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치익, 탁-!
일곱 번째 에너지드링크 캔을 따는 소리를 들으며, 정진욱은 자신의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무슨 일이지.’
피로와 카페인의 치열한 격전 탓에 중간의 기억은 밍숭맹숭했지만,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정도는 기억이 났다.
‘…내기를 했었지.’
형우가 특별심사위원에 합격하느냐 불합격하느냐를 두고 했던 내기에서, 자신은 패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진욱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었다. 지나친 눈의 피로 때문에, 몸이 비명을 지르는 거였다.
“정진욱 작가님? 지금 눈물 나오는데요?”
진욱의 눈물을 보고 형우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혹시라도 이제 이 기나긴 고통이 끝나지 않을까 잠깐 기대했는데 어림도 없었다.
“벌써 눈물이 나오면 안 되는데… 밤은 잘 안 새 보셨나 봐요? 일단 이것부터 넣으세요! 이게 엄청 비싼 안약인데….”
형우는 친절하게도, 안약을 직접 진욱의 눈에 집어넣어 줬다.
피시식-
마른 목에 탄산수가 닿은 것처럼, 약간 시원한 고통 같은 게 느껴졌다.
“이제 덜 피로하죠?”
…요즘 약은 왜 이리 성능이 좋을까?
피곤하다고 하니 카페인을 먹이고, 어지럽다고 하니 오메가3을 먹이고, 눈이 아프다고 하니 안약을 넣어 줬다.
‘이게 작가 집이야, 아니면 약국이야?’
더 짜증 나는 것은, 형우가 주는 약들이 다 하나같이 효과가 확실했다는 점이다.
“흐흐, 직접 먹어보고 비교해 봤거든요.”
정진욱은 살면서 처음으로 좋은 약을 만든다는 이유로 제약회사가 미워졌다.
“한 10분 쉰 것 같으니까, 다시 작업 들어갈까요?”
“벌… 벌써……?”
“에이, 아직 한참 남았어요. 아직 100만 원어치도 못 한 걸요.”
형우가 마치 악마처럼 씩 웃었다. 정진욱이 다시 노트북으로 고개를 꺾었다. 화면만 봐도 욕지기가 올라왔다.
‘만약 다시 일주일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런 내기는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어어? 정진욱 작가님, 왜 또 눈물을 흘리세요? 어라, 안약이 부족했나?”
옆에서 형우가 호들갑을 떨었다.
* * *
일주일 전.
다른 작가들이 떠난 카페의 테이블에는, 정진욱과 김형우, 그리고 천우희가 둘러앉아 있었다.
“험, 케겍!”
어색한 분위기에 정진욱이 헛기침을 했다.
이제 와서 내기 결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정진욱이 약속이나 내기를 칼같이 챙기는 성격이라서는 아니다.
“만약 도망친다면, SNS에 다 까발릴 거예요.”
그 협박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10년 넘게 활동해 온 SNS의 세계에서, 정진욱은 자신의 캐릭터를 공고하게 구축해 놨다.
‘언제나 비판적이며, 세상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딥다크하고 시크한 현대 작가.’
그것이 정진욱, 아니, Novel_life의 이미지였다. 형우가 여기서 몇 마디만 덧붙인다면, 자신이 쌓아놓은 이미지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치달으리라.
“그렇게 되면 현대 작가가 아니라 말만 번드르르한 사기꾼 취급을 받겠죠. 그러니까, 처신 잘하시라고요.”
그 부분이 상당히 마음에 걸렸지만, 정진욱은 짐짓 당당한 듯이 가슴을 쭉 내밀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내기 내용 기억하시죠?”
“물론이지.”
내기의 내용은 간단했다.
형우가 패배할 경우 현금 500만 원을 일시불로 진욱에게 지급하고, 반대로 진욱이 패배할 경우에는 헌터물에 대해 형우에게 알려준다.
“헌터물이래봐야 뭐 알려줄 것도 없지. 메일 주소나 알려주고 가.”
“메일 주소요?”
“그래. 내가 거기에 팁을 적어서 주지. 아무 데서나 구하기 힘든 건데….”
물론 거짓말이다.
한 20분 정도, 대충 분량만 늘여서 쓸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도 일단 약속은 지킨 게 되니까.
