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소설이 있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스패로우 팩토리의 사무실에서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지원은 저 말이 200년 전에나 통용되던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지 못한다. 특히 일하는 사람은.
눈앞에 쌓인 에너지 드링크가 벌써 세 캔이다. 뜯어진 맥심 스틱은 그것보다 훨씬 많다. 만약 저게 없었으면 자신은 진작에 죽어버렸겠지. 그러니, 사람은 카페인으로 사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 톨스토이의 말을 인정하기는 한다. 굳이 사랑을 인류애로 한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일에 대한 사랑도 넉넉하게 사랑으로 쳐 준다면,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대에는 에너지 드링크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지.
“후우.”
요즘 들어 일이 많았다. 매니저로서나, 경영자로서나.
매니저로서의 일부터 말하자면, 스패로우 팩토리는 어느새 20에 가까운 작가들을 확보했다. 그중 절반 정도는 연재를 시작했고, 남은 절반도 열의를 갖고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잘하면 올해가 끝나기 전에 두세 작품 정도는 유료화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
경영자로서의 일도 착착 잘 진행되고 있다. 최근 있었던 가장 큰 사업은 역시 달이 빛나는 서재와의 겸업인데, 상상 이상으로 잘 끝났다.
무엇보다, 사업체를 이끌었던 경력이 있는 혜선의 도움이 아주 컸다. 만약 혜선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꽤 많은 일들을 헤매야 했을 거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혜선에게 맡긴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공동대표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투자금으로 보나 열정으로 보나 어디까지나 스패로우 팩토리의 대표는 자신이다.
C&N에서 월급 받으면서 일할 때도 나름 자기 일처럼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진짜 오너가 된 거랑은 차이가 크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잠깐 시간이 비어 일이 없을 때의 기분이 그렇다.
“뭐 할 거 없나.”
직장에서 일할 때는 가끔 일이 비면 기분 좋게 쉬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불안감이 든다. 차라리 격무에 시달리는 게 불안감보다 나을 정도로.
위이잉.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전화가 울렸다.
전화기를 향해 걸어가며, 짧은 시간 혜선에게 말을 걸었다.
“혜선 씨, 짜증 나면서도 좋은 게 뭔지 아세요?”
“연애요.”
“…음, 그것도 말이 되긴 하는데.”
그 짧은 대화 사이, 전화기 앞에 도착했다. 그대로 수화기를 잡았다.
이제 일을 해야겠구나, 하는 격무에 대한 예감과 드디어 일이 들어왔어, 하는 사업에 대한 즐거움이 교차한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다. 기쁘면 기쁘고 언짢으면 언짢을 것이지, 두 감정이 동시에 대가리를 내미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차가우면서 뜨거운 건 말이 안 되지만, 짜증 나면서 좋은 건 말이 되는 것이다.
“여보세요.”
“네, 편집자님. 저예요, 형우.”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출판사 내에서 최고의 복덩어리 취급을 받는 형우다.
C&N에서 알아 온 인연이 참 질기게도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형우는 단 한 번도 지원의 기대를 외면한 적이 없었다. 최고의 파트너다.
“저번에 편집자님이 그러셨잖아요. <아이언 타이거>도 아마 웹툰화까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혹시 기억하세요?”
“당연히 기억하죠.”
<아이언 타이거>가 100화쯤 도달했을 때, 지원이 넌지시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웹툰은 왜요?”
“으음…. 지금 와서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부탁드릴 게 좀 있어서요.”
수화기 너머로도 약간 멋쩍어하는 게 느껴졌다.
“좀 빠르게 웹툰화를 진행할 수 있을까요?”
“…얼마나 빠르게요?”
“최대한이요.”
지원은 머리를 굴렸다. <아이언 타이거>는 이제 막 100화를 돌파한 작품이다.
관례대로 본다면, 벌써 웹툰화를 고려하는 것은 일러도 상당히 이르다. 웹툰에 대한 이야기는 작품이 어느 궤를 잡은 후에 논하는 게 보통이다.
후에 소설이 갑자기 고꾸라질 수도 있는 거고,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 발언이 아주 허무맹랑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지금 <아이언 타이거>가 화제작이기는 하죠. 하지만 웹툰화는 다른 이야기인데….”
“힘든가요?”
“제가 힘들다기보다는.”
