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한국대학교의 벤치에 앉아서, 한다은은 학교를 하나 바퀴 둘러봤다.
“벌써 30년인가….”
대학교부터 대학원, 강사부터 교수까지.
중간에 공백기가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세월을 학교와 함께해 온 건 사실이다.
“세월 참 빠르네.”
학교의 설립부터 함께해 온 구식 건물들은 시대를 지나며 낡기보다는 오히려 중후해졌다.
그리고 구식 건물을 중심으로 부지를 넓히며 하나하나 쌓아 올린 신건물들은 구건물과의 조화를 최우선시한 방향으로 디자인이 설계되었다.
그야말로 옛것이 새것을 이끄는 신구新舊의 조화인 셈이니, 대학교라는 취지에 걸맞은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헌데….”
지난 30년 동안 그 멋들어진 교정의 모습을 늘 자랑스럽게 여겨왔던 한다은이지만 요즘은 가끔 다른 생각이 들었다.
건물이 많은 게 꼭 좋은 일일까?
물론 일반적인 견해로 보자면 아무래도 좁은 것보다는 넓은 것이 낫기는 하다.
한 가지 전제가 붙는다면 말이다.
‘알차게 활용할 수 있다면 말이지. 에휴……’
한다은은 텅텅 빈 강의실의 건물들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올해도 한국대학교는 정원을 감축했다. 한다은이 교수로 부임한 후로 벌써 세 번째였다. 학교의 문제라기보다는 수험생 인구의 감소로 인한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그래,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만약 한국대학교의 건물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면, 물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듯이 그래, 당연한 일이야. 하고 넘어갔을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많아.”
기껏 지어놓은 건물들이 텅텅 비어 있는 걸 보니 가슴이 휑해지는 기분이었다. 소설가로서의 감상적인 기분이 아니라, 과를 이끄는 학과장으로서의 현실적인 기분이 그랬다.
‘빈 건물인데 왜 돈이 드냐?’
건물은 농구선수 서중훈이랑 비슷하다. 덩치는 큰데 엄청나게 섬세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건물도 아무런 관리 없이 딱 석 달만 놔두면 꽤나 을씨년스러워지고, 1년을 놔두면 폐가가 된다.
그대로 삼 년이 지나면 지나가던 유령이 여기가 내 집이구나 하고 달라붙을 수 있을 정도의 비주얼이 될 테고, 하드 컨텐츠에 목마른 뉴튜버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건물이 될 테지.
가슴이 휑한 거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서 재정이 휑해진다면? 그것도 ‘그럴 수 있는’ 건가?
‘무위자연도 정도가 있는 거지…….’
도가의 시조인 노자가 살아와도 그렇게는 못할 테다. 돈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
‘그렇다고 멀쩡한 건물을 허물 수도 없고…….’
터벅터벅.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몸은 자연스럽게 계단을 오르고 교수실의 문을 열고 커피머신을 작동시켜 오롯한 커피 한 잔을 뽑아냈다.
여유로운 차 한잔 같은 게 아니다.
있는 여유마저 쫓아버리기 위한 카페인으로서의 커피였다.
“……계륵이구나, 계륵이야.”
“뭐가 말이냐.”
“……어어어어어어?”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너무 놀란 한다은은 순간적으로 커피잔을 놓칠 뻔했다. 만약 들고 있는 것이 27만 원짜리 일본제 커피잔이 아니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게 동남아 사는 친구에게 겨우겨우 구한 고급 루왁이 아니었다면 분명 진짜로 놓치고 말았을 테다.
‘들고 있는 것 = 고급 = 비싸다 = 돈!’
돈이 인간을 움직인다는 말은, 비유 같은 게 아니다. 한다은은 마술사를 방불케 하는 손놀림을 보이며, 가까스로 떨어지는 커피잔을 잡아 냈다.
그리고서는 그대로 옆으로 뒤쪽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뿌렸다.
“놀랐잖아요!”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천병옥이 근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한 건 너야.”
“……맞다. 그랬죠.”
