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C&N 장르소설 편집부의 회의실 안에는 여섯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오른쪽에 앉아 있는 김형우, 천우희, 정진욱, 유동현, 안재욱 다섯 명은 특별심사위원이었고, 그 반대편에 앉아 있는 것은 C&N의 장르소설 편집장 공판석이었다.
“일단, 특별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C&N 공모전에는 총 480작품이 응모됐다. 작년에 비하면 거의 다섯 배로 증가한 숫자였다.
특별 심사위원 제도의 홍보 효과에 더하여 한국 콘텐츠진흥원과의 협업까지. 실패하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공모전이었다.
“올해 뽑는 인원이 일곱 맞죠?”
“그렇습니다.”
안재욱의 질문에 공판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일주일간, 총 두 번의 평가를 통해 작품들을 걸러냈습니다.”
1차적으로는 작품의 시놉시스와 초반부를 보면서 수준 미달의 작품을 절반 정도 걸러냈다. 그렇게 남은 작품은 200개.
그리고 2차 심사 때는 조금 더 심혈을 기울여, 작품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봤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응모작의 3배수인 21개의 작품이 남았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해야 하는 건 뭐죠?”
“간단합니다. 투표죠.”
공판석이 스물한 개의 소설들을 가리켰다.
“이 소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소설을 하나씩 골라 주시면 됩니다. 그 의견들을 취합하고, 편집부의 의견을 더해 최종 7인을 선발하게 될 거고요.”
“아하.”
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투표와 토론이라, 생각보다 꽤 합리적인 절차로 진행된다 싶었다.
“그러면 바로 시작하실까요?”
공판석의 말과 함께, 다섯 명의 작가들은 바로 스물한 개의 소설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그중 가장 열렬히 소설을 탐닉하는 것은 역시 형우였다.
‘와, 이게 입문자가 쓴 거라고? 5질 기성이 썼다고 해도 믿겠는데?’
‘아이디어가 완전 톡톡 튀잖아! 하지만 문장이 조금 아쉽네.’
‘이건 전개가 조금 더 빨랐으면 좋겠는데….’
형우의 손이 재빠르게 소설들 사이를 헤집고 지나갔다. 훌륭한 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을 구분하는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와우.”
소설을 살피던 천우희가 놀랍다는 듯 형우의 모습을 바라봤다. 1달 전만 해도 소설 보는 눈이 젬병이었던 녀석인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상당히 세태를 잘 읽는 느낌이랄까. 대부분 자신이 고른 것과 비슷한 것을 골랐다. 가끔 다른 것들을 고르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천우희조차도 ‘자신이 고른 것이 확실하게 낫다’라고 장담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취향의 영역에 속한 것들이었다.
‘진짜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형우의 모습에 놀란 것은 천우희만이 아니었다. 형우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정진욱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 헌터물은 캐릭터 구분이 조금 애매하군. 나라면 여기서 전개를 한 번 꺾었을 거야.’
‘로맨스는 잘 모르지만, 이 작품은 내 책장에 꽂아두고 싶네.’
그렇게 열심히 작품에 밑줄까지 쭉쭉 그어가던 정진욱은, 그대로 엄청난 위화감을 느꼈다.
‘……이걸 왜 내가 열심히 하고 있지?’
평소라면 작품을 대충 훑어낸 뒤에 슉슉 던지고 끝내버렸을 텐데, 지금은 자기도 모르게 열과 성을 다해 열심히 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내가 아니야! 뭔가 이상해!’
그렇게 생각하며, 정진욱은 다시 소설을 대충 읽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대충대충이라는 게 어떻게 하는지 잘 기억이 안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슉슉슉-
하필 바로 옆자리에 앉은 형우의 펜 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순식간에 작품들을 정리해내고, 그 순위를 파악해내고 있었다.
‘저, 저렇게 빨리?’
정진욱이 눈을 깜빡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김형우한테 지고 싶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무조건 내가 이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소설 감평이라는 분야에 이기고 지는 게 어디 있겠는가 싶지만, 정진욱은 확실하게 진심이었다. 김형우에게만큼은 가위바위보도 지고 싶지 않았다.
‘유치하다는 건 나도 알지만….’
동시에, 건설적이다.
