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쉬는 시간이에요! 홍 매니저님!”
얼마 전 C&N에서 스패로우 팩토리로 이적한 홍 매니저의 표정이 싹 굳었다.
‘…빌어먹을, 또 쉬는 시간이야?’
이상한 일이다.
C&N에 있을 때는 쉬는 시간이 되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는데, 스패로우 팩토리에서는 오히려 욕을 하게 되다니.
쉬는 시간임에도 욕이 나오는 경우가 언제일까?
명목만 쉬는 시간이라고 하고 일을 시킬 때? 물론 그건 아주 빡치는 일이지만……
‘…차라리 그게 낫겠다!’
울상을 지으며, 홍 매니저가 사무실을 바라봤다.
두꺼운 서류철을 들고 뒤뚱거리는 혜선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자판을 두드리는 지원의 모습이 보였다.
“혜선 씨, 스페셜 위크에서 작가 몇 명 뽑아 보라는 거 어떻게 됐어요?”
“일곱 명 정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일곱 명? 이왕 하는 거 열 명 채워주시지?”
“열 명이요? 한 번 더 뒤져보겠습니다!”
…지금 시간은 12시 30분.
분명 점심시간이자 휴식 시간일 텐데.
혜선과 지원은 미친 듯이 일을 했다.
“어흠…….”
잠깐 눈치를 보던 서민홍이 슬쩍 책상에 놓인 서류를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혜선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휴식하시라고요!”
“…이 분위기에서요?”
서민홍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사장도 일하고, 회사 선배도 일하는데… 막내보고 쉬어라?
“그게 어떻게 말이 됩니까?”
“…몇 번이나 설명해 드렸잖아요.”
지원이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희는 공동대표지만, 서민홍 매니저님은 직원이시잖아요. 직원은 근로기준법에 영향을 받는다니까요? 저희는 안 받지만.”
…이것이 바로, 직원은 쉬고 사장은 일하는 이상한 기업문화가 만들어진 이유였다.
“이유야 알겠는데….”
못 받아들이겠다.
지금까지 C&N의 엄격한 명령문화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서민홍으로서는 더더욱.
잡초 뽑는 대대장을 보는 이등병의 심정이랄까.
그 사이에도 혜선은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고 뒤뚱거리고 있었다.
“아까 말씀하신 서류 뽑았습… 으아앗!”
“어엇!”
헤선이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지원이 소리를 질렀다.
“괜찮으세요? 무릎에서 피나는데요?”
“그래도….”
혜선이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들었다.
“서류는 안 넘어졌어요! 다행이다, 이거 흘렸으면 다시 줍는 데 시간이 모자랐을 거예요.”
“맞아요, 요즘 일할 시간이 좀 빠듯한데. 어어? 서민홍 매니저님 안 쉬고 뭐 하세요?”
“지금 들고 계신 거 뭐죠? 구급상자!”
“뺏어요!”
혜선의 말에, 지원이 달려들어 서민홍이 들고 오던 구급상자를 빼앗아 들었다.
“쉬는 시간에 업무는 금지라니까요!”
“저… 구급상자 들고 오는 것도 업무인가요?”
“편하게 쉬세요, 편하게!”
구급상자를 건네받은 혜선은 그 안에서 대충 후시딘을 꺼내 무릎에 쭉 펴 발랐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아무튼요, 서민홍 매니저님은 1시 반까지 푹 쉬세요. 내 집이다 생각하고 푹!”
…이 가시방석에서 어떻게 푹 쉬냐.
푹은 무슨. 일하는 사람들 뒤에서 쉬고 있자니 양심이 푹푹 찔리는 느낌이었다.
“그… 쉬려고 해도 다들 일 하고 있는데 저만 쉬는 것도 좀…….”
“방해됐나요? 그럼 조금 조용히 일해야 하나?”
“아니, 그 뜻이 아니라… 저도 일을….”
“에히에이! 정 저희가 신경 쓰이시면, 나가서 피씨방이라도 잠깐 다녀오세요!”
그게 되겠냐?
…이걸 모범기업이라고 해야 할지 악질기업이라고 해야 할지 감이 하나도 안 잡혔다.
결국 서민홍은 앉아서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 몇 시야?’
12시 15분.
쉬는 시간이 45분이나 남았다.
‘쉬는 시간 더럽게 기네.’
‘빨리 안 끝나나?’
‘제발 시계야 빨리 가라!’
C&N에 있을 때는 상상도 못 해본 천인공노할 생각이 모락모락 떠올랐다.
‘어… 잠깐만. 방법이 있잖아?’
서민홍의 눈에 이채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대로 서민홍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홍 매니저님 피씨방 가시나 보네요.”
“흐으음, 푹 쉬셔야 할 텐데. 서민홍 매니저님 덕분에 저희 일이 얼마나 편해진지 몰라요.”
“일은 잘하시고 월급은 적게 받으시니! 이 또한 스패로우 팩토리의 복이겠지요.”
혜선과 지원이 뛰쳐나가는 서민홍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 * *
“사장님!”