‘억울한 조건 속에서도 머리를 굴려서 오히려 골탕을 먹이는 거지.’
그야말로 웹소설에 등장하기 딱 좋은 사이다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문제였다.
“…정 작가님, 대충하시려고 그러죠?”
“어? 뭐, 뭐라고?”
“맞네. 나, 참.”
형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정진욱은 사이다 전개라고 생각했겠지만, 형우가 보기에는 지나가던 개도 못 속일 만큼 얄팍한 속임수로밖에 안 보였다.
‘이 작가가 요즘 왜 계속 죽 쑤는지 알겠네.’
순간, 이 작가한테 헌터물을 배우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냐, 그래도 일단은 헌터물로 돈 벌고 사는 사람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형우는 그대로 휴대폰 어플 하나를 켰다. 모든 휴대폰에 설치된 기본 어플인 계산기였다.
기본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엄청나게 유용하다는 뜻이다.
특히 이런 순간에는 더더욱 그랬다.
타다다닥.
형우의 손가락이 자판 위를 내달렸다. 그렇게 일곱 자리의 숫자를 적어냈다.
5,000,000.
“이게 작가님이 달라고 했던 돈이지요.”
그렇게 말한 뒤, 형우는 그대로 옆에 놓인 나누기(÷) 부호를 누른 후 네 개의 숫자를 더 적었다.
“8590?”
어디서 본 듯한 숫자였는데, 기억은 잘 안 났다. 정진욱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형우와 계산기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게 대체 무슨 숫자인데?”
“모르시나요?”
“…아, 나 이거 알아.”
그때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천우희가 불쑥 끼어들었다.
“올해 최저시급 아냐?”
“어, 어떻게 알았어요?”
형우야 올해 초까지만 해도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알고 있는 게 당연하다지만, 잘나가는 작가인 천우희와 정진욱은 모를 줄 알았는데.
그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당연히 알지! 신작 주인공이 1화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잖아!”
“맞다, 그랬죠.”
형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대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정진욱이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지금 최저시급이 왜 나와?”
천우희는 최저시급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작금의 상황을 이해한 모양이지만, 미련한 정진욱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이해하고 싶지 않거나.’
하지만, 설명 못 해줄 것도 없었다. 이 논리는 내기의 본질에서부터 시작한다.
“공정한 내기라는 건 양쪽이 거는 게 비슷할 때 성립합니다. 그렇지요?”
가위바위보를 하자. 내가 지면 마이쮸 하나를 줄 테니 네가 지면 집문서를 내놔. 이런 건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내기다.
뭐, 카지노나 도박처럼 확률이 관련된 내기에서는 배당이라는 게 있지만, 보통 이런 단발성 내기에서는 성립되지 않는 개념이었다.
“정진욱 작가님은 저한테 돈을 요구했고, 저는 정진욱 작가님에게 시간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정진욱 작가님에게 500만 원 어치의 시간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국가에서 정한 한국인의 1시간은 8,590원의 가치를 갖고 있다. 오백만 나누기 팔천오백구십이라는 계산식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 결과는 582.72177이었다.
“소수점 떼면 582시간이네요.”
“…뭐라고?”
정진욱의 눈이 크게 떠졌다.
582시간이면, 하루 종일 일해도 24일이 넘게 걸리는 긴 시간이었다.
“왜 계산을 그런 식으로 하지? 차라리 나도 500만 원을 줄게!”
“에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작가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거래란 건 서로가 원하는 걸 줘야 하는 거라면서요?”
형우는 미리 찾아놓은 정진욱의 SNS를 내밀었다.
Novel_life
쓸모없는 선물을 준 친구가 자기 생일에도 선물을 챙겨 달라고 하는데, 그럴 거면 영수증이라도 같이 주던가. 자기 선물을 바라고 나한테 선물을 준 거니, 이건 따지자면 거래인 셈인데. 상대가 필요 없는 걸 거래 품목으로 주는 사람이 어딨어.
언제 썼는지 기억도 안 나는 글이었다.
‘내가 이런 걸 썼다고?’
마치 지금의 자신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듯한 날카로운 비평이었다. 보통 사람이면 여기서 고꾸라졌겠지만, 아쉽게도 정진욱은 얼굴이 좀 두꺼운 편이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말야, 시, 시간을 그런 식으로 돈으로 치환하는 게 어딨어? 애초부터 말이 안 된다고! 이건 무효야!”
