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96화 (96/200)

#95

[제8회 C&N 장르문학 공모전 수상 결과]

최우수상 : <폭군전기> - 글루랄라

우수상 :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 - 서연수

은상 : <반지하의 기사> - 글크루삥뽕

<무림체조선수> - 김윤중….

몇 번을 봐도 그 글씨들은 바뀌지 않았다. 형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반지하의 기사>나 <무림체조선수>라면 모를까, <폭군전기>는 진짜로 말도 안 돼.”

일주일 전, C&N의 장르문학 회의실에 모인 다섯 작가는 모두 만장일치로 연수의 작품인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를 최우수 작품으로 뽑았다.

그다음인 우수상을 가리는 데에서는 <반지하의 기사>와 <무림체조선수>가 좀 갈라졌다. 그 후에도 몇몇 작품의 이름이 더 올랐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폭군전기>라는 제목의 소설을 말한 적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그 제목도 기억 안 나. 지원 편집자님은 어떠세요?”

“저는 제목 정도는 기억이 나요.”

하지만 딱 그 정도. 작가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매니저들 사이에서 벌어진 토론에서도 딱히 화두에 오른 작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최종 결정에서 갑자기 비틀렸다는 건데.”

“최종 결정권이 누구한테 있는데요?”

질문을 듣자마자, 지원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공판석이요.”

C&N의 장르소설부 편집장이자, 부회장과 사돈 관계를 맺고 있는 인맥제일주의자.

수석 편집자인 지원조차 모르게 공모전의 결과를 뒤바꿀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 * *

“뭐, 우수상이 어디예요!”

셋 중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우수상을 받은 장본인인 연수였다.

“어차피 최우수상이랑 300만 원 차이밖에 안 나고, 일단 작가로 계약은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럼 됐죠 뭐.”

“…아냐, 안 됐어.”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너는 지금 도둑질을 당한 거야.”

“에이, 어떤 도둑이 700만 원을 주고 가요?”

“서연수, 정신 차려.”

형우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차갑게 가라앉았다. 연수가 된다고 해도, 자신이 그 부분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알아,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네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렸는지.”

일의 가치는 그걸 위해서 얼마나 투자했는가보다는 그걸 위해서 어떤 것들을 버렸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형우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너는, 네 5년을 버렸어.”

로맨스 소설을 바라보며 달려왔던 그 시간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 노력이 단 한 스푼이라도 깎이는 걸 나는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다.”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풋내기 작가로 시작해서, 1위 작가로 도약하기까지 형우가 소설 외적으로 배운 거라고는 그게 전부였다.

‘이거라도 있어서 어디야.’

‘이만큼이라도 받았으니 다행이지.’

‘이거면 난 만족해.’

진짜로 만족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빼앗겼다는 것을, 자신이 자신의 몫을 똑바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그 사실을 잊기 위해 이런 말들을 주문처럼 되뇌는 법이다.

“네가 노력했는데 2등밖에 못한 게 아니잖아. 원래 네 자리를 빼앗긴 거잖아. 그런데도 너는 정말 괜찮다는 거야?”

“그 정도로 해요. 서 작가님 울겠네.”

밖에서 통화를 마치고 들어온 지원이었다. 결과를 알자마자 지원은 바로 편집부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다 돌렸다.

“막내 매니저랑 홍 매니저랑 몇 명 해서 물어봤는데, 본인들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오히려 저보고 알고 있었냐고 물어보던데요.”

“그러면 확실해졌네요.”

“그렇죠.”

이 모든 일을 꾸민 건 공판석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C&N이 판교에 있기는 해도, 상당히 오래된 기업이라 수직 문화가 좀 강해요.”

수습 열 명보다 평사원 한 명의 발언권이 더 강하고, 평사원 열 명보다 수석 한 명의 발언권이 더 강하다. 결정권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국콘텐츠진흥원이랑 협약을 맺은 걸 편집장 혼자 권한으로 꺾었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지원은 그보다 더 위를 상정했다.

편집장은 실무진의 가장 위.

그러니 편집장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실무진이 아니라 경영진이라는 뜻이 된다.

“이사, 상무, 어쩌면… 부회장?”

