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21화 (121/200)
  • #120

    약간의 우여곡절이 지난 후, 새벽 2시.

    의재는 <전설의 보안관> 웹툰의 113화를 전송하는 데에 성공했다.

    “후우, 드디어 113화다!”

    의재가 중얼거렸다. 113화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었다.

    헤럴드와 베아트리체가 시장에게 상을 받는 것을 끝으로 1부가 완결되는 화라서 그렇다.

    “이제 2주 휴가인가요, 선생님?”

    “그렇지.”

    송의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웹툰이나 웹소설이나 1부를 완결하면 보통 며칠 정도는 쉰다.

    뭐, 김형우처럼 가끔 규격 외의 놈들도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다.

    열정이 부족하다는 꼰대들의 말과는 정반대로 열정이란 건 무한대가 아니며, 가끔 충전해주지 않으면 늘 예정보다 빨리 동나는 법이니까.

    “비축분 아슬아슬했다. 그렇지?”

    “맞습니다, 선생님.”

    “초반부엔 뭔가 더 빨랐던 것 같은데, 그 사이 열정이 식었나?”

    “흐흐, 조금 쉬고 오면 괜찮겠죠.”

    흐흐, 하고 말하기는 했지만, 전혀 웃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초반부에 비해 의욕이 떨어졌다는 송의진의 말이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만화에 대한 의욕이 그 사이 식어버린 건 아니다. 그보다는, 외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으흠.”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의재가 댓글을 확인했다.

    설상가상 : 진짜 이거 보려고 어플 깔았다.

    현주면주 : 이게 만화다!

    토오젠다로 : 이 만화 작가 참새치랑 대학 친구라던데 그러면 그 사람도 한국대임?

    쥬나나사이 : 와 이게 한국대의 만력인가.

    새옹지마 : 한국대의 만력 ㅇㅈㄹㅋㅋ

    억수르 : 하버드생이 만화 그렸으면 루브르박물관에 걸렸겠네 ㅋㅋㅋ

    gg선언 : 천하대 뭐하냐?? 한국대 벌써 작가 두 명 냈는데?? 한천전 한국대가 개바른거 인정?

    NSAF : 한천전은 무슨 천한전이다

    gg선언 : 천한전은 무슨 진짜 천해 보인다.

    NSAF : 응 한국대 천하대보다 취업률 딸림

    gg선언 : 응 천하대 한국대보다 등록금 1.5배 비쌈ㅋㅋ

    억수르 : 여기서 대학싸움 각을 보네 ㅋㅋ

    분무기 : 니네 대학 좋은 거 아니까 다른 데서 싸우면 안 됨?

    약간의 소요는 있었지만, 여기까지만 본다면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작업 의욕을 200% 고취시켜주는 최고의 댓글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 댓글들이다.

    윤줌 : 근데 원작작가가 C&N이랑 대판 싸우고 나갔다고 하지 않았음?

    도백백 : 나간 건 나간 거고 계약은 그 전에 한 거니 어쩌겠음ㅋㅋ배 아파도 참아야지.

    염무 : 원작가랑 만화가랑 짱친이라던데. 혼자만 쏙 빼놓고 나간 거 좀 배 아플 듯.

    잡았쥬 : 짱친ㅋㅋ 대체 언제적 말임?

    염무 : 예끼@@@@@@

    윤줌 : 근데 어차피 C&N 코믹스 이거 빼고 성공한 작품 없지 않나? 전보(전설의 보안관)까지 나가면 그대로 코믹스 무너지는 거 아님?

    잡았쥬 : 이게 맞다.

    “에휴.”

    댓글을 바라보던 의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요즘 의재와 송의진의 작업 의욕이 뚝 떨어진 이유는 독자들도 알고, 매점 아줌마도 알고, 개나 소나 다 알았다.

    의재는 형우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화실에서 짤리고 좌절하는 의재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 형우였으니까.

