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지금으로부터 세 시간 전.
“<폭군전기>가 공태준이 쓴 거라고요?”
형우의 말을 들은 연수의 눈이 동그렇게 커졌다. 형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맞을 거야. 예전에 4학년 실습실에서 본 적이 있거든.”
연수에게 팩폭을 날렸다가 뺨을 맞았던 그 날이 맞다. 정확히는 제목이 <폭군전기>가 아니라 <타이런트>라는 제목이었고, 내용도 훨씬 더 조악했다.
기억에 안 남을 정도로 그저 그랬던 글자혼합물 수준이라 좀 잊고 있었는데, <폭군전기>를 다시금 읽다 보니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났다.
“공태준이 그런 걸 창작실에서 썼다고요? 그때 분명 마주치기는 했지만….”
“아마 확실할 거야. <타이런트>의 주인공 이름이 공태준이었거든.”
“…주인공을 자기 이름으로 했다고요?”
“…자기가 생각해도 영 아니었다 싶었는지, <폭군전기>에서는 이름을 바꾸긴 한 것 같지만.”
<폭군전기>를 보고 바로 공태준의 <타이런트>를 떠올리지 못한 이유가 저거였다. 주인공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
“<폭군전기>의 주인공 이름이 준태였죠?”
“…어. 게다가 왕족이라 공작이니.”
“서(sir)준태… 해석하면 준태 공이고… 뒤집으면 공태준이네요.”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제 딴에는 기발하다고 생각하고 썼겠지만, 이 정도면 사실 오글거린다.
“어어, <타이런트>라…. 해석하면 폭군이니까 <폭군전기>랑 제목도 똑같네요. 선배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도 동의합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지원이 끼어들었다.
“예전에 저희 편집장, 그러니까 공판석이 그런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자기 조카가 한국대학교에 다닌다고요.”
“공태준과 공판석이라…. 마침 성도 같네요.”
일치하는 소설의 내용, 비슷한 제목, 같은 성씨. 하나하나 떼 놓고 보면 우연처럼 보이지만, 셋을 함께 보니 잘 맞물리는 퍼즐 조각처럼 아귀가 맞았다.
“정리해 보면 이렇게 되는 거네요.”
지원이 태블릿 PC를 꺼내 슥슥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라기보다는, 흔히 말하는 졸라맨이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졸라맨 세 명을 그린 뒤, 텅 빈 머리 안에 이름을 적었다.
머리가 작은 녀석이 공태준, 그다음 녀석이 공판석이었다. 지원이 공판석과 공태준 사이에 선을 하나 그었다.
“일단 공태준과 공판석은 협력관계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자기 조카를 위해서 공모전에 개입했다. 그런 거죠?”
“저,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옆에서 태클을 건 것은 연수였다.
“그 조작이라는 거, 들키면 큰일 나는 거잖아요?”
“그렇죠.”
“보통 조카를 위해서 그 정도까지 하나요? 저는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데요. 공태준 성격 보면 유달리 자기 삼촌한테 잘했을 것 같지도 않고.”
타당한 지적이었다. 공모전 조작 같은 건 편집장 권한으로는 상당히 어렵고 리스크가 큰 일이다.
“그래서 세 번째 사람을 그린 겁니다.”
편집장의 권한으로 버티기에도 힘겨운 리스크를 별것 아닌 듯이 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사, 상무? 아니야. 그보다 조금 더 위야.’
가장 큼지막한 세 번째 졸라맨.
지원은 텅 빈 공간에 ‘윤정식 부회장’이라고 적었다.
“…부회장까지는 너무 간 거 아닐까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마 맞을 거예요. 예전에 공판석이 술김에 윤정식을 친근하게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언젠가 있었던 회식, 술을 잔뜩 마신 공판석은 윤정식 부회장을 ‘정식이’라고 불렀었다.
“아무리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보통 부회장을 그렇게 부르지는 않거든요. 물론 그 다음에 재빨리 무마하기는 했지만, 똑똑히 기억나요.”
“그 말은 곧….”
“네. 어쩌면 제 생각보다 친밀한 관계일지도 몰라요. 애초에 그게 아니더라도, 공판석이 윤정식 라인을 타고 있기도 하고요….”
말을 하다말고 지원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생각보다 커진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스러웠다.
