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09화 (109/200)

#108

“형우 오빠!”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소녀가 형우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화려하다기보다는 조금 과장스러운 옷이다. 당연한 일이다, 단순한 옷이 아니라 연극용 의상이었으니.

“오랜만이네, 복희야.”

“왜 이제야 와!”

복희가 형우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달려왔다.

소리로 표현하자면 오도도도 정도일까. 형우는 복희를 살짝 안아서 으쌰 들어 올렸다.

“…무거워졌네.”

“어허. 나쁜 말.”

정색하는 복희를 보고 형우가 하핫 웃었다.

“넌 성장기니까 무거워져도 되는 거 아냐?”

“차라리 키가 컸다고 해. 오빠는 글 쓴다는 사람이 왜 이리 어휘 선택이 그 모양이야?”

“내가 글 쓰는 사람이지 말하는 사람은 아니잖아. 정 그러면 채팅으로 대화할까?”

“농담이라기엔 재미가 없고, 진담이라기엔 기가 차는데.”

“……너 초등학생 맞냐? 뭐 이리 말을 잘 해?”

“연극 짬바지.”

“짬바?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대.”

“오랜만에 본 건데 또 꼰대처럼 굴 거야?”

“…….”

꼰대처럼 군 적은 없었지만, 오랜만에 본 건 사실이긴 했다.

복희의 ‘나중에 꼭 봐야 해!’라는 말을 등지고 희망보육원을 나선 지 어언 5개월.

형우는 오늘, 서울시에서 주관하여 열리는 <13세 이하 부문 연극제>를 관람하러 온 참이다.

“참가팀이 총 13개나 돼.”

“응응.”

“그중에는 전문으로 연기하는 애들도 있대. 아역배우들.”

“오호라.”

앞선 공연에서 유달리 발성이나 몸짓이 눈에 띄는 애들이 몇 명 보였는데, 그 친구들이 아마 아역배우들인 모양이다.

“…걔네 진짜 잘하더라.”

“1등 하고 싶어?”

“응. 근데 좀 떨려.”

복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당차고 억세다고 해 봐야 아직은 이빨도 다 안 빠진 초등학교 저학년이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 떨리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리라.

“30분 후에 2부 시작합니다!”

“히익.”

멀리서 들려오는 사회자의 목소리에, 복희가 몸을 흠칫 떨었다.

복희와 희망보육원의 연극은 2부의 첫 번째 연극이었다.

“…지금이라도 순서 바꿔 달라고 할까?”

“아냐. 첫 번째가 딱 좋지 뭐. 쉬고 왔으니 관객들도 호응 잘해줄 테고.”

“그게 더 무서운데. 차라리 다 눈 감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어떻게 1등 하게?”

“…그러네.”

복희가 고개를 좌우로 크게 저었다.

“실수하면 어떡하지? 연습 때처럼 다시 하지도 못하잖아.”

“음.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피아니스트들도 가끔 연주 중에 실수한다더라.”

“그러면 어떻게 해? 사과하나?”

“아니, 그 사람들은 사과를 안 해.”

“왜?”

“그 사람들은 실수 한 번으로 자신의 가치가 폄하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아니야.”

복희가 손가락을 쭉 폈다.

“잘못했으면 사과해야 해.”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인데.”

뭐라 설명해야 할까?

잘못 설명했다가, 복희가 나중에 잘못하고도 사과하지 않는 어른이 될까 두렵다.

“흐음, 그게 그러니까….”

잠시 뒤, 좋은 말이 생각났다.

“상대가 바라지 않는다면, 꼭 사과하지 않아도 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네가 무대에서 실수를 했다고 치자. 상대가 보고 싶어 하는 건 그 자리에서 네가 사과하는 걸까, 아니면 더 열심히 하는 걸까?”

“우웅.”

그렇게 중얼거릴 때마다 고개가 좌우로 꺾이는 게 귀엽다. ‘갸웃갸웃’이라는 게 어린애들한텐 진짜로 통용되는 표현이구나, 싶은 느낌?

“알았다.”

잠시 후, 복희가 이해했다는 듯이 손바닥을 딱 쳤다.

“예전에 형섭이가 그랬어.”

“형섭이라면, 너보다 한 살 어린 애?”

“응, 걔가 게임을 하는데. 올바른 사과는 사과문을 작성하는 게 아니라 아이템을 더 많이 퍼주는 거래.”

“…응?”

“걔는 그걸 사료라고 불러.”

“어어… 그거랑은 좀 다른데.”

“달라?”

“…아예 콕 찝어 다르다고 하긴 그렇고.”

머리가 아팠다.

사회라는 건 수학 문제처럼 딱딱 떨어지는 게 아니고, 이 상황에서 다르고 저 상황에서 다른 거라 설명하기가 두 배는 힘든 느낌이랄까.

