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67화 (167/200)

#166

누군가는 말한다. 세상에서 위대한 작가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두 명밖에 없다고.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그 주인공이다.

누군가는 분명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세상에 작가가 얼마나 많은데, 무슨 근거로 100년도 더 전, 같은 날에 죽은 두 사람을 최고의 작가로 꼽는단 말인가?

영국의 또 다른 위대한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 또한 비슷한 의문을 품었다. 그 해결을 위해 평생에 걸쳐 셰익스피어가 쓴 36편의 희곡과 154곡의 소네트를 분석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셰익스피어는 창조주 이래로 가장 많은 인간을 만들어 낸 사람이다.

셰익스피어가 만들어 낸 인물, 즉 캐릭터의 수는 천 오백 명이 넘었던 것이다.

당장 지금 종이를 펴들고, 천 오백 개의 사람 이름을 적으라고 하기만 해도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텐데, 하물며 천 오백의 캐릭터라니.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업적이다.

하지만, 조이스의 놀라움은 이게 끝이 아니다.

천 오백의 캐릭터 중 겹치는 캐릭터가 없다.

배경이 비슷해도 성격이 다르며, 성격이 비슷해도 가치관이 다르며, 가치관까지 비슷하다면 적어도 말투라도 다르다.

자신의 작품에서 한 번 사용한 캐릭터를 결코 재사용하지 않겠다는 강박증적인 의지.

그것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어떤 작가에게도 존재하지 않는 셰익스피어만의 특징이었다.

세상에 위대한 작품을 남긴 작가도 많고, 많은 글을 쓴 작가도 많지만, 셰익스피어만큼 위대한 작품을 많이 남긴 작가는 없다.

다작가多作家이자 명작가名作家.

셰익스피어가 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던 놀라울 정도의 캐릭터 메이킹 능력 덕분이었던 것이다.

‘사람이 아니지.’

낚시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형우는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천 명이 넘는 개성적인 캐릭터라니.’

형우는 새삼 그 전설적인 작가에 대해 떠올렸다.

글로브 극장에 마련된 집무실에 앉아, 창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대작가를.

무슨 이야기들이 오갔을까?

신기한 꿈을 꾸었다는 사사로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고, 남녀 간의 치정에 대한 소문일지도 모르고, 무덤에서 해골을 들고 난동을 피우는 귀신을 보았다는 괴담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셰익스피어는 아마, 씩 웃고서는 고급스러운 깃털 펜을 쥐지 않았을까.

그렇게.

신기한 꿈을 꾸었다고 외치는 속 좁은 남자의 이야기에서 <한여름 밤의 꿈>의 오베론을 창조하고.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 속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구상했으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괴담을 진지하게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햄릿>에 대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캐릭터는, 그렇게 완성되는 건데….

“…잊고 있었네.”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최근에 선배 좀 바뀐 게 있지 않아요? 만약 있다면 그게 아마 슬럼프의 이유일 거예요.

연수의 말이 맞았다.

최근에 바뀐 것. 그건 돈도, 지위도 아니었다.

‘마음가짐.’

소설가로서의 마음가짐이 변해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형우는, 자신의 노트를 바라봤다.

대머리 아저씨의 이름은 정철산이었다.

과거 거대한 운송선을 다루던 선장이었고, 각국에서 온갖 일들을 겪었다. 파나마가 막혔을 때의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재밌었다.

‘상단주로 하자.’

머리가 없고, 약간 거리낌도 없지만 그래도 사람 좋은 중원의 상단주 캐릭터를 완성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양순하면서도 약간은 깐깐한, 종종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단장은 무림원의 훈련대장이 되었고.

유유자적 낚시점을 운영하는 소탈한 가게 주인은 주인공의 단골집 점소이 캐릭터가 되었다.

‘말하지 않았다면 몰랐겠지.’

만약 그들과 대화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저 대머리 아저씨이고 가게 주인이고 지나가던 노인에 불과했을 테고, 그들이 품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들 또한 그대로 묻혀 버렸을 테다.

“……굳이 황계백 선생님을 찾아 뵐 필요도 없겠네.”

애초에 논산을 가려던 것은 슬럼프 극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미 이뤄낸 이상, 굳이 논산까지 시간을 들여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참치야?”

“뺘악!”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참치가 동의한다는 듯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그래, 돌아가자.”

형우는 그대로 서울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보다 훨씬 시급한 일들이 많았다.

