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다음 역은, 아산, 아산 역입니다.]
“우와, 참새 귀엽다! 한번 만져 봐도 돼요?”
“그래, 너무 시끄럽게 하지 않는다면.”
“뺘아악!”
꽤 오랜만에 보는 광경에, 형우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예전엔 기차 진짜 많이 탔었는데.’
형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지갑 속 운전면허증을 쓰다듬었다. 기능 4번 탈락, 주행 2번 탈락 끝에 형우는 운전면허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면허증 따면 기차 안 탈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연수용 도로를 달릴 때도 익숙하지 않아 손발이 덜덜 떨리는데, 지금 상태로 어떻게 그 무서운 고속도로를 달린단 말인가?
‘한 1년 정도는… 얌전히 운전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형우는 품 속에서 노트를 꺼내들었다. 그 안에는 동물원에서 조사했던, 동물들의 생태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호랑이와 두루미, 뱀, 그리고 사마귀의 공통점은, 한자 하나를 뒤에 가져다 붙이기 좋다는 점이다.
권拳이라는 글자 말이다.
그러니까, 각각 호권, 학권, 사권, 당랑권이다.
“주인공은 호랑이를 닮은 권법을 쓰는 걸로 할까.”
타다다닥-
형우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B5 양식의 한글 파일 위로 화산의 매화가 흩날리고 숭산의 박꽃이 나풀거린다.
그러니까, 무협武俠이다.
***
‘예전부터 무협은 한번 써 보고 싶었어.’
형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작품은, 지난날 지친 자신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던 대여점 소설인 <전생검신전기>였다.
‘만약 그 소설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렇다면, 자신은 웹소설의 길에 올라타지 않았을 테고, 지금의 성공 또한 얻지 못했을 것이다.
무협을 쓴다는 건, 그런 자신의 인생에 대한 감사함을 담아내는 과정이었다.
타다다닥-
그렇게 다시 작업에 열중하려는데, 이상하게 손가락이 평소보다 느린 기분이 들었다. 소설이 잘 써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무협… 어렵네.”
사람들은 종종 판타지를 서양풍 무협, 무협을 서양풍 판타지 정도로 생각하곤 하지만, 엄밀하게 따져 보면 두 장르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바로 배경의 차이다.
판타지라는 장르는 무협보다 훨씬 유연한 데가 있다. 어느 정도 작가 마음대로 설정을 짜낼 수 있고, 필요한 이야기를 배분할 수 있다.
하지만 무협은 조금 달랐다. 무협의 세계관은 판타지보다 훨씬 비유동적이다. 홍콩 출신 무협 작가이자 ‘가장 노벨문학상에 근접했던 장르소설가’라는 평가를 받는 신필神筆 김용의 세계관을 기준으로, 오대세가와 구파일방, 마교라는 배경이 이미 정립되어 있는 셈이다.
판타지 세계관이라면, 검의 달인이 칼에서 오러를 뽑든 드래곤을 단신으로 잡든 세계관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 되지만, 무협 세계관에서는 좀 다르다. 화산파 출신의 검사가 이십사수매화검이 아니라 태극권을 사용한다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 부분에 대해 의아함을 가지고 말 테니까.
‘…하지만 그만큼 장점도 확실하지.’
무협이 배경을 고정하는 이유는 픽시드 기어 자전거의 원리와 비슷하다.
유연함을 어느 정도 포기하는 대신 속도감을 얻는다.
판타지에서 드래곤이 등장하면 “마법의 지배자이자 강력한 발톱으로 적을 꿰뚫는 고대의 생명체.”라는 말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겠지만, 무협은 좀 다르다. ‘그는 팽가의 가주였다.’라는 말 한마디면, 독자들은 알아서 거대한 도를 들고, 듬성듬성 수염을 기른 호쾌한 성격의 남자를 상상한다.
그렇게 아낀 문장과 페이지, 그리고 작가의 심력은 자연스럽게 유쾌한 사건을 만드는 데로 집중되게 된다. 한 작가가 말했듯이, 판타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훌륭한 배경을 만드는 거라면, 무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멋진 사건을 만드는 일이니. 하지만, 이것들을 위해서는 선행되야 할 것이 있다.
“…일단 외워야 한다는 건데.”
독자로서 소설을 읽을 때와, 무협을 쓰려고 마음을 먹은 후의 배워야 할 것은 양이 엄청나게 다른 느낌이었다.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의 독문 무공 정도는 이미 외우고 있었으나,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그것 외에도 중국의 지리부터 산의 이름까지 죄다 필요한 느낌이었으니.
‘그나마 사전이 있어서 다행이지.’
형우는 책상 옆에 펼쳐 놓은 ‘무협대백과’를 살짝 들춰 봤다.
