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92화 (92/200)

#91

“일단 캐릭터 분석부터 해 주세요.”

“캐릭터 분석?”

“넵.”

MMORPG게임을 베이스로 한 헌터물 장르의 첫 번째 특징은, 다른 장르의 소설에 비해 많은 수의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소설 캐릭터들의 조형과 컨셉, 성격을 정리해 주시고요, 헌터물 작가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덧붙여 주시면 좋겠어요.”

“흥, 별것 아니군.”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정진욱의 앞에 책 몇 권이 쌓였다. 정진욱도 익히 아는 시리즈였다.

“<나 혼자만 파워업>이라. 꼭 지 같은 소설만 골랐네.”

“예이, 예이, 그러시겠지요.”

<나 혼자서 파워업>은 정진욱이 여태까지 쓴 모든 소설들을 합쳐도 뛰어넘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매출을 자랑하는 작품이었지만,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귀찮아 그냥 넘어갔다.

‘뭐, 원래 저런 사람이었으니까.’

자기보다 못 나가면 쓰레기, 자기보다 잘 나가면 운빨. 형우도 이제는 정진욱의 마인드를 얼추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꾸하는 대신, 책을 몇 권 더 뽑았다.

“그리고 이것도요.”

“<초보자 평원의 석유>? 이건 완전….”

“알았으니까- 이것도요.”

형우는 계속해서 소설을 쌓아올렸다.

“<전쟁크래프트 연대기>? 이건 헌터물도 아니잖아?”

“헌터물의 모티브는 00년대 MMORPG고, <전쟁크래프트 연대기>는 그중 제일 유명한 MMORPG를 원작으로 한 소설이잖아요?”

“그런 궤변이… 그건 그렇다 치고, <호밀밭의 파수꾼>은? 이건 웹소설이 아니라 순문학이잖아?”

“주인공 성격이 마음에 들어서요.”

“<시턴 동물기>는? 애초에 이건 소설조차 아닌데?”

“헌터를 번역하면 사냥꾼이잖아요? <시턴 동물기>에는 사냥꾼이 나오니까….”

그렇게 하나하나 이유를 가져다 붙이다 보니, 어느새 사람의 키보다도 더 큰 책의 탑이 쌓였다.

“…그래서, 이걸 다 읽으라고?”

“에이. 설마요. 그럴 거면 이중책장 사지도 않았죠.”

“…이중책장?”

형우가 자신의 책장을 드르륵- 밀었다. 앞 책장이 벌어지면서, 그 뒤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책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헤헤, 멋있죠? 이게 50만원 넘는 건데-”

형우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밀의 방에서 기어 나온 거대한 바실리스크를 목격했던 헤르미온느의 기분이 이랬을까.

“…미친.”

정진욱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정진욱에게, 형우가 에너지드링크 몇 캔을 내밀었다.

“일주일이면 충분하겠죠?”

* * *

반강제로 끌려온 정진욱은 처음부터 상당히 비협조적이였다. 약간 밉상인 군대 동기 같다고 할까. 뭐든지 대충대충 하려는 티가 팍팍 났다.

‘시간만 때운다는 거지?’

참으로 얄팍한 전략. 그런 사람에게 딱 좋은 방법이 있었다.

방 안에 모든 집기를 다 빼고, 정진욱과 책, 그리고 A4용지 세 개만 남겼다.

“여기에 계세요. 저는 밖에서 글 쓸 테니.”

그러면서 곱게 문까지 잠갔다.

정진욱은 처음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눈치 보면서 농땡이 피우기도 지쳤는데, 아예 문을 걸어 잠가줄 줄이야.

하지만 그 기쁨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한 시간까지는 기뻤다.

두 시간쯤에 처음으로 무료함을 느꼈다.

세 시간에는, 1분이 마치 1시간처럼 느껴졌다.

미국 콜로라도에 위치한 ADX플로렌스라는 교도소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교도소로 악명이 높다. 보통 끔찍한 교도소라면 환경이 열악하거나, 내부 범죄가 많거나 둘 중 하나인데, ADX플로렌스는 그 두 가지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도소를 통틀어도 상위권에 위치할 정도로 깨끗하며, 내부 범죄 또한 벌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ADX플로렌스가 ‘깨끗한 지옥’이라고 불리우며 세계 최악의 교도소로 회자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ADX플로렌스 교도소는 재소자들에게 그 어떤 자극도 제공하지 않는다.

모든 죄수들은 독방에 배정되고, 교도관들은 일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이 무자극이야말로, 인간이 견디기 가장 힘든 고통임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마치 1.5kg짜리 보더콜리같은 녀석이라, 새로운 자극이 없으면 버티지를 못한다. 인간이란 지루함보다는 차라리 괴로움을 택하는 동물이므로.

“젠장.”

