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26화 (126/200)
  • #125

    애석하게도, 제임스 영의 말투는 선을 꽤 넘었지만 행동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았다.

    턱을 돌려버릴 수준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 아니겠습니까.”

    “만난다고 다 인연은 아닐걸요?”

    “하하하, 농담도 참.”

    하지만 연수의 인내심을 알 리가 없는 제임스 영은, 눈을 피하면서 귀밑머리를 넘기는 연수의 행동이 자신에 대한 첫 인상적 호감이라고 단정을 지어버렸다.

    ‘한 90%는 넘어 온 것 같고, 이제 무슨 말을 한다?’

    그러다가 머리에 번뜩 스치는 게 있었다.

    연수가 소설가라는 것이 생각난 것이다.

    ‘공통분모에 대해 이야기하되, 상대보다 내가 조금 더 잘한다는 걸 강조해라! 인간은 보통 자기보다 능력 있는 이성에게 끌린다!’

    예전에 열심히 읽었던 픽업아티스트 관련 서적에 나온 글귀였는데, 지금에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흠흠,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저는 사실 소설을 20권 넘게 쓴 롸이터입니다. 질로 치면 세 질 작가지요.”

    “아, 그렇군요.”

    “혹시 레이디는 소설을 몇 질이나 쓰셨는지?”

    “하나요.”

    “하하하, 이제 막 시작하는 비기너로군요.”

    버터와 된장이 섞인 듯한 이상한 뉘앙스의 목소리로, 제임스 영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래서 당신께 조언을 좀 드리고 싶은데.”

    “조언 필요 없는데요.”

    “아하하하, 설마요. 자신감이 넘치시는 분이시로군요. 그래도 소설 제목 정도는 알려 주시지요. 혹시 모르잖습니까? 제가 읽고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연수가 그런 제임스 영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무시하고 가면 쫓아오고, 기분 나쁘게 하려고 해도 허허허 웃고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드레스 걱정만 안 했으면 이미 멀리 도망가 버렸을 텐데, 하필 입은 옷이 치렁치렁한 드레스라 그것도 못 했다.

    “소설 제목만 알려 주면, 그냥 갈 거죠?”

    “듣고 나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작가님.”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요, 됐죠?”

    “아, 멸망한 세계의 무도… 예?”

    잔뜩 폼을 잡던 제임스 영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 분명히 3개 플랫폼 소설 랭킹의 상위권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1위를 할 정도로 대중성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신인의 패기와 심도 높은 액션신으로 엄청나게 많은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제임스 영이 지금까지 쓴 세 질의 책들을 모조리 합쳐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판매량을 기록한 작품이기도 했다.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라니….”

    아까까지 잘난 척을 하던 제임스 영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그 모습을 본 연수가 그대로 되물었다.

    “나만 말하니까 좀 억울하네, 그쪽은 소설 뭐 쓰셨는데요?”

    “제 소설 말입니까? 그게.”

    “자기 소설 제목도 몰라요?”

    연수가 혀를 하, 하고 찼다.

    “뭐야, 이상한 사람이네. 작가가 맞기는 해요?”

    “저… 작가는 맞습니다.”

    “근데 왜 영어 잘하는 척해요? 해외파인 척하려면 뭐 이공계 칼럼에서 하던가, 한글로 먹고 사는 작가들 사이에서 해외파인 척은 왜 하는지. 아까부터 좀 궁금했거든요.”

    “그게….”

    “애초에 해외파인 건 맞아요?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한국대학교 학생인 연수는, 당연하게도 영어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았다.

    그리고 제임스 영은 애석하게도 영어를 잘 못했다. 제임스 영이라는 것도 해외 이름이 아니라 고등학교 때 영어마을에서 붙여준 이름이었고, 뉴욕은 여행 삼아 4박 5일로 가본 게 전부였다.

    당연히, 폭풍처럼 쏟아지는 연수의 영어 앞에서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뭐야, 영어도 뻥이에요?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그, 그게 말입니다.”

    “됐어요. 더 대화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네요.”

    그렇게 말한 뒤, 연수는 뚜벅뚜벅 걸어 연회장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제임스 영, 아니 영재홍은 그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뭐야, 방금 봤어?”

    “웃기네. 이거 나중에 소설 소재로 써야겠다.”

    “대박.”

    주변에서 그 이야기를 몰래 들은 사람들이 쑥덕거렸다.

    “이익.”

    재홍의 얼굴이 그 이름처럼 붉게 물들었다. 이대로라면 놀림거리가 되고 만다. 자존심을 회복할 수단이 필요했다.

    주위를 싹 훑어보는데, 딱 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초짜 놈이 하나 보였다.

    “저기요, 그쪽.”

    “네, 저요?”

    “그쪽도 작가죠?”

    딱 맞는 정장을 위아래로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는데 왜 그러시죠?”

    “처음 보는 얼굴이라서요. 처음 오셨죠?”

    “그렇습니다.”