형우는 대답하는 대신, 정진욱의 다른 게시글을 보여 줬다.
Novel_life
흔한 격언 중에 시간은 금이라는 격언이 있다. 이건 시간이 엄청 귀하다는 게 아니라, 시간을 돈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저번 달 나의 시간은 78g 정도였다. 금의 현시세는 3.75g에 28만 원이니, 직접 계산해 보시길.
대체 이건 또 언제 적은 거지? 진욱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니까 이건…!”
뭐라고 우기려던 진욱의 얼굴에, 형우가 또 하나의 게시글을 들이밀었다.
Novel_life
말이 많은 놈들은 십중팔구 패배자더라고.
…과거의 나는 왜 이리 SNS를 많이 한 걸까?
정진욱은 인생 처음으로 그 사실이 후회됐다.
‘하루에 12시간씩 자신의 집에서 머물며 500시간동안 헌터물을 쓰는 것을 도울 것.’
형우와 정진욱이 체결한 최종적인 합의점.
처음에는 582시간이었지만, 주휴수당 5분의 1에 휴게시간 8분의 1을 제하니 대충 그 정도 남았다.
‘괜히 신고당할라.’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상대가 쪼잔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정진욱이었으니 애초에 책잡힐 만한 일은 안 하는 게 나았다.
“집 더럽게 작네.”
형우의 집을 바라본 정진욱이 똥 씹은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원하신다면 출퇴근하셔도 되는데.”
“통근시간도 일하는 시간으로 쳐 주냐?”
“에이, 세상에 그런 꿈의 직장이 어디 있어요? 사실 주휴 꼬박꼬박 챙겨주고 휴게시간 꼬박꼬박 챙겨주는 것만 해도 상위 5%라니까요? 제가 예전에 백화점 주차장에서 일했던 적이 있는데….”
알바의 고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형우의 말이 좀 길어졌다. 별로 듣고 싶지 않았던 정진욱은 덤덤하게 형우의 집 문을 열었다.
“뺘악!”
“으응? 이게 무슨 소리…?”
문을 열자마자 날카로운 새 소리가 들렸다. 오랜 시간 형우가 집을 비운 탓에 배고픔과 외로움에 잔뜩 골이 나 있던 참치였다.
“뺘악, 뺙뺙!”
정진욱을 형우라고 착각한 참치는 그대로 진욱에게 달려들어 이마빡을 콱콱, 하고 쪼았다.
“으아악! 이거 뭐야, 뭐야?”
진욱이 팔을 내저으며 비명을 질렀다. 형우는 황급히 주머니를 뒤져 하나에 8천 원씩 하는 고급 약과를 꺼냈다.
“참치야, 일단 이거! 이거 먹고 진정 좀 해!”
“뺘아악?”
“하나 더 줄까?”
…잠시 후.
“뺘아악!”
너무 비싸서 형우조차 잘 먹지 못하는 고급 약과 위에서, 참치가 기분 좋다는 듯 날개를 퍼덕거렸다. 정진욱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참치를 노려봤다.
“아니, 저 빌어먹을 새는 뭐요?”
“하하, 그게. 제가 키우는 참새인데. 이름은 참치에요.”
“누가 이름 물어 봤… 쓰읍! 연고 좀 살살 좀 바르면 안 되나? 아파 죽겠구만!”
“연고를 어떻게 살살 발라요?”
상처자리에 연고를 바르는 도중 정진욱이 역정을 냈다. 손끝이 움찔거리는 걸 보니 진짜로 아프긴 아픈 모양이었다.
“…많이 아프세요?”
“부리에 네 번이나 쪼였는데, 안 아프겠어?”
“한 번 쪼이는 데 10시간 해서, 총 40시간 빼 드릴게요.”
죽도록 아깝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뭐, 그 정도면….”
정진욱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고를 다 바르기가 무섭게, 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고도 다 발랐으니, 슬슬 시작하죠.”
1분 1초가 소중한 형우로서는 허비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C&N의 특별심사위원쯤 되는 작가를 원하는 대로 써먹을 기회는 그렇게 흔한 기회가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