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C&N의 최상층, 부회장실.
“그러니까, 그 잘난 특별심사위원분들께서 우리 못난 조카의 작품에 한 표도 안 줬다는 거죠?”
C&N의 부회장, 윤정식의 말에 공판석이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애초에 도입부가 이상하다면서 똑바로 읽지도 않았습니다! 작가들이 조금만 더 읽었더라면!”
“후우, 우리 조카님은 대학교 초입까지만 해도 영재 신동으로 유명했었는데, 대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윤정식이 피식 웃으며, [C&N 출판사 회장 윤태중]이라고 적힌 명패를 쓰다듬었다.
“사람이라는 게 참, 쉽게 곤두박질치는 것 같아요. 안 그렇습니까, 사돈?”
‘곤두박질’이라는 단어 속에서 느껴지는 묘한 위압감에, 공판석이 몸을 한번 부르르 떨었다.
“제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 * *
형우는 대교동에 위치한 한 일식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는 지원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작가님 오셨네요. 그분은요?”
“아, 한 30분 정도 있다가 오기로 했어요.”
“그러면 음식 나오기 전에 <아이언 타이거> 이야기 좀 할까요?”
지원이 늘 가지고 다니는 태블릿 pc를 꺼내 작품 추이를 설명했다.
“지금 선작도 그렇고 연독률도 그렇고, 유입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어요. 전작인 <전설의 보안관>만큼의 폭발력은 없지만….”
“그건 그럴 만하죠.”
형우는 행운과 실력을 구분할 줄 알았다. <전설의 보안관>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소설 자체의 재미에 더해 몇몇 이슈들이 겹친 효과였다.
“맞아요. 저번 작품은 좀 시끌시끌했지만, 이번 작품은 그런 게 없으니까 서서히 늘어나는 거죠. 하지만, 이 추세가 꽤 오래 유지되어만 준다면 전작을 뛰어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솔직히 저번보다 더 잘 썼거든요.”
“당연히 그래야죠.”
소설가들에게 ‘당신이 쓴 소설 중 가장 좋은 소설이 뭐냐?’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십중팔구 ‘최신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만약 자기 옛날 작품이 최신작보다 더 좋다고 생각해 버리면… 그 작가는 수명이 다한 거예요. 팔딱거리긴 해도, 사실상 죽은 거죠.”
“횟집에서 그런 말 하니까 좀 으스스하네요.”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도중, 종업원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왔다. 오늘의 메뉴는 숙성 연어 초밥이다.
“이 집이 냉동을 안 한 연어를 쓰는데, 진짜 맛이 끝내준다니까요.”
“뭔가 새콤한 맛이 나는데, 뭐죠? 귤?”
“아마 유자일 거예요.”
“맞는 것 같네요. 진짜 맛있네.”
형우가 초밥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번에 갔던 오마카세도 좋았지만, 거기는 아무래도 음식을 천천히 주다 보니까 조금 감질났거든요.”
“후훗.”
그런 형우의 모습을 보며, 지원이 살짝 웃었다.
“작가님, 많이 바뀌셨네요.”
“바뀌다니, 뭐가요?”
“처음 작가 되셨을 때 기억해요? 제가 식사 대접한다니까, 편의점 삼각김밥 먹겠다고 했잖아요.”
그랬던 신인 작가가 지금은 오마카세가 좋니, 고급초밥이 좋니를 따지고 있으니, 참 격세지감이다 싶었다.
“어어, 저 방금 좀 졸부 같았나요?”
“아뇨, 아뇨. 그런 말은 절대 아니에요.”
지원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야 비로소 자기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하기 시작하신 거죠. 없는 사람이 사치를 부리면 문제지만, 있는 사람이 너무 아끼면 그건 그것대로 또 보기 안 좋거든요.”
“하긴, 맞는 말이긴 하죠. 애초에 그렇게 되면 시장 질서 자체가 안 돌아가니까….”
“오오, 초밥에서 시장 질서까지요?”
“…요즘 느와르를 쓰다 보니 그만.”
<아이언 타이거>의 최근화에서는 정치인과 결탁하여 행패를 부리는 깡패 집단이 빌런으로 등장한다.
“약간 <베트랑> 나오는 주태호랑, <내거지들> 나오는 이광희가 손잡은 느낌으로 썼는데….”
“와우, 그 말만 들어도 어마어마한데요. 천만 영화에 천만 영화 더하면, 조회 수 이천만 나오겠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원이 없겠습니다. 하하.”
