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드디어 시작하는 거군요.”
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이름을 건 출판사를 차리는 것,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지원이 꿈꿔왔던 일이었다.
실제로 준비도 꽤 많이 해 뒀었다. 그러니, 아예 아무 뒷배도 없이 순간적인 기분으로 C&N을 때려치운 건 아니라는 뜻이다.
“제가 여기저기 찾아봤는데, 스타트업은 5인 이상 창업일 경우 혜택을 좀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지원이 이곳에 사람들을 모은 이유였다.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작가님들. 공동창업자로 이름을 올려 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물론, 공동창업이라고 해도 여러분이 하실 건 없어요. 실무는 제가 하고, 여러분은 평소처럼 소설만 써 주시면….”
“에이, 또 쓸데없는 소리 하신다.”
형우가 손을 내저었다.
“저는 지원 편집자님 믿어요.”
“저도요!”
형우와 연수가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씩 웃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믿음직하던지.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제 갓 시작하는 출판사에요.”
“발전할 일만 남았다는 뜻이죠.”
형우가 대답했다.
“C&N에 비해 불편할 거예요.”
“C&N처럼 저희를 돈줄 취급하지도 않을 거잖아요.”
연수가 손을 내저었다.
“작품도, 아직은 두 개밖에 없어요.”
“이제 곧 세 개가 될 거야.”
천우희의 말이었다.
“나도 작품 주고 싶지만, 아직은 계약이 묶여 있어서. 조금만 기다려요, 언니. 곧 완결이니까.”
천우희가 아쉽다는 듯 덧붙였다. 이런 입장을 표명한 건 천우희만이 아니었다.
안재욱과 유동현, 그리고 의재와 송의진 선생님. 그 외에도 꽤 많은 작가가 지원의 출판사에 호의를 보였다.
“그때까지 출판사 잘 키워 놔요, 지원 언니.”
“당연하죠.”
지원이 검지로 슬쩍 눈물을 닦았다. 성취감이랄까, 지금까지 이뤄놓은 게 다 쓸모가 없지는 않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됐다. 형우는 휴지 몇 장을 뽑아 지원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말이죠, 편집자님. 아까 스타트업 지원을 받으려면 다섯 명이여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저희는 네 명인데요.”
형우가 물었다.
“아, 맞다. 말씀드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편집자가 한 분 더 계세요.”
아무리 작게 시작한다고 해도 일단 법인은 법인이다. 지원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한들, 회사를 홀로 운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 많이 됐다.
윤진이나 홍 매니저 등의 C&N 동료들을 꼬셔 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내 그만뒀다.
작가와 편집자, 모두 소설에 관련된 일을 하지만 둘의 생태는 상당히 다르다. 스포츠로 따지자면, 작가는 선수고 편집자는 구단 직원이랄까.
출판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고 떠날 수 있는 작가들과 달리, 편집자는 기본적으로 회사에 묶여 있는 존재다.
아무리 문제가 터졌다고 한들, C&N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굴지의 출판사다. 그런 회사를 버리고 성공할지 아닐지 확신할 수 없는 자신의 스타트업 회사로 와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상당히 염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냥 학교를 갓 졸업한 새내기라도 하나 키워서 써야 하나 생각할 때쯤, 지원의 눈앞에 엄청나게 괜찮은 경력직 한 명이 나타났다.
“스펙으로 말하자면, 예전에 스타트업 대표를 하면서 경영 능력을 쌓았고, 그 후에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실무 경력도 어느 정도 있으신 분이에요.”
“저기….”
지원의 설명을 듣던 형우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렸다.
“혹시 그 사람이 일했다던 출판사가 소설토끼인가요?”
“맞아요!”
“…혹시 그 사람 제가 아는 사람인가요?”
“그것도 맞고요! 이제 슬슬 오실 텐데….”
“허억….”
형우의 표정이 굳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누군지 모른다면 그건 바보 멍청이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잠시 후 도착한 건, 형우의 예상대로 신혜선이었다.
“반가워요, 천우희에요.”
“네, 신혜선입니다!”
“혜선 선배! 저 몇 번 얼굴 봤는데, 기억하세요?”
“어, 기억 안 나는데. 누구죠?”
“서연수에요! 선배보다 3년 후배요!”
“아아, 기억 못 해서 미안해.”
