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그렇게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누군가가 말없이 가게 바깥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가자마자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벽 틈새에 쭈그리고 앉아 한숨을 푹 내쉰다.
“에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방금까지만 해도 하하호호 함께 웃었고 떠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표정으로 궁상을 떠는 사람은, 오늘 로맨스 판타지 장르상을 수상한 천우희다.
“역시 천우희 작가님도 나오셨네요.”
옆에서 그렇게 말을 거는 사람은, 현대판타지를 쓰는 안띵, 안재욱이다.
“언제 나왔어요? 못 봤는데.”
“흐흐.”
안재욱의 오른손에는 반쯤 탄 담배가 들려 있다. 어두운 밤에는, 그게 마치 반딧불이처럼 보인다.
그리고,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은 동시에 이해한다.
같은 이유로, 이곳을 빠져나왔음을.
“우와, <아이언 타이거>가 대상까지 받을 줄이야!”
안재욱이 너스레를 떨었다. 천우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은 일이죠.”
“맞아요. 축하하는 자리가 퍽 좋더라고요.”
“그런데 왜 나왔어요?”
“분해서요.”
안재욱은 역시, 자기감정에 솔직하다.
“좋은 건 좋은 거고, 분한 건 분한 거니까. 천우희 작가님은 어때요?”
“분할 게 뭐 있어요?”
천우희가 짐짓 밝은 표정으로 말한다.
“형우 걔, 제가 가르친 거예요.”
“맞아요. 이야기 들었어요.”
“그리고 뭐, <아이언 타이거>도 재밌기는 한데 스킬은 제가 더 낫고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죠.”
“그래서 저도, 제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거기서 말이 멈춰버렸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점점 낮아진다. 말의 끝부분이 불명확해진다.
하지만 그럴수록, 감정은 오히려 선명해진다.
언어와 감정이 반비례 그래프를 그리고, 그 끝에서 천우희는 결국 어떤 말도 끝맺지 못한 채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추운 겨울이라 그런지, 눈물과 피부의 온도차이가 격심하다. 평소보다 눈물이 두 배는 뜨겁다.
“다음엔 꼭 이길 거예요.”
“당연하죠, 꼭.”
그렇게 두 작가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뒤로, 누군가가 남몰래 돌아선다. 자리에서 없어진 작가들을 찾기 위해 나온 편집자, 지원이다.
“좋은 일이겠지.”
두 사람 모두에게 저 분함은 원동력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바라본다.
오늘도, 눈이 내렸다.
* * *
“눈 오네.”
C&N의 부회장실. 의자에 앉은 윤정식이 바깥을 보며 투덜거린다.
“눈만 오면 아주 짜증나는 기억이 올라온단 말이지.”
강원도에서 근무했던 2년 반의 시간이 떠오른다.
사실, 기업가로서의 지위를 이용했다면 빼지 못할 것도 없었으나, 윤정식은 그러지 않았다.
후에 책잡힐 일은 혹여나 만들지 말라는 아버지, 윤태환 회장의 말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노인네.”
그리고 그 2년 반이 지난 후, 윤태환과 윤정식 사이에서는 메꿀 수 없는 골이 생겼다.
누나와의 사이가 벌어진 것도 그쯤이다. 누나는 동생보다는 아버지를 더 좋아했고, 늘 아버지의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들어오라고 해.”
그 말과 동시에, 부회장실의 문이 열린다.
또각또각, 들려오는 하이힐 소리.
“어때 누나, C&N의 사장이 된 소감은?”
“뭐, 나쁘지 않네.”
오늘의 주주총회 결과로, 박재진 사장은 완벽하게 그 세력을 잃었다.
출판 공장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건지 그냥 퇴직을 선언하기에 그 두 손에 퇴직금을 두둑이 들려 보냈다.
측은지심이라기보다는, 지금까지 C&N에 했던 헌신에 대한 보답이다.
