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64화 (164/200)
  • #163

    참치가 내린 곳은 목적지인 논산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인 천안이었다.

    “왜 여기에 내린 거냐?”

    “뺘악!”

    참치는 딱밤맞은 게 화난다는 듯 볼을 부풀리고 형우의 시선을 외면했다. 이럴 때는 알아서 생각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천안, 천안이라.”

    참치가 천안에 내린 이유가 뭘까? 천안하면 유명한 게 뭐지?

    ‘호두과자? 호두과자 냄새 맡고 날았나?’

    참새니만큼 꽤 가능성 높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전주비빔밥을 전주에서만 파는 것이 아니듯 천안호두과자라고 천안에서만 팔지는 않는다.

    서울에 있는 형우의 집에서 5분만 걸어가도 붕어빵과 풀빵, 호두과자를 잔뜩 파는 과자 매장이 있는데 굳이 여기서 내릴 이유는 없단 말씀이다.

    참치는 사람만큼이나 똑똑하니까.

    ‘…그렇다면.’

    그대로 형우의 머릿속에 두 번째 가능성이 떠올랐다.

    ‘또 뭔가 냄새를 맡았나?’

    이제 와서 말하기도 우습지만, 참치는 영물이다.

    벌써 참치에게 도움받은 일이 다섯 번은 훌쩍 넘은 것 같다.

    ‘한두 번은 우연이라고 쳐도, 다섯 번쯤 되면 우연 취급하는 게 더 바보 같은 일이지.’

    설령 백만 분의 일 확률로 지금까지 벌어졌던 모든 일들이 우연이라고 할지라도 별 상관은 없다. 세상엔 긍정적인 플라시보라는 것도 분명 있는 법이니.

    ‘그러니까, 이번에는 무슨 도움을 주려나.’

    문제는 명확하다.

    슬럼프가 와서 소설이 막혔다. 정확히는 캐릭터 빌딩에서 문제를 겪었다.

    ‘분명 10화까지는 끝내주는데…….’

    문제는 조연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11화부터였다.

    의재를 모티브로 한 주인공 캐릭터는 확실하게 매력 있었지만, 그 외의 조연들이 영 떠오르지가 않았다.

    가끔 조연 없이도 진행하는 소설이 있긴 하지만, 무협은 다르다.

    악당이든 선역이든, 조연은 반드시 등장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도저히 만들 수가 없어.’

    좋은 캐릭터는 스스로 뛰어다니는 캐릭터라고, 황계백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형우가 만든 캐릭터는 어떤가?

    마치 스토리에 끼워 맞춰 놓은 것처럼 어색하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전혀 안 들었다.

    겨우겨우 억지로 만든 조연들도 몇 번인가 쓰다가 결국 마음에 안 들어서 지워버리기 일쑤였다.

    ‘예전에는 어떻게 했더라?’

    <전설의 보안관>이나, <아이언 타이거>나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적어도 스무 명은 넘을 테다.

    그리고 그 캐릭터는 전반적으로 생기가 느껴졌다.

    ‘과거의 나는 어떻게 그 많은 캐릭터들을 만들어 냈던 거지?’

    불과 몇 달 사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드는 법을 몽땅 잊어버린 기분이었다. 그게 얼마나 막막했던지, 가끔은 <권객>을 포기할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루지는 못했다.

    써 놓은 10화까지의 분량 때문이었다.

    ‘너무 아까워!’

    분량이 아까운 것은 아니다.

    10화라고 해 봐야 고작 6만 자. 마음만 먹는다면 삼일 만에도 써낼 자신이 있다.

    아까운 건 분량이 아니라 그 내용이었다.

    ‘<전설의 보안관>, 어쩌면 <아이언 타이거>보다도 더 좋은 도입부야.’

    아직 다 쓰이지 않은 소설이니 차후까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도입부만 보자면 확실하게 여태껏 쓴 작품 중에 가장 좋았다.

    그러니, 어찌 욕심이 안 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욕심에도 시기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도, 거기에 천년만년 시간을 들일 수는 없다.

    그 시간이, 다시 오지 않을 만큼 중요한 기회라면 더더욱 말이다.

    ‘아마 이번 일주일이 한계겠지.’

    한달 뒤면 스패로우 팩토리의 빅 이벤트, <월드 배틀>이 시작한다.

    이제 슬슬 어떤 장르의 어떤 소설을 쓸지를 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정했는데. 나만 못 정했지.’

    형우가 주먹을 꾹 쥐었다.

    ‘지금 달려 나가지 못하면, 평생 못 나갈지도 몰라.’

    스패로우 팩토리는 지금 궤도에 올랐다.

    무슨 일을 하든 잘 되고 있다.

    물론 백조의 우아함처럼 물밑에서의 엄청난 노력이 동반한 성공이긴 하지만, 노력만으로 모든 일이 성공할 수는 없는 법이니.

    이 정도면 되는 날이라고 해도 좋을 테다.