그렇게 다들 인사를 나누는데, 형우만이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구석에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신혜선은 7년 전에 형우가 고백했다가 차였던 동기다.
저번에 술집 앞에서 만났을 때는 취했다는 핑계를 대고 어떻게든 도망쳤지만, 이제는 동업자 신세. 얼굴을 볼 수밖에 없는 사이인 것이다.
“형우, 너는 나랑 인사 안 해줄 거야?”
“어…? 아, 해야지.”
형우는 얼떨결에 혜선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잘 부탁해, 형우!”
“…나도.”
진짜 더럽게 어색하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그럼 이렇게 다섯 명이 출판사의 공동대표가 되는 건가요?”
“예, 말했다시피 경영이나 운영은 저랑 신혜선 편집자가 하게 되고, 작가님들은 평소처럼 작품활동에만 매진해 주시면 됩니다. 물론, 일을 벌일 때는 무조건 여러분에게 동의를 구할 거고요. 그리고 또….”
지원이 설명하는데, 뒤에서 큰 소리가 났다.
“뺘아아악!”
새장 속에서 덜컹거리는 것은 참치였다. 마치, 나는 왜 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참치가 성이 많이 났나 보네요.”
“그러게요. 쟤가 왜 저러지?”
그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형우는 새장 앞에 서서 참치를 몇 번이고 달래야만 했다.
“참치야. 아무리 그래도 네 이름을 넣을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조용히….”
“뭐, 못 넣을 것도 없죠.”
지원이 자신의 태블릿pc를 톡톡 건드렸다.
“사실 아직 출판사 이름을 못 정했는데, 참치를 보니까 좀 괜찮은 생각이 났어요.”
“뭔데요?”
“스패로우 팩토리, 어때요?”
참새 공장이라는 뜻이었다. 연수가 생각났다는 듯이 박수를 딱 쳤다.
“참새가 박씨를 물어다 주듯, 독자분들에게 좋은 마음의 양식을 물어다 주겠다, 그런 의미로 하면 되겠어요!”
“어… 거기까진 생각을 안 했는데.”
지원이 멋쩍게 웃었다.
그냥 참새를 출판사 마스코트로 하면 귀여울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거였는데, 꿈보다 해몽이라고 꽤 그럴듯한 이유까지 붙었다.
“그러면 스패로우 팩토리로 할까요?”
“줄여서 S.F네요. 이름도 뭔가 좋아요. 공상과학소설 느낌 나기도 하고.”
“저도 찬성!”
연수와 천우희도 찬성했다.
그렇게 서지원을 필두로 한 서연수, 천우희, 김형우의 출판사인 스패로우 팩토리가 시작되었다.
* * *
“선인세로 3천 준비했어요.”
형우의 <아이언 타이거>와 계약을 맺으며 지원이 내민 금액이었다. 스패로우 팩토리의 상황을 고려하자면 무척이나 큰 금액이었다.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아닙니다. 그럴수록 더 신중해야죠.”
지원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친한 사이일수록 계산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지원의 의견이었다.
형우는 그 모습이 믿음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약간 걱정이 됐다.
“스패로우 팩토리, 갓 세운 거잖아요. 앞으로 돈 쓸 일 많으실 텐데, 초장부터 이렇게 쓰면 어떻게 해요?”
“그건 저희가 알아서….”
“에이, 저희가 알아서가 아니죠. 저도 회사 공동대표인걸요.”
그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그러면 이 3천은 받았다 치고, 스패로우 팩토리에 투자하는 걸로 하죠.”
“투자요?”
“네. 편집자님이 말했잖아요. 회사 키워서 언젠가 주식회사로도 만들고, 상장도 시킬 거라고. 아녜요?”
“그렇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어허!”
형우가 지원의 말을 끊었다.
“전도유망한 미래 기업에 대한 선투자 활동입니다. 워랜버핏도 코카콜라에 투자한 걸로 부자가 됐다죠? 나도 백만장자 한번 돼 볼까.”
“…작가님.”
지원의 눈에 또 눈물이 맺혔다.
C&N에서 편집자로 일할 때만 해도 언제나 냉정한 인텔리인 줄 알았는데, 일을 때려치우고 나니 없었던 감성이 새록새록 돋아나기라도 했나 보다.
아니면, 남의 일 해주는 게 아니라 자기 일 시작한 거라 조금 더 와닿거나.