‘일단 소설을 쓰고, 아카데미 이벤트도 준비해야지. 그리고….’

아, 맞다.

“정수한테 사과도 해야지.”

제일 중요한 일을 잊을 뻔했다.

* * *

형우가 떠난 뒤, 낚시꾼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은 건 노란 모자와 대머리 아저씨, 정철산이였다.

“어이, 동생.”

“왜요, 정 형.”

“왜 입 다물고 있었나?”

“뭐가요.”

“전부 다.”

정철산이 노란 모자를 바라봤다. 노란 모자가 체- 하는 소리를 냈다.

“그 꼬마가 찾던 건 소설가였잖소. 나는 소설가는 아니잖아요.”

“소설가는 아니지, 하지만 편집자였잖아. 그것도 한국에서 제일 큰…… 거 뭐더라? 아까도 들었었는데 이름이…… 아!”

이름을 떠올린 정철산이 박수를 딱 쳤다.

“맞네, C&N! 거기 사장이었다면서? 맞지, 재진 동생?”

정철산의 말에 노란 모자, 박재진이 고개를 저었다.

“옛날 일이에요. 미련도 없어요.”

“에이. 동생 또 거짓말하네.”

“거짓말은 무슨….”

박재진이 괜한 이야기 말라는 듯 낚시도구를 꺼내 일어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정철산이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 여기 사람들이 다 김형우 근처에 둘러앉아서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고 있을 때, 자네는 입 꾹 닫고 있더군.”

“그냥 이야기하고 싶지가 않았을 뿐이요.”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박재진을 보며, 정철산이 하하 웃었다.

“내가 30년간 바다를 누볐어. 말 통하는 사람도 있고, 말 안 통하는 사람도 있었지. 나라고 세상 모든 언어를 다 알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말야, 말이 안 통해도 나는 실수한 적은 없어. 그 이유가 뭔지 아나?”

“뭔데요?”

“내가 사람 얼굴을 기막히게 잘 봤거든. 말이 안 통해도 얼굴만 보면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보인단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동생.”

정철산의 목소리가 조금 진중해졌다.

“미련이 있지?”

“미련이요?”

“그래, 미련.”

정철산이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아까 자기 인생을 미주알 고주알 떠든 놈들은 과거에 대한 미련은 별로 없는 놈들이야. 그러니까 막 이야기할 수 있는 거지. 실연도 똑같지 않은가? 막 헤어진 연인에 대해 말하기는 껄끄럽지만, 헤어진 지 오래되어 미련을 떨쳐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냥, 이르다고.”

정철산이 코를 쓱 문지르며 말했다.

“미련 가진 인간이 낚싯대나 휘두르고 있으면 쓰나.”

“그거 오지랖입니다. 정 형.”

“이 나이쯤 되면 오지랖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아까 꼬맹이 이야기는 들었지?”

낚시꾼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형우도 자기 이야기를 했었다.

회사를 차린 일이나, C&N과 싸우는 일 같은 것.

“자네 표정이 참으로 구질구질하던데.”

“당연하죠. 제가 있던 곳 아닙니까. 그런 기분이 안 드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글쎄, 만약 나라면 통쾌해했을 거야.”

미련이 아예 없었다면, 이라고 정철산은 덧붙였다.

“미련이라…….”

박재진의 고개가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달랐을까?

내가 남아 있었다면.

남아서 윤정식을 견제하고, 회사를 이끌어 나갔다면. C&N은 아직 건재했을까.

“모르겠네요.”

박재진이 휴대폰을 바라봤다. 오늘의 날짜가 밝게 떠올라 있었다.

퇴직자들을 위한 90일간의 유예.

공교롭게도, 오늘은 그 마지막 날이었다.

오늘 형우를 만난 것,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 자신에게 찾아온 또 다른 기회라면….

‘…그랬으면 좋겠네.’

박재진이 노란 모자를 벗었다.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정 형. 아까 낚싯대 부러졌다고 했죠?”

“그랬지.”

“제 거 쓰십쇼.”

그것만으로는 뭔가 못마땅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주 주는 거 아닙니다. 넉넉잡아 한 5년쯤 있다가 돌아올 테니 잘 간수하고 계시라고요.”

“최소기한은 있어도 최대기한은 없으니 더 있어도 좋네.”

“어딜 낼름 드시려고.”

“어어, 들켰나?”