    지저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최고조고, 끈질기게 스패로우 팩토리를 견제해 왔던 C&N은 델리만쥬의 깽판 덕분에 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 달려야만 한다.

    사람들의 관심은 금세 식을 테고, C&N은 금방 정신을 차릴 테다.

    델리만쥬 사건은 꽤 무거운 펀치지만, 이 정도로 쓰러질 C&N과 윤정식이 아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수습이 끝나는 순간 더더욱 큰 게 온다는 뜻이지.’

    그 전까지 최대한 규모를 키우고 힘을 비축해 놓아야만 할 테다.

    거인의 주먹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그러기 위해선 결국, 슬럼프를 극복해 내야 해.’

    돌고 돌아서 다시 원점이었다.

    아무리 좋은 바람이 불어온들, 선원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만약 해결되지 않는다면…….’

    형우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지려는 순간이었다.

    “삐루루루루루루루욱…… 삐룩!”

    커다란 몸을 토실거리며 힘겹게 날아가던 참치 녀석이 비명을 질렀다.

    ‘에라, 고민도 분위기가 맞아야 하지.’

    형우가 힘없이 피식 웃었다.

    “너는 진짜 새니까 살쪄도 귀여운 거지, 사람이었으면 진짜 보기 안 좋았을걸. 아니, 보기 안 좋은 수준이 아니지. 분명 큰일이 났을 거야.”

    만약 자신이 저렇게 뒤룩뒤룩 살이 쪄서 뛰지도 못하는 상태였다면? 아마 어머니인 송윤아 여사에게 목덜미를 잡혀서 계곡으로 던져졌을 거다.

    ‘어머니는 건강하지 않은 걸 눈 뜨고 못 보지.’

    예전에 집에서 키우던 진돗개인 박돌이가 사료를 잔뜩 퍼먹고 살이 뒤룩뒤룩 쪄서 산책도 안 나가려고 할 때, 어머니가 그 목줄을 끌고 마을을 다섯 바퀴나 돌았던 게 여전히 눈에 생생했으니.

    ‘……다른 집은 개가 사람 끌고 가는데, 우리 집만 사람이 개 끌고 가서 다들 뭐라고 했지.’

    등 따숩고 배불러서 잔뜩 게을러진 박돌이가 산책가기 싫다며 얼마나 낑낑대던지, 동물인권운동가인가 하는 사람과 마찰이 붙은 일도 있었다.

    -개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어요! 산책 싫다는 애를 왜 굳이 끌고 나가세요! 사람처럼 대해야죠!

    -사람처럼 대하라고요?

    그때 어머니의 답이 참 가관이었었는데.

    -얘가 개니까 지금 안 맞고 있는 거지, 내 아들이 이따위로 뒤룩뒤룩 쪄서 뒹굴대고 있었으면 이미 코피 줄줄 흘리면서 집에서 쫓겨났어, 이 인간아!

    ……보통은 눈물을 흘리며 쫓겨나지 않나?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먹던 콜라가 목에 넘어가지 않아서 그대로 집어 던졌던 기억이 났다.

    “참치 넌 진짜 조류라서 다행인 줄 알아. 살쪄도 깃털 덕에 티가 안 나잖아.”

    “뺘아아악……!”

    참치가 괜한 소리 말라는 듯 눈을 부라리지만, 격렬한 운동 탓에 그 손톱만 한 작은 눈망울이 완전 맛탱이가 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날개를 펄럭이는 걸 보니, 뭔가 필사적이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삑삑!”

    갑자기 참치가 그렇게 울었다.

    평소와는 다른 울음인데, 형우는 저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버스 타자는 거구나?”

    “삑! 삑!”

    카드 찍는 소리를 흉내 내며 우는 녀석.

    평소 우는 소리인 뺘악- 과 카드 찍는 소리인 삐익-이 비슷한 덕에 할 수 있는 묘기다.

    ‘이런 거 찍어서 틱택톡 같은 거 올려볼까? 조회 수 잘 나올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형우는 자기 머리를 꿍, 하고 때렸다.

    ‘소설가가 소설 쓸 생각은 안 하고 다른 걸로 돈 벌 궁리나 하고 있다니. 왜? 조만간 비트코인이랑 주식도 한다고 하지?’

    그렇게 스스로를 한번 꾸짖어 준 후, 형우는 그대로 버스에 올랐다.

    * * *

    “……으음?”

    코끝에 알싸하게 감도는 물비린내를 맡으며, 형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 김 씨. 거기 지렁이 좀 빌려줘.”

    “자네도 지렁이 있잖은가?”

    “물고기가 자네 지렁이를 더 잘 무는 느낌인데.”

    “무슨 지렁이도 상등품 하등품이 있나.”

    시내에서 삼십 분 정도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낚시터였다.

    “참치가 여기 맞아?”

    “뺘아악!”

    참치가 이제 만족했다는 듯, 형우의 어깨 위에 올라가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이곳이 맞게 온 게 맞다는 뜻이다.

    “……흐음.”

