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101화 (101/200)
  • #100

    사건은 시시각각으로 빠르게 진행됐다.

    [문학우주 11월호 논평. 거대 출판사의 말도 안 되는 변명. 예술이라는 이름 하에 모든 것이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 글쓴이 천병옥.]

    [네이비 시리즈 웹툰작가모임회 13인은 한국 컨텐츠의 미래를 위해 C&N의 진상발표를 촉구합니다!]

    [유명 드라마 원작 작가 천우희, ‘C&N에 실망. 확실하게 진상 공개하라.’며 sns에 글 기재! 안띵 등 유명 작가가 좋아요 눌러….]

    [2차 성명문과, 트럭시위 계획입니다….]

    그렇게 관련 사건들을 읽어내려가는 형우의 눈에 특이한 것이 보였다.

    내일 11시, C&N의 윤정식 부회장이 직접 기자회견을 요청했습니다.

    일이 커질 대로 커지고 나서야, 최종보스가 전면으로 튀어나오는 느낌이었다.

    * * *

    “요즘 세상 참 좋아졌어, 안 그렇습니까, 공판석 편집장님?”

    윤정식이 으르렁거렸다.

    공판석이 사시나무 떨듯 벌벌벌 떨었다. 지금 창밖에는 커다란 전광판을 실은 트럭이 두 대나 정차해 있었다.

    [C&N은 이번 8회 공모전 비리를 해명하라!]

    [조작, 표절, 도작논란 해명하고, 피해 입은 작가들에게 보상하라!]

    “예전에는 저런 거 하려면 직접 피켓 들고 소리 질러야 됐는데 요즘은 편리하게 트럭이 대신해 주니, 얼마나 좋습니까. 안 그래요?”

    저 트럭이 온 지 이틀 만에, 결국 윤정식은 기자회견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결정하지 못한 게 있었다.

    ‘누구를 잘라내야 하지?’

    지금 가장 커다란 이슈는 도작 논란이다. 즉, 회사에 있어서는 그 도작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정확하게 해명할 책임이 있었다.

    그리고 현시점에서, 그 일에 관련된 사람은 두 명이었다. 공태준과 공판석, 삼촌과 조카.

    어느 쪽을 고르든 문제가 있었다.

    ‘편집장인 공판석의 주도라고 해 버리면 회사 이미지에 타격이 너무 커. 하지만 공태준이 주도했다고 한다면… 누나가 가만있지 않겠지.’

    회사의 이미지와 거대주주인 누나의 호감도.

    그 사이를 저울질하는 것은, 윤정식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누나는 어떻게든 설득할 수 있지만, 한번 떨어진 신뢰도는 회복하기가 힘들다. 차라리 공태준을 버리는 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부회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비서가 들어왔다.

    “기자회견까지 30분 남았습니다, 부회장님.”

    “…가지요.”

    그렇게 회견장의 문을 여는 순간, 여기저기서 플래쉬가 파바바박 터졌다.

    그리고, 윤정식은 놀라고 말았다. 플래시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다.

    자신이 올라가야 할 연단에, 이미 누군가가 올라가 있었다.

    “…너,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냐.”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얼마 전 퇴직 의사를 밝힌 C&N의 수석 편집자 서지원이었다.

    * * *

    “…공판석 편집장의 비리에 대해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2년 전 소설토끼에 재직할 당시, 신입에게 자신의 죄를 덮어씌워 퇴직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이 자료를 보시면, 4년 전에도 몇 번이고 조작을 저질렀던 전적이 있으며….”

    “또한 5년 전에는….”

    지원의 발표를 듣던 공판석의 얼굴이 까맣게 질렸다.

    ‘저것들을 다 어떻게 알았지?’

    지원이 가져온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무려 9년 전의 자료였다.

    지원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이 짧은 시간에 혼자서 알아내기엔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증거였고, 그 디테일도 놀라웠다.

    마치 자신의 옆에서 직접 본 듯한….

    ‘…혹시?’

    그 순간, 공판석의 머릿속에 불꽃이 튀었다. 딱 하나, 가능한 시나리오가 있긴 했다.

    ‘공태준, 조카 녀석이 날 팔아치운 건가?’

    C&N의 대주주이자 공태준의 어머니인 윤정아.

    자신의 동생과 결혼한 그 출판업계의 큰손은 예전부터 공판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애초에 공판석이 C&N이 아니라 소설토끼 같은 작은 출판사에서 경력을 시작했던 이유도, 윤정아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녀가 보기에 공판석은 그저 동생의 능력에 한 발 얹어 인생을 쉽게 살아가려는 놈팡이였고, 공판석으로서는 윤정아와 몇 번이고 친해지려고 노력했지만, 잘 안 됐다.

