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사람의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세 번의 기회를 자신의 인생에 대입해보는 경험은, 꽤 값진 행위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아마, 웹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거겠지.”
인간의 재능이란 의외로 폭이 좁다.
공격수로는 별다른 재능이 없다가 수비수로 포지션을 바뀐 뒤 포텐이 터진 축구선수나, 선수로는 별 볼 일 없다가 감독이 된 후에 팀을 삼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다던 감독의 이야기 같은 것은 찾아보면 의외로 많은 법이니.
형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재능을 찾는 것은, 마치 대포를 쏘는 것과 같다.
올바른 착탄지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것.
초등학생인 형우는 뭐든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때에는 자신이 국어를 좋아하는 것을 알았다. 고등학교 때는, 그게 ‘소설’까지 줄었다.
꽤 미세하게 조정했다고 생각했으나, 클리크가 약간 틀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휴학을 결심했던 그 방학날 마지막으로 클리크를 다시금 조정했다.
웹소설.
시계의 초침처럼 아주 얇은 그 틈새에, 형우의 진짜 재능이 숨어있었다.
오래된 책장 속에 숨어있던 무협 소설, <전쟁검신전기>를 발견했던 것.
그것이 형우의 첫 번째 기회였을 테다.
그리고 두 번째 기회는, 아마도.
“바로 지금이지.”
기회는 모기와도 같다.
한번 놓치면 다시 잡기가 더럽게 힘들고, 계속해서 여기저기 윙윙대며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드니.
“그러니 확실하게 잡아야 해.”
비록 아카데미다 뭐다 해서 바쁜 요즘이지만, 그렇다고 집필을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아카데미가 끝나면 늘 집에 와서 소설을 썼다. 연재 중이라면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연재 중이 아니라 비축분을 만드는 단계였으니.
충분히 그럴 시간도, 실력도 있었다.
뚜두둑-
열 손가락을 쥐었다 편 후, 피아니스트가 건반 위에 손을 올리듯 경건한 마음으로 노트북을 위에 손을 올렸다.
목표는 확실했다. 신작을 쓴다.
“무협.”
자신에게 첫 번째 기회를 줬던 장르이니만큼, 특별한 마음이 앞섰다.
‘좋은 무협은 캐릭터가 작가의 손을 떠나 스스로 뛰어다니는 이야기라고 했지.’
황계백의 이야기를 주문처럼 떠올리며, 형우는 입맛을 다셨다.
‘에너지 드링크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어제 먹은 게 마지막이었다. 새로 살까 생각도 하다가, 괜히 작업 시간이 꼬일까 봐 그만뒀다.
‘일단은 시작하자.’
그대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흐음.”
작업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형우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평소라면 바닷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뛰어다녀야 할 손가락인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탈진한 상류의 연어만치 손가락에 맥아리가 없었다.
‘왜 이리 집중이 안 되지?’
보통 작품의 도입부를 들어갈 때는 평소보다 글이 훨씬 잘 써지기 마련인데.
이번 작품은 뭔가 진도가 빠르게 빠지지 않았다.
의미 없이 쓰고 지우고만 반복하는 느낌이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네 시간이 경과했지만, 형우는 불과 두 페이지도 똑바로 완성해내지 못했다.
“오늘은 컨디션이 좀 안 좋은가……?.”
그렇게 생각하자, 짜증이 치밀었다.
안 그래도 이런저런 일로 바쁜 요즘인데, 눈치 없는 몸뚱이는 왜 이런 날 컨디션이 구리단 말인가.
‘보약도 챙겨 먹고 운동도 꾸준히 했잖아. 말 좀 들어라, 이 빌어먹을 몸뚱아.’
괜히 자신의 몸에 대해 욕설을 퍼붓던 그 순간.
띵동- 띵동-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바깥을 확인해 보니,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교복 입은 남학생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형우의 제자, 김정수였다.
* * *
집에 들어오면서, 정수가 우산을 탁탁 털었다.
작업에 집중해서 몰랐는데, 비가 오는 모양이다.
“제가 조금 일찍 왔나요?”
“일찍?”
“지금 작업하고 계셨나 봐요? 저번에 말했던 무협 맞죠?”
“어, 맞아.”
“그런데 백지네요. 잘 안 되시나 봐요.”
“으음.”
형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정수의 말대로였다.
주먹을 쓰는 주인공이 권각술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때려 부순다- 라는 <권객>의 골조를 세웠을 때는, 금방이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골조만으로 건물을 세울 수는 없는 법.
스티븐 킹은 소설을 머그잔에 비유했다.
쓰고자 하는 이야기가 컵이라면,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손잡이다.
지금 형우의 소설은 요약하자면, 손잡이가 없는 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손잡이를 발견하지 못한 형우는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뭐, 소설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써지는 게 아니잖아요. 선생님.”
그런 형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수는 신나서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다.
“고민하고 고민하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게 떠오르겠죠.”
“정수야.”