    하지만 요즘은 일이 좀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자신을 C&N에 넣어줬던 형우가 C&N과 대판 싸우고 나간 게 문제였다. 형우의 탓이라는 건 아니다. 그 문제는 어떻게 보든 전적으로 C&N의 과실이었고, 의재도 형우의 행동에 100% 찬성하는 편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작가가 뛰쳐나간 것과는 별개로, <전설의 보안관>이라는 작품의 저작권은 여전히 C&N이 가지고 있다. 계약이 만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전설의 보안관>으로 웹툰을 그리는 의재와 송의진 또한 C&N과 불편한 계약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애매하네.”

    죄책감이라고까지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약간의 찜찜함이 들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그대로 작업 의욕의 하락으로 이어졌다. 누군가는 고작 그 정도로 작업 의욕이 떨어지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예술이라는 건 사실 감정에 영향을 많이 받는 섬세한 작업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 약간의 균열이 작품의 퀄리티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까지는 오지 않았지만, 솔직히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느는 건 한숨밖에 없었다.

    “그래가지고 땅이 꺼지겠냐?”

    펜대를 입에 문 송의진이 허탈하게 말했다. 형우에게 마음의 빚이 있는 건 송의진도 마찬가지였다.

    번아웃이 세게 와서 만화를 반쯤 때려치웠던 자신의 작업 의욕을 다시 되살려 제2의 부흥기를 이끌어 준 게 형우 아니던가.

    게다가, <전설의 보안관>을 통해 번 돈으로 손자 녀석의 병원비를 감당했다. 덕분에 손자는 건강하게 퇴원했고, 어제 처음으로 뒤집기를 성공했다.

    ‘아부지, 봐요! 손자가 뒤집었다고요!’

    아들인 병구 녀석이 얼마나 호들갑을 떨던지. 얌전한 진미를 반만 닮았으면 참 좋을 텐데.

    자신이 일을 시작한 후부터 가족들 사이에 웃음꽃이 피는 일이 잦아졌다.

    “애매하더라고, 형우 생각하면 찝찝한데, 또 아들놈이랑 며느리, 손주 놈을 위해서는 C&N이랑 계속 일을 해야 하고.”

    송의진이 한탄하듯이 이야기했다.

    이 기묘한 아이러니는, 늙은 만화가의 마음을 끊임없이 무겁게 했다.

    끝끝내 가족을 고를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 선택을 위해 짐을 갖고 가는 것이다.

    “하지만 너는 다르지, 의재야.”

    송의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가라.”

    “네?”

    “나야 어쩔 수 없지만, 너까지 C&N에 돈을 벌어다 줄 필요는 없지 않느냐.”

    의재가 되물었다.

    “아니, 스승님. 나가라니요. 아직 그림도 다 못 배웠는데….”

    “그림이야 어디서든 배울 수 있어. 하지만 김형우 같은 친구 놈은 구하기 힘들 거다. 아니냐?”

    낯간지러운 소리였지만, 말하는 사람이 노인이라서 그런지 말에 신빙성이 꽉 차 있는 느낌이다.

    “그런 놈은 꽉 잡아야 해. 괜히 어색해지지 말고 육개장 챙겨주는 관계로 만들란 말야.”

    “…육개장 챙겨주는 관계요?”

    “이놈은 글 쓴다는 놈이 상상력이 이리도 빈약해서야, 네놈이 먼저 죽으면 네 장례식에서 걔가 육개장 먹고, 그놈이 먼저 죽으면 네가 그놈 장례식장에서 육개장 먹고. 늙어 나자빠질 때까지 친하게 지내라는 말이잖느냐.”

    “…스승님.”

    송의진이 아는 서의재는 그 커다란 덩치에 안 맞게 잘 운다. 지금도 그랬다.

    눈시울이 아주 그렁그렁하다.

    “안 됩니다, 스승님. 사실 형우도 괜찮다고 했어요.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냐고.”

    “그래, 그렇게 말했겠지.”