사실 <아이언 타이거>의 웹툰화는 예전부터 생각해 온 바이기는 했다. 특히 ‘문단에서 인정받은 웹소설’이라는 타이틀이 엄청나게 매력적이었다. 당연히 노를 젓는다면 지금이 맞았다. 단순히 입에 오르내리는 화제話題작을 넘어서, 화끈하게 올라가는 화재火災작으로 향하는 거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진행하지 않았던 이유는, 역시 조심성 때문이다. 웹툰화를 진행했는데 도중에 작품이 꺾이기라도 하면 상황이 애매해질 수밖에 없고, 그건 결국 작가의 부담이 되는 것이다. 안 그래도 바쁜 형우에게 추가적인 부담감을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웹툰을 진행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진짜로 쉴 틈도 없으실 거예요. 소설에 차질이 생기면 웹툰에도 차질이 생기니까, 휴재나 휴식 같은 걸 못 하게 되실 수도 있어요.”
“그래도 하겠습니다.”
형우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특이한 일은 아니다. 작품 이야기를 할 때는 대부분 이랬으니.
“갑자기 결정하게 되신 이유가 있나요?”
“…있긴 있습니다.”
“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번에는 형우가 잠깐 망설였다.
이건 좀 특이한 일이다.
“사실은요…. 의재가 이번에 <전설의 보안관> 웹툰을 그만뒀다고 하더라고요. 저 때문에 C&N에 남아있기가 너무 미안해서 그랬다고는 하는데, 그걸 보고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요.”
“으음….”
“물론 갑작스러운 이야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제 가장 소중한 친구입니다. 게다가, <전설의 보안관>의 웹툰을 보면 실력도 의심할 바가 없고요. 어떻게 안 될까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잠시만 고민 좀 해 볼게요. 아, 끊지는 마세요. 금방이니까.”
그렇게 수화기를 내려둔 뒤, 생각에 잠겼다.
“상관없지 않아요? 뭐, 저랑 학교 다닐 때 의재 걔가 만화를 그리지는 않았는데. 적어도 친구 작품을 소홀히 할 애는 아니거든요.”
옆에서, 잠자코 전화를 듣던 혜선이 한마디 했다.
“그리고 전에도 비슷한 일 있었다면서요? C&N에 있을 때요.”
“그때랑은 다르죠. 그 때는 의재 작가님 외에는 따로 선택지가 없었는걸요.”
“만약 이거 안 들어주시면, 형우가 진짜 서운해할 텐데.”
그 말을 듣자마자, 지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한국의 유명 엔터테이먼트인 YJP의 수장인 박영진 사장의 명언이었다.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회사의 모든 사람이 본인한테 서운해한다는 거라고. 그게 회사라고.
그렇게 지원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하나만 확실하게 할게요.”
지금은 회사를 이끌어가는 경영진으로서, 확실하게 못 박아야 하는 순간이다.
“의재 작가님을 섭외하려고 하는 게, 친구를 위해서인가요. 작품을 위해서인가요?”
만약 작품을 위해서, <전설의 보안관>을 성공시킨 전적이 있는 네임드 스토리작가를 섭외하는 거라면 거기에 대해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대학교 친구로서 서의재를 섭외하는 거라면, 지원은 형우의 결정을 반대할 것이다.
회사는 철저하게 이익 관계로 이끌어나가야지, 감정 관계로 이끌어나가는 순간 붕괴되고 마니까.
서운해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구성원들의 서운함을 받아내는 것도 자신의 역할이다. 그게 아무리 형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대표인 자신조차도, ‘돈을 번다’라는 회사의 대원칙을 어기면서까지 특별대우를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전 직장인 C&N이 그 같잖은 사내정치와 친목질로 인해서 내부부터 무너져버리는 걸 직접 보지 않았던가. 스패로우 팩토리는 그게 싫어서 세운 회사다.
“어느 쪽이죠?”
만약 이번 일로 형우가 회사를 나간다고 해도, 의견을 철회하지는 않으리라. 약간의 침묵 뒤에, 형우의 대답이 들려왔다.
“편집자님.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은데.”
형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 첫 번째. 저는 제 소설이 잘 되기를 누구보다 바랍니다. 늘 제 자식 같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소설이 자식이라면, 2차 창작은 그 손자 정도 되겠죠.”
“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자격 없는 사람에게 자기 손자를 맡기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순간, 형우의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변했다.
“이메일 확인을 좀 자주 하는 게 좋으실 것 같네요.”
“이메일요?”
형우의 말을 듣자마자, 지원은 자신의 메일함을 켰다. 과연, 형우로부터 메시지가 잔뜩 와 있었다.
