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팬덤(Fandom)
사전적 정의를 빌려오자면, 공통적인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공감과 우정의 감정을 특징으로 하는 팬들로 구성된 하위문화라고 한다.
“아니, 잠깐만요! 여러분?”
그리고 지금 자신의 팬덤을 마주한 형우는 그 사전적 정의에 상당한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제가 먼저 줄 섰다니까요?”
“줄을 서려면 일자로 서야지, 그래 삐딱하게 서면 그게 줄이에요? 다시 서세요!”
“이 양반이 진짜!”
저 수라장 어느 구석에 공감과 우정이 있다는 걸까? 차라리 혼돈과 파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쪽이 훨씬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그 모습을 본 형우의 마음 또한 혼돈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자신에게 싸인을 먼저 받겠다고 투닥거리는 모습이 고맙게 느껴지면서도, 그래도 이왕이면 조금 더 선진국답게 질서정연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는데.
“잠시만요, 여러분!”
그때, 와이셔츠를 차려입은 한 남자가 후다닥 달려왔다. 가슴팍에 명찰이 달랑거리는 걸 보니 싸인회 관계자인 것 같았다.
“조금만 진정해주세요! 이럴수록 사인회는 점점 늦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그걸 제지하는 게 당신들 일이잖아!”
맞는 말이기는 한데.
솔직히 말해서, 이 아수라장의 이유가 관계자의 관계 소홀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말이다.
처음에 교보재문고 측에서 생각했던 싸인회의 규모는 작년의 데이터를 미루어 봐서 총합 천 명 정도라고 예상했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그 두 배인 이천 명도 충분히 케어할 수 있을 만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했다.
그나마 교보재문고니 이 정도의 편성이 가능했던 거지, 일반 출판사라면 아마 1,000명을 딱 맞춰서 인원을 배분했을 터였다. 애초에 순문학 팬덤 내에서 작가 사인회가 그다지 주류적인 문화인 것도 아니니까. 이토록 많은 사람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그러니 문제는 교보재문고가 아니라, 다른 쪽에 있었다. 그러니까, 행사에 참가한 형우가 장르문학 작가라는 게 문제였다는 뜻이다.
[2년차망생이@2yearsnewbee
오늘 교보재문고에서 참새치 작가님 사인회 있다는데요?
#교보재문고 #올해의소설]
[유늅@younoob
저도 오늘 싸인 받음. 참새치 작가님 사랑합니다!
#교보재문고 #올해의소설 #참새치]
ㄴ타타룬@tatarune : 근데 어떤 소설에 싸인 받으신 거예요? 참새치작가님 책으로 소설 내신 게 <아이언 타이거> 문학판 뿐일텐데? 거기에 받으신 거예요?
ㄴ유늅@younoob : 아뇨아뇨! 저는 노트북 뒷면에다가 받았어요! 참새도 그려주셨어요!
ㄴ타타룬@tatarune : 미친 저도 바로감.
순문학 팬덤과 달리 장르문학 팬덤에서 사인회란 일상처럼 이루어지는 주류문화에 가깝다. 형우의 싸인회 소식은 장르문학 팬들의 SNS를 타고 일파만파 퍼져나갔고, 그 결과가 지금 눈앞의 진풍경이다.
“밀지 말라니까!”
“관계자 뭐 하냐고!”
1,000명의 참가자를 예상하고 2,000명을 케어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을 투여했지만… 이미 이천 명은 넘은 지 오래였다.
“저, 참새 그려 주세요!”
“저도요! 저도 참새 그려 주세요!”
……게다가 참새를 그려줬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죄다 참새를 그려달라고 했다.
‘가끔 참새 그린 게 도움이 됐네.’
글 쓰다가 가끔 생각이 안 나면 노트 빈칸에 끄적끄적 낙서를 하고는 했는데, 눈에 보이는 게 늘 참새였으니. 마치 화산파의 검수들이 매화꽃을 피워내듯 자연스럽게 참새를 그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마리여야지.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데…….’
살면서 지금까지 그린 참새의 수보다 오늘 하루 동안 그린 참새의 수가 더 많을 것 같다. 이게 진짜 참새였으면 고향에 있는 보리밭은 아주 아작이 나지 않았을까?