    송의진이 아는 형우라면, 속으로는 불편하더라도 친구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했을 거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의재라면 그런 형우의 속마음까지 알아차렸을 거고.

    “내가 걱정하는 건 의재 너다. 형우 녀석은 괜찮다고 하겠지만, 네가 안 괜찮잖느냐.”

    모순 속에서 일하는 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굉장히 힘이 많이 든다.

    자신처럼 이것 말고는 아예 없는 케이스라면 모를까, 의재처럼 어딜 가서도 잘 할 수 있을 만한 놈이라면 더더욱.

    “아니면 나 때문에 못 나가는 거냐?”

    “스승님….”

    “그렇지, 나는 네 스승이다.”

    마치 무협지의 대사를 읊듯 송의진이 말했다.

    “짐 덩이가 아니라, 네 스승이야. 스승이 제자의 앞길을 밝혀줘야지. 막아서야 쓰겠느냐?”

    “…아.”

    의재도 저 말을 안다.

    송의진의 전작에서, 주인공의 스승이 자신의 생명력을 제자에게 건네주면서 했던 말이다.

    비록 개똥철학일지언정, 모든 만화가는 자신의 만화에 철학을 담는다.

    저 말 또한 송의진의 철학일 것이다.

    “스승님, 저 없어도 되겠어요?”

    “안 될 건 또 뭔데?”

    “태블릿 사용하는 법 잘 모르시잖아요.”

    “…설명서 보면 된다.”

    “화장실 변기도 못 뚫으시고.”

    “그건 못 뚫는 척한 거야. 그래야 네가 하니까.”

    “고기도 다 태우시고….”

    “그것도 못 굽는 척한 거다. 그래야 네가 하니까.”

    “…스승님.”

    의재가 송의진 앞에서 무릎을 탁, 꿇었다.

    “지금까지 진짜 감사했습니다.”

    나름 분위기를 잡은 것 같은데 그 분위기가 좀 이상하게 잡혔다.

    인상 험악한 놈이 그렇게 하니 야쿠자 같았다.

    그리고 송의진은.

    “그래, 너라면 어디서든 잘할 거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의재를 일으켜 세웠다.

    녀석은 안 일어나려고 했다.

    바닥에 뭔가가 뚝뚝 떨어졌다. 울고 있는 거다.

    그 모습을 보니, 송의진도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만약 좀만 더 젊어서 몸에 수분이 많았더라면, 분명 울었을 거다.

    “<전설의 보안관>은 걱정 마라. C&N은 꼴같잖지만, 그래도 형우 녀석 작품을 망쳐 놓을 생각은 없으니.”

    화실에서 나서는 의재에게, 송의진은 통에서 G펜 한 자루를 꺼내 건넸다.

    “요즘 세상에 펜을 쓸 일이 얼마나 있겠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일단 가져는 가 보거라.”

    만화가로서 제자의 새 출발을 축하하는, 송의진 나름대로의 의미 있는 선물이었다.

    그 펜들을 한 손에 쥐고, 의재는 훌쩍거리며 어딘가로 걸어 나갔다.

    슬프면서도 홀가분하고, 마음에 짐이 하나 덜어진 듯하면서도 하나 더 쌓인 느낌이었다.

    “으허어엉, 스승님….”

    그렇게 걷고 있는데….

    “잠시만요, 선생님.”

    하고 누군가가 의재의 어깨를 턱 하고 잡았다.

    * * *

    서울의 한 지구대.

    “…예, 제 친구 맞고요. 네, 제가 신원 보증합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확인 한 번만 더 할게요.”

    경찰이 살짝 미심쩍은 표정으로 의재와 형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니까, 흉기가 아니라 스승님한테 받은 펜이었다고요?”

    “네.”

    “울면서 걸은 건 취해서가 아니라 슬픈 일이 있어서고?”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일단 죄송하다는 말씀은 먼저 드리는데, 아무리 그래도 밤중에 덩치 큰 남자가 울면서 날카로운 걸 들고 걸어가면 저희가 출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 이해하시죠?”

