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63화 (163/200)

#162

“38.5도네요.”

체온계를 확인한 연수의 목소리에 걱정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오늘 아침, 연수는 매니저인 지원에게부터 급박한 연락을 받았다.

-서연수 작가님, 진짜 죄송한 말인데 혹시 형우 작가님 찾아뵈어 줄 수 있을까요?

-선배요? 왜요?

-오늘 아침에 몸살로 쓰러지셨대요! 원래는 제가 가야 하는데 지금 교정이 너무 밀려 있어서, 생각나는 사람이 연수 작가님 정도밖에는….

-제가 갈게요!

-죄송합니다, 부탁 좀 드릴게요!

그렇게, 연수는 아침부터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형우의 작업실까지 한달음에 달려 온 것이다.

“요즘 좀 잠잠하다 싶더니, 선배는 진짜.”

“……아카데미는 어떻게 됐대?”

바싹 마른 입술로 형우가 물었다.

이 상태가 되어서도 일 생각이 먼저라니. 가끔은 성실하다기보다는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방금 지원 매니저님한테 연락받았어요. 일단 정진욱 작가님이 며칠간 대리로 수업을 진행해 주시기로 했대요.

“다행이네.”

정진욱이라면 확실하게 믿을 만한 사람이다. 그제야 안심한 형우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금 쓰러져 있으면 안 되는데…….”

“아뇨. 선배는 지금 쓰러져 있어야 해요. 잠깐 있어 봐요.”

연수가 형우의 머리에 물수건을 올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왠 몸살이에요? 저번에 봤을 때만 해도 몸 관리 잘하고 있다면서요?”

“그게…… 나도 모르겠다.”

형우는 지난 며칠간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을 천천히 설명했다.

“첫날에는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아서 못 쓰나, 싶었는데 다음 날도 안 되더라고.”

“네.”

“그래서 뭔가 노력이 부족했나 싶어서 글쓰기를 두 배로 늘렸어. 집중도 열심히 했고.”

“그런데요?”

“그래도 안 써지더라고.”

형우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서 세 번째 날은 그것보다도 열심히 했지. 써질 때까지 휴식은 없다, 느낌으로.”

그 말을 들은 연수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상당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당연히 몸이 축나죠!”

“글이 안 써지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

형우가 쉰 목소리로 항변했다.

“근데 결국 어제도 한 자도 못 썼어.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왜 이러기는요, 슬럼프니까 그렇죠!”

“응?”

형우가 눈을 끔뻑거렸다.

“슬럼프……?”

“예! 슬럼프요! 어제까지 잘 되던 게 오늘따라 이상하게 안 되고. 머피의 법칙마냥 꼬이고 꼬여서, 결국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는 끈적끈적한 거!”

그제서야, 형우는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슬럼프가 나한테 왔다고?”

뮤즈의 또 다른 얼굴이자, 예술가들의 영원한 적.

그 녀석이 형우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 * *

슬럼프(Slump)

뚜렷한 이유 없이 자신의 실력을 잘 발휘하지 못하거나, 실력이 늘어나지 않는 상태가 반복되는 현상을 뜻하는 운동 용어다.

그리고, 과거 운동을 전공했던 연수는 슬럼프라는 것에 대해서는 형우보다 잘 안다고 확실하게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슬럼프가 와서 일이 잘 안 되는데, 그걸 억지로 해보려고 시간을 갈아 넣다가 몸까지 갈아 넣었다는 거죠, 지금?”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누가 슬럼프 관리를 그딴 식으로 해요? 그러다가 멘탈 다 나가요!”

슬럼프 관리에 가장 안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건 바로 형우처럼 ‘될 때까지’를 외치며 정신론으로 밀어붙이는 방법일 테다.

“선배가 무슨 2차대전 일본군이에요? 정신력이면 다 되는 줄 알게! 그 인간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칼 들고 탱크에 돌격하다 다 죽었잖아요!”

