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89화 (89/200)

#88

‘심미안이 없는 사람이라도 데뷔를 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건 요행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단발적인 성공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예술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진정 좋은 작품을 알아볼 수 있는 심미안이 필수적입니다.’

예전에 수업 시간에 들었던 말이다.

‘단발적 성공, 요행?’

불길한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휘몰아쳤다. 요행이란 운이라는 거고, 그러면 나는 그저 운이 좋아서 작가가 됐다는….

똑딱똑딱.

시계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그랬었는데, 사람은 의욕이 없을 때 시계 소리가 들린다고.’

난다긴다하는 작가들을 모아 보니까 알겠다.

아직 멀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직접 보는 건 또 경우가 달랐다. 다들 똑똑하고, 아는 것 많고, 능력도 뛰어났다.

‘진짜 우물 안 개구리였네.’

거기에, 그 작가가 끝이 아니다. 그들 위에는 또 다른 작가가 있고, 그 위에는 또 누군가가 있다. 그렇게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그 탈력감 속에서, 형우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참으로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이거 오랜만인데.’

딱 6개월 전, 골방에서 느꼈던 감각이 아닌가.

누군가는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잘 해왔는데, 왜 갑자기 이런 일로 멘탈이 터져? 그렇게 말할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안 터지는 게 더 이상하지.’

지금까지 형우가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었던 건,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 믿음은 ‘난 뭐든지 할 수 있어!’같은 낙천적인 믿음이 아니라, ‘나는 열심히 읽고 썼어. 내 소설적 기술은 훌륭해.’라는 식의, 자신의 기술과 능력에 대한 믿음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그 믿음이 깨졌다.

히말라야를 등반하는데, ‘네가 들고 있는 장비가 사실 고장 났을지도 몰라-!’하는 말을 들어버린 느낌이다.

불안감이 찾아오고, 초조해진다. 시계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렸다.

똑딱, 똑딱. 똑, 딱.

그리고, 그 가운데서,

“풋.”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입을 살짝 가린 채로 보란 듯이 입꼬리를 올린 정진욱의 얼굴이 보였다.

“와.”

그 순간, 형우는 속에서 솟구치는 뭔가를 느꼈다. 만약 한 50년쯤 지나 자서전을 쓸 일이 있다면, 그 첫 줄은 분명 이렇게 시작할 거다.

[무기력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누군가는 동기를 세우는 일이라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마음을 다잡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것들은 다 틀렸다.]

[무기력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저 새끼한테만은 지고 싶지 않다 싶은 놈을 찾아내는 것이다. 운이 좋게도 나한테는 그런 놈이 하나 있었다.]

* * *

“심미안이라는 건 그러니까, 따지면 작품의 가치를 환산하는 능력인 거잖아?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좋아요.”

천우희의 질문에 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욱의 도발 덕분에 의욕을 회복한 형우는, 일단 끔찍한 심미안의 이유부터 찾아보자고 했다.

“형우 너는 소설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재미요.”

“그야 당연한 거고. 그 재미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거.”

“가장 필요한 거라.”

이번엔 2초 정도는 고민했다.

“소설의 짜임새죠.”

“그래, 그거네.”

천우희가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는 소설이 나름의 짜임새만 있다면, 그냥 그 소설을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어, 다른 사람은 그렇게 안 해요?”

“소설 읽으면서 구성이니 뭐니 하고 보는 사람이 더 드물걸. 보통은 그냥 와 이거 재밌네, 와 이거 노잼이네, 하면서 보지.”

요컨대,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소설을 분석한다는 뜻이었다.

“…좋은 구성과 상업적 흥행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거군요.”

정확히는, 좋은 구성만으로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구성만이 소설의 전부인 것은 아니니까.

“가수만 해도 그렇잖아.”

가창력이 가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척도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창력이 가장 중요한 척도인 것 또한 아니다. 뛰어난 가창력이 곧 가수로서의 성공을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가창력이 다소 떨어지는 퍼포먼스 아이돌 그룹이 유명 락커와 발라더를 제치고 음악방송 1위를 내달리는 일은 정말이지 흔한 일이니까.

“다른 사람이 와 저 사람 노래 좋다, 와 저 사람 목소리 좋다, 할 때 형우 너는 와 저 사람 목소리가 3옥타브 솔까지 올라가네? 저거 진짜 어려운 건데, 끝내주잖아? 이러고 있다는 거지.”

