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술자리가 끝났다.
대리운전 기사님만 다섯 명이 넘게 왔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뵙지요. 기사님, 을지로로 가 주세요.”
스파크부터 렉서스까지.
한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다시 제 길을 찾아 떠났다. 형우는 그 가운데서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운전면허를 따 놨어야 하는데.”
“…난 운전면허도 있는데 왜 대리가 안 오지.”
옆에서 천우희가 투덜거렸다.
“비싼 차라서 그런가?”
“어, 맞아요. 그런 이야기 들은 적 있어. 대리운전기사들이 외제차는 좀 꺼린다고.”
외제차 몬다고 돈 더 받는 건 아닌데, 실수로 긁으면 진짜로 난리가 나 버릴 수도 있으니 약간의 기피 증세가 있는 것이다. 가만히 서 있던 천병옥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러게 자동차는 그냥 싼 거 사라니까.”
“아빠가 차에 대해서 뭘 알아?”
“자동차는 그냥 구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어이고, 내가 내 돈으로 비싼 차 끌고 다니겠다는데, 왜 그러신대.”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 아빠 교수 된 거 기념해서 외제차 한 대 뽑아 드리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소나타로 바꾼다?”
“그건 바꾸지 말거라.”
“왜? 언제는 내가 내 돈으로 내 차 사는 거 안 된다며?”
“그건 내 차니까 괜찮아.”
“…어휴, 누가 문창과 교수 아니랄까 봐 말은 진짜 잘하네.”
한참을 천우희와 투닥거리던 천병옥이 형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형우 학생.”
“네, 교수님.”
“아까 물어볼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맞네요.”
아까 술자리에서 물어보려다가, 괜히 분위기를 망칠 것 같아서 미뤄 뒀던 질문이었다.
“공태준은 어떻게 될까요?”
“그 질문일 줄 알았지. 학교 차원에서 교수로서 답변해주자면….”
잠시 고민한 후, 천병옥이 이야기했다.
“…어찌 됐든 간에, 조작에 가담하여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점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지. 아마 교내징계위원회가 열릴 거다. 게다가 공태준 학생은 이미 저번에 경고를 한 번 받았으니, 답은 뻔하지.”
한국대학교의 교칙상, 한 학기에 경고를 두 번 이상 받은 학생은 정학에 준하는 처벌을 받는다.
“나 또한 선처를 베풀어 줄 생각은 없고. 잘은 모르지만, 한다은 교수도 비슷하지 않을까.”
간단히 말해 퇴학이라는 뜻이었다. 약간 씁쓸한 표정으로 천병옥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정식이가 그렇게 변했을 줄이야.”
“정식이요?”
그 말을 들은 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의 맥락에서 나올 법한 정식은, 형우가 알기로 한 명밖에 없었다.
“윤정식 부회장이랑 아는 사이에요?”
“알다마다. 한국대학교 문창과의 3강强이라는 좀 부끄러운 별명도 있었는걸.”
문창과의 3강이라면 예전에 연수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90년대 문창과를 졸업하고, 문단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세 명의 선배들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윤정식 부회장이 거기에 들어간다고요?”
“당연한 거 아닌가? C&N의 부회장인데.”
“아아.”
맞다. 지금까지 마찰이 있었던 게 전부 장르소설편집부라 잠깐 잊고 있었다.
C&N은 장르소설 출판사가 아니라, 대부분의 출판물을 취급하는 종합출판사였다.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은 물론, 매거진, 잡지, 웹툰과 만화, 비문학까지 취급하는 거대 출판사.
그런 출판사의 대표가 거인 취급을 받지 않는다면 그게 더욱더 말이 안 됐다.
“대리 부르신 분?”
그렇게 고민하던 사이, 도착한 대리운전기사가 천우희의 차를 보자마자 한마디 했다.
“와우, 이거 엄청 비싼 차네.”
“혹시, 운전 못 하신다거나 그러신 건….”
“에이! 그러면 뭐 비싼 차 가지신 분들은 술도 맘대로 못 마시겠네! 어제는 말입니다, 더 비싼 차도 몰았거든요. 그 람보르기니 아시죠? 노란 거 있잖아, 영화에도 나온 거….”