아니, 어쩌면 본래 건설적인 것들은 죄다 유치한지도 모른다. 내가 쟤보다는 낫지, 내가 쟤보다는 더 잘하지, 그런 유치한 욕망들이야말로 인간을 더 나은 생물로 만드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내가 무조건 더 열심히 할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형우보다 더 빠른 속도로 소설들을 탐닉하는 정진욱이었다.
“오오?”
그렇게 소설을 탐독하던 정진욱의 눈에, 상당히 괜찮은 소설 하나가 들어왔다.
“잠깐, 작가님들. 이거 한 번 보시겠어요? 판타지 배경의 격투기 소설인데….”
소설의 제목은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
작가명은 서연수였다.
* * *
한국대학교 근처에 위치한 커피점 <두유집>.
“잘 됐을까.”
형우의 후배인 서연수는 지금 심장이 두근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요 며칠 진짜 잠도 못 잤어.’
형우가 추천해준 C&N의 공모전을 준비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이나 글을 쓰고, 퇴고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로맨스를 포기하고 액션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형우가 열의를 다해 설득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결정은 내리지 못했으리라.
딸랑딸랑.
카페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연수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왔다!”
하루 중 가장 조감이 밝다는 12시. 그럼에도 형우의 얼굴은 거의 까만색처럼 보였다. 옷이라도 밝은 걸 입지, 옷까지 칙칙한 검은 색을 입었다.
“선배?”
“…어, 안녕.”
연수를 발견한 형우가 후드를 벗었다.
“와 있었네.”
“저도 방금 왔어요. 평소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맞죠?”
형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분위기를 잡는다기보다는 탈진한 느낌에 가까웠다.
“심사는 잘 보고 왔어요?”
“어휴, 말도 마.”
형우가 지친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다들 자존심이 얼마나 세던지. 다 자기 좋아하는 작품들 후보에 올린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하기야, 작가들이 원래 자존심이 좀 세잖아요.”
“그래도 뭐, 최우수상 고를 때는 의견이 거의 일치하더라.”
“최우수상이요? 어떤 작품이었는데요?”
연수가 눈을 반짝거리며 형우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본 형우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너도 아는 작품일걸? <멸망한 세상의 무도가>.”
연수가 쓴 작품이었다.
우수상과 은상, 장려상을 고를 때에는 작가들 사이에서 나름의 의견 다툼이 있었지만, 최우수상을 고를 때만큼은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멸망한 세상의 무도가>죠, 이건.”
“다른 작품들도 좋기야 무조건 좋은데, 이건 좀 너무 압도적이라고 할까요. 아니, 진짜 거짓말 안 치고 지금까지 봤던 무술 묘사 중에 제일 좋은 것 같은데?”
전말을 아는 형우는 그 말을 듣고 그만 웃어버릴 뻔했다.
‘당연한 말이잖아.’
미국의 작가인 로렌 와인스버그는 유명 패션잡지 편집장의 비서를 했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삼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작품을 내놨고, 이 작품은 엄청나게 히트를 쳤다.
영미 양국에서 드라마화가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정치 소설인 <하우스 오브 카드>도 마찬가지다. 작가인 마이클 돕슨은 실제로 정치판에서 일했던 사람이다.
‘패션업계 기자가 쓴 패션 소설이나 정치인이 쓴 정치 소설이 재미없을 리가 있나.’
연수가 쓴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 또한 마찬가지의 맥락이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저 둘 보다 나았다.
“기자 출신 작가나 정치인 출신 작가는 찾아보면 은근히 몇 명 있지만, 격투가 출신 작가는 내가 알기론 너밖에 없으니까 말야.”
“헤헤.”
칭찬을 받은 연수의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뭐, 그쪽 말에 의하면 무조건 1등 하는 건 아니래. 아무래도 작가들 시선이랑 편집자 시선은 다를 테니까, 그 음악 경연 프로그램도 그렇잖아. 관객점수가 더 높아도 전문가 점수가….”
“…그런 건 됐고, 선배는 어땠어요? 그, 제 소설이요.”
“어, 응? 재밌었어.”
“그게 끝? 반응 진짜 재미없다.”
연수가 장난스럽게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진짜 우주에서 본 소설 중 제일 재밌었어! 이 재능으로 로맨스 썼으면 진짜 아까울 뻔했잖아! 그 정도로는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로맨스.”