그러는 와중에도, 줄의 후열에서는 싸인을 기다리는 팬들이 끊임없이 언성을 드높이고 있었다.
“아니, 이 양반이 진짜!”
“뭐요? 해 보자는 거예요?”
“야 꼬맹이, 넌 빠져!”
이 싸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부족한 인력?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형우가 가진 소설가로서의 스펙트럼 때문이다.
“아니, 여기가 줄이잖아요?”
이렇게 외치는 건, 어깨 부딪히며 싸인을 ‘쟁취’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순문학 팬덤이었고.
“이게 어떻게 줄이에요? 나 참, 이런 데 한 번도 안 와 보셨나? 원래 이런 거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사인 문화에 익숙한 웹소설 독자님일 테고.
“저기요, 관계자님. 주차권은 혹시 어디서 받습니까? 잠깐 꼬마야! 새치기하지 말라니까!”
이렇게 말하는 건 아마 헬스와 운전을 즐겨 하는 40대 중년 오디오북 독자님이며,
“제가 먼저 왔는데요? 진짜 개 어이없어.”
저 학생 팬은 아마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전설의 보안관>일 테다.
순문학, 장르문학, 10대와 40대.
이토록,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옹기종기 모였으니 싸움이 안 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개 어이없다고? 지금 욕한 거야?”
“이게 무슨 욕이에요?”
애초에 사용하는 표현부터가 달랐으니, 의견일치가 될 리가 만무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갈등은 심해지기만 했고…….
“아니, 여긴 관리자도 없어요?”
“관리자 어딨어?”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는 늘 관리자들인 법이니. 목에 건 직원명찰을 휘날리며 하얀 양복들이 여기저기 열심히 뛰어나왔다.
“선생님들, 진정하세요!”
“이쪽이 줄입니다!”
“저쪽이 줄이라고?”
“사람들은 이쪽에 몰려 있는데?”
교보재문고의 직원들이 몇 번이나 통제하려고 애썼지만, 별 효과는 없어 보였다. 원래 통제라는 게, 사람들이 절반만 따르면 혼란을 두 배로 곱하는 것 외에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법이니.
저럴 때는 확실하게 모든 사람이 따를 만한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
“저기, 참새치 작가님!”
예를 들자면, 지금 형우에게 헐레벌떡 달려오는 교보재 문고의 중견 사원 주민호 선생 같은 사람 말이다.
“잠시 이야기 괜찮으실까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런 수라장을 놔두고 참새만 그리고 있기가 아까부터 불편하던 참이었다.
“제가 뭘 해야 하죠?”
“일단은 지금 군중들이 저희 말은 거의 안 듣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주민호가 면목 없다는 듯이 콧잔등을 긁적거렸다.
“그, 형우 작가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면 좀 소란이 가라앉지 않겠습니까?”
“……제가요?”
다행히 저번 한국 대학교의 리더 행사 덕분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 정도는 실컷 연습했었다. 게다가, 조만간 스패로우 팩토리에서 아카데미를 준비하게 되면 많은 수강생 앞에서 쫄지 않고 말을 해야 할 텐데, 지금의 상황은 꽤 좋은 공부가 될 수 있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이런 일은 해 본 적 없기는 한데, 알겠습니다. 한번 해 보죠.”
“감사합니다, 작가님!”
“그 전에 잠시만요.”
형우는 사인을 기다리는 앞줄의 여학생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독자님. 죄송한데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얼마나요?”
“5분이면 됩니다. 그때까지 싸인에 뭐 쓸지 생각하고 계세요.”
그렇게 앞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형우는 줄 맨 뒤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수라장이군.’
멀리서 볼 때도 난리였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더 아수라장이었다. 경광봉을 든 직원들이 마치 허수아비처럼 허우적거리고만 있었으니.
“어, 참새치 작가님이다!”
“작가님! 팬이에요!”
하지만 형우가 등장하고 나니, 잠깐 그 소란이 멎었다. 형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직원분들. 죄송한데 경광봉 좀 빌려 주시겠어요?”