벌써 4월이 지나서 슬슬 중간고사를 생각할 때라, 그 부분을 의논하기 위해 천병옥과 약속을 잡은 기억이 났다.
“아무리 그래도 인기척이라도 냈어야죠! 아니면 혹시 후배가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고 일부러 놀려준 건가?”
물론 농담이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천병옥은 그런 것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니.
“……아니다.”
근데 왜 대답이 조금 늦는 것 같지?
눈은 왜 또 피하고?
응?
* * *
“그러면 중간고사는 셰익스피어로 하죠.”
“그래. 그거면 되겠지.”
셰익스피어라는 말을 듣자마자, 천병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상에 음악이라는 개념이 사라져도, 바하만 있다면 음악을 재창조할 수 있노라고.
베토벤과 모차르트 등 세상에 기라성같은 음악가가 많지만, 하필 바하인 이유는 바하가 음악의 근본, 즉 정석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정석定石이란 그런 것이다.
아니, 예술뿐만이 아니다. 물리학도 마찬가지다.
양자물리학의 아버지인 슈뢰딩거나, 신 물리학의 아버지인 아인슈타인 등. 천재 중의 천재들을 쭉 나열하더라도 가장 앞에 오는 이름은 늘 하나다.
아이작 뉴턴, 물리학의 아버지.
인간의 역사 처음으로, 모든 물체의 움직임을 계산해 내어 물리학이라는 개념을 창조한 슈퍼스타.
그렇다면 문학에는 누가 있는가?
음악이나 물리학과 다르게, 문학의 슈퍼스타는 두 명이다.
영국의 셰익스피어와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면식도 없었으되 동시대에 태어나 같은 날에 죽었다는 기묘한 우연을 가진 두 대작가.
문학의 아버지가 이 둘인 이유는, 둘의 스타일이 완연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는 문학의 본질은 잡설雜說에 있다고 보았다. 이야기하는 본능이 곧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는 소설은 내리는 비와 같다고 생각했고, 일견 별것 없어 보이는 이야기와 이야기들이 연결되다 보면 맥락脈絡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그 맥락이야말로 소설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런 사상에서 써진 것이 <돈키호테>라는 불세출의 명작이다.
허나 셰익스피어는 이와 정반대로, 문학이란 날카로운 검처럼 청중의 가슴을 순식간에 후벼파는 것이라고 여겼다.
‘완벽이란 더할 것이 없는 게 아니라, 뺄 것이 없는 것이다.’
세르반테스가 장문의 미학을 추구했다면, 셰익스피어는 단문의 미학을 추구했으니.
문장보다는 단어를 좋아했고, 때로 자신이 생각한 심상을 표현할 마땅한 단어가 없을 때는 단어를 스스로 창조했다.
나레이션을 통한 설명을 너무나도 싫어한 나머지 설명이 필요할 때마다 그 설명을 해줄 만한 캐릭터를 등장시켜 모든 설명을 대사로 퉁쳐버리는 것은 예사였다.
그 덕에 후대에게 ‘조물주 이래로 가장 많은 인간을 창조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니, 간략함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집착은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맥락과 축약. 현대소설의 정수와도 같은 개념이지. 언제나 기본을 잊어서는 안 되는 법이야.”
“기본, 기본이라….”
그 단어를 들으니, 한다은은 내심 속이 쓰려오는 것을 느꼈다.
“선배, 건물의 기본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무너지지 않는 것이지.”
…이건 셰익스피어적인 실용주의적 생각이다.
“저는요, 건물의 기본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쓰지 않으면 건물은 의미가 없지요.”
“유물론唯物論과 유심론唯心論인가?”
“……그놈의 돈도 안 되는 철학 이야기 말고요. 철학도 배가 불러야 하는 거지. 선배, 그리스가 왜 철학자가 많았는지 아세요?”
“……그건.”
“먹고 살 만 했으니까에요. 인구의 절반이 노예였으니까, 가만 있어도 지갑이 빵빵했다 그거죠. 그런데 우리는…….”