정철산이 씨익 웃었다. 그 머리 너머로 노을이 지는 저수지가 보였다. 마치 두 개의 태양처럼 보이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박재진이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어, C&N은 요즘 어때? 응, 나 박재진. 전에 내가 발령 났던 곳 있잖아. 거기 자리 아직 있지?”

노을 지는 저수지를 배경으로. 박재진의 힘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퍼더더덕-!

그 큼지막한 목소리에 혼비백산한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낚시는 이쯤에서 끝내야 할 모양이다.

* * *

정수의 방문 앞.

잠깐 망설이던 형우는 그대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정수야.”

“?”

둘의 눈이 마주치자마자, 형우는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두 팔을 벌리며 정수에게 다가갔다.

“허.”

그렇게 웃은 정수는, 그대로 의자에서 일어나 두 팔을 마주 벌렸다.

툭툭.

두 남자가 서로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미안, 미안했어.”

“뭘 그런 걸 가지고.”

남자라는 생물은 은근 단순한 데가 있어서, 아무리 앙금이 남아 있어도 상대편에서 먼저 팔을 벌리고 들어오면 악감정이 싹 녹아버리는 것이다.

“예민해서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요즘 좀 잘나간다 싶어서 정신이 나갔었나 봐. 진짜 미안해.”

“전 괜찮아요.”

“에너지 드링크 잘 마셨다. 맛있더라.”

“공산품 맛이 거기서 거기죠 뭐.”

조금 민망해진 정수가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다녀온 건 잘 됐어요? 연수 누나한테 들어보니까 슬럼프 극복한다고 논산 간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 논산에는 안 갔어. 그 전에 실마리를 잡았거든.”

“올, 그러면 이제 다시 소설 쓰는 거예요?”

“엉. 논산은 나중에 시간 나면 가려고. 지금은 좀 바쁘니까. 그나저나 너는 논산 언제 가냐?”

“제가 왜요?”

“그 있잖아, 훈련소.”

“허억.”

정수의 얼굴이 시꺼멓게 변했다. 형우가 녀석의 등을 툭 쳤다.

“가면 편지 써 줄게.”

“저 이제 고3이거든요. 군대 가려면 삼 년도 더 남았어요. 그때 어떻게 될 줄 알고?”

“인마. 삼 년 뒤에는 나 안 보려고?”

“사람 일 모르죠.”

“짜식, 말 못되게 하네.”

정수의 등을 장난스럽게 툭, 쳤다.

“어휴.”

그 순간, 누군가가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둘이 화해했어요?”

“어라?”

정수의 어머니였다.

“정수가 며칠간 축 처져 있더니, 그게 다 형우 작가님이랑 싸워서 그랬었구나.”

“어, 엄마! 그것 때문에 시무룩했던 게 아니라 어… 요즘 몸이 안 좋아서 그랬던 거야!”

“맞아요 어머니. 저희 안 싸웠어요. 그냥 사소한 말다툼 정도?”

“으음, 뭐.”

정수의 어머니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나저나 형우 작가님 오신다고 해서 국밥 끓여 놨는데, 식사하실 거죠?”

“국밥이요?”

정수 어머니의 국밥이라면 저번에 먹어본 일이 있었다. 한 숟가락 뜨는 순간 온몸에 힘이 쭈욱 도는 슈퍼 스태미너 음식이 아닌가.

“당연히 먹고 가죠!”

“그럴 줄 알고 수저 내 놨어요.”

“감사합니다!”

형우의 입가에 군침이 싸악 돌았다.

그대로 식탁으로 가 국밥을 목구멍으로 욱여넣으며, 형우는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제일 요리 잘하는 게 우리 엄마인 줄 알았는데, 어머님 솜씨도 못지않네요!”

“호호, 남의 집 아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제 솜씨가 나쁘지는 않나 봐요. 아, 어머니께서는 뭘 하세요?”

“시골에서 농사지으십니다.”

“아하, 농사라. 그거 부럽네요. 저도 작게 주말농장을 하는데, 어머님께서는 이 계절에는 뭘 심으시죠?”

“어어… 글쎄요?”

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어머니랑 전화를 통 안 하기는 했네.’

생각난 김에 전화나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형우였다.

* * *

경)김형우 작가의 TV 출연을 축하합니다!(축

“저건 또 언제 올렸대.”

밭을 매러 가다가 발견한 새로운 현수막을 바라보며, 형우의 어머니 송윤아가 피식 웃었다.

“이장님 짓이구만,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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