“경광봉을요? 아, 예.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후, 형우는 그대로 경광봉을 하늘 높이 쭈욱 치켜들었다.
그대로 숨을 후욱, 하고 들이마쉰 뒤.
“자아! 다들 이쪽으로 줄 서세요! 네, 줄은 이쪽입니다!”
하고 소리쳤다.
“거기 뭐 하세요! 이 쪽이라니까요!”
“거기 학생들!”
그대로 경광봉을 휙휙 휘두르며 능숙하게 사람들을 인솔하는 형우.
예전에 지하주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게 이럴 때 도움이 됐다.
“작가님! 여기서 뭐 하세요?”
그렇게 한참을 교통정리에 열중하고 있는데, 줄을 기다리던 학생이 소리를 질렀다.
“앞에서 싸인회 하셔야죠! 여기서 이러고 있으시면 어떻게 해요?”
타이밍 좋고.
마침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형우는 그 질문을 한 학생을 향해 싱긋 웃어 줬다.
“상황 정리되거든 재개할 겁니다. 교통정리가 빠르게 끝나면 싸인회도 빠르게 시작하겠죠?”
싸인 받고 싶어? 그럼 줄 서!
그런 뜻이었다.
“여보쇼! 빨리 줄 서쇼!”
“평생 기다릴 거야!”
형우의 그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성별, 나이, 직업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단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었다.
형우의 싸인을 받기 위해 모인 팬이라는 것.
‘싸움이고 나발이고, 그러다가 싸인을 못 받을 순 없지!’
팬들의 마음이 한 곳으로 모였다.
“아저씨!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자리가 없잖아요!”
“아이 씨! 그냥 제 앞에 오세요! 다들 괜찮죠?”
“괜찮으니까 빨리 줄 서자고요!”
직원 열 명이 달라붙어도 정리되지 않았던 소란이 순식간에 정리됐다.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온 주민호 팀장이 엄지를 비쭉 치켜들었다.
“정리가 끝나셨군요! 대단하십니다!”
“뭘 이 정도로요, 후훗. 제 교통정리 솜씨가 녹슬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예?”
“절도있게 착착!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거의 해병대 전우회 수준이었다고 할까요.”
그 말을 들은 주민호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사실 따지자면 형우의 솜씨는 녹슬 대로 녹슬어서 해병대 전우회는커녕 신장개업한 주유소 앞 풍선인형만치 절도도 뭣도 없었지만.
순식간에 줄이 정리된 건 교통정리 솜씨 때문이 아니라 팬들의 단합력 때문이었지만.
“역시 김형우 작가님이십니다! 해병대 전우회가 뭡니까! 거의 의장대 수준이었죠!”
사업가인 주민호는 그냥 모르는 척, 형우의 말에 추임새를 잔뜩 넣어 줬다.
***
“오래 기다렸죠?”
형우의 질문에, 아까까지 기다리던 여학생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싸인에 뭐 받을지는 생각해 놨어요? 오래 기다렸으니까, 더 성심성의껏 해 줄게요.”
“그, 싸인보다는요.”
잠깐 망설이던 여학생은, 형우가 들고 온 경광봉을 가리켰다.
“경광봉 저 주시면 안 돼요? 저게 갖고 싶은데.”
“이거요? 어어, 이건 제 게 아니라서.”
그렇게 말하며 형우는 뒤쪽에 있는 주민호를 바라봤다. ‘이거 줘도 되나요?’라는 뜻이었다.
상관없다는 듯, 주민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상관없다네요. 경광봉에 싸인 해 주면 되나요?”
“네. 참새도 그려 주세요.”
“잠시만요.”
쓰스슥-
아무래도 종이에 그리는 것보단 힘들어서 조금 찌그러지긴 했지만, 어떻게 참새처럼 보이기는 했다.
“와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경광봉은 어디에 쓰려고….”
“다 쓸 데가 있어요!”
그렇게 말한 뒤, 그 소녀는 씩 웃으며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몰려드는 팬들에 의해 형우는 곧 소녀와 경광봉을 곧 잊어버렸다.
* * *
형우의 재치 덕분에, 사인회는 다행히 별일 없이 끝마칠 수 있었다.
