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자고 일어난 사이 창밖에는 눈이 이만치 쌓였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벌써 12월이구나.”
형우가 중얼거렸다. 올해 1년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밀도 높은 1년이었달까.
1월과 2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순문학 공모전에 낼 소설을 썼다.
3월에 웹소설을 시작했고, 첫 작품인 <서울낭인괴담>을 말아먹었다.
4월, 처음으로 <전설의 보안관>을 집필했다. 출판사와 계약을 맺었다.
그렇게 9월 말, <전설의 보안관>을 완결지었다.
연재 기간 약 200일, 총 280화.
거의 하루에 1.5화씩 꾸준히 연재했던 셈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말도 안 되는 집필 속도였다.
그리고 10월, 바로 <아이언 타이거>의 집필을 시작했다.
11월, C&N과의 인연을 끊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스패로우 팩토리를 설립했다.
그리고 12월.
“선배, 제 옷 어때요?”
“어어, 예쁘네.”
“치이, 그게 다예요?”
말은 저렇게 했지만, 오늘의 연수는 정말로 예뻤다.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 평소에 안 하던 귀걸이까지 찼다.
“선배는 또 그 양복이네요. 아버지가 주신 거.”
“그렇지 뭐. 중요한 일에는 이걸 입어야 다 잘 되더라고.”
“그럼 들어가 볼까요?”
꿀꺽.
형우는 침을 삼키며, 눈앞에 있는 거대한 건물을 바라봤다.
강남구 삼성역에 위치한 코엑스 오디토리움.
그 앞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네이비 시리즈, 올해의 웹소설 어워드]라고 쓰여 있었다.
* * *
“여기에요, 여기! 형우 작가님!”
멀리 스패로우 팩토리의 식구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게 보였다. 천우희와 안띵, 정진욱 등의 작가들은 물론이고 혜선과 지원 역시 초대받았다.
그리고 그사이에 약간 어색한 듯이 끼어 있는 정수까지 보였다. 어디서 났는지 제 몸에 맞는 정장까지 차려입고 왔다.
“흐음, 거의 다 초대받았나 보네요.”
네이비 시리즈의 웹소설 어워드에 초청받는 것은 출판사마다 작가 한둘 정도라고 들었는데, 스패로우 팩토리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대받은 셈이다. 그 어마어마한 잠재력에 지원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그나저나 형우 님 따로 초대하신 분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 곧 올 거예요.”
형우의 초대권은 총 세 장이다. 각각 어머니와 정수, 그리고 현수를 위해서 썼다.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는 좀 있다가 들어갈게요.”
“네네, 자리 잡아두고 있을게요.”
그렇게, 코엑스 앞에서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렸다. 건물도 넓고 사람도 많아서 자칫하면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다. 그 수많은 인파들, 대부분이 작가나 출판사 직원이라고 생각하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멀리서, 고마운 친구의 얼굴이 보인다.
“와 줘서 고맙다.”
두 달 넘게 준비한 40번째 공모전이 실패한 후, 모든 사람들은 말했다. 괜찮다고, 조금만 더 하면 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정작, 형우의 아픔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친구인 현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글에 영혼이 없고, 지지부진하고, 어울리지 않는다며 무너질 듯 위태로운 자신에게 질책을 퍼부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조금 너무하다 싶기도 했지만, 그 말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하면 또 목에 서리라도 앉은 듯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이다.
“아, 어머니도 곧 오실 거야.”
녀석이 새삼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 형우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어머니? 우리 엄마?”
“응. 오다가 만났거든. 지금은 화장실 가셨어.”
“네가 우리 엄마를 어떻게 알아?”
“그 반대야.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시더라고. 내 사진 보신 적 있으시다는데, 형우 친구냐고 물어보시길래 여기까지 같이 온 거야.”
“맞다. 그랬었지. 기억났다.”