총 일곱 개의 파일, 이름은 각각 모스키토, 마준수, 베르그, 코끼리, 고정민, 주태, 그리고 서의재. 확장자명은 모두 JPG거나 GIF다.
그러니 저 알쏭달쏭하게 보이는 일곱 개의 단어들은 암호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모두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스토리 작가들의 이름이었다. 하나같이 다 나름 잘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타닥-
지원은 그 파일들을 천천히 클릭했다. 역시나, <아이언 타이거>의 1화다. 완성된 웹툰은 아니고 러프 수준의 콘티만 보냈다, 그림 작가가 아니라 스토리 작가를 구하는 거니, 상관은 없었다.
“만약, 이 중에서 편집자님이 의재 것보다 더 마음에 드는 게 있다고 하신다면 그 작가를 고르는 것으로 하죠.”
그 말을 들으며, 지원은 그 러프들을 살폈다. 일단 네 개의 작품은 보자마자 넘겼다. 분위기가 <아이언 타이거>랑 맞지 않았다. 남은 건 셋.
모스키토 작가는 전형적인 일본 애니메이션풍 연출을 따랐다. 감정 묘사와 표정 묘사가 뛰어나고, 디테일에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났다.
주태 작가는 반대로 흔하지 않은 미국 카툰풍 연출이다. 디테일보다는 상황묘사를 신경 쓰고, 대사를 길게 쓴 티가 났다.
마지막으로, 의재는 쿠앤틴 타란티노풍의 B급영화 감성과, 최종훈 감독의 범죄영화 감성을 버무린 형태의 연출을 선호했다. 장면전환이 과격하지만, 그만큼 전개가 시원하다.
“…고민할 필요가 없네요.”
셋 다 잘 그렸지만, 대중예술에서 추구해야 하는 건 최고가 아니라 최적이다.
<아이언 타이거>는 웹소설이었지만, 순문학적 장치를 많이 차용한 태가 나는 작품이다. 그 중 가장 많이 치용한 것이 이미지의 활용인데, <아이언 타이거>는 그 중에서도 의도적으로 ‘하강’의 이미지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낸 콘티는 단 하나. 의재의 것밖에 없었다.
“순문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눈치채기 힘든 장치들이죠. 만약 이 장치들을 의재보다 더 잘 찾아내고 이용하는 만화가가 있다면,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지원이 허, 하고 웃었다.
이렇게까지 준비하고서 설득하는데, 넘어가지 않는다면 그건 경영자로서의 선택이 아니라 그저 아집에 가득 찬 꼰대 짓일 뿐이다.
“일정 조율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지원은 천천히 최근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이번 주까지 맺을 계약만 네 건이고, 정해진 것 없이 갑자기 터지는 일까지 감안하면, 너무나도 바쁘다. 시간도 자원이고, 자원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잠을 줄여야겠네.”
한숨을 푸욱 내쉬고, 지원은 에너지 드링크를 꼴깍거렸다.
“사장님, 잠시만….”
그렇게 한 캔을 다 비웠을 쯤에, 혜선이 말을 걸어왔다. 다급해 보이는 표정이다.
평소에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그녀였기에, 그 모습에서 지원은 약간 괴리감을 느꼈다.
* * *
짜안, 술잔이 서로 맞부딪혔다.
허나 술잔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자그마한 잔에 든 액체는 술이 아니라 오렌지 맛 환타다.
웹툰화가 시작되면 바빠지는 건 의재뿐만이 아니다. 오히려 형우가 더 바빠진다.
웹툰에 진도가 따라잡히지 않도록 계속 달려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술은 금물이다. 자칫 술을 잘못 마셨다가는 다음 날까지 작업을 못 하게 되는 수가 있으니.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맛있다는 듯 소주를 들이켜는 의재 녀석은 좀 원망스럽다.
“맛있냐?”
“어. 끝내 준다.”
친구를 위해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그런 친구를 위해서 직장을 구해주고, 그런 일들이 하루 만에 슉슉 지나갔지만, 둘의 대화란 결국 이런 식이다.
차라리 이게 좋았다. 의재가 고맙다느니, 왜 그랬냐느니 하는 건 낯설고 오글거렸을 거다.
마찬가지로 의재에게도 마음을 무겁게 해서 미안하다, 두고 나와서 미안하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둘 모두 원하는 바가 아니니까.
그래서 결국은- 평소와 똑같다. 서로 놀리고, 주고받고, 가끔 꿀밤을 먹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어제 만났던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다.
우정의 무게란 제멋대로여서, 돈독한 관계라고 꼭 진지하리라는 법은 없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