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위이이이잉-
레코드판 위에서 원반이 회전했다.
고향의 고목古木으로 만들어진 원목 인테리어, 그리고 독일 출신 지휘자의 클래식까지.
이런 방에서 하는 대화란 응당 귀족적인 것이어야 할 테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인 듯싶다.
“한 교수! 절대로 안 된다니까!”
“총장님! 세상에 절대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이번 한 번만요, 예?”
총장 김만기.
이사회와 더불어 드높은 지식의 상아탑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 학교 내에서는 김만기에게 감히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야 하겠지만.
아쉽게도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한다은은 그럴 만한 권한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네는 이사회도 아니잖나? 돈 이야기는 자네 소관이 아닐 텐데?”
“저도 이 대학에서 월급 받고 사는 사람인데! 왜 제 소관이 아녜요?”
“그런 건 이사회에 말하는 게…….”
“이사회 가니까 총장님 직인 있어야 한다던데요?”
“으으음…….”
김만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무래도 한다은을 감당할 수 없으니 자신에게로 토스한 것이리라.
자기 선에서 안 될 것 같으면 다른 쪽으로 밀어버리는 건, 학교나 사회나 마찬가지인 법이니.
“전에도 말했다시피, 안 돼.”
김만기가 딱 잘라 이야기했다. 그는 재력가라기보다는 학자였고, 학자로서의 자부심 또한 충만했다.
학교라는 곳은 이기적일 정도로 학생만을 위한 곳이어야 한다.
“누군가는 이걸 아집이라 하겠지만, 내 생각은 변함이 없네.”
“교수님, 제발요!”
한다은이 김만기를 부르는 칭호를 바꿨다.
“학과장으로서가 아니라 제자로서 부탁할게요. 진짜 안 돼요?”
“한 교수 자네는 진짜……. 사람이 참 초지일관하구만.”
“그거 칭찬이죠?”
“아니야!”
김만기가 언성을 높였다.
예전에 학생일 때부터 봐 왔지만, 한다은은 진짜 한번 마음먹으면 될 때까지 밀어붙이는 애다.
‘저번에 순순히 간 게 이상한 거였지.’
설전 끝에 누군가가 순순히 물러난다면 김만기는 그 사람이 패배를 인정했다고 생각할 테다.
하지만 그 사람이 한다은이라면, 그건 결코 인정이나 순응 따위가 아니라, 준비과정이다.
다음 공세를 밀어붙이기 위한 준비 말이다.
“……어차피 여기서 밀어내도 한 3일 뒤에 다시 올 테지?”
“높은 확률로?”
“대학교에도 도덕 과목이 필요하다니까. 내가 교수 시절 때 만들었어야 했는데.”
“저도 어떤 학생 때문에 그런 생각 해 본 적 있어요.”
“그 학생은 어떻게 됐나?”
“퇴학당했는데요?”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과거의 자신을 저주하며 김만기는 일어나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매실차랑 홍차 있는데.”
“커피요.”
“……커피는 없어. 카페인을 끊었거든. 자네도 커피 좀 그만 마시게. 병옥이가 걱정하던데.”
“그 선배는 왜 남의 식단에 관심이 그렇게 많아? 나 좋아하나?”
병옥이가 미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거란다, 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김만기는 그냥 한숨이나 푹 쉬기로 했다.
“학생들 앞에선 그러고 안 다니지?”
“저번 학기 교수 인기 투표 못 보셨어요? 제가 또 1등 했는데. 4년 연속이잖아요!”
“……우리 학교 최대의 미스테리지.”
김만기도 그 투표를 보기는 했다.
-한국대에서 제일 멋진 교수님!
-인텔리하고 근엄해서 본받고 싶어진다.
-그야말로 교수라는 직업을 그려놓은 듯한 사람.
……그 학생들이 지금의 한다은을 봤어야 하는 건데. 근엄이 어쩌고 저째?
‘근엄은 무슨, 무엄하기만 하구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물이 다 끓었다.
“그냥 홍차 마셔. 좋은 홍차거든.”
“넵. 앗, 뜨뜨!”
한다은이 잔을 후후 불었다.
아마 이 학교에서 한다은의 저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리라.
기껏해야 병옥이 정도?
저렇게 보여도 학생들 앞에서는 강의도 잘하고, 강의평가도 상위권을 놓친 적이 없으니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음이다.
“……그래. 어떻게 한다고?”
“이야기 들어 주시는 거예요?”
“안 그러면 들어줄 때까지 올 거잖아.”
“역시 교수님!”
한다은은 재빨리 챙겨온 자료를 김만기에게 내밀었다.
“저희 제자들이 세운 출판사 중에 스패로우 팩토리라고 있거든요.”
