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24화 (124/200)

#123

마음이 좀 급해졌다.

새벽 세 시를 넘어, 네 시, 다섯 시까지. 형우는 오랜만에 루틴을 어기면서까지 글을 썼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로 모든 게 끝이 날지도 몰라. 좋은 놈이든 나쁜 놈이든, 게이트 열리면 뒤지는 건 똑같을 테니.]

이상하게, 몸은 지쳤는데 글은 잘 써졌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더러운 일을 하는 놈들은 세상 사람 전부가 자기처럼 더러울 거라고 생각해. 그게 이 세상이 개 같은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그러면 어떻게 하죠?]

[뭘 어떻게 해? 좋은 놈이든, 나쁜 놈이든. 일단은 살아남아야지. 그래야 뭘 증명할 거 아니냐.]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아이언 타이거>의 104화를 마무리 지었다.

벌써 세 화나 연달아 썼다. 이왕 쓴 김에, 한 화를 더 쓰려고 손을 움직였다.

어떻게든, 최대한 빠르게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리고 작가인 자신이 ‘열심히 했다’라고 보여줄 만한 건 기껏해야 소설의 글자 수 정도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 예정된 날은 찾아오고 말았다. 게이트가 열린다.]

[하지만, 모두가 넋 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불가능에 가깝지만, 목표라는 게 있긴 하다. 그리고 목표와 목적이 있다면, 아무리 희박하더라도 그걸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그렇게 철호는 게이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중간에 떠오르는 것은 공태준이었다. 공태준의 유학은 2년 후에….]

어느새, 머릿속의 풍경이 뒤바뀐다. 온갖 음모와 모략이 득실거리는 <아이언 타이거> 속 세상에서, 지금 형우가 살고 있는 현실로.

“후우.”

한숨을 쉬면서 목을 꺾었다. 두두두둑- 하는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괜찮다고 정신력을 북돋아 봐도, 그것과 별개로 몸이 이미 지쳐버린 모양이다.

“여기도 음모와 모략이 우글거리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뭐, 나를 위협하는 게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게 좀 다른가.”

사실 정확히 따지면, 사람이라기보단 기업이다.

적의를 가진 기업이란, 어쩌면 몬스터보다 더 무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 앞에서 형우가 할 수 있는 건.

“아쉽게도 소설뿐이지.”

말벌은 침을 쏜다. 그 상대가 아무리 방호복을 똘똘 두르고 있어도, 말벌이 사람을 상대로 총을 쏘거나 칼을 휘두를 수는 없다.

그런 허무맹랑함을 바라는 것보다 어떻게든 방호복의 틈새로 파고들어 정확히 침을 꽂아 넣는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다.

형우는 그대로 두 눈을 감고, 그 위에 뜨거운 수건을 올렸다. 눈물샘이 찔끔, 떨린다.

“뺘아악.”

늦은 새벽임에도, 참치는 잠들지 않았다.

대신, 형우를 보고 짧게 울었다.

‘그러다가 다쳐.’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평소에는 시니컬하고 날카로운 녀석이지만, 사실 형우가 힘들어할 때 그 모습을 가장 많이 지켜보는 녀석이다.

“참치야, 안 자고 왜 깨 있어. 내가 노트북을 너무 세게 두드려서 그런가? 그렇다면 정말 미안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내가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 뭐라도 해야….”

그렇게 말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코끝이 따끔거렸는데, 다행히 코피는 안 났다.

지난 몇 달간 체력을 충분히 키워두지 않았더라면,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하…….”

형우가 천장을 바라보고 한숨지었다.

사실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건 안다. 여섯 시까지 작업을 해도, 결국에는 그만큼 더 늦게 일어날 뿐이라는 걸.

하지만, 오늘은 왠지 이렇게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써지지도 않는 글, 노트북을 살짝 밀친 후에 그대로 커튼을 걷었다.

태양은 아직 붉은 줄에 불과하다.

“윤태준과 윤정식, 그리고 C&N.”

하나하나가 벅찬 이름들이지만, 눈을 돌릴 수도 없는 이름이다.

그렇게 바깥을 바라보니, 태양이 조금씩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샐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밤을 새웠지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본 것은 몇 번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태양은 언제든지 자신이 떠오르는 걸 볼 수 있도록 매일같이 떠오른다.

그냥 왠지, 오늘은 저 모습을 보고 싶었다.

“뺘아아악….”

“아, 미안.”

잠에 취해 고개를 까딱거리는 참치의 새장을 조심스럽게 덮어준 후, 형우는 이불을 펼쳤다.

그리고 세 시간 후에 눈을 떴다.

“맞다, 오늘 기말고사였지….”

아무래도 미친 짓을 단단히 한 것 같았다.

* * *

대학교 4학년 2학기의 기말고사는 다른 학년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무엇보다, ‘시험 잘 봤어?’, ‘나 이번 시험은 좀 망했네.’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게 끝이기 때문이다.