‘공판석이 단독으로 조카를 위해 벌인 일일까? 아니면 이 사건의 배후에 윤정식이 있을까? 한 발 더 나가서, 공판석과 공태준, 그리고 윤정식까지 특별한 관계일지도 몰라.’
지금으로서는 정보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연수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러면 일단 몰래 정보를 모을까요?”
“그건 안 돼.”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상대보다 정보가 많아지기를 기다리다가는, 우리는 평생 그쪽을 못 이겨.”
상대는 거대한 기업인 C&N이다. 단순한 실수라면 모를까, 이번 공모전은 상당히 조직적으로 움직인 태가 났다.
“그러니까, 시간을 지체할수록 오히려 우리한테 불리하게 작용할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하자고요?”
“지금 우리가 더 유리한 걸 생각해야지.”
자금력도, 객관적인 파워도, 조직력도 당연히 일식집에 모인 셋보다는 C&N이 강하다.
“우리가 더 나은 게 딱 하나 있어.”
“그게 뭔데요?”
“정보. 우리는 <폭군전기>의 작가가 공태준인 걸 알잖아. 하지만 C&N은 우리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걸 몰라.”
명문대 교수가 핸드폰 대리점에서 바가지를 쓰는 이유이자, 미국의 대통령까지 지냈던 최고 지식인인 W.H.테프트가 억대 사기를 당한 이유.
바로 정보의 불균형 때문이다.
“그러니, 상대가 그걸 눈치채기 전에 빠르게 속전속결로 치고 들어가야 해.”
지원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기야, 상대도 이쪽이 먼저 움직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알아채기 전에 먼저 때린다는 거군요.”
이해했다는 듯 지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 편집자님은 공판석을 만나러 가세요. 저는, 공태준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감히 내 소설을 훔쳐?
만나면 엉덩이를 걷어 차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공태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자존심은 엉덩이보다 더 아팠다. 김형우한테 밀려서 넘어지다니.
“이 건방진 자식이, 비겁하게 기습해서 내 멱살을 잡아?”
공태준이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야, 김형우. 진짜로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아까부터 건방지다느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냐느니, 그거 자체도 짜증 나지만, 지금 제일 짜증 나는 게 뭔지 알아?”
형우의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왜 자꾸 내가 할 말을 그쪽에서 하냐 그거야.”
건방진 것도 저쪽이고, 무사하지 못할 것도 저쪽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형우는 주머니 속에 구겨 넣고 온 A4용지를 꺼내 집어던졌다.
“…이건?”
“<타이런트>, 아니, <폭군전기>. 당신이 4학년 창작실에서 쓴 소설이지. 아니지, 아냐. 썼다고 하기에도 좀 그래.”
형우는 잠깐 생각하며, 적절한 단어를 골랐다.
“당신이 훔친 소설이지. 참 여기저기에서도 훔쳤던데.”
“…훔쳤다니, 그게 무슨….”
쓸데없는 부인을 들어주느라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60p부터 64p까지는 <전설의 보안관>을 표절하셨더라고. 그렇게 싫어하는 내 소설을 가져다 쓰다니, 상상도 못 했지.”
“뭐?”
“표절률이 55%라! 논문도 표절률 30%면 연구자가 욕을 바가지로 먹는데, 대학생이라는 사람이 이건 좀 심하네!”
문장부터 전개, 설정, 대사까지 참 꼼꼼하게도 베꼈다. 공태준의 입이 쩍 벌어졌다.
‘먼저 기를 꺾은 뒤, 팩트로 찍어 눌러라.’
<아이언 타이거>를 쓰면서 배웠던 기본적인 취조 기술이었다.
‘거짓말은 뇌를 많이 쓰는 활동이다. 그러니까 생각을 가다듬을 틈을 줘서는 안 돼. 계속해서 멘탈을 후려쳐라!’
기선제압, 팩트, 그다음은 뭐였더라.
맞다, 도발이었다.
‘상대가 화가 많이 날수록 좋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첫 번째는 앞에 말했다시피 상대가 이성을 찾을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도발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저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평소와는 다른 그 눈높이만으로도 공태준은 이미 얼굴이 붉게 물들어 터지기 직전이었으니까.
‘평소에 나를 얼마나 발아래로 봤는지 알겠네.’
하긴, 애초에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짓은 벌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거다.
자기가 보기에 만만한 인간을 괴롭히는 인간.