문이 닫히고 정확히 세 시간 후, 정진욱은 형우가 시킨 작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완성하기까지는 10시간 걸렸다.

“…이게 뭐예요?”

“네가 쓰라고 한 거.”

반항인지 뭔지, A4용지 앞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큼지막하게 <김형우가 시킨 거> 라고 써 놨다. 참 어마어마한 제목 선정이었다.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1. <나 혼자서 파워 업>

주인공 : 짱쎄다. 효자임.

포지션 : 시체끌고다님.

…중학생 수행평가라고 해도 미달일 정도의 처참한 퀄리티였다. 딱 봐도,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 끄적거렸다는 티가 팍팍 났다.

“이걸 이렇게 하면 안 되죠.”

형우의 지적에, 정진욱은 뻔뻔하게 눈을 치켰다.

“난 최선을 다한 거야.”

“아니, 그게 말이 돼요?”

“믿기 싫으면 믿지 말든가.”

정진욱이 형우를 힐끔 쳐다봤다. 단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했을 뿐, 너 좋은 일은 죽어도 안 하겠다는 네거티브한 의지가 팍팍 느껴졌다. 그래서 형우는 전략을 바꿨다.

‘일단 시작은 했으니, 다음엔 달려가게 만들어야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가장 빠르게 성과를 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예전에 그런 주제를 다룬 글을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그 논문에서 주장하는 바는 이러했다.

‘자기의지와 주변환경의 시너지.’

인간이란, 의욕만으로 뭔가를 하기도 힘들고 환경만으로 뭔가를 하기도 힘들다. 가장 좋은 건 환경과 의욕이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시작하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지속하라는 거지.’

정진욱이 일단 펜은 쥐었으니, ‘자기 의지로 시작’ 부분과 ‘환경조성’ 부분은 클리어다. 이제 다음은 조성한 환경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차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정진욱이 조성한 환경이란 형우를 의미했다.

“정진욱 작가님, 일단 이것부터 드세요.”

형우는 싱긋 웃으며 정진욱에게 에너지드링크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형우의 스파르타식 닦달이 시작됐다.

‘눈이 아프다고요? 안약 넣으세요! 어? 이번에는 코피가 나세요? 지혈제 여기 있습니다.’

‘이 정도로 절대 안 죽어요. 저도 해 봐서 알거든요.’

네가 일을 안 하고 배기나 보자. 그런 의지로 집요하게 쪼아댔다. 만약 형우 본인은 띵가띵가 놀면서 자기한테만 뭐라 하는 거였으면 괘씸해서라도 강짜를 부렸을 텐데, 형우부터가 모범을 보이고 있었으니 뭐라 하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정진욱을 굴리며, 형우는 군대에 있을 적 유격 조교들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죽는 소리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보다 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대한민국 성인 남성이 죽지 않습니다악!’

그때는 내 몸을 당연히 내가 더 잘 알지 니가 뭔데 내 몸을 잘 안다고 염병이야? 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굴려보는 입장이 되어 보니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쓰러지면 바로 500시간 차감해 줄 테니, 제 커리큘럼대로만 무조건 열심히 하세요!’

그 말을 듣고, 정진욱은 눈을 빛냈다. 까짓거,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쓰러지겠지. 차라리 한 번 빨리 쓰러지고 끝내자, 그렇게 생각했을 테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형우 때문이었다.

‘어어, 눈 풀렸다. 홍삼! 홍삼!’

‘목 스트레칭 한번 하세요! 담 와요!’

진욱이 쓰러질 것 같으면 휴식을 종용했고, 눈앞이 아득해지면 입에 홍삼을 물렸다.

‘으어억.’

그리고, 정진욱은 결국 인간의 몸이 생각보다 훨씬 튼튼하다는걸 인정해야만 했다. 형우의 말대로, 인간의 몸은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진작에 이렇게 하시지 그러셨어요.”

“으어억.”

수척해진 정진욱은 대답조차 똑바로 못 했다.

비록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일주일 사이 정진욱은 살이 8kg이나 빠졌다. 다이어트 약을 먹으면서 아침을 굶어 봐도 안 빠지던 살이었는데, 참으로 놀라운 성과였다.

“뇌는 사람의 몸에서 칼로리를 제일 많이 쓰는 장기니까요. 그거 아세요? 체스 기사는 운동선수만큼 칼로리를 소모한대요.”

“으어억.”

정진욱은 도저히 형우의 말을 들어줄 컨디션이 아니었다. 눈을 감으면 눈앞에 글자가 울렁거렸고, 숨을 쉬면 코끝에서 카페인 음료의 냄새가 났다.

“고생하셨어요. 잠시 쉬세요.”

“으어억.”

정진욱이 침대에 드러눕는 것을 확인하며, 형우는 그대로 굵직한 A4용지 뭉치로 눈을 돌렸다.