    그래서 전략을 바꿨다.

    장수를 노리려면 말을 쏘라는 일본의 속담처럼, 자신의 조카가 태어난 후 공판석은 윤정아 대신 조카인 공태준을 공략했다.

    비싼 옷을 사 주고, 잘 놀아 주고, 성인이 된 후에는 자주 술자리를 만들었다.

    그러던 중, 가끔 술이 과해지면 반쯤 허세를 섞어 그런 말을 했다.

    “이건 절대 말하면 안 되는 건데, 내가 7년 전에 말이다. 돈을 좀 챙긴 적이 있거든.”

    “빽 없는 게 제일 큰 잘못이다. 내가 2년 전에 소설토끼에서 일할 때 말이다….”

    “이건 비밀인데….”

    그렇게 비밀을 공유한 덕분에, 공태준과 급속하게 친해지고 윤정아에게도 잘 보여 C&N으로 이적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그때는 그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반대였다.

    ‘…맞아, 저건 태준이에게 했던 이야기들이잖아.’

    술자리에서 했던 비밀 이야기들이, 지금 연단에 있는 지원의 입에서 술술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확실해졌다.

    공태준이 자신을 팔아치웠다.

    “…이상입니다.”

    어느새 말을 마친 지원이 연단에서 내려왔다.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윤정식이 올랐다.

    “일단 여러분께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윤정식이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누구를 버릴지는 이미 결정 났다.

    “회사 내부 감사 결과, 장르소설부에서 진행한 공모전에 심각한 비리가 있었음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시도한 사람은….”

    윤정식이 눈을 감았다.

    “방금 서지원 전 수석편집자가 말했듯이. C&N의 장르소설 편집부 편집장… 공판석입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마이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윤정식 부회장님! 부회장님은 모르고 계셨던 겁니까?”

    “윤정식 부회장님! 이 이후에 공모전의 배상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부회장님!”

    보디가드와 직원들이 달려들어 윤정식을 둘러쌌다. 플래시와 마이크를 뚫고 나오자마자, 누군가가 달려들었다.

    “부회장님! 억울합니다!”

    공판석이었다. C&N의 직원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공판석은 재빨리 달려 들어와 윤정식의 소매를 붙잡았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도작은….”

    윤정식이 소매를 휘둘러 공판석을 떨쳐냈다.

    “저기요, 편집장님. 제가 말했잖아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부회장님! 그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 잘못입니다. 죽을 것 같으면 먼저 쳤어야지. 가만 있었던 당신의 잘못이라고요.”

    윤정식이 비웃었다.

    “당신이 누구한테 졌다고 생각합니까? 김형우? 서지원?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 조카한테 진 겁니다. 태준이한테요.”

    왜 졌는지, 그건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다.

    중요한 건, 공판석보다 공태준이 더 머리가 잘 굴러가고, 수완이 좋다는 거였다.

    “부회장님!”

    “아, 당신에게도 두 개의 선택지가 있기는 하군요.”

    공판석을 향해, 윤정식이 한 걸음 성큼 다가갔다.

    “다 뒤집어쓰고 퇴직금이라도 챙겨가던가, 아니면 괜히 입 열었다가 모아둔 돈 변호사 선임비로 다 날리던가.”

    처음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공판석은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실형 살 일 없게끔 변호인단 잘 꾸려 드리죠. 퇴직금도 두둑하게 챙겨 드리고요.”

    그렇게 말한 뒤, 윤정식은 쓰러진 공판석을 놔두고 뒷문으로 향했다.

    * * *

    ‘…아까운 패였어.’

    답답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공판석은 나름 능력과 수완도 있었고, 충성심도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심복이었다.

    체스로 치자면, 퀸은 못되더라도 나이트 정도는 되는 좋은 말이었는데. 그런 귀중한 말을 잃어버렸다.

    ‘…김형우, 서지원.’

    이름들을 하나하나 읊조리며 으득, 윤정식이 자신의 입 안을 씹었다.

    꼬리는 잘 잘랐지만, 그뿐이었다.

    도마뱀은 도망칠 때만 꼬리를 자르는 법이니.

    짜증나는 패배였다.

    * * *

    [C&N 윤정식 부회장 사과, 문화관광부에서는 조사에 착수하기로 의견 밝혀.]

    […최근 국내 최대 출판사 C&N의 공모전 비리가 밝혀져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에 윤정식 부회장은 직접 기자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소비자들에게 송구함을 표시했습니다.]

