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같은 시간, 지원은 C&N의 앞에 도착했다.
“…서 수석? 이제 오나?”
공판석이 지원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날씨가 춥지도 않은데, 지원은 꽤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었다.
“네. 일이 좀 있어서요.”
“아, 오늘 미팅이 있었지? 거, 누구였지?”
“서연수라는 작가입니다. 원래라면 이번에 공모전에 당선되어야 했을 작가죠.”
지원은 자신이 추론한 것들을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지금 편집장님이 꽤 큰일을 벌이셨다고 생각하는데요. 편집장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지원은 최대한 예의를 차려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내가 부회장님과 이사, 상무들과 함께 손을 잡고 공모전 비리를 저질렀다, 이 말인가? 나랑 부회장님, 그리고 1위 당선자는 돈독한 관계라는 거고?”
“…혈연관계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다면… 자네는 왜 그렇게 빳빳한 거지?”
공판석이 놀란 기색도 없이 물었다.
“자네 말대로라면 공모전 비리를 저지른 건 회사 그 자체라는 건데, 자네가 홀로 회사를 막아보겠다는 건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원은 능력 하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유능한 편집자였지만, 바꿔 말하면 능력밖에 없는 편집자였다.
실무는 에이스지만, 권력도 빽도 연줄도 없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도 부족하다. 계란으로 지구를 때리는 수준이었다.
지원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본 공판석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뭐, 그게 사실이라도 어쩔 건가? 문학이란 건 예술이지 않나. 난 예술이라는 단어가 참 좋아. 야한 사진은 법적으로 처벌을 받지만, 그림은 아무리 야하더라도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용인되지 않던가?”
“하고 싶은 말씀이 뭐죠?”
“소설도 마찬가지라는 거지. 만약 자네 말대로 우리가 1위를 바꿔 쳤다고 해도,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가 그만큼 좋은 작품이란 걸 어떻게 설명할 거냐는 뜻이야.”
최근에 몇몇 불상사로 조용해지긴 했지만, 이것이야말로 사내정치력 100단 공판석의 진짜 모습이었다.
말투와 분위기는 확실하게 위압적이었으나, 질문이 너무 뻔했다.
저 정도 질문은 세 시간 전부터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말씀대로입니다.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가 좋은 작품이라는 걸 설명하기는 힘들겠죠.”
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원도 아예 맨손으로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폭군전기>가 1등을 할 수 없는 작품이라는 것만큼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지원은 <폭군전기>의 표절과 관련된 자료들을 꺼냈다.
“총 17군데에서 6개 작품의 표절이 발견되었습니다.”
“…뭐라고?”
“프로그램을 통해 표절률을 확인해 봤는데, 최소 30%에서 최대는 60%까지 나오더군요.”
사실 그 정도면 표절이라고 부르기도 무안할 수준이었다. 60%라면 원작에서 고유명사만 바꾼 거나 마찬가지라, 도작이라고 부르는 게 맞았다.
표절 시비가 붙은 작품은 종종 어떻게든 넘어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작가가 어디서 본 것을 자기도 모르게 썼다고 주장할 수라도 있으니까. 무의식적 표절은 의외로 꽤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고, 작가 또한 선처를 기대해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도작은 다르다. 도서 시장에서 도작 사건이 발생할 경우 그 처리 방법은 오직 하나, 전량 회수뿐이다.
“도작… 이라고?”
자신만만하던 공판석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둡게 물들었다.
“확실한가? 확실하게 도작이야?”
“모르셨습니까?”
잠깐 생각하던 공판석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기본은 됐다 싶었더니 도작이었나. 그래, 무슨 작품을 베꼈지?”
판석의 질문에, 지원이 하나하나 대답했다.
“참새치 작가님의 <전설의 보안관>이랑, 안띵 작가님의 <너무 양심적인 보험 설계사>. 그리고….”
“작가는 떼고 이야기해.”
“…, <무림쾌걸>, <블랙기업이지만 사장님 얼굴이 복지라 괜찮아요!>, <리턴 투 디재스터>까지 6개입니다.”
“전부 우리랑 계약한 작품이로군. 맞지?”
공판석이 말했다.
“그럼 덮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덮다니요?”