“아, 맞다. 제가 최근에 재밌게 봤던 무협이 있는데요. 거기서 보면…….”
조잘거리는 녀석의 수다를 듣고 있자니, 저절로 머리가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정수야, 좀 조용히 해 줄래?”
“예?”
“너 때문에 집중이 안 되잖아. 네가 소설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 순간, 형우는 자신이 너무 심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님.”
정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조금 상처받은 것도 같았다.
형우는 잘 모르는 부분이지만, 정수는 형우를 단순한 선생이 아닌, 목표이자 이상향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자신의 이상에게 듣는 비난이란, 고등학교 3학년 소년이 듣기에는 지나치게 아픈 것이었으리라.
“미안하다, 내가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진 모양이야.”
“아녜요.”
뒤늦게 사과했지만, 이미 늦었다.
“선생님 바쁘시다는 거 잘 알아요. 아카데미도 있고, 이런저런 것도 있고. 괜히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그렇게 말한 뒤, 정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그러실 것 없어요. 나중에 한가해지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죠. 아, 이거 드세요. 세일하기에 사 왔어요.”
그대로 정수는 나가버렸다.
정수가 내민 검은 비닐봉투 안에는, 자몽, 메론, 스포츠- 형형색색의 에너지 드링크 다섯 개가 파워레인저 전대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수가 떠난 지 오 분 정도 지났을 때.
위이잉- 하고 휴대폰이 울렸다.
[4월 12일 6:00 정수 소설을 봐주기로 약속함.]
이라는, 알람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이런.”
낭패감에 젖은 표정으로, 형우가 중얼거렸다.
명백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하아.”
그대로 형우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진짜 엉망이네.”
소설은 막히고, 제자에게는 하면 안 될 소리를 멋대로 늘어놓았다.
“할 일은 많은데.”
아카데미의 일도 있고, 신작도 구상해야 한다. 게다가 정수한테 사과도 해야 하는데…….
몸이, 따라주지를 않았다.
일 년에 하루 정도 있다는, 뭘 해도 안되는 날. 그게 아마 오늘인가 보다.
“그러니까 내일.”
형우가 중얼거렸다.
“내일 하자.”
사과도, 소설도, 아카데미도.
내일은 뭐가 됐건 오늘보다는 낫겠지.
“그렇지 참치야?”
“뺘악.”
참치가 길게 울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 * *
“형. 나 어제 소설 쓰다가 끝내주는 경험을 한 것 같아.”
매사 진지한 정주현의 말에, 조준구의 고개가 갸웃 꺾였다.
“뭐가 그렇게 끝내줬는데?”
“소설 내용보다는 그 뭐라고 해야 할까…… 소설을 쓸 때 기분이 끝내줬다는 표현이 맞을 거야. 그러니까.”
정주현이 어젯밤의 기억을 되새겼다.
어젯밤, 정주현은 평소처럼 지친 몸을 이끌고 키보드 앞에 앉았다.
하지만 뭔가, 그날따라 기분이 달랐다.
몰입감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까지 상상만 하고 하지 못했던 것들을 몽땅 다 할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냥 느낌만이 아니더라고.”
실제로 소설이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르게 써졌던 것이다.
“막혀 있던 부분을 보니 내가 왜 이걸 고민했나 싶을 정도로 쉽게 뚫리고, 며칠이나 고민했던 전개들도 뭘 선택해야 할지 확 보이고. 새로운 스토리도 엄청나게 떠오르고. 그런 느낌이었다고.”
그 말을 들은 조준구가 피식 웃었다.
“오버하기는. 그냥 새벽감성 아냐?”
“새벽감성이라니, 절대 아냐!”
새벽 감성을 원천으로 쓴 글은 쓸 때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글처럼 보여도, 막상 다음 날 아침에 세수하고 읽어 보면 이걸 정말 내가 쓴게 맞나- 싶을 정도로 오글거리는 게 보통이다.
“근데 내 글은 말야, 아침에 읽어도 재밌었다고.”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이걸 정말 내가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치밀하고 재밌었다.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뭐든지 되는 날. 그게 어제였던 것 같아. 내가 매일 이런 글을 쓸 수 있으면 5년 내로 조앤.K.롤링과 악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으음.”
조준구가 진지한 표정으로 주현의 얼굴 여기저기를 살폈다.
“어디 아프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러면 어제 술이라도 마셨나?”
“물밖에 안 마셨거든!”
“집에 가서 물통에 불붙여 봐라. 아마 화르륵 잘 붙을 거다.”
장난기 다분한 조준구의 말에, 정주현이 정색했다.
“진짜라니까?”
“진짜는 무슨. 너 인터뷰 한 번 나오더니 겉멋 너무 든 거 아니냐? 그걸 믿는 사람이 어딨어?”
“으음, 저는 있을 수 있는 일인 것 같은데.”
그 순간, 구원투수가 등장했다.