“시상식은 잘 끝냈어?”
“시상식이랄 게 있나, 그냥 상만 주면 끝인데.”
네이비 웹소설 어워드가 열리는 날, C&N에서도 전속 작가들에 대한 자체적인 시상식을 진행한다.
감각이 빠른 사람이라면 눈치챘겠지만, 당연하게도 우연이 아니라 노린 거다.
“오늘 누가 받았지?”
“성민준, <리턴 투 디재스터>쓴 사람.”
“아아. 예전에 서지원이 담당했던 그 사람이로군. 아직 안 나갔나?”
솔직히 상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성민준도 곧 김형우나 천우희처럼, C&N을 박차고 스패로우 팩토리로 가 버릴 텐데.
드르륵-
윤정식은 그대로 찬장을 열어 위통에 좋은 내복약을 하나 꺼내 쭉 삼켰다. 빼앗긴 작가들을 생각할 때마다 속이 쓰렸다.
“이번에 그쪽 친구들이 어워드를 휩쓸었다던데.”
“나도 들었어.”
형우의 2관왕과 천우희의 장르상, 그리고 서연수의 신인상 수상 소식은 이미 들었다.
“…어느 정도 선전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위험부담을 지면서도, 웹소설 어워드 날짜에 맞춰 C&N 시상식을 진행시킨 이유기도 하다.
더 이상의 작가 이탈은 막아야 했으므로.
요컨대, 오늘의 행사는 흔들리는 C&N을 다잡기 위한 일종의 단합대회였던 셈이다.
그리고, 절반 정도는 성공했다.
“작가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더라고. 눈빛이 다 그렇던데, 역시 C&N이다.”
“그렇겠지. 작가 뺏긴 건 좀 그렇지만, 그 정도 빠진다고 무너질 회사가 아냐.”
주주총회를 통해 사내 의견을 하나로 모으고, C&N 내부 행사를 통해 아직 건실함을 증명했다.
힘을 모으고, 건재함을 과시했다면, 그다음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견실함이 아니라, 강함을 보여줄 차례다.
“스패로우 팩토리라….”
아직 완벽히 회사가 정리되지는 않았으니 대놓고 때리지는 못하겠지만, 슬슬 견제구 한두 번 정도는 던져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선생님, 일단 영원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할게요. 보통 영원이라는 말을 설명할 때, 대부분은 짧게 설명하잖아요? 끝나지 않는다거나, 혹은 상상도 못 하게 긴 시간이라거나. 하지만 인도의 신화를 보면요, 이 개념을 엄청 재미있게 설명하거든요. 어떤 식이냐면, 이래요. 세상의 끝에는 한 변이 10리에 달하는 거대한 다이아몬드 산이 있대요. 그리고 거기에는 100년에 한 번, 독수리가 날아와 부리를 갈고 가지요. 그렇게 해서 그 다이아몬드 산이 다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이 영원의 1초라고 하더라고요. 멋지지 않아요?”
“멋지네. 그런데 정수야.”
형우가 하하 웃으며, 정수를 바라봤다.
“그거랑, 네 소설 주인공이 갑자기 독일어로 대화하는 거랑은 무슨 상관인데?”
“그러니까, 짧은 글도 길게 쓰면 가끔 멋있다는 거죠.”
“고작 그 이유 때문에, 주인공을 친구랑 대화하다가 갑자기 독일어를 쓰는 미친놈으로 만든 거야?”
“…독일어 쓰는 주인공, 좀 멋있지 않아요?”
“정수야, 이건 멋있는 게 아니라 꼴깝이야. 당장 지워.”
“히잉.”
투덜거리면서도, 정수는 자신의 소설 속 독일어를 몇 개 지웠다.
“거기, 두 번째 줄, 그건 왜 남겨?”
“이건 독일어가 아니라 스페인어인데요.”
“…빨리 지워.”
