사장?”

    “예. 실제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죠?”

    윤태준의 어머니이자 C&N의 사장.

    윤정아가 스패로우 팩토리의 사무실에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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