“스패로우 팩토리? 처음 들어보는데?”
“웹소설 출판사라 그래요.”
“웹소설이라…….”
김만기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순문학이면 나았을 텐데. 이사회 꼰…… 아니, 인간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방금 꼰대라고 하려고 했죠?”
“아니다.”
하지만 김만기의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작년에도 한다은이 웹소설 과목을 신설하겠다고 했을 때, 이사회가 얼마나 이를 물고 반대했던가.
“하지만 결국 해냈잖아요! 똑똑한 제자 한 명 덕분에.”
“기억나는군.”
한국대학교 리더 행사 때 문창과 대표로 나왔던 학생과 천병옥과의 설전.
그 이벤트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았다면 아마 문창과에는 해당 강의가 없었을 테였다.
“잠깐만, 아까 말한 그 스패로우 팩토리라는 회사를 세웠다는 게?”
“맞아요!”
한다은이 빙긋 웃었다.
“그때 걔예요, 김형우! 지금 밖에 있는데, 들어오라고 할까요?”
진짜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는 제자다.
“차를 하나 더 끓여야겠군.”
김만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이번 졸업 공연 작품을 자네가 썼지?”
“어, 어어어, 그게…… 그렇습니다.”
찻잔을 쥔 형우의 손이 벌벌 떨렸다.
원래 강사 앞에만 서도 긴장하는 게 대학생인데, 그 강사 위에 있는 게 교수고, 그 교수 위에 있는 게 학과장이며 그 학과장 위에 있는 게 총장이니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주 잘 봤네. 지금까지 봤던 공연 중에 단연코 최고였어.”
“잘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라네. 이참에 아주 학교 전통으로 만들어 볼까 생각하고 있네.”
“저, 전통까지요?”
“그렇지. 혹시 저작권료가 필요한 거라면…….”
“아, 아닙니다!”
형우가 손을 내저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협업해서 만든 건데, 저작권료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아니야. 누구든지 노력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받아야 하는 법이지. 내가 학사에 말해 놓겠네.”
그대로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연락하는 김만기를 향해 형우가 경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이 사람이 모닝 총장이구나.’
이 별명은 두 가지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첫 번째는 해가 다 뜨기도 전 이른 아침부터 출근한다는 의미였고, 두 번째는 그 출근을 할 때 타고 오는 차가 서민들의 자동차로 유명한 모닝이라는 뜻이었다.
총장실이야 외부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중후하게 꾸몄지만, 그 외의 것들은 소박하기 그지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매년 장학재단에 꼬박꼬박 돈을 기부하는, 한국대학교의 거인.
그게 김만기라는 인물이었다.
“초, 총장님의 기부금 덕에 저도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자네 장학금 대상자였나?”
“네. 집이 그렇게 잘 살지를 못해서…….”
“이런, 미안하군. 괜한 이야기를 꺼냈네.”
“아닙니다.”
사과하는 김만기를 형우가 만류했다.
“덕분에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나름 괜찮게 돈을 벌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회사도 차렸고요.”
“그거 놀랍군.”
김만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김만기를 향해 형우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모든 게 다 총장님 덕분입니다.”
“허허, 기부를 나 혼자 한 것도 아닌데. 부끄럽구만. 마음 같아서는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만…….”
김만기가 시계를 톡톡 건드렸다.
“오늘은 일정이 좀 많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 보지. 건물을 빌려달라고 했지?”
“네.”
“자네 말대로 학교 건물이 많이 비어있는 건 사실이지만, 나는 학교로 장사를 하고 싶지는 않네. 학교는 학생을 위한 장소여야만 하지.”
“그 말은…….”
“허나.”
형우를 바라보는 김만기의 시선에 미소가 어렸다.
“자네 또한 내 학생이니.”
그에게 있어 졸업생들이란 사회에 내놓은 자식과도 같았고, 특히 어려운 형편에도 나아가는 형우와 같은 아이들은 그 자체로 감동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사 인사라.’
교직에서 내려온 후로는, 학생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별로 없었는데.
그 말 한마디가 김만기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다.
“……사연을 듣자 하니, 이 사업이 실패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다고?”
“그렇습니다.”
“C&N과의 경쟁이라…….”
잠시 고민하던 김만기가 손짓으로 한다은을 불렀다.
“학과장, B동이 아마 비지?”
“그렇습니다.”
한다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B동 2층을 쓰게.”
김만기가 서랍을 뒤져 직인을 꺼내 도장을 쿵 하고 찍었다. 그런 총장을 보며 형우가 일어나서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총장님.”
“고마운 건 내가 고맙지. 학교를 빛내는 건 내가 아니라, 자네처럼 훌륭한 학생들인 법이니.”