아버지의 제삿날인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술김에 그런 말을 한 기억이 났다. 어머니가 네 아빠는 친구가 많았는데 너는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것 같다고 하시기에, 형우는 휴대폰을 뒤져 자신의 친구들 사진을 한참이나 자랑했더란다.
그래 봐야 뭐, 현수랑 연수, 의재 셋이 전부였지만. 그다음부터는 뭐라고 했더라, 아마 친구라는 건 숫자보다는 얼마나 관계가 깊으냐가 더 중요한 거라고 강변했을 거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너 혹시 왕따 당하는 건 아니지?’라고 묻던 것이 기억난다.
‘딱 그 정도의 시시콜콜한 대화였는데.’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계셨을 줄이야.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억력은 상상 이상이라더니. 약간 헛헛하고 민망한 기분이 들어 슬쩍 웃었다.
“어어, 저기 어머니 오시네.”
현수가 가리킨 건물 맞은편에서, 다급한 듯 걸어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저번 잡지사 인터뷰 때처럼 화장을 진하게 하고 힐까지 신으셨다.그 모습이 강남 한복판에서도 어색하지가 않다.
평소라면 민준 삼촌이 함께 와 줬을 텐데, 안타깝게도 오늘 민준 삼촌은 선약이 있다고 들었다.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은 간다.
“오느라 고생 많았죠?”
“고생은 무슨, 요즘 기차 편하더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역시 아침 일찍 일어나 꾸미랴 기차를 타랴, 피곤하셨는지 하품을 길게 내뱉는다. 그 부분은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이제 좀 제법 맞는구나.”
“뭐가요?”
“옷.”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손을 뻗어 아들의 옷깃을 어루만졌다. 처음에는 입는 법도 서툴고 다소 큰 것처럼 느껴지는 옷이었지만, 이제는 딱 맞는다.
“좀 아버지 같나요?”
“아니.”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그 옷은 네 아버지한테도 컸어. 빨면 줄어든다고 처음부터 큰 걸 샀었거든. 그런데 고급 옷이라 줄어들지가 않더구나.”
“그래서요?”
“옷에 맞게 살을 찌우겠다고 했지.”
거기까지만 하고, 모자는 이야기를 끝냈다. 그 뒷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는 그 이후 형우와 만났고, 이장이 되었고, 첫 소풍을 가는 아들을 위해 손수 김밥을 싸다가 소금 대신 설탕을 넣어 엉망으로 만들었고, 아들의 자전거를 고쳐주기 위해 트랙터 체인을 몰래 훔쳤다가 엄마한테 등짝을 맞았고, 형우가 중학교 때 병에 걸려서 돌아가셨다.
하지만, 이야기는 절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후로도 어머니는 혼자 남아 아들을 키워냈고, 아들은 아버지와의 추억을 소설에 담아 세상에 퍼트리고 있었으니.
아들이 아버지의 이야기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의 이야기가 되는, 끊임없는 이야기의 선순환 속에서, 모자는 서로에 대한 끝없는 애정을 느꼈다.
“넌 모로 봐도 네 아버지랑은 달라. 네 아버지는 너처럼 근사했던 적이 없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아들의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러니, 분명 자랑스러워하실 거다.”
“아직 상도 못 받았는데요? 그러면 상 안 받아도 되나?”
“네 아버지는 상을 안 받아도 자랑스러워했겠지만, 나는 아니다.”
어머니가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결과까지 좋아야지.”
* * *
네이비 시리즈 웹소설 어워드는 아카데미 시상식이나 청룡영화제 등의 커다란 행사에서 모티브를 얻어 개최되기 시작한 행사다. 그래서 그런지, 그 모습이 퍽이나 고풍스럽다. 참가자 중에서는 드레스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꽤 많이 눈에 띄었고, 중앙에는 레드카펫까지 깔려 있다.
“카펫 기준으로 시상 후보는 오른쪽에 모여 앉으면 되고요, 초청객은 왼쪽이래요.”