말이 많고 사람이 좋아 보이는 운전사가 신나게 떠들었다. 천우희가 맞장구치며 차에 올라탔다.
“가자, 아빠!”
“잠시만.”
차에 타기 전, 천병옥이 형우 쪽으로 등을 돌렸다.
“자네는 정말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버스 타고 가면 돼요.”
아까 천병옥이 차를 같이 타자고 했지만, 형우가 거절했다.
아무래도 대학생이 교수랑 같이 차를 타긴 껄끄러운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괜찮냐고 물어본 건 그 부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말이 아니라, 윤정식을 말하는 거야. 내가 아는 정식이는 복수를 좋아하는 녀석이었거든.”
“에이, 설마요. 부회장이라는 사람이 이깟 일에 복수까지 하겠습니까? 거기에 뭐, 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요.”
“…그런가.”
천병옥은 그대로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차에 올라탔다.
“형우 학생. 이번 소설 잘 보고 있네.”
그 말을 끝으로, 천우희의 차도 점점 멀어져갔다. 소설을 잘 보고 있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형우는 그만 피식, 하고 웃고 말았다.
‘전에는 장르문학에 치를 떠는 사람이었는데.’
사람이 많이도 바뀌었다.
아니, 바뀐 사람은 천병옥만이 아니다.
‘유명 작가’라는 이름에 취해 소설보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중요시하던 천우희는, 다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로맨스를 쓰는 작가로 거듭났다.
꿈이 없어 방황했던 의재는 만화가라는 꿈에 처음으로 불씨를 지폈고, 번아웃이 심하게 왔던 송의진은 70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꿈을 찾았다.
온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며, 늘 인색하게 굴었던 정진욱은 이유 없이 누군가를 선뜻 도와주는 좋은 사람이 됐다. 그리고,
‘나도 바뀌었나.’
재능 없는 순문학 지망생이, 장르소설의 슈퍼스타가 됐다.
“사람은 바뀔 수 있다는 거겠지.”
그렇게 말하며 유리창을 바라봤다.
술기운 탓인지,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게 되는 느낌이었다.
생각은 간질간질하고, 날씨는 추웠고.
“엣취!”
그러다가, 재채기가 나왔다. 재채기의 모양은 둥그런 모양.
“이제 11월인데, 꽤 춥네.”
어느새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계절이 됐다. 바라보던 유리창에 입김이 서렸다.
입김과 유리창, 이 충동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그대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직선 다섯 개를 그렸다. 며칠 전 지원이 태블릿에 그렸던 것과 비슷한 졸라맨이었다.
그 텅 빈 얼굴에, ‘김형우’라는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옆에 졸라맨 두 개 더. 형우의 부모님인 김철호와 송윤아.
“아빠, 미안.”
그렇게 말하며, 송윤아의 옆에 조그마한 졸라맨을 하나 더. 당연히 민준 삼촌이다.
그 주위로 수많은 졸라맨들을 그렸다.
서의재, 서연수, 서지원. 왜 다 서 씨지? 참치도 잊지 않았다. 천우희와 천병옥, 그리고 한다은도. 정승록, 정진욱, 안재욱, 유동현, 송의진… 수많은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다.
“끄응.”
그러다 보니, 졸라맨 하나가 남았다. 어떤 이름을 쓸까 고민하던 도중.
손가락 하나가, 형우의 귀밑을 스쳐 지나갔다.
“내 이름은 안 적어 줄 거야?”
슉슉-
손가락이 움직여 졸라맨 안에 이름을 적었다.
형우의 시선이, 그 손가락을 거슬러 올라갔다.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경솔하지는 않은 손짓.
엉뚱하면서도 기발해 보이는 표정.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삐뚤빼뚤 적은 세 글자.
신혜선.
유려하게 쓰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알아보기 쉽게 쓰는 게 우선이라고 우기던,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사소한 기억들.
“오랜만… 은 아니지, 형우야? 저번에 편의점 앞에서 보고 갔잖아.”
“알고 있었어?”
“아니. 와서 알았어.”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아 그게. 초대받았는데 편의점 일이 너무 늦게 끝났지 뭐야….”
그렇게 대답하는 엉뚱함까지.
…7년 전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 * *
“사람은 바뀔 수 있다.”
