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31화 (131/200)
  • #130

    빙그레게임즈에서 나오고 나니 바깥은 벌써 어둑어둑했다. 겨울이라서 해가 빨리 지는 것도 있었지만, 계약이 오래 걸린 게 더 컸다. 혜선의 요구로 인해 새롭게 조율해야 하는 부분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오른쪽을 보면 큼지막한 트리가 보이고, 왼쪽을 보면 그보다 더 큰 C&N이 보였다. 혜선은 그사이에 서서 멍하니 크리스마스 트리를 바라보고 있다.

    계약을 하나 마치고 와서 그런지, 약간은 피로한 듯한 표정이다.

    “오늘 수고했어.”

    “응.”

    혜선이 짧게 대답한다. 수고는 무슨, 이라던가 하는 말을 하지 않는 건 참 그녀답다.

    “오늘 계약이 잘 돼서 다행이야.”

    “…그건 모르는 거지.”

    “답지 않은 말을 하네.”

    “나다운 게 뭔데?”

    “응?”

    놀란 형우를 보며, 혜선이 농담이라는 듯 씩 웃는다.

    “어제 TV에서 하이틴 드라마를 하더라고. 한번 따라 해보고 싶었어.”

    아무리 그래도 ‘나다운 게 뭔데?’라니. 드라마에서는 자주 보는 대사지만, 실제로 저런 말 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 좀 당황했다. 솔직히 말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차라리 계약에 대해 생각하는 게 더 쉬워 보였다.

    ‘콜라보레이션이라….’

    게임과의 콜라보레이션과 고급 일러스트도 좋았지만, 그보다는 C&N의 공격 이후 처음으로 체결한 추가계약이라는 쪽이 더 인상 깊었다.

    C&N이 게임업계에 발을 뻗고 있지 않거나, 혹은, 그 자유분방한 분위기로 추정해 보건대 그냥 빙그레게임즈 자체가 그런 걸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기업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후자 쪽이 좀 더 그럴듯하다. 콘텐츠 산업이란 한 꺼풀 벗기면 죄다 얽혀 있는 법이니.

    만화는 만화, 소설은 소설, 음악은 음악, 게임은 게임이었던 시절은 이미 30년도 더 전에 지났다. OSMU니, 멀티 프랜차이즈니 하는 말이 안 쓰이는 데가 없는 시기가 아닌가.

    “게임사업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콜라보 말고, 스패로우 팩토리 IP로 만든 게임 말야.”

    형우의 말에, 혜선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컨텐츠를 확장해나간다면 언젠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그거면 C&N이길 수 있나?”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이길지.”

    바깥 공기가 찬가, 혜선이 코를 쓱 문지른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맥주 한잔 어때?”

    타이밍이 좋았다. 마침 맥주가 생각나던 참이었으니까.

    * * *

    데엥- 데엥-

    TV에 흘러나오는 재야의 종소리를 들으하며, 형우는 핸드폰을 바라봤다. 과연, 1월 1일이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지구가 크게 한 바퀴 돌아서, 새로운 연도가 찾아온 것이다.

    창밖에서는 새해다! 하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오피스텔 사람들이 축제라도 벌이는 것 같다. 그리고 형우는, 당연하게도 글을 쓰고 있었다. 다행히 예민한 편은 아니라서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까지도 글감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그래도 너무 아무것도 없이 새해를 보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해라는 날은 만국 공통으로 무엇을 결심하고 계획을 짜기에 가장 좋은 날이 아닌가.

    그동안 하지 않았던 것들을 한번 생각해 봤다. 올해 불편했던 것들을 생각하니, 가장 먼저 자동차가 떠올랐다.

    ‘올해는 꼭 면허부터 좀 따야지.’

    자동차를 살 돈은 충분히 모았는데, 이런저런 일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면허를 따는 것을 잊어버렸다. 강남 쪽 면허시험장은 좀 빡세고, 송파 쪽 도로가 좀 널널하다고 들었으니 미리 수강 예약까지 해 놨다.

    1월 1일이라 그런지 할인 이벤트까지 겸하고 있다. 요즘 꽤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편이기는 한데, 그래도 세일을 거절할 이유는 없다.

    면허를 딴 후에는 뭘 해볼 수 있을까.

    일단 <아이언 타이거>를 깔끔하게 완결짓는 일이 제일 중요하겠지.

    9월부터 시작한 소설은 어느새 150화를 돌파해서 중반부로 달려들었다. 캐릭터들이 충돌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적들이 등장하는 시기다. 보통 작가들은 이 시기를 일컬어 ‘가장 위험한 시기’라고 부른다.

    초반부는 소재가 재밌고, 종반부는 엔딩이 궁금하지만, 중반부는 그런 게 없으므로.

    독자들이 가장 많이 떨어져 나간다는 거다.

    <전설의 보안관> 때도 가장 독자 이탈이 많았던 시기가 딱 중반부 시기였다.