형우가 마치 노련한 정치인처럼 웃었다가, 놀랐다는 듯이 젓가락을 흠칫 멈췄다.
“어, 그게요. 흠….”
“말씀하세요.”
“이게 그, 뭐랄까. 배우들이 가끔 메소드 연기라는 걸 한다고 하잖아요?”
메소드 연기.
배우 본인이 배역과 일체화되는 방식의 연기 기법으로,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조커 역할을 맡았던 자레드 레토라는 배우가 가장 유명하다.
“자레드 레토는 싸이코 악당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서 동료에게 실제로 죽은 쥐를 선물했다고 하죠.”
“<악마를 봤다>의 최만식 배우분도 살인자 배역에 너무 몰입해서, 자기도 모르게 가끔 욕을 하고는 했다는 이야기도 들어 봤어요. 그런데 메소드 연기는 갑자기 왜요?”
“소설을 쓰다 보면 가끔, 혼잣말하고 허공에 주먹을 휘둘러 보거든요.”
마치 소설 속의 한 장면을 재현하듯, 거울을 쳐다보고 ‘네 딸 이미 죽었어, 이 자식아!’ 이러면서 주먹을 휙휙 내던지고는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어머니랑 같이 살 때는 안 그랬는데, 혼자 살다 보니 이게 가끔 저도 모르게 배역 흉내를 내더라고요.”
“…확실하게, 누구랑 같이 살면 못 하겠네요.”
갑자기 아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아들이 거울에 대고 욕을 하면서 주먹을 슉슉 휘두르고 있으면, 확실하게 무서울 것 같긴 하다.
“…그만큼 소설을 열심히 쓰고 있다,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죠?”
지원이 피식 웃었다. 개성 넘치는 작가들 사이를 조율하는 일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웬만한 일에는 꽤 둔감해졌다.
‘적어도 늑대인간 흉내를 내면서 뛰어다니다가 경찰에 신고당하거나, 소설 속 정의로운 주인공에 빙의해서 SNS에 정치글을 올리지는 않잖아.’
그런 일들에 비하면 거울 보고 주먹 지르는 것 정도야 거의 애교로 보일 수준이었다.
“아, 그리고 편집자님.”
“네?”
“저 사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형우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참새치(@Mr_Sparrow)
오늘 처음으로 계정 만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 글이 쓰여 있었다. 지원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SNS네요. 갑자기 이건 왜요?”
“그, 전에 정진욱 작가님이 하는 거 봤거든요.”
시도 때도 없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정진욱을 보며, 대체 SNS라는 게 얼마나 재밌기에 그렇게 열중하는 건지 좀 궁금했었다.
“그, 정진욱 작가님처럼 막 미친 듯이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팬의 소통창구 정도로만….”
“…솔직히 말해 안 했으면 하지만, 하고 싶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의외로 허락이 빨랐다.
“SNS 같은 사적인 것까지 저희가 뭐라고 하지는 않아요. 그게 출판사 매출에 영향을 끼치면 모르겠지만….”
“영향 끼칠 짓이라면요?”
“대표적인 게 정치 발언이죠.”
지원이 설명했다.
“물론 작가들도 정치 성향은 있겠지만, 그걸 밝히는 건 보통 무조건 안 좋거든요. 막말로 사람들 절반은 등 돌리는 거니까.”
“그 정도야 알죠.”
“…그런데 꼭 작가님들 중에 그런 분이 있어요. 자기는 작가니까 옳은 말만 해야 하고, 옳은 글을 써야 하고, 옳은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정치글을 쓸 거고, 사회 시사를 비판할 거고, 좀 그런 사람이요.”
아무래도 데인 게 많은 모양인지, 지원의 말이 좀 길어졌다.
“솔직히 매출에 영향 안 갈 짓이면 뭘 해도 상관없는데, 그건 매출에 영향이 가거든요.”
“절대 안 그럴게요.”
“민감한 주제에는 아예 끼어들지 마세요. 누가 그런 거 물어보면 무시하시고요….”
지원의 주의사항은 꽤 길게 이어졌다. 저 긴 것들이 죄다 경험담이라니, 편집자도 참 쉽지 않은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누군가랑 키배를 뜰 때는….”
그렇게 지원에게 sns개론을 듣던 도중,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가게의 문이 열렸다.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아, 선배!”
연수가 양손에 뭔가를 가득 들고 들어왔다.
“그게 다 뭐야?”
“헤헷, 저희 아버지가 꿀 유통업 하시잖아요. 매니저님한테 잘 부탁한다고 가져다드리래요. 매니저는 김영란법 안 걸리죠?”