윤정식은 자신의 외조카, 공태준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솔직히 말해. 도작은 네가 했지?”
공태준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 모습을 본 윤정식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걸로 뭐라 하지는 않겠다. 그냥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야.”
잠시 고민하던 공태준이, 끄덕. 고개를 흔든다.
그 모습을 보는 윤정식의 표정이 변했다. 반은 짜증, 반은 만족이 섞인 표정이다.
“…그렇다면, 네 숙부. 그러니까 공판석 편집장을 묻은 것도 너라는 이야기군.”
역시 끄덕.
이제 윤정식의 표정에는, 짜증보다 만족이 더 크다.
“별 볼 일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이쪽 피가 섞이기는 했다는 건가?”
이쪽 피라면, 당연히 윤가家를 말하는 거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그 외의 것은 무엇이라도-
아니, 가문의 것이라도 가문 전체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거리낌 없이 내다 버릴 수 있는 족속들.
그것이 윤가의 가풍이고, 가훈이고, 삶의 방식이다.
“윤가의 사람이 되고 싶나?”
끄덕, 공태준이 또 고개를 끄덕거렸다.
“윤가의 사람이 되고 싶으면, 일단 그 고개 끄덕이는 것 좀 집어치워. 당당하게 대답하란 말이다.”
“…네, 외삼촌.”
다 갈라진 목소리로 공태준이 대답했다.
패기는 없지만, 독기는 충분했다. 제 숙부의 목을 스스로 끊은 놈이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일단은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우리 아들은 어땠어?”
방에서 나오자마자, 윤정식의 누나인 윤정아가 말을 걸었다.
“늑대 새낀지는 모르겠는데, 치와와 새끼는 아닌 것 같네.”
“윤정식. 말 함부로 하지 말랬지.”
“부탁하는 태도가 영 별론데. 그리고, 이건 내 기준에선 칭찬이었어.”
윤정식이 손을 들어 올렸다. 윤정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회사엔 언제부터 보낼 거야?”
“회사 좀 잠잠해지면. 그리고. 출근 전까지 공씨 성은 좀 떼.”
“성을 바꾸라는 거야?”
“지금이 일제시대는 아니니, 성 갈아치우는 것 정도야 그리 흠 잡힐 일도 아니지 않아? 윤씨 성으로 해.”
“너….”
“누나. 나도 이것만큼은 양보 못 해.”
윤정식이 으르렁거렸다.
“C&N은 윤가의 거야. 누나도 알잖아?”
* * *
집 밖으로 나온 후, 윤정식은 천천히 걸었다.
30년 전만 해도 회사에 대한 야욕이 거대하던 누나였는데, 가족을 갖더니 변해 버렸다.
‘…뭐, 내가 신경 쓸 건 아닌가.’
그 덕에 회사를 차지하게 됐으니, 이득이라면 이득이지 손해는 아니다.
윤정식은 다시 부회장으로서 손익계산을 시작했다.
‘회사의 이름과 유능한 수하를 하나 잃고, 거대 주주 하나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라.’
거기에 아직 늑대인지 개인지 모를 풋내기 하나까지.
‘등가교환이라고 하기에는 잃은 게 너무 크군.’
하지만 너무 상심하지는 않았다.
윤정식이 살아온 세상에서는 최선보다는 차악을 고를 때가 더 많았으니.
이 정도면 차악이라고는 불러줄 정도는 됐다.
* * *
지난 일주일, 지원은 평생 놀 걸 다 놀았다.
뮤지컬을 네 편이나 봤고, 제주도와 강릉을 둘 다가 봤으며, 수상스키를 타고, 동물원 펭권과 사진을 찍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셨다. 주종도 매일 바꿨다. 말 그대로, 내일 죽어도 원이 없을 정도로 마셨다.
“그렇다고 내일 죽을 수는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 시간 동안 C&N에서 뼈 빠지게 일한 것에 대한 자기 보상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제 내 일을 해야지.”
내 ‘일’을 해야지가 아니라, ‘내’ 일을 해야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지원은, 형우의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연수와 천우희가 모여 있었다.
“다들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사람들을 형우의 집에 모은 이유는 간단했다.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지원이 주변을 쭉 둘러봤다.
“예전에 말했듯이, 출판사를 차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