한다은이 한숨을 푹 쉬었다.
“강의실 삼십 개 중 일곱 개가 텅텅 비었다구요.”
“아, 돈 문제였군.”
그제야 한다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챈 천병옥이 조심스레 의견을 타진했다.
“우리 학교 재정이 그 정도로 바닥은 아닐 텐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너무 호들갑 떠는 게 아니냐, 그 뜻이죠? 뭐, 지금은 틀린 말은 아니에요.”
한다은이 커피잔을 슬쩍 쓰다듬었다.
“하지만 5년 후는요?”
“5년 후?”
“네. 학생은 점점 줄어들어요. 어쩔 수 없죠. 우리 대학교 건물 채워야 하니까 아이를 많이 낳으세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하지만, 그럴수록 빈 건물을 늘어나잖아요. 그리고 건물은 비어 있어도 사람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관리비를 먹죠. 아니, 가끔은 그것보다도 더 먹고요.”
자동차를 너무 안 굴리면 녹슬어서 망가지듯, 건물도 너무 안 쓰면 오히려 망가지는 법이니.
“……그때가 돼서 부랴부랴 처리하기에는 분명 빠듯할걸요.”
“학교 걱정을 많이 하는군.”
“저도 교수답게 애들이나 가르치고 싶죠. 그런데 이 자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더라고.”
한다은이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하나 더 꺼냈다. 천병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후배를 바라봤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냐.”
“발자크는 하루에 2L를 마셨다죠.”
“발자크 시대의 커피는 지금으로 치면 커피콩 탄 물에 가깝지. 지금의 커피와 비할 바가 아니다.”
그 당시 커피가 맥주였다면, 요즘 커피는 거의 러시아산 보드카 급이다. 카페인 함량이 다르다.
“……됐어요. 커피 모르는 사람은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 수백 가지지만, 커피를 아는 사람은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 커피뿐이니까.”
“그건 담배에 쓰는 말일 텐데.”
“한국담배공사에서 문장에 저작권 달아놨대요? 내 맘대로 쓸 거야. 그리고요, 혹시 이런 말 못 들어 봤어요?”
“무슨 말?”
“케어란 것은 박살 난 컨디션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 악화의 근원을 찾아서 제거하는 것. 그것이 진짜 케어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냐.”
“그 뭐냐, 에이오에스? 게임 하는 학생들이 하던데. 듣고 좀 그럴듯하다 싶더라고. 그러니까 방법 좀 생각해 봐요, 선배. 선배 똑똑하잖아요?”
“으음, 그럼 말이다…….”
“오오?”
천병옥이 운을 떼자, 한다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빈 강의실을 외부에 빌려주는 건 불가능한가?”
“으으.”
성냥처럼 반짝거리던 눈이 물속에 집어던진 듯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 정도는 이미 해 봤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칼에 거절당했다.
“총장님 가라사대, 한국 대학교는 한국 대학생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나 참. 좋은 분이시기는 한데 가끔은 답답해 죽겠다니까!”
“다, 답답?”
천병옥이 당황한 표정으로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세상에 위쪽에 있는 사람을 욕해도 되는 건 피노키오를 삼킨 고래 정도밖에 없는 법이고, 대학교 교수라고 해도 예외는 없는 법이다.
“흠흠, 학교에 외부인이 자주 출입하는 것도 그다지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무슨 문제가 벌어질지 모르니까. 총장님은 그 부분을 말씀하셨을 거다.”
“……덕분에 꽤 답답한 토론을 했죠.”
그 말을 들은 천병옥은 가까스로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서 제일 답답한 토론은, 양쪽 다 옳은 말만 하는 토론인 법이니.
한다은 또한 총장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하아…… 뭐 방법 좀 없나.”
한다은이 쇼파 위로 축 늘어졌다. 커피를 마셨는데도 계속해서 피곤한 느낌이었다.
“……선배. 인생은 왜 이리 힘들까요.”
“……갑자기?”
“이 정도로 열심히 살면 응? 가끔 보너스로 발에 굴러들어오는 복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을 계속할 때마다 한다은의 감정이 점점 격해졌다.