“애들아, 잘 가!”

“졸업 후에도 꼭 연락해야 해!”

“하아, 나 졸업 못 하는 거 아냐?”

대학교와 졸업.

이 마지막 시험을 끝으로, 학생이라는 신분은 졸업이다.

물론 대학원에 가서 대학원생이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조금 다른 별세계 이야기다.

가끔 교수님 좋다는 대학생들을 볼 수 있는데, 대학원생들은 하나같이 지도교수에 대한 살인 충동에 시달리는 걸 보면, 같은 학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실례가 아닐까 싶다.

그 새로운 길의 기로 앞에서, 두 명의 남자들이 마치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학교 바깥으로 걸어갔다.

날밤을 새운 형우와 의재였다.

평소에도 그리 의욕적이라고 할 만한 학생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몸의 뼈 절반 정도가 고무 재질로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험 이야기는 이제 듣기도 싫다.”

“나도 그래. 그냥 시험이라는 단어 자체가 싫어.”

“그럼 말을 하지 마. 이제부터 시험이라고 말하면 벌금 만 원이다.”

“좋네, 그거.”

그렇게 중얼거리며 교문을 나가던 차, 형우의 휴대폰이 위잉 하고 울렸다.

세상을 만만하게 보던 고등학생, 김정수였다.

“형우 작가님! 저 오늘 결과 나왔어요!”

“무슨 결과?”

“기말고사요!”

“아, 시험 잘 봤어?”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의재가 흐흐흐, 웃으면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오.”

쓸데없는 지출 만 원이 생겼다.

* * *

글을 쓴다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역시 공부보다는 나았다.

소설은 시간을 투자하면 적어도 몇 화는 써낼 수 있지만, 공부라는 건 도저히 발전했다는 느낌이 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아들, 공부 중이야?”

앙증맞게 깎인 사과가 잔뜩 올라가 있는 접시를 든 중년 여인이 아들의 방문을 두드렸다.

“사과 좀 먹고 할래?”

“잠시만, 영어 듣기 중이라서!”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김정수의 어머니. 서민정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게 된 것은 기껏해야 2주일밖에 안 됐다.

2주 전에 정수가 글을 쓰겠다며 학교를 때려치울 때는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프로게이머를 하겠다며 게임만 하다가 여전히 백수로 살고 있는 옆집 청년이 생각나서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무슨 변덕인 건지, 가출했다 3일 만에 돌아온 아들은 갑자기 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벌써 2주일.

처음에는 작심삼일인가 하고 긴가민가했지만, 지금은 아들의 결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정수의 꿈이 바뀐 건 아니다. 여전히 그녀의 아들은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다만, 계획도 대책도 없이 ‘어떻게든 되겠지.’ 식은 아닌 것 같다.

낭만과 치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시절이 드디어 지났다고 해야 하나.

“영어 듣기 끝났니?”

“엉, 사과 땡큐.”

그렇게 말하며 사과를 아삭거리며 집어먹는 아들은, 어머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오로지 책상 위에 놓인 EBS 교재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서운하다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그런 생각은 조금도 안 했다. 오히려.

‘내 아들이 이렇게 어른이 됐구나.’

라고, 대견한 마음만이 차오를 뿐이었다.

같은 곳을 보고 달린다고 해도, 전략을 갖고 질주하는 경주마와 취한 듯이 로데오를 일삼는 야생마를 보는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결과가 나왔다.

평균 3.7등급.

옆집 아들은 시험만 봤다 하면 전교 1등이고, 뒷집 딸은 어디 수학대회에서 상을 받아서 대학교 프리패스권이 있다지만, 정수의 어머니는 그런 말에 별로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맨날 6등급을 전전하던 아들의 성적 앞자리가 3으로 바뀌었다는 것만 해도 기뻤다.

‘그게 다 은인 덕분이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때맞춰 초인종이 띵동 하고 울렸다. 오늘은 그 은인이 집에 찾아오기로 한 날이었다.

띵동-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때맞춰 초인종이 울렸다.

‘아들 말로는 엄청 잘나가는 작가인데다가 삶의 교훈까지 준 대단한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아마 요즘 말로 ‘인싸’라고 부르는 활달한 분위기의, 딱 봐도 리더처럼 보이는 건실한 청년일 것이 분명하….

“안녕하세요.”

“어, 예. 그… 김형우 작가님?”

“맞습니다.”

…지 않았다.

누가 골방에 19년 정도 가둬두고 글만 쓰게 시킨 것처럼, 툭 치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모습이다.

얼굴이 마치 칵테일 같다. 절반은 햇빛을 못 봐서 하얗고, 절반은 다크서클 덕에 까맣다. 게다가 취한 듯이 비틀거리기까지. 보기만 해도 안쓰럽다.

서민정은 그 불쌍해 보이는 작가를 위해 저녁 메뉴를 바꿨다. 원래는 젠틀하게 스테이크에 샐러드나 구워 줄 생각이었는데, 프라이팬을 치워버리고 냄비를 꺼내 국물을 끓였다.

