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23화 (123/200)

#122

“쌈자를몰라아아! 왜! 널 지킬 쌈자를몰라아!”

군대에서도 떼창이 나온다는 전설적인 밴드 ‘비즈’가 부른 명곡이 술에 잔뜩 취한 의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네.’

형우는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의재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지금까지 C&N에 홀로 남아 겪었던 마음고생들을 모두 털어 버리려는 듯이, 의재는 수많은 노래를 불렀다.

며칠 사이 남자를 몰라 야윈 너를 보낸 후 택시를 타고 어디를 가야할 지 기사한테 물어보는 의재. 2030 대한민국 남자들의 노래방 스페셜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면 ‘그냥 다들 부르는 노래 아냐?’라고 생각했겠지만 의재와 자주 놀아 본 형우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의재는 성격상 분위기가 죽는 칙칙한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별노래보다는 ‘기브미더머니’에나 나올 법한 힙합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게 의재 취향이다.

MBTI로 치자면 내츄럴 본 EN이라고 할까.

“행복하지마아아요오오!”

목이 걱정되긴 하지만, 폭주한 의재를 말릴 순 없다.

감정 잡고 발라드 부르는 의재는 형우의 입장에서는 거의 화난 연수만큼이나 무섭다.

2학년 땐가, 의재가 1년 넘게 사귄 여자친구랑 헤어졌을 때가 딱 지금과 같았다. 그 때는 한 시간동안 발라드만 불렀다.

그런데 지금은 벌써 한 시간 반 째다. 어찌 보면 여자친구랑 헤어진 것보다 친구와의 의리를 더 높게 친다는 거긴 한데, 마음은 기쁘지만 솔직히 말해 귀가 떨어질 것 같다.

그래도 이제 슬슬 시간이 끝나가니 다행이다.

[노래방 아저씨의 서비스! 30분 추가되었습니다!]

…아저씨가 마음씨가 참 좋았다. 좋은 마음씨만큼 좋은 센스까지 갖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역시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다. 이대로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술을 일부러 피한 것이 무색하게 작업시간을 잃고 말 것이다.

그대로 마이크 전원을 내리려는 순간.

“역시 여기 있었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노래방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어어?”

한창 하이라이트를 부르던 의재조차 멈췄다.

부모님이 부탁해도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는, 혜성의 <가슴 아린 이야기>의 하이라이트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 손에 태블릿 PC를 들고 달려온 여성은, 그만큼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신혜선?”

“네가 왜?”

형우는 온 것이 혜선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의재는 혜선이라는 인물 자체에 놀랐다.

형우와 함께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만난 건 거의 7, 8년 만이었으니까.

“여기는 어떻게?”

“둘이 만난 걸 보니 학교 근처라고 생각했고, 둘 다 전화를 안 받는 걸 보고 시끄러운 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둘을 합치면 후보지는 두 개밖에 안 남아.”

“두 개?”

“노래방, 아니면 디스코팡팡.”

“…디스코팡팡?”

“거기 없더라. 그래서 이쪽으로 왔어.”

의재가 약간 어이없다는 듯 혜선을 바라봤다. 몇 년 만에 만난 거였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러면 여기는 왜 온 거야?”

이상한 상황은 이제 질렸다는 듯 지친 표정을 짓는 형우를 보며, 혜선은 일단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그대로 자리에 앉은 혜선은 태블릿 PC를 꺼냈다. 반주가 흘러나오는 노래방 기계는 꺼 버렸다.

소설가인 김형우와, 만화가인 의재.

7년 전, 형우가 아직 소설가가 아니고 의재가 아직 만화가가 아닐 때부터 친했던 친구들이다.

거기에 이 자리에 없는 연수와 현수까지 더한다면 꽤 그럴듯한 모습이다.

1학년 때에는 그저 철부지의 모임이었지만, 지금 와서는 다들 나름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대로 계속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세상이란 게 그렇게 쉽지는 않은가 보다. 문제의 시작은, 한 시간 전 스패로우 팩토리에 걸려온 전화 한 통이었다. 아니, 사실 문제는 그 이전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지금에서야 알아차렸을 뿐이다.

“C&N의 사장이었던 박재진이라는 사람한테 연락이 왔는데. 공태준이 성을 갈았다는 모양이야.”

“성을 갈았다고?”

형우가 되묻자, 혜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이제는 공태준이 아니라 윤태준이야. 그리고 그 뜻은, 윤정식이 윤태준을 C&N의 후계자로 내정하고 있다는 뜻이지.”

모두가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 뭔가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반쯤 큰일이 난 후가 대부분이라고.

* * *

“잘 다녀와라, 태준아.”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공항에서, 윤정아는 자신의 아들을 꼭 껴안았다. 태준은 아직도 자신의 바뀐 성이 익숙하지 않은 듯, 연신 여권을 만지작거렸다. 공태준, 아니 윤태준은 오늘 한국을 떠나 미국의 대학으로 간다.