형우를 바라보는 김만기의 눈가에는, 미처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 *
“됐냐?”
김만기의 질문에, 한다은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내가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에게 약하다는 걸 알고 노린 거잖나.”
김만기 또한 어린 시절에는 죽도 못 먹고 자랄 정도로 가난했었다.
그런 아이들을 만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총장이 되고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에이, 설마요.”
한다은이 손을 내저었다.
“총장님…… 아니, 교수님.”
“맞게 말해 놓고 왜 고쳐!”
“저는 이게 더 편한걸요. 아무튼 교수님이 힘든 애들한테 약한 거야 솔직히 알죠.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잖아요?”
“……눈치 챘나?”
역시 이 제자 녀석은 눈치가 비상하게 빠르다.
“……정식이 때문이었죠?”
“아니라곤 못 하겠군.”
한다은과 천병옥과 마찬가지로, 윤정식 또한 김만기가 교수 시절 가르쳤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자신이 교수 시절 사회에 내보냈던 제자가, 자신이 총장 시절 사회에 내보냈던 다른 졸업생을 찍어 누르려고 하는 상황.
책임감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너희를 가르친 게 벌써 30년 전이구나.”
그때 김만기는 30대의 파릇파릇한 신입 강사였다.
만약 누군가가 그때의 자신에게 다가가서 ‘당신은 30년 후에 한국대 총장이 됩니다’라고 말했다면 바로 ‘미치셨어요?’라고 대답하고 말았을, 그런 젊은 시절.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직접 가르친 제자들이 수도 없이 많지.”
“그 얼굴들이 다 기억나세요.”
“어떻게 사람이 그러겠느냐.”
기억은 마치 공룡과도 같다.
처음에는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위풍당당하다가도, 어느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잊어버리고 마니.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마치 화석처럼 삶의 사이사이에 박혀서는,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가져가게 되는 기억들.
“나한텐 너희들이 그런 기억들이다.”
과거의 탑을 바라보는 늙은이의 심정은 대개 둘 중 하나다.
그리워하거나, 후회하거나.
“둘 모두 서글픈 일이지만, 후회보다는 그리움이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식이 그 녀석은…….”
김만기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내가 잘못 가르친 게지.”
“아니요.”
한다은이 고개를 저었다.
“교수님은 저희를 잘 가르쳐서, 잘 내보냈어요. 정식이는 제멋대로 비뚤어진 거고요.”
“글쎄다.”
김만기는 10년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교수님이 조금만 더 진아의 상태를 눈치챘더라면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담당 교수라는 사람이, 그런 것조차 몰랐다고요?
-그러니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사세요.
당사자가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을까.
“교수님.”
자책하는 김만기를 향해, 한다은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교수님 잘못이 아니에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죠. 그 일에 교수님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그게 그렇게 되지는 않더구나.”
어떤 인간은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뻔뻔할 수 있고, 김만기 같은 사람은 반대로 잘못을 하지 않고서도 죄책감을 가지는 법이니.
‘……죄는 나쁘지만, 죄책감은 좋은 것이다.’
라는, 어디선가 봤던 구절이 떠올랐다.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닌가.
그 죄책감이 없었다면, 김만기는 총장이 되지도 않았을 테고, 자신도 교수가 되지 않았을 테고.
……형우도 기회를 얻지 못했을 테니.
“그 아이, 참으로 기특하더구나.”
“맞아요.”
한다은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만기가 자신들을 보며 느꼈을 감정을, 지금은 자신이 형우를 보면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 거대한 인간의 순환을 생각하면, 뭔가가 벅차오르면서도 동시에 숙연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 생각이 왠지 헛헛하게 느껴져서, 한다은은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그나저나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말이냐.”
“건물 내 준 거요. 이사회에서 가만있지는 않을 텐데요?”
“그걸 아는 녀석이…….”
김만기도 화를 내려다가,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가만 안 있으면 뭐, 그래봐야 총장은 나다.”
그대로 차를 호쾌하게 쭉 들이켰다.
“그게 싫었으면 나한테 짬 때리지를 말았어야지!”
“짬 때리기라니, 말 참…….”
한다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의 그 막무가내인 말본새가 어디서 왔겠는가.
-한다은! 이게 소설이냐! 이렇게 가볍게 쓰지 말랬지! 소설이 너무 가벼워서 이걸 집어 던지면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겠다! 병옥이 반만 닮아 봐라!
-소설은 재밌어야죠! 무거운 건 재미 없어요!
-오냐, 네가 F 학점 때려 맞고도 그 소리를 할 수 있나 보자!
-교수니이이이임!
애제자란 필연적으로 스승을 닮게 되는 모양인가.
옛 추억을 떠올리며 한다은이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