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뭔가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네, 이거.”
30만원이 넘는 고급 컴퓨터용 의자에 앉아 소설을 집필하며 형우는 생각했다.
최근에 공모전 비리다, SNS총공이다, 이런저런 일들에 휩쓸려 다닌 탓에, 정작 본업인 소설에는 잘 집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뭐, 그 시간들이 아예 낭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800만 원이라.”
자신의 작품이 표절당했을 경우 원작자가 평균적으로 받을 수 있는 금액이라고 한다.
공태준의 <폭군전기>가 베꼈던 작품은 형우의 <전설의 보안관>을 포함해서 총 일곱 개. 계산은 금방 끝냈다.
“…평균가로만 따져도 5,600만 원인가.”
배낀 작품들이 아무래도 월에 천만 원 이상 수익을 찍어내던 작품들이니만큼, 실제 판결 결과는 이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것이다.
작품 하나로 5,600만 원을 벌기도 쉽지 않은 세상인데, 작품 하나로 5,600만 원을 잃어버리다니.
“뭐, 자업자득이지.”
별로 불쌍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공태준의 집안이야 부자라고 했으니 그 돈 잃었다고 세상 무너지지도 않을 거고, 만약 부자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형우는 이런 일에 측은지심을 느낄 정도로 아량이 넓지는 않았다.
“아무튼.”
형우는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아이언 타이거>를 재밌게 써내는 것이었으니까.
“유료 직전 순위 6위라….”
전작인 <전설의 보안관>보다 살짝 못 미치는 순위였다.
헌터물적인 배경에 어둡고 진지한 느와르 분위기를 섞어 완성해 낸 <아이언 타이거>는 장르 외에도 여러모로 전작인 <전설의 보안관>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전설의 보안관>의 평가가 ‘빠르다, 호쾌하다, 문장이 하드보일드하다, 강렬하다’였다면, <아이언 타이거>는 오히려 ‘진중하다, 무겁다, 문장이 미려하다, 예술적이다’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예술적이라는 건 분명 좋은 뜻인데.”
문제는 그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 탓에 독자들이 잘 붙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약간 아쉽긴 했지만, 일단 지금으로서는 아쉬움보다 안도감이 조금 더 컸다.
“…안 엎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 했네.”
한 번 크게 엎기 전의 <아이언 타이거>는 지금보다 더 어둡고 칙칙한 이야기였다. 스토리 자체는 지금과 별로 다를 게 없었지만, 연출이나 호흡이 꽤 많이 달랐다.
지금의 <아이언 타이거>가 암울한 스토리에 활발한 연출을 섞은 <킬 빌> 같은 느낌이었다면, 엎기 전의 작품은 스토리부터 분위기까지 내내 암울하기만 한 프랑스 예술영화 같은 느낌이었달까.
물론 좋아하는 사람도 있기는 했다. 웹소설 전문 뉴튜버인 웹타쿠만 해도, 고치기 전의 <아이언 타이거>에 나름의 호감을 표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많지는 않았겠지.”
가끔 그런 작품들이 있다. 평론가들은 다 5점을 주는데, 직접 본 괜객은 ‘이게 왜 5점이야? 이해를 못 하겠네.’라고 투덜거리는 작품들 말이다.
형우는 그런 식의 독립영화나 인디 밴드 등을 폄하하는 쪽은 아니었지만, 굳이 그쪽을 지향하지도 않았다. 이왕 글을 쓰는 거,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앞섰다.
“…진짜로 엎기를 잘했어. 안 엎었으면 완전 힙스터 취급을 받았을 거야. 어쩌면 유료화 자체를 실패했을지도….”
형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위가 아주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좌절할 정도로 낮은 순위도 아니지 않는가.
“일단 지금은, 새로운 장르에서 나름의 결과를 끌어냈다는 데 의의를 두자.”
소설의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
그건 언제나 좋은 일이었으니.
* * *
미사 지식산업센터. 지원은 그 건물 한 칸을 빌려 스패로우 팩토리의 사무실로 삼았다.
전에 다니던 C&N의 고층빌딩에 비하면 여러모로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지원은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뭔가 주도적으로 운전대를 잡고 자신의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았으니까.
똑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지원은 일어나서 문을 열어 줬다.
“어라, 혼자 계시네요.”
그렇게 말하며 들어온 것은 형우였다.
“아, 혜선 씨는 지금 일 좀 보냈어요.”
“아하. 그나저나, 사무실 괜찮네요.”
엄청 넓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햇빛도 들고 괜찮았다.