    한 명의 독자도 이탈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이 이뤄질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일단 두 번째 소원에는 그렇게 적었다. 예전에 누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꿈은 반쯤 불가능하게 꿔야 그 절반은 간다고. 정확하게 그런 꿈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해리 포터>나 <왕좌의 게임> 정도의 작품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로 나오고, 몇몇 사람들이 <아이언 타이거>를 보며 작가의 꿈을 꾸게 되는 것. 그런 선순환.

    그것이 두 번째로 생각난 목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역시, C&N에게 한 방 먹이는 것 정도겠지. 앞에 두 개는 방법이라도 알겠으나, 마지막 부분은 방법조차 잘 모르겠다.

    그냥 열심히 하면 되나?

    물론 단순히 시간만 꾸역꾸역 쏟아붓는 정도의 ‘열심히’가 아니라, 다양한 방면에서 다양한 수단을 악착같이 사용하는 효율적인 ‘열심히’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옆에서 푸드덕-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역시 새장 속에 엎드려 있는 참치다.

    “삐이익.”

    “풀어 달라고? 안돼.”

    “삐이이익….”

    형우는 새장을 굳게 걸어 놨다. 엊그제 산책 중에 있었던 소동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새가 요크셔테리어한테 덤벼서 얼굴을 할퀴어 놓냐?”

    “삐이익!”

    억울하다는 듯이 참새가 따진다. 사실 이해는 간다. 요크셔테리어는 원래 작은 새 등을 잡기 위한 사냥개 혈통이니, 먼저 달려들었을 거다.

    참치가 다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냥 호로록- 도망칠 수도 있었던 일 아닌가. 굳이 개한테 달려들어서 얼굴에 생채기를 내고, 그 주인의 머리털을 한 움큼 뽑은 건 분명 혼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삐유우욱….”

    그래도, 저렇게 축 처져 있는 녀석을 보니 조금 마음이 약해지기는 한다.

    “다음부터 안 그럴 거라고 약속해.”

    “삐익!”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재주는 없으니, 저 삐익-! 의 말은 알아서 상상해야 할 테다. 그냥 ‘알았어!’ 정도로 알아듣기로 했다.

    그렇게, 새장을 묶은 매듭을 풀어 줬다.

    “포로로롱!”

    풀어 주자마자 제 스스로 새장을 열고 나오는 게 참 영리한 놈이다 싶다. 솔직히 말해서, 매듭도 혼자 풀 수 있었을 거다.

    그냥, ‘저 반성하고 있습니다!’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안 풀었을 뿐이겠지.

    “아, 맞다.”

    그렇게 말하며, 형우는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냈다. 예전에 <요그> 잡지 촬영 때 사용했던, 곰 인형이 그려진 파스텔 톤의 머그컵이다.

    -잘그락.

    소리를 들으면 알겠지만, 안에 들어있는 건 액체가 아니라 고체다. 수십 종의 말린 과일과, 그보다 더 많은 종의 견과류.

    참치를 위한 선물이다.

    “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뺘악?”

    그 안을 보고, 참치가 비명을 질렀다. 뒤로 벌렁 넘어가는 시늉을 몇 번 하더니, 이게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머그컵 주변을 세 바퀴쯤 돌았다가.

    “표로로롱!”

    하고, 컵 안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뺘악, 뺘악, 뺘아악!”

    “아주 헤엄까지 치네. 하긴, 즐거울 만도 하지.”

    먹을 것 사이에서 헤엄치는 기분은 어떨까? 내심 피자와 치킨 사이에서 헤엄치는 자신을 상상해 봤다.

    “...별로 안 좋을 것 같은데.”

    그래도 참치는 좋은 모양이다.

    “네가 좋다면 그만이지.”

    그런 참치를 바라보며, 형우도 막걸리 한 병을 치익- 하고 뜯었다. 평소에 즐기는 술은 아니었는데, 냉장고에 있었다. 아마 예전에 집주인 영감이 두고 간 술인 것 같다.

    “맥주 먹고 싶었는데. 맥주 사 올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나가기도 귀찮고 해서 그냥 있는 걸 먹기로 했다. 애초에, 연말이라 편의점이나 슈퍼도 대부분은 닫았을 테고.

    꼴깍, 꼴깍.

    크어어-!

    조금 김이 빠졌기는 해도, 새해에 처음으로 마시는 알코올의 느낌은 나쁘지 않다.

    “뺘악!”

    “…알았어.”

    안주로 머그잔 속 아몬드라도 몇 개 집어먹을까 했는데, 참치 녀석이 역정을 냈다.

    누가 사준 건데, 욕심쟁이 같으니라고.

    그래서 그냥, 깡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셨다.

    소주는 깡으로 먹으면 확! 하고 오는데, 막걸리는 이렇게 마셔도 그렇게 나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어어, 별거 아닌데?’

    그렇게 한 병.

    ‘뭐야, 나 사실은 술 잘 마시나?’

    그렇게 두 병.

    ‘누가 막걸리가 잘 취한다는데, 다 거짓말… 어어?’