답답함을 참지 못한 연수가 가슴을 퍽퍽 때렸다. 만약 형우가 아프지 않았다면 그 주먹은 분명 형우에게로 향했으리라.

“……미, 미안.”

그 서슬퍼런 기세에, 형우는 자신도 모르게 사과를 했다.

“어휴, 내가 못 살아. 그런 일이 있으면 말을 해야지. 그러면 도와줄 수 있었잖아요.”

“너도 슬럼프를 겪은 적 있어?”

“당연하죠. 슬럼프 제일 많이 오는 직종이 운동선수인거 몰라요?”

연수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중학교 때였어요. 겨우겨우 극복했었죠.”

“어떻게 했는데?”

“가장 먼저 한 건…… 처음으로 메달을 땄던 경기장을 찾아갔던 것 같아요. 그 기분을 다시 되새기면서 자신감을 얻으려고요. 슬럼프 극복의 시작은 자신감을 되찾는 거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처음으로 무협 소설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던 곳이 어디예요?”

“그야…… 논산이지.”

정확히는 황계백의 집이다.

<권객>의 테마도, 무협에 대한 깨달음도 그곳에서 처음으로 얻었다.

“그러면 그곳에 찾아가 보세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좋아.”

밑져야 본전.

연수의 조언을 들은 형우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아직은 아니에요. 일단.”

연수가 다급하게 일어나려는 형우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살짝 밀었다.

“그 몸살부터 어떻게 해결하도록 해요.”

“하지만.”

“어허!”

그 단호한 손짓에, 형우는 얌전히 끄응, 소리를 내며 침대에 엎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틀 뒤.

“36.5도네요.”

열이 내렸다.

* * *

“흐음.”

약간 나른한 기분이었지만 몸을 움직이는 데는 딱히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어.’

그렇게 생각한 형우는 그대로 가방에 노트북을 챙겨 넣었다.

“정말 같이 안 가도 괜찮겠어요?”

연수의 질문에,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혼자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참치는 데려가면서.”

“참치는 어쩔 수 없잖아. 여기에 두고 가면 내 팔에 북두칠성을 남기고 말걸.”

“그건 그렇지만… 일단 알았어요.”

연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주셔야 해요.”

“알겠어.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연수의 걱정을 뒤로한 채, 형우는 논산으로 내려가는 기찻길에 올랐다.

“뺘악!”

새장 속의 참치가 크게 울었다. 참치에게 대충 해바라기 씨 몇 개를 던져준 형우는 그대로 고민에 잠겼다.

‘조급함이라…….’

연수의 말에 의하면 슬럼프의 90%는 조급함이 그 원인이라고 했다.

왜 이 정도밖에 안 될까?

예전에는 이것보다 나았던 것 같은데?

내 목표는 이것보다 훨씬 높은데?

그런 질문들이 모이고 모여 한데 뭉치면, 슬럼프라는 괴물이 탄생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조급함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야 해요.

-자신감을 되찾으면 되는 거 아냐?

-으음, 조금 달라요. 슬럼프는 따지면 원인이 아니라 결과거든요.

-결과?

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과격하지만, 암을 예로 들어 볼게요. 하루에 소주를 세 병씩 마셔서 간암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쳐 봐요.

-응.

-자신감을 찾는 건 비유하자면 암을 절제한 거예요. 하지만 아무리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한들, 그 사람의 생활 습관이 바뀌지 않는다면 암은 다시 재발할 확률이 높겠죠?

첫째. 상승의 순간을 겪는 등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멘탈을 회복시키고 자신감을 찾을 것.

둘째.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슬럼프의 원인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나아가서 제거할 것.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슬럼프 회복의 공식이었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세요. 최근에 뭔가가 바뀌지는 않았는지. 마음가짐 같은 것도 괜찮아요.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슬럼프의 원인이라고.

연수는 그렇게 말했다.

‘갑자기 바뀌어버린 거라.’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적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았던 탓이다.