뭣보다, 지원의 인테리어 센스가 나쁘지 않았다. 가구들을 구경하던 사이, 지원이 커피를 내왔다.
“스틱 두 개에 설탕 조금 덜어서, 맞죠?”
“기억하고 계시네요.”
“당연하죠, 작가님 관련된 건 얼추 다 기억하는걸요.”
그뿐만이 아니다. 작가에게 뭐가 도움이 되는지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작가님, 뉴스 보셨나요?”
“안 봤어요.”
“…보통은 무슨 뉴스예요? 라고 묻지 않아요?”
“아뇨. 뉴스 자체를 안 봐요.”
“안 봤었어요?”
“아뇨, 그냥 안 봐요. 글 쓰느라.”
형우가 글 쓰느라 뉴스를 안 봤다면, 그건 충분히 말이 됐다.
아마 글 쓰느라 숨 쉬는 걸 깜빡해서 죽었다고 해도 한 5초 정도는 그럴 수도 있다고 믿을 것 같다. 김형우는 그런 작가였으니까.
약간 애매한 기분을 느끼며, 지원이 설명했다.
“며칠 전에, 네이비에서 큰 발표를 하나 했어요. 일단 이것 좀 보시겠어요?”
지원이 태블릿PC를 내밀었다.
[네이비시리즈, 해외 1위 웹소설 사이트 ‘하우패드’인수!]
[달피아-페이지-시리즈 3강 구도에 격변 오나?]
[네이비, 우리는 이제 글로벌에 도전한다!]
C&N에서 몇 년이나 굴렀던 유능한 편집자인 지원은 이 말뜻을 순식간에 파악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달릴 테니까, 알아서 긴장해라! 그런 뜻을 담은 신호탄 같은 거였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지원은 곧바로 형우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1차 유통은 네이비로 가시죠, 작가님.”
지원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1차 유통을 달피아로 잡는다고 들었었던 것 같은데, 획기적인 변화였다.
“그, 해외 플랫폼을 인수한 게 그렇게 큰일인가요?”
“당연하죠. 네이비에서 칼을 빼든 거라고요!”
달피아 – 시리즈 – 페이지로 대표되는 3대 플랫폼 중, 가장 늦게 시장에 뛰어든 것은 네이비 시리즈였다.
그만큼 불리한 시작이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리즈는 지금까지 꽤 공격적인 전략들을 많이 취해 왔죠.”
기존에 성행하던 ‘네이비 웹툰’을 통한 웹툰화 전략, 2018년을 강타했던 화제의 소설인 <독자가 다 앎>을 웃돈을 주고 플랫폼에 편입한 것.
“게다가 이번 6,500억짜리 해외 플랫폼 인수까지.”
그야말로 엄청난 투자가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필 소설 런칭을 며칠 앞두고 벌어진 이 거대한 사건을 지원은 기회라고 봤다.
“그 거대한 자본의 흐름에, 저희가 살짝 편승하자는 거죠.”
이 정도 이슈가 터졌는데 판매전략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말이 안 됐다.
“그래서 제가 짠 로드맵이 이건데….”
지원이 1차, 2차, 3차 유통까지 세세하게 싸여진 자신의 판매 전략을 몇 번이고 설명했다.
과연,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설명이었다.
* * *
“네이비로 간다고?”
천우희가 이해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요즘 거기 엄청 공격적으로 나가더라.”
잘나가는 작가인 천우희는 확실하게 형우보다 출판시장을 읽는 눈이 뛰어났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졸부 같은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실력 있고 유능한 모습뿐이었다.
“소설은 어때? 성공할 것 같아?”
“글쎄요, 예감은 좋은데….”
“그럼 잘 되겠지 뭐. 나도 읽어봤는데 재밌더라.”
“정말요?”
“그래.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천우희의 이 무심한 듯 툭 던지는 어투에, 형우는 이제 나름 익숙해졌다.
약간 유치한 라이벌리의 표현이랄까. 뭐, 가끔은 좀 닭살이 돋을 정도긴 했지만 그래도 진지할 때는 진지한 편이니 그러려니 했다.
“저도 잘 됐으면 좋겠네요.”
“잘 되는 법 알려줄까? BL을 약간….”
“싫어요. 천우희 작가님도 안 쓰잖아요.”
“난 남자 주인공은 잘 못 써.”
“저도 BL은 잘 못 쓸 걸요?”
“무조건 대박이라니까? 그, 주인공 김철호랑, 마피아 두목인 걔랑….”