“부회장이라면, 윤정식이요?”

“네. 작가님도 저번에 본 적 있었죠.”

회장은 일선에 등장하지 않은 지 꽤 되었으니, 생각나는 사람들은 거기까지였다.

“…솔직히 윤정식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부회장이 끼어들 만한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만약 거기까지 연루되어 있으면,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뭐가요?”

“공모전의 우승작을 고르는 권한은 전부 C&N에 있으니까요. 무슨 작품을 고르든, 그건 이쪽의 권한이라는 거지요.”

눈 뜨고 우승을 뺏긴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거였다.

“국가 지원까지 받는 공모전이라면서, 최소한의 기준 같은 것도 없습니까?”

없진 않다. 공모전이나 입사의 비리나 불합리를 막기 위한 법안들이 세상에는 꽤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요, 이건 예술이잖아요. 명확한 잣대가 없다고요. 그 법들을 어떻게 적용시킬 건데요? 만약 어떻게 맞는 조항을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그쪽에서 우기면 못 뒤집는단 말이에요.”

“그러면 눈 뜨고 당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 방법은 지원으로서도 꽤 많은 각오를 해야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망설임은 없었다.

‘이미 한 번이면 족해.’

저번 웹툰 사태를 겪으면서, 이미 형우한테는 한번 빚을 졌다.

‘기회는 한 번이야.’

지원은 내로남불을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당연히 그 말은 자신에게도 적용됐다.

‘편집자가 작가에게 두 번이나 신세를 진다면, 그건 편집자 완전 실격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지원은 가방에서 갓 뽑은 뜨끈뜨끈한 A4용지를 꺼냈다.

“…이건?”

“방금 자료 받아서 PC방에서 뽑은 거예요.”

<폭군전기>

이번에 연수의 소설을 제치고 최우수상에 등극한 작품이었다.

[아주 오래전 옛날, 사막에는 폭군이 살았다.]

상당히 지리멸렬하게 시작되는 도입부가 기억났다. 형우는 이 소설을 한 15P 정도 읽고 옆으로 던져 놨다.

“그나마 제가 많이 읽은 거였죠. 천우희 작가님은 두 장도 안 읽고 이건 아니라며 던졌으니까요.”

그렇기에 기억에 남지 않았던 작품이다. 다시 읽으니까 확실해졌다.

이건 결코 연수의 작품을 이길 만한 작품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수상을 할 정도도 아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해요.”

지원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폭군전기>의 결격 사유를 찾아내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이 점에 관련해서, 확실한 정보를 하나 들었어요.”

아까 홍 매니저와 통화하던 도중, 지원은 <폭군전기>와 관련된 상당히 놀라운 내용을 들었다.

“<폭군전기> 15P까지밖에 안 읽었다고 하셨죠?”

“네. 소설은 많고 시간은 없었으니까. 별로라고 생각한 소설을 더 읽을 필요가 없었죠.”

“그러면요, 60P부터 한번 읽어 보시겠어요?”

“60P요?”

형우와 연수는 지원이 시키는 대로 <폭군전기>의 60P를 펴들었다.

[폐하, 비켜 주시지요. 그 마을에 뭐가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알지. 네 부모를 죽인 살인자가 있다는 걸. 하지만 자네는 그 인원을 특정할 수 없지.]

[제국법에 의하면, 범인을 말하지 않는다면 다 공범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 뭐가 있는 건가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연수는 그냥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형우의 태도는 달랐다.

“…이건 혹시.”

“알아채셨나요?”

지원이 묻자, 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작盜作 맞죠?”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낯선 작가에게서 내 소설의 향기가 난다 싶었어.’

<폭군전기>의 60P부터 64P까지.

총 8,000자의 분량은, 고장 난 마법 총을 휘두르는 어수룩한 총잡이와 약간 까칠한 성격인 현상금 사냥꾼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도작이라고요?”

눈을 동그랗게 뜬 연수가 재빨리 소설을 한 번 더 살폈다.

[알고 있나? 그대는 지금 내 발을 밟고 있다.]

[지금 발 밟은 게 대수입니까? 한 번만 불경을 저지르지요. 오, 폐하. 제발 그 입 좀 다무십시오. 그래야 눈높이가 맞으니까.]