비록 한국대학교에서는 퇴학당했지만, 윤정아와 윤정식이 나름의 애를 쓴 덕분에 편입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한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절반 정도는 기부입학이다.

“어차피 사람들은 미국 대학 잘 몰라. 대충 미국에서 나왔다 그러면 다 대단하다고 생각할 거다. 그러니까, 딱 2년만 있다가 오렴. 오, 내 아들!”

윤정아가 감정에 복받친 듯, 자신의 아들을 끌어안았다. 그대로 어머니와 헤어진 후, 윤태준은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에 올라탔다.

부우웅-

비행기가 떠오르고, 땅이 점점 멀어졌다. 윤태준은 눈을 부릅뜨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김형우.”

그 이름을 발음하자마자, 명치께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었다. 지난날 그 자식에게 얻어맞았던 부위였다.

벌컥벌컥-

퍼스트 클래스에 비치된 고급 샴페인을 싸구려 콜라처럼 꼴깍거리며, 윤태준은 끓는 속을 달랬다. 요즘 인터넷 기사를 보면, 종종 녀석의 이름이 보였다.

[달이 빛나는 밤에 출현한 스타 작가!]

[소설가 김형우, 웹소설 최초로 오늘의 소설에 등재!]

[MBS 오디오 북 11주째 1등을 유지하는 비결은? <아이언 타이거>에 대해 말하다!]

[스패로우 팩토리, <전설의 보안관>에 이어 <아이언 타이거>웹툰화 준비 중.]

예전에는 그것들을 보면 속이 쓰려왔는데, 지금은 정 반대로, 오히려 우스운 느낌이 들었다.

‘지금 열심히 즐겨 두라지.’

딱 2년이다. 어머니의 말대로라면, 딱 2년만 미국에서 버티면, 자신은 정식으로 정식 삼촌에게 C&N의 후계자 수업을 듣게 될 것이다. 심지어 이 후계자 구도에는 경쟁자조차 없다. 만약 있다고 해도, 어머니가 잘 닦아서 정리해 둘 테다.

일개 웹소설 작가 나부랭이와 거대 출판사 대표라. 그 승패를 점치는 것에 의미라는 게 있을까.

‘돌아오는 날이 곧 복수의 때다.’

그렇게 생각하며, 윤태준은 안락한 의자에 기대어 손톱을 다듬었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손이다.

- * *

“윤태준이라.”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형우가 천천히 되뇌었다. 그 모습을 본 혜선이 말했다.

“생각보다 놀라지 않네.”

“놀랐어.”

다만 당황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느 정도는,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떻게 하기는.”

혜선의 질문에 형우는 손가락을 비틀어 뚜둑, 소리를 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언뜻 자조처럼 들리는 말이지만, 이 말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처럼, 계속해서 글을 써야지.”

“그게 다야? 그래 봐야 너는 일개 작가고, 상대는 커다란 회사의 대표인데?”

“일개 작가니까야.”

형우가 혜선의 말을 정정했다.

“일개 작가니까. 난 J.K롤링도 아니고 셰익스피어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더 노력해야지. 아무리 C&N의 대표라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아무리 꽉 막혔더라도 지금 당장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심플한 대답이었지만, 근거 또한 희박했다.

하지만, 혜선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형우의 손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디마디에 굳은살이 박혀 있고, 자주 쓰는 손의 새끼손가락 마디가 완전히 닳아 있는, 작가의 손.

혜선이 물었다.

“형우 너, 요즘도 손에 피 날 때까지 글 써?”

“아니.”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피 안 난지 오래 됐어. 완전히 굳은살이 박혔거든.”

그 말을 들은 혜선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미쳤구나.”

그 손이야말로, 그의 말을 증명해주는 가장 큰 근거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박재진 사장이 지원에게 전달해 준 소식은 두 개였다. 첫 번째는 윤태준이 C&N의 후계자로 내정되었다는 거였고, 두 번째는 형우보다는 오히려 스패로우 팩토리에 치명적일 만한 소식이였다.

“제38회 C&N 주주총회가 열린다고 해. 부회장이었던 윤정식이 지금까지 자신의 누나인 윤정아와 완벽히 손을 잡고 주주들을 휘어잡으려고 하는 게 목적인 것 같네. 솔직히 말하자면, 난 거의 끝난 것 같아. 허허.”

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C&N에 재적하던 시절 지원이 타던 라인의 꼭대기에 있던 박재진 사장이었다.

C&N의 표절 논란이 터진 순간, 박재진 사장은 윤정식을 찍어누를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능력으로 뛰어오른 박재진이지만, 결국 그 능력이 부족해 고꾸라졌다.

윤정식은 순식간에 자신의 사돈 격인 공판석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는 암암리에 주주들을 설득했다.

무엇보다도, 꽤 오랫동안 표면상으로 반목해오던 자신의 누나인 윤정아와 손을 잡았다는 소식이 치명타였다.

나름 막으려고 수를 써 봤으나, 번번이 허사였다. 마지막으로 준비했던 수는 가장 믿고 있었던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무산당했다.