<37개 시리즈 헌터물 캐릭터 분석>

1. <나 혼자만 파워 업>

2. <독자가 다 앎>

3. <나 혼자만 RH+형 인간>

….

36. <싸움질을 배우다>

37. <초보자 타워의 석유>

남다른 재능을 가진 정진욱이 일주일에 걸쳐 완성한 캐릭터 분석표였다.

“진짜 열심히 했네.”

형우는 천천히 음미하듯, 그 내용을 한자한자 유심히 읽었다. 단순히 눈으로 읽고 외우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 정도로는 정진욱의 지식을 완전히 빨아들이기엔 역부족이다.

‘외우는 거랑, 학습學習은 완전히 다른 행위니까.’

지식을 완전히 씹어서 소화시킨 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형우가 생각하는 학습의 요지였다.

더럽게 힘들고 복잡하겠지만,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 정진욱은 겉보기에는 루저처럼 보이지만, 그냥 루저는 아니다.

‘굳이 따지면 성공한 루저일까.’

성공한 루저, 언뜻 듣기로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말이 안 됐지만, 생각해 보면 그만큼 정진욱을 잘 표현해 주는 말도 달리 없었다.

하지만 그 저열한 인간성 탓에 저평가 당할 뿐, 정진욱의 재능만큼은 진짜다. 별다른 노력 없이 C&N의 특별심사위원으로 낙점된 것부터가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재능이 나한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깊이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단순한 논리의 결과였다.

정진욱은 결코 자신의 노력을 따라잡지 못할 테지만, 자신은 정진욱의 ‘헌터물’이라는 재능을 순식간에 집어삼킬 자신이 있었다.

‘타인의 지식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그 답은 간단하다.

대조와 토론, 그리고 피드백.

“…해 볼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형우는 책상에서 무식할 정도로 두꺼운 무제노트 몇 권을 꺼냈다.

<아이언 타이거>의 연재를 시작하기 전, 인풋을 쌓기 위해 만들어 뒀던 <37개 시리즈 캐릭터 분석본>이었다.

지금부터 형우는 자신의 캐릭터 분석본과, 정진욱의 캐릭터 분석본을 하나하나 대조해 볼 계획이었다.

‘오호, 이 캐릭터. 나는 싸이코패스로 봤는데, 정진욱 작가님은 그냥 약간 성격 나쁨 정도로 했네.’

‘주연 캐릭터가 4명인 걸 많다고 봤는데, 이 쪽에서는 7명까지는 괜찮다고 보는군.’

‘역할군과 성격을 잘 나누고 말버릇을 잘 설정하는 식으로 캐릭터의 개성을 확보해 나가면 충분히 일곱 캐릭터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라…. 이거 놀라운데?’

꾸르르륵.

뇌가 꿈틀거렸다.

배고플 때 위가 꿈틀대듯이.

그래서, 허기질 때 밥을 먹듯 머릿속에 지식을 우겨넣었다.

타다다닥-

새롭게 배운 지식을 동원해, 새롭게 소설을 써 봤다. 결과물은 금방 나왔다.

글자혼합물이었다.

“…허어.”

새삼 야구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가끔 나쁜 습관이 있는 야구선수들은 코치의 지도 아래 폼을 교정하고는 하는데, 처음 교정을 시작할 때는 오히려 나쁜 폼으로 칠 때보다 성적이 더 떨어진다고 한다.

그 일시적 하락이 두려운 몇몇 선수들은 결국 폼을 고치는 걸 포기하고 나쁜 폼으로 계속해서 마운드 위에 올라간다고 하는데, 그런 선수들은 십중팔구 잘못된 폼으로 인한 부상으로 은퇴하거나, 그저 그런 선수로 선수 인생을 마감한다고 들었다.

“그럴 순 없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형우는 다시 한번 소설을 피드백했다.

“접합 부분이 너무 어색해…. 묘사가 아니라 대사로 이어볼까.”

나름의 깨달음을 얻은 뒤, 다시 썼다.

여전히 엉망이었다.

“하긴, 깨달음 한 방으로 잘 써지면 그건 김형우가 아니라 원효대사님이지.”

접합부를 대사로 때웠더니, 대사가 조악해졌다.

그래서 또 썼다.

“이번에는 캐릭터가….”

또.

“아니, 대체 왜 안 되지?”

또, 또, 또.

“으흠, 그 다음에는…….”

“미친 새끼야, 잠 좀 자자!”

참다못한 정진욱이 소리를 빽 질렀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 세 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조금 아쉬웠지만, 내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쓴 건 그래도 ‘글자 혼합물’은 넘어서 ‘저질 소설’이라고 해 줄 정도는 됐으니.

꽤 만족할만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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