‘…선생님은 진짜 대단한 직업이구나.’

갑자기 초등학교 선생님이 부쩍 존경스러워진 형우였다.

* * *

“이번 차례는, 희망보육원 아이들이 준비한 <천재 이반>무대입니다!”

“와아아!”

복희를 비롯한 희망보육원 아이들이 차례차례 무대위로 올라가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형우는 그 사람들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쳤다.

“옛날옛날에, 이반이 살았답니다!”

걱정했던것과 다르게, 복희는 안정적으로 대사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5분쯤 지난 후.

“거대한 폭풍우가 비를 퍼붓던 날, 이반은 자신의 밭에 어떤 이변이 발, 발생, 발생한….”

…어이구.

말을 더듬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발생한!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멀리서 봐도, 귀가 빨개진 게 보였지만, 어떻게든 외운 대로 꼬박꼬박 읽어 내려간다.

짝짝짝-

그 모습이 대견했던 모양인지, 하이라이트도 아닌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뭐, 연극 내적으로는 하이라이트가 아닐지 몰라도, 연극 외적으로는 확실하게 괜찮은 그림이기는 했다.

“잘하네.”

“덕분이지.”

분명 혼잣말이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로 대답이 들려왔다.

“네가 좋은 말 해 줬다던데.”

어느새 현수가 형우의 뒤에 다가와 있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형우가 피식 웃었다.

“말도 마. 설명하느라 얼마나 곤혹을 치렀는데.”

주변 분위기가 오페라 극장처럼 조용한 분위기라면 좀 껄끄러웠을 텐데, 아무래도 어린이 연극이라 그런지 주변에서 도란도란 떠드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탓에 별로 주눅은 안 들었다.

“그래도 어떻게 잘 이해는 한 모양이네.”

“아, 들어가기 전에 형섭이 발 밟고 이거 사과해야 해? 하고 물어보더라.”

“…뭐?”

“상대가 원하지 않는 사과는 안 할 거래.”

“진짜야?”

“당연히 농담이지. 복희가 바보도 아니고.”

현수가 낄낄거렸다. 속았다는 느낌에, 형우는 왠지 조금 심통이 났다.

“…학교에는 이번 학회에 낼 평론 준비한다고 사유서 냈다면서,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에이 뭐, 들킨 것도 아니잖아.”

그 말을 들은 형우가 눈을 끔뻑거렸다.

“…학교에 거짓말을 했다고? 현수 네가?”

“거짓말은 아냐. 평론도 쓰긴 썼거든. 오늘 아침에도 쓰다가 연극 보러 왔어.”

“제도의 테두리에서 줄넘기를 하다니, 너 조현수 맞아? 좀 변했네.”

“더 완곡한 표현 없어?”

“바넘 효과에 의해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만한 행동을 하다니, 너 조현수 맞아? 좀 변했네.”

“그건 좀 괜찮네.”

…원래는 이런 식의 농담이나 융통성은 눈에 씻고도 찾을 수 없는 녀석이었는데, 확실하게 변하기는 했다.

“교수님이 널 보면 특혜받고 농땡이 피운다고 죽이려고 드실걸.”

“에이, 교수님은 내가 사과하는 것보다는 더 좋은 평론으로 보답하길 원하실 거야.”

“…야, 그거.”

방금 복희한테 해 줬던 이야기가 아닌가.

남에게 해줬던 조언을 스스로의 귀로 듣는 건, 흐음, 솔직히 조금 부끄러운 느낌이었다.

내 소설을 누가 내 앞에서 소리 내서 읽는 느낌이랄까. 그 내용이 부끄럽다거나 떳떳하지 않다는 게 아니고, 그 상황이 좀 부끄럽다는 뜻이다.

당황하는 형우를 보며 현수가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능글맞기는. 애가 아주 보헤미안이 됐냐.”

말은 저렇게 했지만, 형우는 오히려 지금의 현수가 더 인간적인 느낌이 들었다.

예전이 너무 착해서 답답할 정도의 호구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래도 좀 융통성은 생긴 느낌이랄까.

숨 쉴 구멍이 두 개 정도는 뚫린 느낌이다.

“그래도 평론 이야기는 진짜야. 눈 봐봐.”

현수가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적당히 충혈된 눈자위, 노랗게 달뜬 광대. 그리고 보라색의 다크서클까지.

“밤샌 거 맞군.”

프로 다크서클 감별사인 형우는 단박에 녀석의 말이 사실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 *

그날 희망보육원은 13개 팀중 2등을 했다.

복희는 기쁨 반, 아쉬움 반으로 울음을 터트렸다.

“애들아 미안해. 내가 대사만 안 절었어도….”

그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이 죄다 손을 내저었다.

“사과할 필요 없어 복희 언니!”