두터운 뿔테 안경을 살짝 치켜올리는 여자는, 지난 한 달 사이 명실상부한 B반의 에이스로 부상한 변호사 출신 아카데미생 구민효였다.
“아주 말도 안 되는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에이, 누나! 아무리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지.”
조준구가 손가래를 쳤다.
“현실이 무협 소설도 아닌데, 물아일체가 말이나 돼요?”
“물아일체까지는 아니지만, 스포츠 용어 중에 존이라는 용어가 있기는 하거든요.”
존(Zone).
스포츠 선수가 극한의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각성상태를 뜻하는 용어다.
“존에 도달한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갑자기 가슴속에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오르면서 미칠듯한 퍼포먼스를 뽐낸다고 해요.”
그리고 지금 존이라는 용어는 스포츠계를 넘어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쓰이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조금씩 말은 다르게 쓰지만서요. 예를 들어 예술을 하는 사람은 존에 도달했을 때 흔히 뮤즈(Muse)를 영접했다는 표현을 쓰고는 하잖아요.”
“뮤즈라….”
그 표현은 정주현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표현이다. 갑자기 밀려오는 영감, 그리고 평소의 자신을 뛰어넘는 표현과 퍼포먼스.
“맞네요, 뮤즈. 그거였나 봐요.”
“우와. 그런게 실제로 있다고?”
설명을 들은 조준구가 입을 쩍 벌렸다.
“부럽다, 정주현. 운 엄청 좋았나 보네.”
“운은 아니죠.”
구민효가 일축했다.
“말로만 들으면 존이라는 게 우연처럼 들릴지 몰라도, 사실은 원인이 어느 정도 있는 거거든요.”
“원인이요?”
“긴장감과 자신감이 일정 비율로 섞였을 때, 존에 진입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해요.”
긴장한 사람의 뇌에서는 아드레날린, 도파민, 엔돌핀 등의 호르몬이 짬뽕되어서 뿜어진다.
“그리고 이런 강력한 호르몬의 힘을 일체 낭비하지 않고 오로지 지금 집중하고 있는 일에 쏟아부었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 바로 존이라는 거죠.”
너무 쉬운 일에 도전하면 긴장감이 생기지 않고, 너무 어려운 일을 도전하면 자신감이 떨어진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따지자면 노력의 산물에 더 가깝다는 거예요.”
“어마어마하네.”
조준구가 좋은 걸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본 정주현의 눈썹이 기분 나쁘다는 듯 씰룩거렸다.
“준구 형. 내가 말할 때는 안 믿더니 왜 민효 누나 말은 그렇게 쉽게 믿어?”
“진짜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이익………!”
정주현이 화를 내려는 찰나, 눈치 빠른 조준구가 재빨리 그런 주현의 어깨를 꾹꾹 눌렀다.
“아얏, 아야앗! 아파!”
“좀만 참아 인마. 야, 엄청 뭉쳤네.”
“미친놈아, 으아악!”
“형한테 ‘미친놈아’가 뭐냐? 아무튼 좋겠네, 좋겠어! 뮤즈도 만나 보고! 나도 인마, 그런 거 한번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
질투가 담긴 조준구의 손이 점점 매워졌고, 그럴 때마다 정주현의 뭉친 어깨는 무두질 잘 된 고기처럼 살살 풀어졌다.
“됐다. 마사지 끝!”
“……어라?”
아프긴 했는데, 끝나고 나니 시원함이 쭉 밀려왔다.
“뭐야, 어디서 배운 적 있어?”
“나 의경 나왔잖냐. 그것도 기동대.”
조준구가 표정을 팍 찡그렸다.
“거기 부조리 존나 심하거든. 맨날 선임들 어깨 주무르다 보니 박사가 되어버렸지 뭐냐.”
“허얼.”
정주현이 혀를 내둘렀다.
그런 둘을 보며 구민효가 피식 웃었다.
“아까 뮤즈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또 다른 게 생각났는데, 한때 뮤즈는 악마로 여겨지기도 했다고 해요.”
“악마라니, 왜요?”
“한번 뮤즈를 경험해 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하고 그것만 갈구하게 되거든요. 그러다가 결국 병에 들고 말죠.”
“병이라면…….”
그 순간.
띠리리링-
1교시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건물 가득 울려 퍼졌다. 구민효가 아쉽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시간이 다 됐네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해요.”
“기대할게요, 누나.”
정주현과 조준구, 구민효는 각자 자신의 반을 찾아 걸어갔다.
“오늘은 뭘 배우려나.”
기대감 가득한 시선으로 정주현은 A반의 선생님인 형우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드르륵- 하고 문이 열렸다.
“으응?”
정주현의 눈이 커졌다.
들어온 것은, 형우가 아니라 서민홍이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 김형우 작가님이 못 나오실 것 같아요.”
“네에?”
깜짝 놀란 학생들이 되물었다.
“왜요? 무슨 일이 있나요?”
“그게….”
침울한 표정으로 서민홍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프시답니다. 오늘 아침에 쓰러지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