힘없을 때는 원래 국밥이 최고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을 이기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이순신 장군 덕이고, 두 번째는 국밥 덕분이다. 국밥은 명품 패딩만큼 뜨끈하고, 강남의 집만큼 든든하고, 뭣보다도 맛있다. 혼자서 의식주를 다 해결하는 베어그릴스 같은 음식이다.

스테이크용 쇠고기를 그대로 썰어버렸다. 어느새 방에서 나온 아들이 물었다.

“엄마, 스테이크 한다고 하지 않았어?”

민정은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 얼굴을 봐라. 스테이크 못 먹인다.”

“허억.”

그제야 형우의 얼굴을 본 정수도 민정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마치 인간극장에 나올 법한 지친 표정.

작가란 본래 저런 표정으로 살아가는 생물인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미래였다.

사람이 어떻게 눈에 초점이 없지?

초점 없는 눈으로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형우를 본 정수의 표정이 약간 숙연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꽤나 공포스러웠다.

그 손가락 모양은 누가 봐도 키보드를 치는 모양다.

천천히 키보드에 대입해 보면 ㅇ,ㅓ,ㄴ,ㅌ,ㅏ,ㅇ,ㅣ,ㄱ,ㅓ

그러니까, 저런 지경이 돼서도 무의식적으로 소설을 생각하고 있다는 거다. 아니, 저 정도면 사실상 쓰고 있는 게 맞았다.

‘이거 미친 사람 아냐?’

자신이 동경했던 미래의 끔찍한 이면을 바라보는 느낌.

‘…아니면 다른 소설가도 다 이런가?’

왜 작가들 평균수명이 짧은지 한 번에 이해되는 이미지라고 해야 하나.

형우의 손가락은 마치, 지킬 박사의 약처럼 정수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소설 쓴 순간, 내 상상은….

한적하게 소설 쓰면서 여유있는 커피 한잔….

나만의 꿈이, 나만의 소원이.

….

사라져갔다, 연기처럼.

* * *

평균 등급 3.7.

“약속은 지켰구나.”

“…네.”

자랑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정수는 조금 주눅이 들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많이 힘들었나?’

사실 정수가 힘든 건 공부 때문도 있지만, 형우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 가장 세상 다 산 듯한 표정. 그것 때문에 미래에 대한 고민을 다시금 하고 있는 거였지만.

“나도 약속은 지켜야겠지. 어워드 같이 가자.”

그것을 알 리 없는 형우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소설 쓴 거 한번 보자.”

“소, 소설이요?”

“응. 소설.”

정수의 표정이 까맣게 물들었다.

어쩌면 이 길이 틀린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일단 네 소설에는 주제가 부족해. 그러니까 일단 주제를 잡는 게 가장 좋을 거야. 지금까지 싫어하는 걸 하면서 좋아하는 게 뭔지….”

“어, 그게요, 작가님.”

그 말에 형우가 씩 웃었다.

“응? 정수야 무슨 할 말 있니?”

“그, 그게요. 그 소설가 있잖아요.”

“있잖아요?”

“그게 좀….”

“그게 좀?”

“생각보다….”

“생각보다?”

형우가 정수의 말을 툭툭 끊었다.

반박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

혹시 장난인가, 싶어 눈을 바라봤다.

‘허억!’

형우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그 진심 100%의 눈빛을 보는 순간, 정수는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거, 도망쳤다가는 이 사람한테 죽을지도 모른다.’

이미 빠지기엔 늦어버렸다고.

그렇게 세 시간 동안, 조용히 앉아서 형우의 소설 강의를 들었다.

* * *

정수와 헤어지고 난 후, 형우는 그대로 현수한테 전화를 했다.

“어, 형우야, 일 잘 끝났어?”

“응. 네 말대로 하니까 잘 됐어.”

“내 말대로면, 아 그거?”

이곳에 오기 전, 형우는 현수에게 사춘기 학생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법을 물어봤다.

저번에 너무 오버했다가 연수에게 놀림당한 것이 생각나서였다.

현수의 답은 간단했다.

“상대 말의 끝부분만 따라 하면 돼.”

“그거면 충분해?”

“당연히 그냥 따라 하는 건 안 되고, 진심으로 상대를 바라보면서 따라 해야지.”

그래서 진심으로 녀석을 바라보면서 끝말을 따라 했다.

그리고, 현수의 말은 맞았다.

“역시 현수 너한테 물어보기를 잘했어. 네 말대로 걔가 한 말 뒷부분만 따라 하니까 대화가 잘 통하더라.”

“오, 정말?”

“그래, 아무튼 내일 올 거지?”

“당연히 가야지.”

“그래, 그때 보자.”

그렇게 말한 뒤 형우는 전화를 끊었다.

내일은 드디어 기다리던 웹소설 어워드가 시작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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