미리 와 있던 지원이 설명했다. 스패로우 팩토리의 사람들 중 수상 후보는 형우와 연수, 천우희까지 세 명뿐이다.
“어라, 정진욱 작가님이나 안재욱 작가님은요?”
“그분들은 그냥 초청받기만 했어요. 수상 후보는 아니지요.”
“엥, 글 잘 쓰시는 분들이잖아요.”
“신인상은 이미 예전에 받았거든요.”
그렇게 말한 건 안재욱이었다.
“다른 작가님도 마찬가지고요.”
“어, 상이 신인상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신인상 빼면 남는 게 대상이랑 장르 부문 상밖에 없는데, 솔직히 그거 받을 정도는 아니라서요. 뭐, 내년에나 도전해 봐야죠. 형우 님도 꼭 좋은 상 받으시기를 바랄게요.”
그렇게 형우와 악수를 나눈 뒤, 안재욱은 초청객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야, 넌 왜 괜한 말을 하냐?”
그 모습을 본 천우희가 형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작가들 자존심 센 거 몰라? 자기 작품이 수상 후보 아닌 것만 해도 배 꽤나 아플 텐데.”
“…역시 그렇겠죠?”
“당연하지. 에휴.”
천우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상 같은 거 신경 안 쓰고 글 쓰는 사람들이 있긴 해. 약간 경쟁을 안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말야, 내가 본 스패로우 팩토리 작가들은 죄다 안 그렇거든. 다들 어떻게든 이겨 먹으려고 눈이 무섭다니까.”
“……역시 그렇죠?”
“하지만 뭐, 노리고 한 것도 아닌데 안재욱 작가님도 알아주겠지. 그리고 솔직히….”
“솔직히?”
“상 못 받은 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배 아픈 건 어쩔 수 없지만, 이것도 뭐, 좋은 자극이 되겠지. 그러니까 가슴 펴. 여기 사진 찍히면 오래 남을 텐데, 그리 좀비 같아서야 되겠어?”
그렇게 말하며 천우희가 씩 웃는다. 하기야 천우희는 안재욱과 형우의 경력을 합친 것보다 더 오래 작품 생활을 해 온 사람이니까. 이런 일에 나름의 해답을 갖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약간 잔인하게 들리기는 해도, 상을 못 받은 게 잘못이라는 천우희의 말이 또 엄청 틀린 말도 아니다.
“여긴가 보네.”
스패로우 팩토리- 라고 쓰여진 테이블에는 의자 세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천우희 작가님. 혹시 연수 못 봤어요? 아까부터 안 보이던데.”
“서연수 작가님? 글쎄, 아까 웬 남자랑 같이 있던데. 포마드 엄청 많이 발라서 빨간마스크도 깜짝 놀라서 도망칠 것 같은 남자였는데. 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거 아닐까?”
“아는 사람이라….”
뭐, 문창과 학생이니 알고 있는 웹소설 작가 한두 명쯤 있어도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다 싶다.
“왜, 너도 다른 작가들 만나보고 싶어?”
“솔직히, 좀 그렇죠.”
“시작까지 30분 남았어. 산책이라도 하고 오던가. 아마 흡연장 같은 데 가면 작가들 많을걸.”
“아하, 그러면 그쪽으로 한번 가 볼게요. 천우희 작가님은 같이 안 가실래요?”
“여기 있을래. 담배 냄새 배는 것도 싫고, 드레스 망가지는 것도 좀 무서워서.”
그렇게 말하며, 천우희는 와인글라스에 담긴 물을 홀짝거리며 마셨다.
“5년 전에 신인상 받을 때, 드레스 찢어먹었다가 지원 언니한테 진짜 죽기 직전까지 잔소리 들은 적이 있거든.”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는 것도 아니고, 죽기 직전까지 들은 잔소리는 대체 뭐예요?”
“궁금하면 네 바지 한번 찢어 보든가. 말리진 않을게.”
“사양할게요. 이거 엄청 소중한 바지라서.”