    [ 이번 행사는 국가 지원사업인 만큼, 더욱 엄중하게 내부 수사가 진행될 전망이며, C&N의 대변인은 ‘이 기회를 통해 회사를 자정하는 계기로 삼도록 하겠다.’며 거듭 죄송함을 표시했습니다.]

    […또한, 위 사건으로 피해를 입었던,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했던 480명의 인원 모두에게 적절한 보상을 약속했으며, 표절 논란이 된 작품에 대해서는 전권 회수조치와 환불조치를 내렸습니다. 또한 표절에 당한 작가들에게는 추가적인 보상을….]

    […일을 벌인 것으로 밝혀진 K편집장은 경찰에 송치되어….]

    “우와, 진짜 이겼네요.”

    “그러니까요.”

    TV를 바라보며, 지원과 연수가 한마디씩 했다.

    방이동에 위치한 커다란 술집, 그곳에는 이번 일을 도와준 사람들이 한 아름씩 모여 있었다.

    형우는 자기 오른쪽에 앉은 네 명을 바라봤다.

    천우희, 안재욱, 유동현, 정진욱.

    공모전의 특별심사위원으로서 성명서를 발표해 여론 조성에 많은 힘을 실어준 사람들이었다.

    “특히 정진욱 작가님은 SNS 총공격까지도 도와주셨죠.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특별심사위원이라고 우리 불러 놓고서 우리 의견 싸그리 무시한 거 아뇨. 그걸 어떻게 가만히 있어? 당연히 화내야지.”

    정진욱이 말했다. 천우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뭐, 출판사가 C&N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건 쓴맛을 봐야 돼.”

    “이런 일이 많아져야 출판사가 독자랑 작가를 우습게 못 본다니까요. 유동현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

    “…공감해. 그나저나 여기 치킨 맛있네. 달달해서 좋아.”

    수염에 소스를 묻혀가며 치킨을 뜯던 유동현이 옆에 앉은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

    “젊은 애들만 있고 내 동년배는 없을 줄 알았는데.”

    “허어, 그쪽 연배가 어떻게 되시오?”

    “나는 60줄이요.”

    “이쪽은 70이니, 동년배라 부르지 마쇼.”

    “선생님, 나이 자랑을 굳이 할 필요는….”

    “넌 술이나 따라 인마! 술잔 비었잖아!”

    송의진과 서의재가 서로 틱틱거렸다.

    오랫동안 만화계에서 활동하며 넓은 인망을 갖고 있던 서의재는, 웹툰작가들을 설득하여 이번 이슈에 꽤 많은 힘을 실어줬다.

    “70도 있고, 60도 있는데. 50대는 없나?”

    “…제가 50대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양복 소매 하나가 비쭉 올라왔다. 엄숙하게 앉아 있던 천병옥이었다.

    “아, 이분은 저희 학교 천병옥 교수님이세요. 천우희 작가님 아버지기도 하시고요. 이번에 C&N 관련해서 논평을 써 주셨죠.”

    그 논평 덕에, ‘공모전 조작’이라는 논의는 장르문학의 틀을 넘어 문학계 전체의 이슈로 퍼져나갔다.

    “문학가로서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네.”

    천병옥이 으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무안한 듯 다시 맥주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우희는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수고했어요, 아빠.”

    “……뭘.”

    여기 나오지 않겠다는 것도 천우희가 끌고 오다시피 했다는데, 그런걸 보니 부녀 관계가 많이 회복된 모양이다 싶었다.

    “…그나저나 내일 수업이 있는데 이렇게 마셔도 되나.”

    “어허! 교수님! 술자리에서 일자리 이야기 금지!”

    지원이 태클을 걸었다.

    “백수 된 사람 앞에서 일자리 이야기라니,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어험,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기뻐 보이는데.”

    “제가 기뻐보인다고요? 맞아요!”

    술에 취한 지원이 빙긋 웃었다.

    “일에만 집착하던 저는, 드디어 퇴사했답니다!”

    지원이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맥주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퇴사한 게 그렇게 좋으세요?”

    “어허, 형우 작가님이 또 초 치시네. 퇴사한 사원이 어떻게 웃는지 아세요?”

    “모르겠는데요.”

    “퇴사사사사, 퇴사사사사사사. 이렇게 웃어요.”

    “뭐에요, 그게.”

    “그러면요, 회사 다니는 사람은 어떻게 웃게요?”

    “회사사사사 회사사사?”

    “땡!”

    지원이 맥줏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회사 다니는 사람은 웃을 일이 없답니다!”

    와라락- 하고 술자리에 웃음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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