게다가 지원이 C&N을 뛰쳐나간 순간부터, 주변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됐다.

“자네가 나가는 것까지 윤정식이 예상했을까?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확실한 건, 그 후로 나보다 더 빨리 움직인 건 부회장이었던 거지.”

공판석을 버리고, 지원도 함께 쳐냈다.

그런 육참골단의 결단을, 윤정식은 해냈고 박재진은 실패했다. 그래서 결국 윤정식이 이겼다.

“정치란 건 본래 그 누구도 믿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더군.”

“박재진 사장님, 혹시 일이 없으시면 작은 출판사지만 저희 스패로우 팩토리라도….”

“됐네. 퇴직금은 충분히 받았어. 잠깐 낚시라도 다녀 볼까.”

박재진은 그러니까, 너무 능력이 좋았다.

실패라는 것도 어쩌면 처음 맛보는 것이겠지.

그 충격에 가라앉는 것도 이해가 아예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과거 지원이 입사했을 때부터 끌어주던 능력 있는 상사가 저렇게 미끄러진 것은 정말 아쉬웠지만, 지금 걱정해야 하는 건 그게 아니다.

문제는 지금 지원이 있는 스패로우 팩토리다. 지금까지는 윤정식이 스패로우 팩토리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C&N 내부가 정리되면 또 모르는 일이다.

자신이 아는 윤정식은, 일벌백계一罰百戒라는 개념을 구체화해놓은 듯한 인간이다.

분명 자신에게 치욕을 줬던 스패로우 팩토리를 가만히 두진 않을 거다.

주주총회를 이끌고, 회사의 내부를 정리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아마도… 끽해야 6개월. 그마저도 박재진 사장이 나가기 전 회사의 내부를 한번 헤집어 놨기에 겨우겨우 벌어놓은 시간이다.

그 6개월 사이에 C&N만큼 커다란 기업이 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인간과 말벌 정도의 차이로는 만들어 놓아야 한다.

네가 나를 죽이기는 쉽겠지만, 너도 침 한 방은 쏘여야 할 거다.

기업인들은 의외로 조심스러운 데가 있어서, 아주 약간의 결함만 있어도 일을 벌이는 데에 망설이게 된다. 그 망설임을 조금씩 키워서, 6개월이라는 유예를 최대한 늘려야 한다.

하지만, 아주 크게 늘릴 수는 없겠지. 지원은 그 기간을 기껏해야 2년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해외로 나갔다는 후계자인 공태준, 아니, 윤태준이 돌아오는 시기다.

잠깐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그때까지 적어도 업계 5위. 소위 말하는 ‘1티어 출판사’의 반열에는 합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C&N에게 먹히고 말 테니까.

그대로 노트북을 잡고 작업을 시작했다. 지금 시간은 두 시 반. 당연히 오후가 아니라 새벽이다. 퇴근시간을 여섯 시간 넘게 어겼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어차피 잠은 죽어서 자는 거다.

농담이 아니라, 이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내면 정말로 2년 후에는 죽어 나자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사장님, 퇴근 안 하셨네요.”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회사의 유일한 직원인 혜선이다.

“혜선씨, 왜 집으로 안 가고 왔어요? 그냥 가라니까.”

“C&N한테 두 번이나 당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이미 예전에 자신이 세웠던 스타트업 하나가 C&N에 의해 박살난 경험이 있는 혜선으로서는, 지금의 소식을 듣고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아까까지는 대체 뭘 해야 하나 싶었는데,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 데 있더라고요.”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작가인 형우는 글을 쓰고, 사장인 지원은 회사를 키우고, 의재는 만화를 그리고, 자신은, 그런 모두를 서포트한다. 그렇게 회사를 굴려나가는 거다. C&N보다 크게.

그 말을 들은 지원이 흡족하게 웃었다.

“포부는 좋지만, 그래도 너무 늦었는데.”

“그러는 사장님도 퇴근 안 하셨네요.”

“웹툰 관련해서 조금 볼 게 있어서요.

“으음, 그림작가 구하고 계신 거죠? 저도 몇 명 생각해 보기는 했는데, 누가 더 괜찮을지는 모르겠네요. 작품 보는 눈은 사장님이 훨씬 나으니까. 목록 넘겨드릴까요?”

“네. 부탁드려요.”

“넵.”

“오늘 하라는 뜻은 아니에요.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고, 건강 챙기셔야죠.”

“사장님.”

혜선이 지원의 말을 탁, 하고 끊었다.

“지나친 건강은 작업에 안 좋아요.”

앞뒤가 바뀐 듯하면서도, 뭔가 말이 되는 그런 말이었다. 그렇게 30분 후.

“의재가 3화까지 콘티 짰다는데요.”

“형우가 <아이언 타이거> 다음 화 보냈네요. 교정 부탁드립니다.”

“작가들이 안 자는데, 매니저가 돼서 자는 것도 좀 이상하죠?”

어느덧 새벽 세 시, 스패로우 팩토리의 불이 꺼지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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