공태준은 그런 인간이었다.
“<전설의 보안관>, , <너무 양심적인 보험 설계사>… 참 좋은 작품들만 베끼셨는데, 정작 모아놓고 보니 그리 좋지 않네요.”
마치 마리 셸리의 공포소설인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크리쳐 같은 모습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것들만 모아서 만들었으나, 가장 추한 모습이 되어버린 괴물.
“그게 당신이 쓴 <폭군전기>라고요. 이깟 소설이 1위라니, 가당키나 해요?”
“너… 그 입 다물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본데.”
피식, 형우가 공태준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처음에는 화를 유도하기 위해 고의로 한 건데, 하다 보니 생각보다 꽤 잘 됐다.
“전에 있었던 대필 의혹은 어떻게든 넘어갔었죠. 그럴 수 있죠. 대필이란 게, 당사자가 입을 열지 않으면 결국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얼마 전에 한국대학교 단편 대회에서 있었던 사건을 말하는 거였다.
“하지만요, 표절도 그만큼 쉬울까요? 증거가 이만큼이나 있는데?”
형우가 공태준의 앞에서 <폭군전기>를 찰랑찰랑 흔들었다.
증거를 지우지도 못한다. 그가 쓴 소설 전체가 표절에 대한 증거 그 자체였으니까.
“선배는 지금 완전 끝났다고요.”
“…이 자식이! 표절은 무슨 표절이야! 너 우리 외삼촌이 누군지 알아? C&N의 부회장… 헉!”
형우가 기다리고 있었던, 명백한 말실수였다.
“…윤정식 부회장이 외삼촌이었어요?”
“이 자식이, 안 닥쳐?”
결국, 참지 못한 공태준은 그대로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할아버지 말이 맞았네.’
건물주 할아버지의 조언은 이랬다. 상대를 흥분하게 하면 좋은 점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상대가 흥분할수록 이성적인 판단이 힘들어져 거짓말을 못 하게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상대가 먼저 달려들면 그 자식을 패 버릴 명분이 생기잖아.’
그대로, 형우는 공태준의 진로에서 몸을 살짝 비틀었다.
“어?”
당황해하는 공태준이 멋대로 휘두르는 팔을 다시 한번 피했다. 그 상태로 오른쪽 발과 왼쪽 발을 바꾸면서, 그대로 스트레이트.
퍼억!
주먹 끝으로, 윗턱과 아래턱이 불협화음을 내며 비틀리는 느낌이 났다.
그대로 휘청거린 공태준은 자신도 모르게 턱을 매만졌다. 맞은 아픔보다, ‘김형우에게 무방비하게 턱을 내어줬다.’라는 충격이 더 컸다.
“한 방엔 안 쓰러지네.”
형우가 다시 자세를 잡으면서 말했다.
<아이언 타이거>를 쓰며 배운 것은 취조 기술이 전부가 아니었다.
전직 형사에게 배운 무술로 완전 무장한 형우는 완벽한 복싱 폼을 유지한 채로 한 발자국씩 공태준을 향해 다가갔다.
“보, 복싱?”
공태준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아쉽게도, 공태준은 이번에도 반만 맞췄다. 복싱을 배운 건 맞았지만.
‘레슬링도 같이 배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형우는 공태준의 몸을 위아래로 쭉 훑었다.
‘때리기 좋은 부분, 그러니까 급소면서도 맞은 티가 안 나는 부분이 딱 세 부분 있어.’
턱과 명치, 그리고 아랫배.
“결정했다.”
그대로 달려들었다. 공태준이 허우적거렸지만, 움직임이 너무 뻔했다. 고작 이런 싸움 실력으로 거들먹거리고 다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리 쪽으로 태클을 걸어 붙잡은 뒤, 그대로 무릎을 올려 쳤다.
콰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형우의 무릎이 공태준의 복부에 15㎝ 정도 박혔다.
“커헉!”
녀석은 볼썽사납게 아랫배를 붙들고 쓰러졌다. 무협이었으면 ‘단전이 파괴되어 폐인이 되었다.’ 따위의 묘사가 붙었겠지만, 이곳은 현실이니 그런 건 없다.
“예전부터 늘 툭 튀어나와 있는 게 더럽게 마음에 안 들었거든.”
꼬르르륵.
눈을 까뒤집으며, 공태준의 거구가 바닥으로 푹 고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