“그렇잖은가, 서 수석. 우리만 입 다물고 있으면… 이 일을 몇 명이나 알지?”
“편집장님! 제정신입니까?”
“제정신이 아닌 건 자네야, 서 수석!”
공판석이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빽 질렀다.
“잘 들어. <폭군전기>는 이미 플랫폼 네 군데와 계약을 했고, 공장 발주까지 들어갔어. 그런데 지금 와서 <폭군전기>가 도작임이 밝혀지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전량 환불과 전량 회수겠지요. 위약금도 잔뜩 물겠고, 회사의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하겠죠.”
그리고 그 말은 곧, 출판사 전체가 휘청거린다는 뜻과 같은 뜻이었다.
“정말 그걸 원하나?”
공판석이 물었다.
“미우나 고우나, 자네가 지금까지 일했던 회사 아닌가? 그걸 자네 손으로 무너트리겠다고?”
“무너트리는 게 아닙니다. 바로잡는 거지요.”
“바로잡고 싶나? 그러면 내가 좋은 방법을 알려 주지. 잘 들어.”
공판석이 아이를 달래듯 말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차라리 이걸로 부회장님과 거래를 해. 내가 이걸 눈 감아 줄 테니, 나를 팍팍 밀어 달라. 그렇게 말하란 말야!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간 후에, 자네가 직접 C&N을 바꿔. 그게 진짜 회사를 바로잡는 거야. 지금 하는 건 무너트리는 거고!”
“……궤변은 끝났습니까?”
지원이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회장님이 자리를 비운 이후 C&N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이 생겼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카드빚, 전세금, 집값 마련.’
지원은 이번에도 직장인을 참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 세 개를 외웠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이미 다 소진한 거지.’
자신이 찾아낸 작가에게 공판석이 불공정계약을 들이민 날이 첫 번째였다.
윤정식이 형우의 웹툰을 볼모 삼아 사내 정치를 시도했을 때가 두 번째였고, 지금이 세 번째였다.
“야구도 삼진이면 아웃이라구요.”
지원은 품속에서 사직서를 꺼내 판석에게 집어 던졌다. 판석의 눈썹을 팔자로 꺾었다.
“사직서? 지금 일을 그만두겠다는 거야?”
“예, 편집장님. 아, 퇴직했으니 편집장 아니지.”
잠깐 고민하다가, 괜찮은 호칭을 찾았다.
“맞아요, 아저씨. 그리고 일 그만두겠다는 게 아니라, 그만둔 거예요.”
“미쳤군. 어떤 회사도 널 찾지 않을 거야. 이 바닥에서 완전히 매장이라고! 이봐, 자네답지 않게 멍청하게 왜 그래? 자네 위치가 아깝지도 않아?.”
“안타깝지만, 그 반대에요.”
지원이 홀가분하게 웃었다.
“나는 ‘수석’보다는 ‘편집자’가 되고 싶었던 거라고요. 그러니까 작가들 뒤통수치는 짓은 안 합니다. 아저씨.”
차라리 더러워서 일을 때려치우고 말지.
그 말을 끝으로 지원은 돌아섰다.
‘…내부고발이라고? 회사를 날려버린다고?’
공판석의 눈이 돌아갔다. 어떻게든 일이 처리되기 전에 지원을 붙잡아 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로 가게 놔두면 안 돼!’
그렇게 생각하고 판석이 지원을 향해 손을 내뻗은 순간,
“위험해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다급한 소리와 함께 판석의 턱이 그대로 휘릭 돌아갔다.
지원의 눈이 재빨리 그 궤적을 쫓았다.
“편집자님, 괜찮으세요!”
연수가 주먹을 한번 털며 물었다.
으으윽, 끄악. 쓰러진 공판석이 턱을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지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형우 작가님이랑 함께 간 거 아니었어요?”
“아, 그게요.”
연수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 * *
지원과 헤어진 후, 형우와 연수는 공태준을 잡기 위해 학교로 가고 있었다.
“애들한테 물어봤는데, 학교에 있는 거 맞대요.”
“고마워.”
형우가 말했다.
“엥? 뭐가 고마워요?”
“생각해 봤는데, 넌 이만 돌아가는 게 낫겠어. 공태준은 나 혼자 보러 갈게.”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연수가 고개를 저었다.