쓰는 소설도 바뀌었고, 버는 금액도 달라졌다. 서 있는 위치도 변했다.

“나중에 생각하자.”

자신감이 바닥인 사람의 멘탈은 불안정하다.

그 상태에서 자신의 문제를 찾아내는 건, 마치 술 취한 의사에게 집도를 맡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모한 행위다.

“어떻게든 자신감을 회복하는 게 먼저야.”

황계백을 찾아가서 영감의 순간을 되새기거나, 아니면 아예 새로운 영감을 찾아내는 것도 좋겠지.

“그니까 자자.”

형우는 안대를 끼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괜히 싱숭생숭해지는 것보단 그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잠을 자면서 생각을 할 수는 없으니까.

“……망할.”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안대를 집어던졌다.

생각이 잠보다 더 강했다. 눈을 감으니 잡념만 늘었다. 다른 걸 해야겠다. 뭐가 좋을까, 창밖 풍경 관찰?

“집어치워!”

대중교통 유리창에 얼굴을 기대면 진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게 뻔했다.

거 뭐, 드라마도 맨날 주인공이 고민 생길 때마다 버스 창문에 머리 기대고 한숨 푹푹 쉬지 않던가. 그 꼴은 사양이었다.

“차라리 인터넷을 볼까?”

잠으로 생각을 쫓는 것도, 멍 때려서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것도 힘들다면, 차라리 뭔가에 집중해서 잡생각이 안 나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휴대폰을 켰다.

아주 좋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뉴스의 헤드라인을 보는 순간, 형우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잡념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한 빅 뉴스였다.

* * *

[C출판사 작가, 플랫폼에 갑질!]

[또다시 C출판사가 구설에 휘말렸습니다. 지난주 수요일, C출판사의 D작가는 자신이 유명 출판사와 계약한 작가라고 주장하며, 플랫폼인 N사와 K사를 찾아가 갑질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것은 당시 상황의 녹음본입니다.]

[-아니, 프로모션을 똑바로 해 주던가! 니네들 돈 받고 하는 일이 뭐야?]

[-저, 델ㄹ[삐-] 작가님. 프로모션은 저희가 일정대로….]

[-뭐야? 너네가 뭔데? 작가 있고 플랫폼 있는 거 아냐? 너희 내가 누군지 알아? C[삐-]에서 내가 계약했는데, 고작 너희가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해?]

[-그게, 작가님….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이 자식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결국, 분을 참지 못한 작가는 N사 사무실에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들고 분말 가루를 난사합니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콰직!

윤정식이 집어던진 휴대폰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고 하지. 그래. C&N은 크고, 미꾸라지쯤이야 여기저기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이번엔 좀 심했어.”

윤정식이 누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미꾸라지가 너무 컸다고. 알아들어?”

이 정도면 미꾸라지가 아니라 <더 워>에 나오는 이무기 수준이었다. 업계의 물을 흐린다는 부분에서는 거의 정확한 비유였다.

“게다가 우리 쪽 미꾸라지도 아니고, 원래 스패로우 팩토리에 있었던 미꾸라지라던데?”

“정식아, 그게.”

“내가 스패로우 팩토리 조져 놓으랬지, 언제…….”

분을 이기지 못한 윤정식이 책상을 쿵, 하고 찍었다.

“그 새끼들 폭탄 대신 가져와서 터트리랬어!”

가족임에도 언성이 높아졌다.

아니, 가족이라서 언성만 높아진 거다.

다른 사람이 이런 실수를 했다면, 이미 재떨이가 산산조각이 났을 테니까.

“작가 빼 오랬더니 매니저를 뺏기지를 않나, 기껏 뺏어온 작가는 개지랄을 해서 회사 이미지를 똥통에 처박지를 않나. 누나가 하는 게 대체 뭐야?”

윤정식의 주먹이 다시금 책상을 내리쳤다.