    “역시나. 초짜들은 얼굴을 보면 티가 나거든. 내 이름은 영재홍이오. 20권 넘게 쓴 작가지. 그쪽은 몇 권이나 쓰셨소?”

    “어, 이제 2질째 쓰고 있습니다.”

    “2질이라. 완전 병아리로군.”

    그렇게 말하며, 영재홍은 훗, 하고 콧바람을 불었다.

    “제목이 뭡니까? 혹시 내가 들어봤을 수도 있으니.”

    “제 작품 이름이요?”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내 자식 같은 작품인데, 아무리 못 해도 부끄러워하면 안 되지. 어쩌면 내가 좀 조언을 줄 수도 있고.”

    “아, 그런 거라면 언제든 감사하지요.”

    “험험, 원래는 쉽게 안 해 드리는 건데….”

    그렇게 말하며, 영재홍은 흡족한 표정으로 신인 작가를 바라봤다.

    여기서 멋지게 조언에 성공한다면, 체면 회복이 어느 정도는 가능할 테니.

    “제 작품은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제목이, 아이언….”

    …타이거?

    모르면 간첩 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올해 최고의 히트작 중 하나다. 영재홍의 등뒤로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이, 이게 그쪽이 쓴 소설이라고?”

    “네. 소개가 늦었네요. 김형우라고 합니다. 필명은 참새치고요. 아, 선생님은 혹시 쓰신 소설 제목이?”

    “그, 그게…….”

    큰일 났다,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아이언 타이거>와 <전설의 보안관>을 쓴 참새치라면, 자신이 지금까지 쓴 소설 20권의 매출을 세 배로 곱해도 못 따라잡는 작가가 아닌가.

    여기서 뭔가 조언을 해 준다면 ‘영재홍이 자기 주제도 모르고 대박 작가 앞에서 잘난 척을 잔뜩 했다지 뭐야!’라고 소문이 날 테고, 그냥 도망가면 ‘영재홍 그거 완전 여우 같은 놈이라더라. 자기보다 못한 작가들 앞에서만 당당하다던데?’라며 소문이 날 테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오직 하나.

    “어이, 거기!”

    또다시 타겟을 바꿨다.

    이번 타겟은 젖은 수건을 들고 표정을 찡그리고 있는 여자였는데, 드레스를 입은 걸 보니 역시 작가인 것 같았다.

    “그쪽도 소설가시오?”

    “소설가 맞는데.”

    좋지 않은 표정과 반말 일색의 말투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잘 됐군. 나는 소설 20권을 쓴 영재홍이라는 사람이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괜찮다면 소설에 대한 조언을….”

    “내 소설을 조언해준다고?”

    방금까지 지원에게 잔소리를 잔뜩 듣고 나온 천우희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이거 미친 새끼 아냐? 가뜩이나 기분도 안 좋은데, 당장 안 꺼져?”

    삼진아웃이었다.

    * * *

    웹소설 어워드.

    그 평가는 출판 관련 전문가 평점 40%에, 독자 투표 60%로 이루어진다. 데뷔 연차가 3년 이내인 소설가들은 신인상의 대상이 되고, 로판, 로맨스, 판타지, 현판, 무협, 그리고 특별부문의 6개 부문에서 장르상을 하나씩 뽑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연재된 모든 웹소설을 통틀어 대상을 선정한다.

    -올해의 웹소설 신인상 후보는 총 다섯 명이었는데요, 그중에서 이번 어워드 신인상 수상작은….

    -서연수 작가,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입니다!

    예상치도 못했던 호명에, 스패로우 팩토리의 사람들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역시 가장 놀란 건 당사자인 연수다. 어떻게 내가 뽑혔지, 이건 선배가 받아야 하는 상인데? 하는 표정으로 형우를 바라봤다.

    “어떻게 선배가 아니라 제가….”

    “으음, 난 알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건 천우희다. 이런 자리에 온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니만큼, 상황 파악이 빨랐다. 연수의 작품은 물론 훌륭하지만, 형우를 제치고 상을 받을 정도는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아마 신인상 대신 다른 상을 주려는 모양이지. 아마도 장르상 정도?”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첫 작품으로 장르상이라니. 역시 난 놈은 난 놈인가 싶다.

    “역시 그렇겠죠?”

    천우희의 말을 들은 연수의 표정이 확 펴졌다. 그런 연수를 보며 형우가 씩 웃었다.

    “빨리 가서 상 받아. 사람들 기다리잖아.”

    “아, 저 수상 소감도 준비 안 했는데.”

    “흐흐, 가서 말 잘해야겠네.”

    그렇게 말한 뒤, 당황해하는 연수의 등을 살짝 쳐 줬다.

    “지금 수상자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인데요? 저게 연기는 아니겠지요? 하기야, 저게 연기면 아마 여기는 웹소설 시상식이 아니라 아카데미 시상식이었겠죠!”

    진행자의 넉살에 장내가 웃음에 잠겼다.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앙다물고 그사이를 걸어 나가는 연수가 퍽 귀엽게 느껴져서, 형우는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유만만이시네? 만약 내 말이 틀렸으면 어쩌려고.”