    세 병 쯤에 다리가 휙, 풀려버렸다.

    지이잉- 지이잉-

    핸드폰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전화를 받지는 못했다.

    안주도 없이 깡막걸리를 마신 대가였다.

    * * *

    보글보글-

    뭔가가 끓는 소리.

    그리고 뒤이어, 구수한 냄새가 이어졌다.

    “…으응?”

    침대 위에서, 형우는 눈을 깜빡거렸다. 분명 어제 참치랑 술을 먹다 잠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가 희미했다.

    “으어억.”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뇌 속에서 비글 여섯 마리에 코카스패니얼 아홉 마리를 키우는 느낌이었다.

    “몇 시야, 지금.”

    시간을 살펴보니 오후 4시다. 어제 새벽 1시쯤 잤으니, 거의 15시간을 자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온다. 한 손에 들고 있는 국자가 눈에 띈다.

    “깼나.”

    “어어, 엄마?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

    “어떻게 오긴 어떻게 와. 기차 타고 왔다.”

    “문은?”

    “열려 있던데? 문 좀 잘 닫고 살아라. 도둑 들면 어쩌려고.”

    “아니, 분명 닫았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형우는 그대로 새장을 바라봤다.

    “너냐?”

    “뺘, 뺘약?”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참치가 고개를 돌린다. 분명 참치 짓이 분명했다. 참치는 참새인데도 영리한 개만큼이나 똑똑해서, 문을 열고 닫을 줄 안다. 심지어 전적도 있었고.

    어쩌면 어제 술을 먹인 것도 참치의 음모일지도 모른다. 어머니 전화를 안 받게 해서, 여기까지 달려오게 만들려는 그런 음모.

    그리고 그렇게 해서 저 작고 앙증맞고 귀여운 생명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너는 뭐, 참새랑 싸우고 있니?”

    참 실없는 놈 보겠다는 듯, 어머니가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서울 올라온 김에 얼굴이나 볼까 해서 들렀더니만, 전화를 안 받더라고.”

    “전화요?”

    아까 보니 뭔가 부재중 전화가 엄청 와 있긴 한 것 같았는데, 그게 어머니였구나.

    “그래, 그래서 집에 들러봤더니 술 먹고 퍼질러 자고 있기에, 그냥 내다 버리려다가 그래도 내 자식이니 해장국은 먹여야겠다 싶어서 끓이고 있는 중이었다.”

    “아아.”

    “슬슬 다 됐으니 와서 먹어라.”

    안 그래도 구수한 냄새에 위가 반응하던 참이었다. 메뉴는 황태와 무와 콩나물을 잔뜩 넣어 끓인 황태해장국이었는데, 터지지 않게 올린 계란 노른자가 특히 인상 깊었다.

    “많이 끓여 놨으니 놔뒀다 먹어라. 황태국은 오래 끓일수록 맛있거든.”

    “네엡.”

    대충 대답하고 허겁지겁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어 밥을 호로록 먹었다. 형우도 나름 요리를 해서 먹는 편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30년 넘게 요리를 해 온 어머니 손맛에는 한참 못 미쳤다.

    “어쩜 이렇게 맛있어요? 치킨스톡 넣었나?”

    “치킨스톡? 그게 뭐냐?”

    “어떻게 치킨스톡 안 넣고 이런 맛이 나지.”

    순식간에 밥 한 그릇을 죄다 비우고, 밥을 더 퍼다 담았다. 겨우겨우 빼놓은 살인데, 다시 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왔다.

    ‘뭐, 최근 많이 뺐으니 좀 쪄도 되겠지. 안 빼고 먹는 것보단 낫잖아?’

    라며, 일단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기는 했다.

    “그나저나 형우야, 무슨 걱정이라도 있니?”

    “갑자기 왜요?”

    “원래 너 혼자 술 먹는 애 아니었잖아.”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걱정은요. 갑자기 그런 기분이 들어서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런 기분이 왜 들었냐고.”

    “요 녀석이.”

    모든 어머니는 자식 관련해서는 눈치가 귀신이라는데, 형우의 어머니는 더했다. 귀신을 넘어서 염라대왕쯤은 될 것 같다.

    운전면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거랑 술 먹은 거랑 뭔 상관이니?’라고 물어볼 테고, C&N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분명 걱정할 테다.

    “사실은요, 요즘 소설이 좀 막혀서요.”

    그래서 소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차피 어머니는 <아이언 타이거>를 안 읽으니까, 적당히 넘어갈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흐음, 어느 부분이 막히는 거니? 주인공이 A급 헌터가 된 이후부터 재중파랑 계속 얽히는 부분 말하는 건가?”

    “…예?”

    “주인공이 검기를 쏘는 부분은 참 좋았는데, 내 생각에도 그다음은 약간 꺾이더구나. 아, 그리고 중간에 나왔던 빨간 머리 남자는 재중파 두목인 서재중 맞지?”

    “…에, 예?”

    형우는 그만 숟가락을 떨어트릴 뻔했다.

    뭐야, 어떻게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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