“저희가 공무원은 아니니 당연히 그렇기야 한데….”
지원이 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어, 보통 선물은 매니저가 작가님들한테 드리는 거거든요? 제가 받기는 좀….”
“에이! 그런 고정관념 깨고, 일단 받으세요!”
“어, 그러면… 잘 먹겠습니다.”
늘 뭐든지 똑 부러지게 처리하던 지원이 저런 식으로 누군가한테 휘둘리는 건 처음 봤다. 그녀도 좀 당황했는지, 괜히 헛기침을 했다.
“흠흠, 아무튼. 전에도 봤었죠? C&N의 장르소설 편집부 수석편집자 서지원입니다.”
“서연수예요.”
그제야 연수가 뒤늦은 인사를 했다.
“오면서 이야기 들었어요. 형우 선배가 편집자님 소개시켜 준다고, 맞죠?”
“아닙니다.”
지원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형우 님한테 부탁한 겁니다. 서 작가님을 한번 소개해 달라고요.”
“예? 옙?”
“아직 공모전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저는 이번 공모전의 최우수 작품이 당연히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특별심사위원인 작가들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장르문학부의 매니저들 사이에서도 연수의 작품이 최우수가 맞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이제 저희는 상부에 안건 올렸으니 그쪽에서 발표만 하면 끝인 거죠. 제 생각으로는 거의 99%는 서 작가님이 최우수라고 생각해요.”
“정말요?”
“평소라면 확정되지 않은 것에는 기대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 정도면 사실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지원이 씨익 웃었다.
“지금이 여섯 시니까, 마침 결과 발표까지 딱 두 시간 남았기도 하고요. 어차피 그 후에는 계약하셔야 할 텐데, 미리 만나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죠. 유능한 작가를 미리 포섭하고 싶다는 제 개인적인 욕심이기도 하고요.”
개인적인 욕심, 부분을 강조하며 지원이 눈을 찡긋했다. 연수의 입이 헤에 벌어졌다.
“재능 있는 작가요…?”
“넵. 일단 계약서부터 보시겠어요?”
지원이 계약서를 펼쳐 들었다. 그 복잡한 조항들에, 연수의 눈이 핑핑 돌아갔다.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제일 관심 있으실 수익 분배 부분은 7대 3 비율로 정산을 드리는데, 작품이 한 편 팔렸을 때마다….”
“우와, 우와, 선배.”
한참이나 설명을 듣던 연수가, 갑자기 형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배는 이런 거 다 알아요?”
“나도 처음부터 다 알지는 못했어. 처음 계약 맺었을 땐 사기 당할 뻔했지. 아니, 정확히는 사기는 아니고… 좀 불합리한 계약을 맺을 뻔했다고 해야 하나.”
만약 그 타이밍에 지원이 오지 않았더라면 꽤 곤혹스러운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원이 피식 웃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대학생이 아니라 교수님들도 핸드폰 대리점 잘못 들어가면 바가지 잔뜩 쓰고 나오는 세상인데, 애초에 속이려는 놈이 잘못한 거죠.”
“제 잘못도 없지는 않죠. 잘 알아보고 갔어야 하는 건데.”
“아무리 잘 알려고 해 봤자 어떻게 편집장보다 잘 알기는 힘든 거니까요. 큰일 날 뻔했죠.”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그, 편집장이란 사람이요.”
연수의 질문에, 지원의 표정이 살짝 떫어졌다.
“여전히 편집장 하고 있어요.”
“엥, 그래도 되는 거예요?”
“피해 입은 작가들 찾아가서 사과도 하고, 내부 징계도 받긴 했지만요.”
말하자면 원 코인 찬스라는 거다.
“실제로도 그 후에는 딱히 일없이 조용해요. 하기야, 지금 자리에서 일 벌였다간 바로 모가지일 텐데, 나라도 조심하긴 하겠네, 어. 잠시만요.”
빰 빰빠라밤밤 빰빰 빰 빰빠라밤빰 빰빰-
어딘가에서 비발디의 <사계>가 들려왔다. 지원의 휴대폰 알람 소리였다.
“벌써 8시네. 공모전 결과 나왔나 봐요.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가… 어, 뭐야.”
“왜요? 이름이 없어요?”
형우의 질문에, 지원이 고개를 저었다.
“이름은 있는데… 그게.”
지원이 멍하니 태블릿PC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연수의 이름이 있기는 했다.
“…최우수가 아니라 우수상이네요?”
어째서? 그런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