[흔히 구파일방 중 하나로 묘사되는 아미파는 사천 지방의 아미산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불교계 문파이다. 주로 여성 승려(비구니)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설정되는데 …. ]
민준의 추천으로 산 책이었는데, 중국의 지리는 물론 역사와 관습까지, 무협소설 메이킹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얼추 갖춰져 있었다. 만약 그 책이 없었다면 한 문장을 쓸 때마다 인터넷을 뒤져야 했으리라.
“좀 도와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형우는 어제 민준과 했던 통화내용을 떠올렸다.
* * *
“무협을 쓴다고? 형우 네가?”
무협을 구상하고 나서 형우가 가장 먼저 연락한 것은 당연히 무협 소설가인 성민준이었다.
스스로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작은 무조건 누군가한테 배우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게 형우의 오랜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네. 예전부터 한번 써 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삼촌한테 연락한 거예요. 삼촌 무협 소설가잖아요.”
“맞기는 하다만, 네가 쓰려는 게 구무협이냐, 신무협이냐?”
무협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흔히 ‘정통 무협’이라고도 불리는 구舊무협과, 구무협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신新무협이 그것이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무 vs 협이다.
‘무협에서 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다만 협이 중요하다.’
이 말은 김용이 한 말이다.
판타지의 아버지가 J.R.R톨킨이라면, 무협의 아버지는 김용이다. 무란 말 그대로 싸우는 것, 전투씬을 이야기하고, 협이란 ‘자신이 말한 것은 꼭 지키는’ 협객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김용의 사후,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김용의 말을 뒤집어 버린다.
‘무협이란 무만 있으면 무협이며, 협은 그렇게 상관이 없다.’
그런 골자에서 출발한 것이 신무협이라는 장르다. 구무협이 무림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협을 지키는 협객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면, 신무협은 인간과 인간이 갈등하고 호쾌하게 싸우는 무술 그 자체에 집중한다.
“내가 쓰는 장르는 신무협이거든. 신무협이라면 알려 줄 수 있겠지만….”
“전생검신전기>는 구무협이죠? 저는 구무협을 쓰고 싶은데….”
“구무협을 쓰겠다고 한다면… 나한테 배우는 것보다는 다른 무협 작가님들을 찾아가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다행히 내가 아는 원로 작가님들이 몇 있는데, 소개해 주랴?”
그런 연유로, 형우는 지금 KTX를 타고 저 멀리 충청도의 논산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논산이라.’
순식간에 나쁜 기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는 형우였다.
* * *
충청도의 논산.
예로부터 충청도는 장군이 많이 나는 지방이라고 알려졌다. 논산의 옛 지명은 그 유명한 황산벌로, 백제의 노장 계백과 신라의 화랑 관창이 목숨을 건 격전을 치렀던 그곳이 맞다.
“…그 탓에 대한민국 성인 남자들의 지옥이 되어 버렸지만.”
장군이라면 계백처럼, 병사라면 관창의 뜻을 받들라는 취지로, 1951년 11월 1일 논산에는 육군훈련소가 들어서게 된다. 102보충대가 폐지된 지금, 사단 신병교육대를 제외한 유일한 육군훈련소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형우 또한, 자대에 들어가기 전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던 기억이 있었다.
“저 개 같은 집은 아직도 있네.”
형우가 음식점 하나를 보고 투덜거렸다. 형우가 입대하던 날, 들어가기 전에 좋은 거라도 먹겠다 싶어 큰맘 먹고 소고기 전골집에 갔더랜다.
고기는 질기고, 국물은 짜고, 주인장은 불친절하고, 가격은 더럽게 비쌌다.
세상에서 제일 맛 없는 음식점이었다.
‘세상에서 절대 사 먹으면 안 되는 게 두 개가 있어. 하나는 계곡 불법 노점상에서 파는 삼계탕이고, 두 번째는 훈련소 앞 고깃집이다. 가끔 괜찮은 데가 있다고는 하는데, 보통은 실패하거든.’
그때 그 맛을 떠올린 형우가 눈살을 찌푸리고 주위를 살폈다.
‘…다시 여길 올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왜 하필 여기서 보자는 거야?’
민준 삼촌이 소개해 준 무협 소설 작가를 만나기로 한 곳은 참 공교롭게도 훈련소의 근처였다.
‘입영을 환영합니다’라는, 쓸데없이 라임을 잘 살린 문장을 보는 순간 PTSD가 작렬하는 기분이었다. 군대를 앞둔 래퍼랑 디스전을 벌일 일이 있다면, 꼭 저 문장을 기억해 두시라. 무조건 이길 테니. 자매품으로 ‘우리는 갈게, 너희는 각개.’도 있다.
“그나저나, 어디 계시다는 거지?”