“소중한 바지?”
“그렇다고 제가 스펀지밥인 건 아니지만.”
“…뭐야.”
천우희가 정색했다.
“그걸 개그라고 한 거야?”
“…재밌을 줄 알았는데. 아무튼 시간 맞춰 올게요.”
쩝, 소리를 내고 형우는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혼자 남은 천우희는, 아무 생각 없이 혼자 물을 홀짝거렸다.
‘1년 만에 신인상이라….’
신인상이라고 말은 하지만, 진짜 신인이 신인상을 받는 일은 의외로 드물었다. 보통은 2년 차나 3년 차에 받는 게 보통이다.
근데 저 녀석은 1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시상식 후보에 오를 정도로 부쩍 성장해 버렸다.
‘신인상 받는 건 맞겠지? 혹시 뭐 장르 상이라도 받는 거 아냐?’
생각해 보니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전례도 있고.’
보통 신인에게는 신인상을 주는 게 관례지만, 가끔 엄청 대단한 작품이 나오면 종종 신인상을 건너뛰고 장르상을 주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천우희가 생각하기에, 형우는 충분히 장르상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찌 됐건 대단한 녀석이긴 하니까.”
천우희는 형우와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떠올렸다.
‘저랑 한판 붙죠.’
‘어떻게 이길 줄 알았냐고요? 천우희 작가님 팬이니까요.’
‘천우희 작가님 도움이 없었으면, 인터뷰 이렇게 잘하지 못했을 거예요.’
‘작가님 덕분이에요.’
‘친하죠, 친해요. 그렇죠?’
…생각해 보면 1년 사이 일이 많기도 많았군.
이상하게 그 기억들을 떠올리니, 얼굴이 약간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글라스에 든 게 물이 아니라 술인가?
그 후로도 기억은 기억을 물고 천천히 떠올랐다.
‘천병옥 선생님을 교수로 임용하는 건 어떻습니까? 천우희 작가님은 그대로 두고요.’
‘은혜라니요, 우리 친구 하기로 했었잖아요.’
‘…소중한 옷이거든요. 제가 스폰지밥은 아니지만.’
“풉.”
갑자기 뜬금없이 떠오른 형우의 개그에 천우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들을 때는 재미 없었는데, 이상하게 지금 와서 곱씹어 보면 웃겼다.
“헉, 이거….”
그 바람에,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이 쏟아져서 드레스에 약간 튀었다.
“크, 큰일 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천우희.
슬픈 예감은 늘 틀리는 법이 없다.
눈을 치켜뜬 지원과 딱,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언니, 그, 그러니까 이건….”
“작--- 가--- 니이이임---!”
멀리서, 지원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 * *
“그러니까, 제 이름은 제임스 영입니다. 아, 어릴 때 미국 유학을 했거든요. 한국 이름은 뭐였더라….”
코엑스의 로비, 포마드 냄새가 심하게 나는 영재홍이 연수의 앞에서 잔뜩 폼을 잡았다.
“아, 맞다. 영재홍이지요.”
“…그러시구나. 저는 아까 말했다시피 조금 볼 일이 좀 있어서….”
“오우, 노노노. 금방 끝낼게요. 혹시 레이디도 작가신지?”
“아, 예. 그건 맞죠.”
“저도 롸이터, 랍니다? 같은 작가끼리 잠깐 스타-봑쓰에서 커피라도 한잔 어떠신지? 한국 사람들은 스타봑스 좋아하잖아요? 뉴욕에서는 그냥 평범한 카펜데.”
“아하, 그러시구나…….”
연수가 귀밑머리를 넘기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본 제임스 영, 영재홍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귀밑머리를 넘기는 건 호감의 증거라지?’
아쉽게도, 그 생각은 틀렸다.
연수는 흔들거리면서 시야를 가리는 귀밑머리를 잠깐 치워뒀을 뿐이다.
여차하면, 턱에 주먹을 꽂을 때 불편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