[무슨 눈높이… 아.]

[그대로 여기사는, 황제의 멱살을 쥐었다.]

[황제의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아, 알았다! 알았다!”

도작이라는 말을 들은 후에야 뒤늦게 알아챈 연수가 호들갑을 떨었다.

“이 부분, 그거잖아요! 선배가 쓴 <전설의 보안관>에서 헤럴드랑 베아트리체가 싸우는 부분! 와, 이거 뭐야!”

연수가 역정을 냈다.

“마지막에 발 밟고 키스하는 것까지 똑같네! 이거 누가 쓴 건지 알 수 있어요? 진짜 파렴치하네?”

“그건 여기저기 알아보고는 있는데.”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형우가 이를 으득, 악물었다.

“누가 썼는지 대충 짐작이 가거든요.”

분명 예전에 본 기억이 있는 작품,

아니. 장물贓物이었다.

* * *

<폭군전기>

공태준은 자신의 소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원래 제목은 <타이런트>였는데, 제목을 영어 단어로 쓰는 건 좀 철 지난 스타일이라기에 수정한 것이다.

“최우수상이라.”

방금 전에는 C&N과 연락도 했다. 상금은 곧 지급될 테고, 종이책 인쇄도 바로 들어갈 거라고 했다.

‘봐봐, 별거 아니잖아. 장르문학이라는 거.’

자신의 생각이 결국 맞았다. 장르문학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을 보라, 불과 며칠 만에 업적을 달성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종이책은 김형우 놈도 출판 못 해본 거고. 나 참, 이렇게 쉬운 것도 못 하는 놈에게 경계심을 느끼고 있었다니.’

그깟 놈 때문에 고민했던 시간들이 아깝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어머니의 말을 들었으면 됐는데, 괜히 빙빙 돌아오느라 시간을 낭비했다.

‘그 자식,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뭔가 있는 척하면서 으쓱거리나 하고. 내가 국내 최대급 출판사 공모전에서 1위를 차지한 걸 알면 찌그러지겠지.’

그렇다면, 그 번지르르한 장르문학 어쩌고 하는 것들이 다 허우대만 멀쩡한 가짜임이 들통날 테다.

학생들도, 한다은 교수도, 천병옥도, 고태희와 서연수까지도.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 옳은 건 공태준이었구나.

‘난 언제나 틀리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익숙한 골목길을 도는 순간,

“공태준.”

하고, 누군가가 멱살을 잡았다.

“뭐, 뭐야?”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들썩! 그대로 몸이 당겨지면서 눈앞에 큼지막한 얼굴이 보였다.

“김형우?”

처음에 누군지 모르는 상대한테 다짜고짜 멱살을 잡힐 때는 좀 긴장했는데, 그게 김형우였다니.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뭐 하는 짓이긴요, 당신 멱살 잡은 거지.”

“당신? 이젠 선배라고도 안 하냐?”

“선배 같아야 선배라고 해 주지.”

저번에 비해 상당히 건방져진 녀석의 말투에, 공태준은 순간 열이 확 뻗치는 것을 느꼈다.

“이 건방진 새끼가…!”

공태준이 팔을 휘둘렀다. 형우에게 잡힌 멱살을 뿌리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라?’

꿈쩍도 안 했다.

힘이 엄청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뭐랄까, 풀 수가 없었다.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한 겁니까?”

“이 자식이, 이거 안 놔?”

“놓긴 놓을 건데, 그 전에 한마디만 합시다.”

형우가 공태준의 옷깃을 잡고 손목을 빙글 돌렸다. 그 간단한 움직임에, 그 커다란 몸이 형우 쪽으로 바짝 쏠렸다.

“…야, 공태준. 똑바로 잘 들어.”

서로의 숨결이 닿을 법한 거리, 공태준의 귀에 빠드득- 하고 형우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의 걸 훔쳐 갈 거면 안 들키게 몰래 훔쳐 갔어야지. 아니면 적어도, 훔쳐서 잘 쓰던가.”

그 말이 끝난 뒤, 형우는 자신의 손을 탁 놨다.

쿠웅-

다리가 풀린 공태준은 그대로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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