“어라, 빨리 오셨네요? 쉬는 시간 10분 정도 남았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헉헉거리는 숨을 내뱉은 서민홍은, 재빨리 자신이 들고 온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적금 깼습니다. 오늘부로요.”
지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민홍을 바라봤다.
“그걸…… 왜 깼어요?”
“그야!”
서민홍이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스패로우 팩토리에 투자하려고 그러죠! 저도 시켜 주십쇼, 그 공동대표인지 뭔지 하는 거!”
“…에?”
“안 됩니까?”
“그게 좀….”
고민하는 지원의 옆구리를 혜선이 쿡 찔렀다.
“사장님, 투자금 액수 좀 봐요. 7천만 원이에요. 아까 아카데미 지출표에서 딱 이만큼 모자랐거든요.”
둘의 대화를 듣던 서민홍이 씩 웃었다.
“후훗. 일부러 맞춰 왔습니다. 아까 힐끗 봤거든요. 이 돈이면 프로젝트 시동 바로 가능하죠?”
“…그러니까, 스패로우 팩토리 공동대표에 앉고 싶으시다는 거죠?”
서민홍의 이야기를 정리한 지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대체 왜요?”
“쉬기 싫어서요.”
“…네?”
지원이 눈을 깜빡거렸다.
“휴식이 싫다고요?”
“휴식은 좋습니다. 하지만요, 다른 사람 일하는 데 혼자서 노는 건 별로 안 좋다고요!”
서민홍이 적금을 깨고 그 자금으로 스패로우 팩토리에 투자를 한 이유였다.
직원이라서 일을 시키지 않는다면, 공동대표가 되면 될 게 아닌가? 하는 간단한 아이디어였다.
“보통은 일을 해서 돈을 벌잖아요. 근데 반대로 돈을 내고 일을 하겠다고요?”
“혹시 마조히스트…?”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혜선이 서민홍을 바라봤다.
괜한 오해가 싫었던 서민홍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제가 바보도 아니고 그 정도도 모르겠습니까? 제가 하는 건 투자입니다, 투자!”
“투자라… 맞네요.”
상황이 상황이라 좀 착각했을 뿐, 확실하게 지금 서민홍이 하고 있는 건 투자다.
아직 상장하지 않았다 보니 주식이 아니라 투자금의 형태가 되었을 뿐.
“…여러분들 일 하는 거 보니 스패로우 팩토리가 꽤 비전이 있다 싶더라고요.”
주식투자의 대가인 워랜 버핏은 어떤 회사에 투자하기 전, 반드시 해당 회사 직원들의 업무 태도를 살폈다고 한다.
겉으로는 견실해 보여도 직원들의 열정이 별로인 회사에는 절대 투자하지 않았고, 겉으로는 조금 힘들어 보일지언정 직원들이 열정이 넘쳐 보인다면 그 회사에는 투자금을 아끼지 않았다.
회사의 견실함은 돈으로 메꿀 수 있는 부분이지만, 열정은 돈으로 메꾸기 힘든 부분이므로.
“…뭐, 제가 워랜 버핏만큼 대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좀 뭐가 보인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빨리 일 주십쇼!”
“쉬는 시간이 아직….”
“저도 이제 공동대표라니까요! 일 주십쇼!”
호쾌하게 외치는 서민홍을 보며, 지원이 피식 웃었다.
“서민홍 매니저님이 워커홀릭인 건 몰랐는데.”
“…윗사람이 일하는데 혼자 쉬어본 적 있으세요?”
“아뇨?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해요?”
그 미친 짓을 왜 나한테는 시키냐고! 나한테는!
…라고 말할 뻔 했다.
“…그거 해 보시면, 차라리 힘들게 일하는 게 더 낫다고 느껴질 겁니다.”
“그러면…….”
지원보단 혜선이 행동이 좀 더 빨랐다.
“아카데미 관련 업무 좀 처리해 주시겠어요? 이번 주 내로 완결짓고 싶거든요.”
“거뜬합니다! 얼마나 하면 됩니까?”
“많이요.”
“얼마나 많이요?”
“그게 말이죠….”
곰곰이 생각하던 혜선이 자신의 책상을 가리켰다.
“저기 상자 보이시죠?”
“비품 상자 말입니까?”
“아니요, 그 뒤에요.”
“아하. 저 A4용지함 말하는 거군요.”
“아니요, 그 뒤….”
혜선의 손가락을 쫓던 서민홍의 눈이 확 커졌다.
“…저거 말입니까?”
“네. 높이 1.8m, 너비 90㎝짜리 철제 상자죠.”
“아하. 저는 저게 캐비넷인 줄 알았는데. 착각할 뻔했네요. 상자, 상자로군요….”
하하하, 인자하게 웃으며 서민홍이 말을 이었다.
“이 ‘상자’ 몇 층 쪽에 제가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을까요?”
“전부 다요. 1층부터 5층까지.”
“아하하하. 왠지 그럴 것 같았습니다.”
“아하하하.”
“아하하….”
서민홍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미쳤지.’
커다란 철제 케비넷을 쓰다듬으며, 서민홍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희극인인 박명소 선생님의 말씀을 새삼 되새겼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진짜 늦은 것이라는.