“1등을 도둑맞은 건 전데 왜 선배가 혼자 가요?”
“난 소설을 도둑맞았잖아.”
연수는 자신도 공태준을 함께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형우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네가 가면 안 돼. 분명 화를 못 참고 분명 진심으로 팰걸.”
“공태준 정도면 진심으로 팰 필요도 없거든요!”
“…아무튼 패긴 팬다는 거잖아.”
지금 연수는 겉으로 봐도 화났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어쩌면 병원 신세를 지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랬다간 괜히 일이 꼬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내가 혼자 가는 게 맞아.”
“선배가 말려 주면 되잖아요?”
“내가 널 어떻게 말리냐? 그랬다가는 병원에 가는 사람이 두 명으로 늘어나.”
“그래도 그건 좀….”
연수가 절대 안 된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혼자 보내기엔 너무 위험해 보였다.
“선배 그러다가 그 자식한테 맞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안 그래도 공태준이 선배 싫어하는 거 알면서?”
“그쪽도 설마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겠어?”
“공태준이잖아요. 장담할 수 있어요?”
“그건 또 아니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대책이 없는 건 또 아니었다. 형우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잘 봐.”
그대로 왼발을 뒤로 빼면서 연수와 반보 간격을 뒀다.
그리고 바로 연수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슉 날렸다.
턱-
“뭐 하는 거예요?”
당연하게도 잡혔다. 하지만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흡! 잡힌 팔의 팔꿈치를 굽히며 간격을 좁힌 후, 무릎을 붙잡고 태클을 걸었다.
꽤나 잘 들어간 레슬링 기술이었는데.
“어억!”
형우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연수가 재빨리 형우의 어깨를 비튼 탓이다.
“아앗! 괜찮아요?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 아니, 그런데 뭐 하는 짓이에요?”
“…뭐 하는 짓이긴.”
형우는 아픈 어깨를 부여잡고 히히 웃었다.
“너, 방금 진심이라고 했지?”
“지금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네가 방금 그랬잖아. 공태준 정도는 진심으로 안 해도 이길 수 있다고. 근데 나한테는 진심으로 했다는 거잖아. 그럼 내가 공태준보다 세다는 거 아냐?”
“어….”
연수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형우를 바라봤다.
“…그러네요?”
분명 방금 형우가 건 태클은 상당히 절묘한 타이밍에 적확하게 들어왔다.
“요즘 팔굽혀펴기 좀 하는 건 알았는데, 그걸로 될 게 아닌데? 나 몰래 어디서 무술이라도 배웠어요?”
“배운 건 아니고, 이번에 내 소설 주인공이 무술 배운 헌터잖아. 거울 보고 연습 좀 했지.”
“…거울 보고 연습이요?”
정확히는 드높은 건물주님께 배운 것이지만, 그것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아무튼, 이제 인정하지? 내가 공태준보다 센 거?”
“그렇기야 한데….”
“그러니까 너는 지원 편집자님 쪽으로 가. 뭐, 그쪽이 막무가내로 행동할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리고 형우의 예상은 귀신같이 맞았다.
“선배 말 안 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편집자님.”
“…그러네요. 고마워요. 서 작가님.”
지원으로서도, 설마 판석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래도 알아낸 건 좀 있네요.”
공판석과 윤정식은 <폭군전기>가 도작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건 상당히 커다란 수확이었다.
* * *
고통에 신음하는 공태준을 보며 형우가 심호흡을 크게 했다. 긴장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였다.
‘연수를 안 데려오기를 잘했지.’
자신도 이렇게 참기가 어려운데, 도둑질을 당한 당사자인 연수였으면 이미 공태준을 반쯤 죽여놨을 테다.
“그러니까 다행인 줄 알아.”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지이이잉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편집자인 지원의 전화였다.
* * *
턱을 맞은 탓인지 골이 흔들렸다.
‘이렇게 쓰러져 본 게 언제였지.’
기억을 되짚어보니 꽤 오래전까지 가야만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태준아, 넌 아무 잘못도 없어.’
아마 그 말을 처음 들었던 날일 거다.
‘맞아, 엄마. 난 아무 잘못도 없어.’
공태준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