    낚시터라기엔 조금 크고, 그렇다고 호수라고 부르기엔 작다. 아무래도 안 쓰는 저수지 같은 걸 낚시터로 개조한 느낌이었다.

    “여길 왜 데리고 온 거야?”

    “뺘악, 뺘악.”

    참치가 날개를 뻗어 형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쯤 했으면 그다음은 알아서 하라고, 김 작가. 그렇게 말하는 듯한 태도다.

    “여기까지 왔으면 그냥 말 해줘도 되잖아?”

    “뺘악?”

    참치가 어이없다는 듯 울었다.

    ‘아 맞다. 참새는 원래 말을 못 하지.’

    녀석이 하도 말없이도 의사 표현을 명확하게 하는 바디랭귀지의 대가인지라, 깜빡하고 있ᄋᅠᆻ다.

    “뺘르륵! 뺘르륵!”

    형우의 멍청한 표정을 비웃어 준 후, 참치는 새장을 향해 날아갔다.

    덜컥.

    부리를 요리조리 놀려 새장 문을 휙 열더니, 그 안으로 쏙 들어가 날개 속으로 고개를 묻었다.

    ‘괜히 건들면 그 팔을 벌집으로 만들어 주지!’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한 번 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허, 참…….”

    그대로 형우는 주변을 주륵 둘러봤다. 평일인데도 꽤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 중에서 귀인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그러니까, 자신의 슬럼프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아마 소설을 잘 아는 사람이겠지? 어쩌면 소설가일지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하며, 형우는 눈을 크게 뜨고 사람들의 면면을 하나씩 살폈다.

    귀인이란, 가만 있어도 범상치 않은 오오라를 풀풀 풍기기 마련이었으니까 말이다.

    * * *

    “……전혀 모르겠네.”

    한참을 낚시터를 둘러봤지만, 형우는 그들 중 누가 참치가 말한 귀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귀인 같아 보이는 사람이 없어서가, 모두가 귀인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신선림이라도 되나?’

    형우는 무협에 종종 등장하곤 하는, 노고수들이 모여 산다는 마을을 떠올렸다.

    엄청나게 과장은 아니었다.

    ‘뭔 낚시터가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없어?’

    사람들 하나하나마다 기운이 얼마나 강맹한지, 형우는 슬쩍 다가가서 말을 붙여볼 생각을 일찌감치 접었다.

    ‘……애초에 불쑥 말을 걸어서는 쓸만한 정보도 안 나오고 말이지.’

    게임 속 NPC를 제외하자면, 안녕하세요 한 마디에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 모든 정보를 술술술 말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정보의 경중輕重을 떠나서, 일단 귀찮으니까.

    “……일단 좀 볼까.”

    그대로 형우는 휘휘 걸어 다니며 낚시꾼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오늘은 고작 일곱 마리밖에 못 잡았군.”

    “2번 낚싯대 탄성이 형편없는데. 바꿀 때가 됐나?”

    “요 지렁이 녀석, 환대에 기름이 좔좔 흐르는 거 보게! 특상품이구만!”

    오호?

    그 대화를 듣자마자, 형우의 머릿속에 문득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이 낚시터는 고였다.’

    저수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을 말하는 거다.

    “월척이구만!”

    “오늘 자네가 마지막 월척인 것 같구만, 하하!”

    “나는 오늘 월척만 네 마리일세!”

    ……말하는 것만 들어 봐도 사람들 하나하나가 죄다 고이다 못해 썩어버린 달인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형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헬스장의 역설易說이라고 불리우는 전설의 논리였다.

    ‘운동을 똑바로 배우려면 일단 아주 이상하게 운동해라!’

    얼핏 듣기로는 이상한 말이다.

    똑바로 배우려면 똑바로 해야지, 왜 이상하게 시작하라는 말인가?

    하지만 이 논리는 놀랍게도 맞는 논리다.

    헬스장에 상주하는 헬스 고인물들 덕분이다.

    -헬스장 처음 오세요?

    -에헤이, 운동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제가 정자세 알려 드릴게요. 데드리프트를 할 때는 기립근을 딱 고정시키시고요. 예, 예. 그대로 허벅지에 힘을 주면서 으랏챠!

    적당히 할 줄 아는 사람을 볼 때는 신경도 안 쓰던 사람들이, 초보자만 보면 갑자기 친절해진다.

    ‘어떤 분야든, 고인물은 뉴비를 좋아한다는 거지!’

    평범한 사람이 물어보면 ‘검색해 보세요.’, ‘알아서 하세요.’라고 귀찮아하는 사람도, 상대가 초보라는 걸 알면 이상하게 잘 대해주는 법!

    그것이 바로 헬스장의 역설의 요지라는 거다.

    ‘그러니까, 그걸 낚시터에서 하는 거야. 일단 친해진 다음에 천천히 이야기해 보면 귀인이든 영감이든 뭐라도 나오지 않겠어?’

    꽤 그럴듯한 계획에 스스로 만족한 형우가 씨익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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