    끄덕, 의재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형우와 함께, 의재는 지구대에서 나갔다.

    손에는 여전히 G펜을 꼭 쥔 채였다.

    “…그래서 화실을 그만뒀다고?”

    “응.”

    “나 때문에? 내가 C&N이랑 싸운 게 마음에 걸려서?”

    “…어. 아무리 그래도 너한테 해코지하려고 한 회사인데, 네 작품이라고 해도 거기에 돈 벌어다 주는 게 맞는 건가 싶고, 해서….”

    그 말을 들은 형우는 허,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두 개였다.

    첫 번째는 고작 그런 이유로 플랫폼 1위를 달리고 있는 웹툰 작가의 자리를 포기한 의재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였고.

    두 번째는, 이런 조금 모자라지만 의리는 확실한 녀석이 자기 친구라는 게 참 멋있어서였다.

    “그래서 뭐, 생각해 둔 건 있고?”

    “응.”

    의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리파였지만, 아무 생각 없이 깡 하나로 화실을 나오지는 않았다. 인생에 깡은 필요하지만, 깡 하나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비밖에 없으니까.

    “예전에 일했던 화실에 다시 찾아가 보려고.”

    “예전에 일했던 곳이라면, 너한테 꼽주고 쫓아냈다는 거기?”

    송의진과 일하기 전 의재가 일했던 화실.

    거기서 의재는 만화는 거의 배우지도 못하고 청소나 정리 같은 잡일만 하다가 두 달 만에 쫓겨났었다.

    “야, 거길 대체 왜 들어가?”

    “그때는 내가 잘 몰랐으니까 그런 거고, 지금은 경력직이니까 나름 대우해 주지 않을까?”

    단순한 희망은 아니고, 두어 달 전에 팀장에게 연락이 오기는 했었다.

    한창 <전설의 보안관>이 잘 나가던 때였다.

    ‘의재 씨, 혹시 <전설의 보안관> 스토리 작가 의재 씨야?’

    ‘네, 맞아요.’

    ‘참새치 작가랑 친구라며? 그것도 진짜야?’

    ‘…그렇습니다.’

    ‘왜 말 안 했어?’

    아마도 <전설의 보안관>이라는 IP로 1등을 하는 웹툰을 보니 탐이 났던 모양이다.

    속된 말로 빨대 꽂기다.

    ‘의재 씨, 다시 우리 팀 합류할 생각 없을까? 그러니까 지금 작품 끝나면 말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예전에 좀 우리 쪽에서 고깝게 굴었던 건 정말 미안하고.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하지?’

    ‘그것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적당히 전화를 끊었지만, C&N과 형우가 척을 진 지금 상황에서는 다시 돌아갈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대 꽂는 게 사실 나쁜 것도 아니고, 뭣보다 다시 돌아가면 분명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

    하지만, 형우는 거기에 찬성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의재가 힘없이 웃었다.

    “네가 왜 싫어. 내 일인데.”

    “야, 친구가 자기 꼽주고 쫓아냈던 곳에 다시 제 발로 돌아간다는데, 누가 그걸 그냥 봐? 그 꼴은 절대 못 보지.”

    바람피워서 헤어졌던 전 여친에게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친 광경이 아닌가.

    당사자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말려야 한다.

    헤어져서 아파하는 친구에게는 다른 인연을 소개시켜 주고, 일자리를 스스로 포기한 친구에게는.

    “잠깐만 기다려 봐.”

    그렇게 말한 뒤, 형우는 그대로 스패로우 팩토리 쪽에 전화를 걸었다.

    “네, 편집자님. 저번에 말씀하셨던 <아이언 타이거> 웹툰화 있잖아요, 그거 지금 바로 합시다.”

    …일자리를 소개해 주면 그만이다.

    지금의 형우에게는, 그 정도 능력은 충분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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