“슈퍼마리오는 열심히 뛰면 목숨 하나 더 주는데, 우리는 목숨 하나 더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라데이션 분노.
“하물며 빠찡코에도 뽀찌가 있는데, 이 인생이란 놈은 왜 뽀찌가 없어! 망할 세상!”
“……너는 문학 교수다, 후배야.”
천병옥이 그런 한다은을 진정시켰다.
“문학 교수라는 놈이 빠찡코에 뽀찌라니. 제자들이 들을까 겁난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고 했던가?
터벅터벅.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에 있는 사무실은 세 개. 조교실과 천병옥 교수실, 그리고 지금 한다은이 있는 학과장실이다.
“말이 씨가 된다고, 진짜로 뭐가 오나?”
“다은아. 좋은 말은 씨가 안 된다.”
“초 치지 말고!”
똑똑.
“계십니까?”
너무나도 익숙한 제자의 목소리에, 한다은은 다시 큼큼거리며 목소리를 깔았다.
“들어오거라.”
“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한다은이 가장 아껴 마지않는 제자의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이구나 형우야. 오랜만에 보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욕과 비속어를 남발하던 한다은이었지만, 그 모습이 얼마나 교수같던지.
‘……연극영화과 교수를 해도 되겠군.’
천병옥이 혀를 쯧쯧 찼다.
* * *
“……뭐?”
왔다.
“그게 진짜니?”
해결책이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
형우가 내민 ‘스패로우 팩토리 아카데미 계획서’를 본 한다은의 눈이 휘리릭 돌아갔다.
“그러니까, 빈 건물을 빌리고 싶다고?”
계획서의 요지는 이랬다.
스패로우 팩토리에서 진행하는 사업을 위해, 한국대학교의 건물을 빌리고 싶다는 것이다.
“네 생각이니?”
끄덕.
형우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하기야, 이런 기막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낼 녀석이라면 저 녀석밖에 없지.
“……자세히 이야기해 보렴.”
형우가 겸연쩍게 헤헤 웃었다.
“제가 생각을 좀 해 봤거든요. 어디서 공부를 해야 효율이 잘 나올까?”
인터넷 강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최악이고, 새로 건물을 구매할 여력은 없었다.
대관도 생각해 봤으나, 대관용 건물들은 죄다 지나치게 비쌌다. 서울 바깥으로 나가면 값이 좀 떨어지지만, 그럼 또 학생들이 찾아오기 어려울 테다. 무엇 하나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생각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공부가 제일 잘 되는 곳이야 한 군데밖에 없으니까.”
공부가 제일 잘 되는 곳은 당연히 학교가 아니겠는가. 그 중에서도 명문인 한국대학교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학교 다닐 때 늘 빈 강의실이 많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그 중에 서너 개 정도 빈 강의실을 빌릴 수 있을까요?”
“……힘들 것 같구나.”
그리 말한 것은 천병옥이었다.
“총장님이 그런 걸 별로 좋아하시지 않아. 한국 대학교는 한국 대학생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잠깐, 아녜요, 선배.”
한다은이 천병옥의 말을 끊었다.
“혜선이나 형우나 둘 다 한국대학교 학생이잖아요?”
“응?”
천병옥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건 너무 궤변인 게 아닐까?
하지만 한다은은 그딴 건 상관도 없다는 듯이 벌써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자료를 챙겨 들고 있었다.
“총장실 가즈아아! 형우야, 따라와라!”“넵!”“총장실 갈끄니까아!”
그대로 교수실을 박차고 달려 나가는 형우와 한다은을 바라보며, 천병옥이 헛웃음을 지었다.
궤변을 들고 총장실로 돌격한다고?
‘……그야말로 <돈키호테>로군.’
학교 건물을 빌려달라고 오는 제자나, 그 이야기를 듣고 좋다고 총장실로 달려가는 스승이나.
둘 중 누가 더 제정신이 아닌지 고민하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사색 거리가 될 수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