웹소설 어워드 행사가 끝난 뒤로부터 며칠이 지났을 때, 갑자기 정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난 일주일 동안 머리를 감싸 쥐고 소설 한 편을 완성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당신의 그림자를 조심하세요>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공포를 테마로 한 라이트노벨류 소설이었다.
‘얘는 중간이 없네.’
소설을 읽은 첫 번째 소감이었다. 쓰고 싶은 걸 찾아서 쓰라고 했더니, 진짜 쓰고 싶은 걸 잔뜩 썼다. 스페인어와 독일어를 섞어 쓰는 주인공이라니, 너무 오글거려서 끝까지 읽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일단 끝까지 읽기는 했다는 뜻이다. 약간 오글거리고 모난 데가 있었지만, 저번에 쓴 소설들과 달리 확실하게 힘이 느껴졌다.
“독일어만 빼면, 일단 좋네.”
“정말요?”
정수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칭찬 한마디에 이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역시 학생답다.
아니면, 그만큼 형우의 칭찬이 드문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히 상상력이 엄청 좋았어. 첫 번째 에피소드 부분.”
<당신의 그림자를 조심하세요>의 첫 번째 이야기는 ‘타자기 두드리는 귀신’이라는 이야기다.
눈이 퀭하게 충혈되어서는 허공에 대고 타자를 쳐대는 한 귀신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 묘사가 상당히 뛰어났다.
“누가 보면 진짜로 귀신 보고 쓴 줄 알겠어.”
“아, 아니에요! 그런 거 본 적 없어요!”
정수가 과민하게 반응했다. 그 모습을 보며 형우가 허허, 웃었다.
“당연히 못 봤겠지. 세상에 허공에 대고 타자 치는 귀신이 어디 있겠어?”
* * *
정수와 헤어지고 난 뒤, 형우는 스패로우 팩토리의 사무실을 향해 택시를 잡았다. 오후라 그런지 도로가 한적하기에, 슬쩍 창문을 열었다. 열린 틈 사이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쏟아져 약간 피곤한 기분을 환기 시켜주는 기분이다.
창문 바깥으로 크리스마스 트리들이 반짝거린다. 저것들이 보인다는 건 올해가 거의 끝나간다는 거다. 트리를 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 좋은 선물이라도 하나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소소한 기대감이 불쑥 솟아오르곤 한다.
“다 왔습니다!”
하남시의 오피스텔 단지 앞에서 택시가 멈췄다. 스패로우 팩토리에 들어가기 전,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 한 캔을 통째로 샀다. 지원은 분명 ‘작가한테 편집자가 선물 받는 건 도리에 어긋난다고요!’라고 할 테지만, 옆에 있는 혜선은 ‘와, 음료수다. 잘 먹을게.’라며 금세 홀짝거릴 테지.
혜선이 좋아하는 음료수는 소나무 맛이 나는 음료수지만, 차마 그걸 살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냥 적당히 에너지 드링크 정도면 되겠지, 싶다. 그대로 음료수를 들고 스패로우 팩토리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들어가자마자, 전화기를 붙들고 소리를 지르는 지원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그러니까! 이게 말이 되냐고요! 계약을 맺기로 해 놓고 이런 식으로 3일 전에 파토 내는 경우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저기요, 여보세요? 아오, 진짜!”
화가 난 듯이, 지원이 전화기를 내려놓던 지원은, 그제야 형우를 발견했다.
“형우 작가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 정수네 집에 들렀다가 겸사겸사 잠깐 왔는데, 무슨 일이 있나요?”
“그게…….”
잠깐 망설이던 지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쉰다.
“어차피 작가님도 알게 되실 일이니까요. 여기 화면 좀 보시겠어요?”
“이게 뭐죠?”
“스패로우 팩토리 일정표에요.”
빈틈없는 일정표에서 지원의 꼼꼼함을 엿볼 수 있었다. 최근의 일정은 플랫폼 계약이 많았다. <아이언 타이거> 코미북스 런칭이나,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의 나비노블 계약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이건 좀….”