    앉자마자, 천우희가 짓궂게 말했다.

    “신인상 말야. 그냥 연수 작가님이 탄 걸 수도 있어. 상이야 주는 사람 마음이니까.”

    “에이 뭐, 그러면 어때요. 연수도 반쯤은 제가 가르친 건데, 청출어람은 축하할 일이잖아요.”

    “말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말하며, 천우희는 가방을 뒤져 거울 하나를 형우에게 내밀었다.

    그 안에 비친 형우의 표정은, 여유롭기보다 조금 긴장한 듯이 보인다.

    “너는 가끔 욕심이 없는 척 군단 말야. 사실은 아닌 주제에.”

    “으음.”

    “연수 작가님은 어두워서 네 표정을 못 본 모양이지만, 만약 봤으면 저렇게 웃으면서 못 나갔을걸.”

    자신의 얼굴을 보니, 확실하게 무슨 눈앞에서 보물 뺏긴 해적 선장 같다.

    더 이상 숨기는 것도 모자란 짓이리라.

    “후우, 진짜 장르상은 받아야 할 텐데요.”

    “으음, 나도 네가 못 받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 아! 연수 작가님 수상 발표한다.”

    연수는 훌쩍거리며 수상 소감을 말했다.

    “이, 일단 상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 딸꾹!”

    울다가, 딸꾹질도 하고, 허공을 보고 한숨도 쉬고, 눈물을 닦으며 ‘왜 자꾸 흘러내려, 짜증 나게 이씨.’라고 발언해서 사람들에게 소소한 웃음도 줬다.

    “무엇보다도, 형우 선배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는 못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선배.”

    그렇게 말하며, 연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준비된 스포트라이트가 이쪽을 비추는 게 꽤 부담스러우면서도, 기쁜 마음이 든다.

    상을 뺏겨서 분하면서도, 동시에 자신한테 감사한다고 하니 대견하기도 하고. 역시 사람의 감정이란 곧잘 상반된 감정이 드는 법인가 보다. 하지만 뭐, 지금 가장 혼란스러운 건 연수겠지.

    “너도 열심히 했어.”

    형우가 진심을 담아 박수를 쳤다. 그걸 시작으로, 박수소리가 퍼져나갔다. 눈물과 박수는 쉽게 전염되는 법이다.

    짝짝짝-!

    축하해요, 축하해!

    사람들의 박수 사이에서, 연수가 천천히 내려오다가, 드레스에 발이 걸려 휘청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공중에서 반 바퀴 돌면서 중심을 잡았다.

    “방금 뭐야?”

    “미친, 서커스인가?”

    “퍼포먼스 쩌네.”

    아무래도, 두고두고 화자가 될 법하다. 그 뒤로, 진행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공연장을 메웠다.

    “다음에는 각 부분 장르상입니다! 첫 번째 로맨스 판타지 부분의 수상작은-”

    “<망국의 테라피스트>, 천우희 작가님입니다!”

    그 호명을 들은 천우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걸어 나갔다. 연수와는 퍽 비교되는 걸음걸이다.

    “흐음, 사실 대본을 써 오긴 했는데 방금 죄다 고쳤거든요. 첫 대본에는 ‘장르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대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썼었는데. 이 대본은 다음에 써야겠어요.”

    능숙한 듯, 농담처럼 그렇게 말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에게 감사를 전하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내려오기 전, 천우희가 사회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대상 못 받은 것 때문에 심술 좀 부리고 싶은데. 사회자님, 여기서 정치 발언이나 사회 이슈 말해도 되나요?”

    “아이고! 작가님! 참아주세요! 그랬다가는 내년 어워드 못 열릴지도 모릅니다!”

    “으흠, 그래서 말하려는 건데.”

    “안 돼요!”

    “그러면 한번 참죠 뭐.”

    그렇게 말하며, 천우희와 사회자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마도, 미리 약속되어 있던 퍼포먼스인 듯하다. 그 의도도 대충 예상이 간다.

    예전에,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자들이 정치성 다분한 발언을 쏟아내어 논란이 됐었던 적이 있다. 아마도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겠지.

    “꽤 센스 있는데요.”

    “그렇지. 경고문 같은 거 돌리는 것보다 훨씬 세련되지 않았어?”

    돌아온 천우희가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시상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로판에 <망국의 테라피스트>, 로맨스에 <라이벌 회사 사장은 우리 집에 산다>, 현판에 <목마른 헌터가 우물 판다>, 무협에 <매화신검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판타지에 <저 드래곤 아닌데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특별 장르 부문에는.

    “생소한 서부극 장르죠? 참새치 작가의 <전설의 보안관>입니다!”

    형우가 소설 주인공이었다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역시, 예상대로군.’이라고 중얼거리거나 ‘운이 좋군.’ 정도로 반응했겠지만.

    웹소설 주인공이 아니었던 형우는 그만.

    “휴우, 다행이다, 진짜로.”

    하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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