쩌억-

이번에는 유리로 된 책상이 갈라졌다.

손등이 베여 피가 뚝뚝 흘렀지만, 윤정식은 거기에 신경조차 안 썼다.

“주가가 하루 사이에 10%가 떨어졌어, 아니, 이제 더 떨어질 테지! 어떻게 할 거야?”

“그래봐야 한순간일 뿐이야.”

“뭐?”

“그래봐야 한순간이라고. ”

동생과 대비되는 침착한 표정으로 윤정아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곧 잊을 거야.”

“확실해? 내가 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던데. 배 짼다고 돌 안 던지진 않더라고.”

저번이라면 전국의 트럭이 죄다 C&N 앞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던 표절사태를 말하는 거였다.

윤정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 시대는 지났지. 날아올 돌은 어떻게든 날아와.”

우민호 감독이 <내통자들>에서 ‘국민들은 개돼지입니다. 어차피 금방 잊을 겁니다.’라는 희대의 명대사를 날린 이후부터, 한국 사람들은 무언가를 쉽게 잊어버리는 순간 ‘개돼지’가 되어버린다는 교훈을 새기게 되었다.

“하지만 살살 맞을 수는 있어. 돌을 안 맞으면 문제가 되지만, 살살 맞으면 그건 그것대로 쉽게 잊혀지니까.”

“뭐?”

“나한테 맡겨 줘. 내가 책임질게.”

“누나한테?”

윤정식의 시선이 자신의 누이를 향했다.

혈육의 단호한 표정을 바라보던 윤정식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알았어, 누나가 해.”

“응.”

“대신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 사장 자리는 관수하기 힘들어 질 거야.”

“그럴 일 없도록 할게.”

“……곧 회의 있으니까 준비하고.”

윤정아는 동생을 잠시 바라본 뒤, 그대로 부회장실 밖으로 뚜벅뚜벅 나갔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나가는 누나의 뒷모습을 보며, 윤정식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후우-

연기가 부회장실을 매캐하게 채웠다.

“그나마 누나가 사장이라 다행인가.”

윤정식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건 전임 사장이었던 박재진이었다.

만약 윤정아가 앞장서서 박재진을 몰아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박재진은 델리만쥬와 관련된 이번 건수를 무기 삼아 자신을 압박했을 테다.

‘……진절머리가 나는군.’

방금 누나에게 잔뜩 날 선 말을 퍼부은 주제에, 이제 와서는 누나를 C&N에 남길 이유를 물색하고 있다니.

가족이란 이름으로 생겨나는 기분 나쁜 모순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뭐, 내가 할 생각은 아니지.’

이 모든 게 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만두지 못하는 지금의 자신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역겹고 기분 나쁜 것이었으니까.

* * *

“델리만쥬 미쳤네.”

기자회견에서 깊게 고개를 숙이는 윤정아의 모습을 본 형우가 혀를 내둘렀다.

“진짜 대박이네, 그렇지 참치야… 응?”

새장을 바라본 형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응당 있어야 할 참새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 갔어?”

형우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참치를 찾았다. 다행히 참치는 형우의 오른쪽에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형우는 기겁했다.

형우의 좌석은 분명 맨 오른쪽 열이었을 텐데, 참치는 형우의 오른쪽에 있었으니까.

그 말은 곧….

“너, 너 언제 나갔어?”

콕콕.

기차 밖에서, 참치가 부리로 창문을 쪼았다.

1분 후에 기차가 출발한다는 안내음이 들렸다.

“자, 자 잠시만요! 내릴게요! 내려요!”

당황한 형우가 헐레벌떡 기차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내리자마자 문이 닫혔다.

“뺘악!”

기다렸다는 듯, 참치가 귀엽게 웃으며 형우의 어깨 위에 달라붙었다.

“이 자식이!”

그런 참치를 향해, 형우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빠악!

이건 딱밤 소리였고.

“뺘악!”

이건 참치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