민준 삼촌의 말로는, 대충 길 가다가 무협작가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형우가 찾던 사람일 거라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둘러보고 있는데, 안경을 쓰고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추리링을 입고 걸어가는 수염 듬성듬성한 남자가 보였다.
‘…느껴진다, 작가의 기운이!’
저런 얼굴의 사람은 둘 중 하나다. 1번, 어제 실연해서 하루 종일 술 마신 사람이거나, 2번, 작가거나.
형우는 그 추리링 남자한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작가님이신가요?”
“…작가?”
남자가 눈을 부라렸다.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왜 시비야? 너도 미영이가 보냈어?”
“…미영이요?”
“미영이한테 제발 전해 줘! 나 진짜 반성 많이 하고 있다고! 다시는 클럽 안 갈게!”
이런, 아무래도 1번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흑, 흐으윽, 미영아아아! 돌아와줘어어어!”
그 외침에 형우는 귀를 막았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주변에 와인 전문점이 있었다면 와인잔이 죄다 박살 났겠는걸.
“저는 그런 사람 몰라요! 사람 잘못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한 남자가 영혼을 쥐어짜 이끌어내는 신파극을 뒤로한 채, 형우는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무협 작가처럼 생긴 사람이 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이야?”
그렇게 주변을 휙휙 바라보고 있던 차에, 멀리서 하얗고 선득한 것이 눈에 띄었다.
“…저게 뭐지?”
형우의 눈에 보인 것은, 하얀 도포를 입고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한 노인이었다. 1종 구름면허로 성층권에서 트랙을 돌다가 갑자기 바닥에 떨어진 것처럼 생겼다. 노인은 아직까지도 미영이를 외치며 우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어허, 여기가 어디라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느냐?”
“할아버지도 미영이가 보낸 거예요?”
“허어, 실연을 한 게로구나.”
할아버지가 안쓰럽다는 듯이 미간을 쓱쓱 긁었다.
“인생이란 병가지상사라고 하지. 인생 또한 마찬가지라네. 헤어진 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 일로 더 단단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면 미영이란 존재는 네 인생에 충분한 빛이 되었음이야.”
“…그게 무슨 소리죠?”
“허나 계속해서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고성방가로 더럽힌다면, 글쎄. 자네의 사랑 또한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 말고 다른 뜻이 무어가 있겠는가. 사랑이란, 보내주는 것까지가 사랑일진데.”
“하지만 잊지를 못하겠는데요.”
“잊을 필요는 없지. 영원히 기억해도 좋네. 하지만, 여기서 울 필요는 없지. 일단 울음을 멈추게. 옳지, 옳지. 시작이 반이거든.”
남자가 울음을 멈췄다.
“그다음에는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만, 가만 있어도 반은 간다는 말이 있다네. 반과 반을 더하면, 이미 다 한 것이나 다름없지. 그러니 가만있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 엄청 잘하네.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광경이었다.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말투 하나하나에 힘이 있다고 해야 하나. 한 연구에 따르면 ‘말’이라는 의사소통 수단에서 그 내용의 비중은 30%도 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나.
제스쳐와 힘, 표정 등등의 비언어적 표현이 의외로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단단한 마음, 인가요?”
한참을 더 훌쩍거리던 남자는 그렇게 되묻더니, 추리링 무릎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이 흡족하게 웃었다.
“울려거든 방에 가서 울고, 무릎을 꿇거든 미영이 앞에서 꿇게. 여기는 장소가 틀렸군.”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래. 아무리 그래도 답을 모르겠다면 나중에 나의 집으로 찾아오시게. 함께 술이라도 걸치지.”
그 모습을 보는 형우는 두 가지 생각이 같이 들었다. 첫 번째는, 참으로 우습다는 거였다.
‘찰리 채플린 말이 맞네.’
저 사람들에게는 비극이었지만, 멀리서 보는 형우에게는 한 편의 희극이었으니.
‘벌건 대낮에 금도끼랑 은도끼 들고 다닐 것처럼 생긴 노인과, 추리링 입고 오열하는 남자라니.’
<거침없이 로우킥> 같은 시트콤에나 나올 법한 광경이니, 어찌 우습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도 맞았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인 <시학>에서 비극이든 희극이든 그 첫 번째 기능은 묵은 감정을 터트려 씻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이 말을 참으로 멋있게 부르는데, 그게 바로 ‘카타르시스’라는 단어다.
“…멋있잖아.”
지금 형우의 가슴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이제 하나는 끝냈고.”
노인이 뒷짐을 지더니, 형우 쪽을 바라봤다.
“이제 다음 차례로군.”
흐음, 찰리 채플린과 아리스토텔레스 다음에는 프리드리히 니체를 넣어야겠다.
‘노인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노인 또한 나를 바라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