형우가 쪼로록, 하고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연수도 형우를 똑같이 따라 했다.
“사실은요 선배. 소설 버리는 거 진짜 어려웠어요. <황태자는 왕국에 살아간다> 말이에요. 버리면서 사실 엄청 울었거든요.”
“응.”
“선배도 울었어요? 소설 망했을 때?”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울지는 않았고, 욕을 했지.”
“선배가요?”
“나도 욕 잘하거든. 이불도 뻥뻥 찼어.”
“하긴, 소설 때문에 화내는 건 좀 선배답기는 하다. 그래도, 결국에 쓰레기통에 던지기는 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연수가 살짝 웃었다.
“아직 그 쓰레기통을 비우지는 않았지만.”
“…진짜야?”
“진짜예요. 엄마가 쓰레기통을 뭘 한 달 넘게 안 비우냐고 뭐라고 하는데.”
솔직히 지금까지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형우의 말을 듣고서, 연수는 확신이 생겼다.
“오늘은 정말로 비우려고요.”
“바퀴벌레 나오겠다.”
“…여자애 방에 대고 못 하는 소리가 없어. 해 보자는 거예요? 선배는 진짜, 가끔 저질이라니까?”
“저질이라니”
쩝, 하고 형우가 혀를 찼다. 그 모습을 본 연수가 낄낄거렸다.
“헤헤, 그래도 좋네요. 잘 됐다는 게.”
“그런가? 하하….”
“드디어 표정 좀 풀렸네, 선배.”
연수가 형우를 보고 눈짓했다. 형우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언제부터 알았어?”
“티 팍팍 내고 다녔잖아요. 어색하게. 치이, 그럴 거면 애초에 소설 접어라 마라 말하지를 말던가.”
“야, 내가 그랬으면 너는 지금…….”
하지만 말을 끝마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한 연수의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 살면서 누구한테 글로 인정받아 보는 거 처음이에요. 성공해서 다행이야.”
만약, 실패했다면
형우는 자신이 괜한 소리를 했나 하며 꽤 오랜 시간 자책을 했을 것이다. 연수는 형우의 그런 모습을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평소보다 더 악착같이 했다.
형우의 기대에 반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였겠죠.”
자신의 말을 책임지기 위해서, 형우는 바쁜 시간을 쪼개서 연수에게 계속 조언해 줬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어쩌면 부모님보다도, 교수님보다도 연수의 꿈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형우였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노력했던 셈이다.
“지금까지 눈치 보느라 고생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연수가 방긋 웃는다. 무슨 말을 해 줄까 고민하다가, 이럴 때 쓰라고 만든 성현들의 말을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야, 야, 울다가 웃으면….”
“그런 싸구려 농담할 거면 차라리 입 열지 말고.”
연수가 눈물을 슥 닦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실패인 것 같다.
“뭘, 열심히 한 건 넌데. 축하해. 1등 했으면 좋겠네.”
“확실하게 1등일 거에요, 내가 누구한테 배웠는데. 게다가 만장일치였다면서요? 아, 이거 왜 눈물이 안 멈추지….”
말을 하면서도 연수는 계속 눈가에 열심히 부채질했다.
“아, 이거 안 되겠어요, 오늘 일단 먼저 갈게요.”
“어어, 그래. 나중에 연락해.”
그렇게 말한 뒤, 연수는 그대로 가방을 챙겨 들고 카페에서 떠났다.
“나도 슬슬 갈까….”
그렇게 중얼거린 후, 형우는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하늘은 만연한 10월.
천고마비의 계절이자, 독서의 계절.
‘작가라는 족속들은 늘 살이 찌기보다는 빠지기 마련이지만.’
아, 지금은 감정이 너무 과잉된 느낌이다.
이런 느낌으로 글을 쓰면, 엄청나게 센티멘탈한 소설이 나오고 말 것이다.
그렇게,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는데.
‘…?’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뒤를 돌아보니,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너.”
공태준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니다.”
하고, 그대로 어딘가로 걸어갔다.
아니, 따라왔으면 무슨 말이라도 할 것이지, 싱거우면서도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좋은 점은 하나 있네.’
센티멘탈한 기분은 바로 사라졌으니, 작업을 할 만한 감정 상태로 되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