“김철호 저희 아버지 이름인데요.”
“…싸우는 장면이 너무 좋더라!”
꽤 빠른 태세 전환이었지만, 그 방향이 틀려먹었다. 형우가 눈을 길게 찢었다.
“아직 둘이 안 싸웠거든요?”
“…소설이 너무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둘이 싸우는 모습 상상함.”
애 같은 모습이 없어졌다는 말은 취소다.
여전히 애 같은 모습이 있었다.
“계속해 봐요.”
당황해하는 천우희를, 형우가 살짝 놀렸다.
잠깐 고민하던 천우희가 두 팔을 쭉 벌렸다.
“일단 마피아 두목 ‘김영훈’, 철호를 보자마자 도망치려고 하지만… 어림도 없지! 콤보 데스폴트.”
“…쿡.”
생각보다 진지하게, 연극톤으로 흉내까지 내는 모습에 형우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 정도면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한 번 넘어가 주는 게 예의일 것 같다.
* * *
작가가 된 지 9개월, 형우는 이제 슬슬 루틴이라는 것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기상은 아침 7시에 해요.”
루틴(routine)은 본래 운동선수들의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21세기에 들어서는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규칙적인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요소 취급을 받고 있었다.
단순히 말하자면, 계획표와 신체 리듬을 일체화시키는 일을 말한다.
형우도 몇 가지의 루틴은 갖고 있었지만, 최근 몇 번의 기절을 겪으며 좀 더 체계적이고 안정감 있는 루틴 설정의 필요성을 느꼈다.
생활보다는, 생존의 필요성이었다.
진짜 마구잡이로 몸을 굴리면서 지냈다가는, 진짜 조만간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아침 7시에 기상.
기상 후, 1시간 조깅.
식사 후에 집필 시작. 5시간의 집필 후 약간의 휴식.
3시부터 다시 5시간의 집필 후, 저녁을 먹은 뒤부터는 독서를 통한 인풋 구축.
이것이 지금 형우의 루틴이었다.
나름 루틴을 지키려고 하고 있는데, 자꾸 그럴 때마다 한 문장만 더, 한 페이지만 더, 하면서 오버를 하게 됐다.
“그러면 루틴 의미가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요.”
형우의 루틴에 대한 설명을 듣던 천우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루틴을 만들겠다는 건 좋은 생각이야.”
천우희가 알기로, 오랫동안 일을 하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나름의 루틴을 갖고 있다. 그게 없으면 인간의 생활은 어느 한쪽으로 쏠리기 마련이고, 생활이 불균형해지면 결국 컨디션에 무리가 오기 때문이다.
“특히 매일매일 글을 써야 하는 작가는 컨디션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고.”
천우희가 형우의 루틴 몇 부분을 지적했다. 가장 큰 에러는 대부분의 루틴이 자신의 의지로 수행해야 하는 루틴이라는 거였다.
인간의 의지는 생각보다 빈약한 데가 있어서, 의지로만 뭘 하려고 하면 십중팔구는 말아먹게 된다.
“아침 1시간 조깅 있잖아. 이거 헬스장에서 1시간 피티 받는 걸로 바꿔.”
“피티요?”
“어. 피티 끊어 놓으면 돈 아까워서라도 무조건 가게 될 테니까. 트레이너도 이왕이면 엄청 무서워 보이는 사람으로 골라.”
“아하!”
일전 자료 조사를 위해 정진욱을 통조림 했을 때가 떠올랐다. 비기너에게 중요한 것은 강제성이었다.
천우희는 그 외에도 루틴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조언해 주고 수정해 줬다. 이런 부분을 보면 영락없이 경험 많은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식 시간을 조금 늘리고, 일 시간을 줄여. 그리고 그 대신 자유시간을 둬.”
“자유시간이요?”
“말 그대로 뭘 해도 되는 시간이지. 루틴이란 게 빡빡하게 짠다고 다 좋은 게 아니거든. 그리고 사람이 가끔은 놀기도 해야지!”
“안 놀아도 되는데….”
천우희가 뭘 모른다는 듯 손가락을 흔들었다.
“네 생각에 웹소설은 아트에 가깝냐, 엔터테인먼트에 가깝냐?”
“…엔터테인먼트죠.”
“엔터테인먼트는 무슨 뜻이지?”
“오락이죠.”
“맞아.”
천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작가도 엔터테인먼트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노는 법을 알아야 좋은 작품을 쓰는 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단다.”
뭔가 궤변 같으면서도, 묘하게 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