그 만고불변의 진리를 말이다.
* * *
지이잉-
논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 형우의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스패로우 팩토리로부터 온 문자였다.
지원 : 아카데미 사업 구상 얼추 끝났습니다!
형우 : 장소도 구했나요? 아니면 저번 구상처럼 화상 강의로?
지원 : 으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화상강의로 하려고 했는데. 요즘 돈이 좀 생긴지라.
형우 : 여건이 되면 굳이 화상강의를 할 필요가 없죠. 확정되면 다시 연락주세요.
지원 : 알겠습니다!
형우는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이왕이면 대면 강의가 좋은데.”
화상 강의라는 건 확실하게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단점 또한 그만큼이나 명확했으니.
몇 년 전 전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한번 휘몰아쳤을 때, 한국의 모든 초등학교들은 전염병을 피해 문을 닫아걸고 화상 강의로 초등생의 수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대면수업과 비교했을 때 학업성취 능력이 명확하게 차이가 났고, 초등학교 1, 2학년 저학년 아이들의 20%가량은 한글조차 똑바로 익히지 못한 문맹이 되어버렸으니.
차라리 80, 90년대였으면 집에서 부모에 의한 수업이라도 가능했을 텐데, 2020년의 대한민국은 맞벌이 부부가 50%에 육박하는지라 그조차도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공부에는 환경도 중요하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화상 강의보다는 대면 강의가 환경적으로 좋다. 익숙한 장소에서 하게 되는 화상수업이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해이하게 만드는 면이 있으니.
물론 불굴의 의지로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다 뚫어버리는 기린아가 세상에는 종종 있다.
‘하지만….’
그런 기린아가 환경의 도움까지 받았다면,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원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필요 없는 고생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법이니.
‘아 씨, 학교 도서관 근로장학생 할 때 생각나네.’
학교 도서관 사서로 일할 때, 맨날 와서 시비를 걸던 법대생이 한 명 있었다.
‘저기요, 자리 맡아두면 안 된다니까요?’
‘에이 뭘 그런 걸로 그래. 자리 매번 꽉 차는 것도 아닌데. 사서야, 내가 여기 단골이잖냐.’
…도서관은 돈 내고 이용하는 곳이 아니니 단골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태도 자체가 글러 먹었다.
‘안 돼요. 다른 분들 불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그건 네가 막아 줘야지.’
‘제가 왜 그 고생을 해요?’
‘넌 사서니까.’
‘예?’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잖냐.’
‘…예?????’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만약 형우가 무림인이었으면 온몸의 기혈이 막혀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주화입마로 쓰러졌을 테다.
‘중의적 표현이야, 하하하!’
대학원생은 참 재밌다는 듯 형우의 어깨를 툭툭 치고 가버렸지만, 형우는 한참이나 바닥에 못 박힌 듯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중의적 표현?
그 말을 들은 형우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더랜다.
그딴 몹쓸 개그는 어디서 배운 거죠?
원생이나 학부생이나 나이 차가 얼마나 난다고 젊다 어쩌고 하십니까?
그리고 왜 초면부터 반말이죠?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서라도 가장 화나는 건 그 말 자체였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그딴 걸 대체 누가 사?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굳이 필요 없는 고생까지 사서 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지금 성격이었으면 내 손으로 짐들 다 집어던져 버렸을 텐데.’
그때는 아쉽게도 1학년이라 언감생심 그런 일은 꿈도 못 꿨다.
그 대학원생을 처리한 건, 갑질을 당하는 형우를 바라보고 있던 다른 대학원생이었다.
선배가 후배를 괴롭히는 불의의 광경을 참지 못하는 살아있는 정의… 는 아니었다.
‘어떤 새끼가 자리만 먹고 안 오나 싶었는데, 너였냐? 뭐? 왜 반말하냐고? 너 몇 학번이야?”
‘어딜 새파란 14학번 새끼가! 나는 13이다!’
‘어어? 덤벼? 너 이 새끼, 공부하는 꼬라지 보니까 판검사로는 법정 못 설 것 같은데, 내 친히 피해자로 법정 서게 해 주마!’
그러니까.
후배를 괴롭히는 게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감히 내 자리를 저 자식이 먹어서 빡친 거였다.
‘굉장했지.’
…아직도 가끔, 눈을 감으면 그 도서관 혈투가 떠오른다.
‘결국 둘 다 블랙리스트에 올랐지.’
그 순간을 생각하며 형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니, 뭔 개소리야. 요즘은 ‘적게 일하고 돈 많이 버세요’가 정석이라고. 그렇지 참치야?”
“뺘아악!”
어느새 깨어난 참치가 날개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녀석이야말로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것의 대표주자 아닌가. 하는 거라곤 짹짹거리며 뛰어다니는 것밖에 없는데, 매 시간마다 밥에 간식에 예방접종까지 맞춰 주니….
“…다음 생에는 반려동물로 태어나야지.”
“뺘아아악!”
참치가 째려봤다.
‘너 같은 주인 놈 만나서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모를 거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