어느 쪽이든, 형우의 이 제안은 너무 고맙고도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코카콜라만큼은 못해도, 괜찮은 출판사가 되도록 노력해 볼게요.”
“괜찮은 출판사라면, 어느 정도요?”
“어… 한 주작미디어 정도?”
주작미디어는 그 이름과 달리 상당히 투명하게 운영되는 출판사로, 장르소설 시장에서는 흔히 ‘2티어’정도로 분류되는 출판사였다.
“주작미디어보다 조금 더 위로 잡죠?”
“조금 더 위라면, 영일미디어나 룬타임이요?”
“아뇨. 이왕 꿈꾸는 거 탑을 잡아야죠.”
형우가 하늘을 손가락질했다.
“C&N. 그 정도는 따라잡아야 하지 않겠어요?”
“C&N이요?”
C&N을 따라잡겠다는 말은 곧 한국 출판시장의 탑을 찍겠다는 뜻과 다름이 없었다.
위만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포부가 엄청나게 크다 싶었다.
“너무 쉽게 말하시는 거 아닌가?”
“말은 원래 쉬운 거예요. 실천이 어렵지.”
형우가 씩 웃었다.
“저는 쉬운 거 할 테니 편집자님이 어려운 거 해주세요.”
“…진짜로 큰 꿈이네요.”
“이왕 하는 거, 정상을 노리자고요.”
꽤나 허무맹랑한 말이었지만, 말하는 사람이 형우다 보니 왠지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선인세를 받았어요?”
연수가 형우에게 물었다.
원래 계약사항은 작가들 사이에 공유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지만, 일단은 공동대표니 말해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삼천 받았어.”
“오, 많네요!”
연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뭔가 예상했던 반응이랑 달랐다.
“나도 똑같이 계약했는데 왜 선인세를 안 줘!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에이, 저는 완전 쌩신인이고 선배는 이미 한 번 떴잖아요.”
“1질 작가기는 하지만.”
“그 1질이 우주최강이었잖아요?”
“켁.”
우주최강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튀어나온 유치한 비유에 형우는 약간 당황했다.
“에이, 무슨 우주최강이야. 열 권, 스무 권 완결지은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에휴. 겸손도 그 정도면 기분 나쁘다니까요. 마가릿 미첼 몰라요?”
마가릿 미첼은 미국의 여류작가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녀가 작가로 데뷔하고 처음으로 미국 작가 모임을 갔을 때, 한 작가가 그녀에게 시비를 걸었단다. 자신은 책을 10권 넘게 쓴 기성인데, 당신은 몇 권이나 썼냐고.
신입 작가였던 마가릿 미첼은 당연히 딱 1권 썼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가 그녀를 비웃으며, 쓴 책의 제목이라도 말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마가릿 미첼은, 자신이 쓴 책의 제목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고 대답했다.
지금도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 TOP10에 꼽히는, 그 작품이 맞다.
“결국 그 남자는 쪽만 팔리고 갔다는 거죠.”
“100년 전 사이다 전개네.”
“아무튼, 선배도 그렇잖아요. 시리즈 수십 개 완결이 뭐가 중요해요? 대박작 하나가 더 중요하지.”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할 뿐, 사실 <전설의 보안관>은 과장 조금 보태서 우주최강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긴 했다.
1차 플랫폼인 달피아에서 1위를 찍고, 2차, 3차 플랫폼에서도 순위권을 석권했던 작품이니.
“연수야, 네 작품은 얼마나 받았어?”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요? 일단 500이요.”
“흐음….”
500이면 형우보다는 적지만, 신인임을 고려하면 결코 작지 않은 금액이다. 아니, 굉장히 많은 금액이었다.
“합리적이네.”
지원은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않겠다.’라는 자신의 말을 철석같이 지켰다.
친하다는 이유로 돈을 더 주지도, 덜 주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선배, 지금 일없으면 밥이라도 한 끼 안 할래요?”
“으음, 밥은 나중에 하는 걸로 하자.”
형우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요즘 글을 너무 못 썼거든.”
다른 사람이 저렇게 말했다면 에이- 글이야 언제든 쓸 수 있는 거니까 나랑 밥 먹어요! 라며 붙잡았을 텐데, 그게 형우라면 좀 이야기가 다르다.
‘차라리 돌진하는 황소를 붙잡고 말지.’
그렇게 생각하는 연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