“휴우, 드디어 끝났네.”
형우가 지끈거리는 손을 쥐었다 폈다.
“글근육이랑 그림근육이랑은 다른가.”
엄지와 검지 사이가 파르르 떨리는 건, 초등학교 시절 하루 종일 딱지치기를 했던 것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지금까지 글을 써 왔던 내공이 없었다면 아마 싸인을 하다가 나가떨어졌을 게 분명했으리라.
“어라.”
휴대폰을 꺼내 보니, SNS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 목록을 촤르르 살피던 형우는 이내 눈에 띄는 것을 발견했다.
“어어, 이거?”
[칸뇽@KhanDragon
님들 이게 뭔지 아세요? 참새치 작가님이 님들 조련할 때 썼던 경광봉임ㅋㅋㅋㅋ
#교보재문고 #올해의소설 #참새치]
ㄴ유늅@younoob : 뭐야 이거 어디서 얻음?
ㄴ칸뇽@KhanDragon : 달라고 해서 받았어요!
ㄴ유늅@younoob : 저한테 파셈 5만원.
ㄴ베리베리@barry2 : 10만원
ㄴ타타미@tatami : 200천원
ㄴ베리베리@barry2 : 200천원 뭔데? 200만원도 아니고
ㄴ타타미@tatami : 뭔 200만원이야 요다가 직접 휘두른 광선검도 200만원은 못 받겠다.
ㄴ칸뇽@KhanDragon : 안 팔아용~~~
그 허무맹랑한 게시글을 본 형우의 표정에 난색이 어렸다.
“…내가 무슨 프레디 머큐리야?”
예전에 프레디가 썼던 기타가 이베이 경매에서 수만 달러에 낙찰되었다는 소식은 들어봤지만, 자신이 싸인한 경광봉이 팔린다는 건 좀 놀라웠다.
“이게 21세기인가.”
경광봉 하나에 20만 원이라니, 나중에 소설이 망하면 경광봉 장사를 하면 되겠군.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있던 차, 옆에서 누군가가 아메리카노 한 잔을 불쑥 내밀었다.
“형우 작가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교보재문고의 담당자인 주민호였다. 마침 기진맥진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 냅다 받아 호로록 마셨다.
“오늘 형우 작가님 팬이 제일 많았던 것 같습니다.”
“순문학 사인회인데, 다른 작가님들께 폐가 되지 않았나 싶네요.”
“폐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주민호가 손을 내저었다.
“덕분에 오늘 교보재문고 소설 매출도 탑을 찍었습니다. 어휴, 특히 형우 작가님 소설이 너무 잘 팔려서 중간에 강남점이랑 교대점 소설까지 싹 쓸어왔다니까요.”
그리고 그 소설들까지 결국 매진이 됐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오늘의 소설 특집 코너>는 휑하게 비어 있었다.
“방금 이천 쪽 출판공장에 증쇄 요청한 참입니다.”
“이번에 몇 쇄죠?”
“으음, 숫자상으로는 8쇄인데, 아마 이번에 10쇄까지 연달아 찍을 것 같습니다.”
보통 출판시장에서 1쇄는 3,000권을 뜻한다. 보통 출판시장에서 3만 권이 팔리면 베스트셀러 취급을 받으니, 형우의 <아이언 타이거> 또한 베스트 셀러 반열에 오른 셈이다.
“감개무량하네요.”
솔직히 웹소설 시장에 진입하고 나서는 반쯤 종이책에 대한 로망을 내려놓았었기에 그 마음은 더더욱 컸다.
‘열심히 하면 될 일은 된다는 건가?’
꿈을 향해 한 발자국 더 내디딘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작가님. 저희가 이번에 약간의 뒤풀이를 준비했는데 말입니다. 혹시 오실 생각 있으신가요?”
“다른 작가님들도 참여하나요?”
“당연하지요.”
형우는 작가이기 이전에 무지막지한 소설 오타쿠기도 했다. 마치 축덕에게 ‘메시랑 밥 한 끼 안 할래?’라고 물어본 것과 비슷한 거랄까.
“가겠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