그 내용은 희망찼지만, 적힌 날짜가 절망적이었다. <아이언 타이거>의 코미북스 런칭 예정일은 12월 21일. 그러니까 오늘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확인했을 때 코미북스에는 <아이언 타이거>에 관련된 내용이 없었다. 그러니까, 답은 하나.
“코미북스가 <아이언 타이거>의 런칭을 퇴짜놓은 건가요?”
“네, 상의도 없이요.”
“이유는요?”
“이미 1차 플랫폼에서 잘 팔린 작품이라 수익성이 없다나 뭐라나. 헛소리죠.”
헛소리라는 말에는 형우도 동의했다.
플랫폼이 갑자기 미친 게 아니라면, 웹소설 어워드에서 대상까지 받은 작품을 어거지까지 부려가며 퇴짜놓을 이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C&N이군요.”
형우의 말에, 지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C&N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번째 순서는 C&N보다 작은 규모의 플랫폼을 압박하는 일이었다.
“3대 플랫폼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퇴짜에요.”
지원의 말에, 형우의 표정이 언짢아졌다.
“치졸하네요.”
“그리고 영리하기도 하죠.”
기업과 기업 간의 다툼에서, 치졸하다거나 비겁하다는 말은 따지자면 극찬이다. 최소한의 기회비용만으로도 충분한 타격을 입히고 있다는 뜻이니까.
지금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플랫폼들 중에 C&N의 협박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플랫폼이 몇 개나 될까? 일단 3대 플랫폼인 커피콩페이지, 네이비시리즈, 달피아는 가능할 테다. 그리고 그 외에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제 <전설의 보안관> 수익이 어떤 식으로 나왔었죠?”
“잠시만.”
기다렸다는 듯이 자료를 꺼내드는 건 혜선이다.
“일단 1차 플랫폼인 달피아에서 40%가 나왔고, 2차유통 시작하고 커피콩페이지랑 시리즈에서 각각 20퍼씩이 나왔어. 그리고 중소규모의 6개 플랫폼에서 나머지 20%를 채웠고.”
알고 있는 것과 대충 비슷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3대 플랫폼이 C&N에 휘둘릴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사라진 것은, 6개 플랫폼이 가져다주는 20%의 수익이다. 에게, 얼마 안 되네? 라고 넘어가기에는 그 숫자가 꽤나 크다.
단순히 수익의 문제가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 스패로우 팩토리 작품들은 중소 플랫폼에 소설을 못 넣는다더라- 같은 안 좋은 소문이라도 퍼지기 시작하면, 회사의 이미지는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테니까. ‘대박 작가들이 많은 출판사’라는 위명보다는, ‘수익 20%가 사라지는 출판사’라는 오명이 훨씬 파급력이 클 거라는 건, 굳이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스패로우 팩토리의 전업작가로서든, 공동대표로서 생각하든, 무조건 이 사태는 해결해야만 하는 사태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이미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일을 저지른 사람까지도 똑같다.
“전에 윤정식이 웹툰 가지고 저희 협박했을 때 기억해요?”
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하죠. 어떻게 잊겠어요. 지금도 미안해 죽겠는데.”
“미안할 필요는 없어요. 아무튼, 그때 문제 어떻게 해결했는지 혹시 기억하세요?”
“당연히 기억하죠. 의재 작가님을 스토리 작가로 섭외해서 웹툰을 처음부터 다시 그렸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아.”
이 정도만으로도, 눈치 빠른 지원은 형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했다.
“그러니까, 플랫폼을 새로 만들자고요?”
“네. 다행히도 저희한테는 예전에 플랫폼 사업을 했던 유망한 인재가 한 명 있잖아요?”
“그거 혹시.”
뒤에서 이야기를 듣던 혜선이 눈을 깜빡거렸다.
“나 말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