“복희 누나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나도 말 절었어!”

“나는 실수로 형섭이 뺨을 손바닥이 아니라 주먹으로 쳤어!”

“뭐? 어쩐지 더럽게 아프더라!”

“아무튼 잘했어!”

…다른 사람들이 경범죄 고백할 때 혼자 강력범죄를 고백한 사람이 한 명 있긴 했지만.

아무튼 잘 끝났다는 거다.

“…얼마 나왔어?”

현수의 말에, 형우가 씩 웃었다.

“21만 원.”

기분이다 싶어 아이들을 데리고 갔던 맥도날드에서, 형우는 21만 원을 긁었다.

“성장기, 무섭더라.”

조그마한 해피밀이나 하나씩 사 주면 그만일 줄 알았는데, 성인 남자가 먹어도 배부른 커다란 햄버거를 우걱우걱 얼마나 잘도 먹던지.

“애들한테는 최고의 날이 됐을 거야.”

비록 1등은 그 아역배우가 두 명 있다는 소극단이 가져갔지만,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싸움이고, 2등이면 최고점인 게 맞았다.

“게다가, 당초의 목적도 달성했고 말야.”

“후원자 좀 늘었어?”

현수가 검지와 중지를 들어 올렸다.

V사인이 아니라, 후원자가 두 배로 늘었다는 뜻이었다.

“대박인데.”

“응, 초청공연 해 달라는 데도 있더라.”

“더 대박이네.”

“네 극본 덕분이야.”

“당연하지.”

지금 봐도 <천재 이반>은 꽤 잘 썼다고 자부하는 작품이었다. 형우는 자부심을 겸손으로 덮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네 평론은 어때?”

“조만간 완성될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인지 안 말해 줄 거야?”

“못 알려줄 건 없는데, 으흠, 뭔가 말하기가 좀 그렇네. 잡지사 입장에선 스포일러 같은 느낌일 테고.”

그래도 뭐, 사람 본성 어디 안 간다고. 규칙 잘 지키는 놈이 변해도 규칙 좀 덜 잘 지키는 놈이 될 뿐, 아예 규칙 무시하는 놈이 되지는 않았다.

“너 같은 애가 정치를 해야 하는데.”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거고, 나는 글 써야지.”

“왜, 네 준법정신이라면 아무 일도 안 터질 텐데.”

“에이.”

현수가 손을 내저었다.

“나라도 소크라테스는 아니야.”

“무슨 뜻이야?”

“안 좋은 규칙은 때려 부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솔직히 말하자면, 올해 들어본 말 중 가장 말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 * *

이틀 후, 현수가 완성한 평론은 그대로 잡지사와 한국대학교 교수실로 전달되었다.

전자는 ‘원고청탁’이고, 후자는 ‘졸업작품’이었다.

먼저 도착한 것은 한국대학교의 교수실이었다.

“아하핫! 조현수! 내 제자지만 진짜 얘는 제정신 아니라니까?”

졸업작품으로서 현수의 평론을 받은 한다은은 평론의 제목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트렸고, 그 내용을 다 읽은 후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해당 평론에 P자를 큼지막하게 적었다.

볼 것도 없이 패스, 라는 뜻이다.

하루 늦게 잡지사에도 현수의 원고가 전달됐다.

잡지사의 반응은 한다은과 완전히 정반대였다.

“…이건 조 작가가 규칙을 어긴 겁니다!”

문단의 원로들이 격분해서 소리쳤다.

“이걸 지금 평론이라고 내다니요!”

“젊은 평론가라고 띄워 줬더니, 이게 뭡니까?”

“지금까진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하인리히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대형 사고를 치기 전에 인간은 29번의 ‘작은 사고’를 치고, 300번의 ‘사고의 징후’를 만들어낸다는 법칙이다.

살인자 누구누구가 어릴 때 사실 도벽이 있었다더라-, 이번에 어디어디 공장이 터지기 전에 비슷한 사건이 몇 번 있었다더라- 같은 이야기에 흔히 인용되곤 하는 ‘하인리히의 법칙.’

하지만 세상에는 가끔 그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300번의 징후 없이, 29번의 경미한 사고 없이.

가만히 있는 듯하다가… 꽝! 하고 대형 사고를 칠 수 있는 예측 불가능의 인간.

‘그게 하필 조현수 평론가일 줄은!’

정 선생이 당황해하며 책상 위에 올려놓은 출력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수의 굴레를 넘어서>

조현수 평론가가 이번에 쓴 평론의 제목이었다.

제목까지는 참 좋은데, 그다음 소제목이 문제였다.

-참새치 작가의 <아이언 타이거>를 중심으로.

그러니까,

가장 촉망받는 젊은 평론가가 웹소설을 주제로 한 평론을 순문학 잡지에 등재하겠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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