“아.”

이제야 상황 파악이 좀 됐다. 다른 사람들이 미식가라면, 형우는 대식가에 가까웠다. 미식가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 헤매고, 대식가는 어떤 음식이라도 그것이 ‘음식’이라고 불릴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한 그 안에서 나름의 맛을 찾아낸다. 그러니, 심미안이 부족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애초부터 형우는 ‘뚜렷한 하자가 없는 글’이라면, 뭐든지 나름의 재미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네요.”

결연한 표정으로, 형우는 그렇게 말했다.

* * *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방법?”

형우가 가장 먼저 찾아간 것은 안재욱이었다. 천우희와 함께 둘밖에 없는 만점자였다.

“나 같은 경우에는 특이성을 봐.”

“특이성이요?”

“응. 이 작품이 다른 작품이랑 얼마나 다른가, 그런 거.”

“다른 작품이랑 다르다고 해서 그 작품이 무조건 재밌는 건 아니잖아요?”

똑같이 다른 작품을 내도, 어떤 작품은 기괴하다는 평가를 받고 어떤 작품은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형우의 지적을 들은 안재욱이 으윽,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그 기괴함이랑 특별함의 차이가 좀 있는데….”

“그 차이가 뭐죠?”

“그게 말이야…….”

한참을 고민하던 안재욱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으윽.”

어떤 예술이 좋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은 예술이 탄생한 순간부터 계속됐던 질문이나 다름없었다.

질문이 계속됐다는 건, 애초에 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뜻이었다.

‘또 원점이네.’

천우희에 이어 안재욱에게까지 물어봤지만 별 수확은 없었다. 그러면 그다음은,

“내 차례인 것 같지만, 김 작가. 내가 해 줄 말은 하나밖에 없네.”

형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유동현이 슬쩍 웃었다.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라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입가에는 마카롱 부스러기가 가득했다.

말이야 좋은 말이었지만, 역시 도움은 안 됐다.

‘미치겠네.’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 형우의 표정이 굳어가는 그때, 뒤에서 쿡,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똑똑한 양반도 잘 안 되는 게 있나 보네. 아니면 그 사이 밑천이 다 드러나신 건가?”

또 다른 심사위원인 정진욱이었다. 일부러 피했지만,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옛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주쳐 버렸다.

‘차라리 잘 됐어.’

옛말에 원수에게서라도 배울 게 있으면 배우라고 했다. 형우는 입꼬리를 움직여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정진욱 작가님은 정답을 어떻게 아신 거죠? 보니까 꽤 빠르게 푸셨던데. 속도가 빠르다는 건, 나름의 기준이 있다는 거겠죠.”

“…기준이라.”

혼잣말처럼 말했지만 다 들렸다.

남들 들으라고 하는 혼잣말이었다.

“그걸 좀 알려주실 수는 없을까요?”

“소설을 잘 쓰면 뭐 해. 뭐가 좋은 글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나야말로 좀 알려주쇼. 그렇게 소설 보는 눈이 없는데 작가질은 대체 어떻게 해 먹고 사는 거요? 아, 혹시.”

정진욱이 눈을 길게 찢으며 킬킬거렸다.

“엄청나게 운이 좋았다는 건가? 재능충이 아니라 운빨충이었군. 역시 인생은 노력이고 뭐고 필요가 없다니까?”

“…뭐라고요? 운빨, 재능빨?”

지금까지의 노력을 죄다 땡처리하는 것과 진배없는 발언에, 형우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만약 지금 부탁하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멱살을 쥐었을지도 몰랐다.

“말을 너무 막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어우, 욕이라도 하려나? 아니면 때리기라도 하려나? 아니면.”

정진욱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엄지와 검지를 딱- 소리 나게 부딪혔다.

“내기라도 하겠나?”

“내기요?”

“아까 들어보니, 헌터물 쓰는 작가랑 친분을 쌓고 싶어서 여기 왔다는데. 내가 또 그 헌터물 쓰는 작가 아니겠나.”

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욱이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 말대로, 자네가 그 노력이란 걸 해서 다음 테스트에 통과한다면, 자네가 원하는 걸 뭐든지 하나 들어 주지.”

“엇.”

그 말을 듣자마자 천우희가 먼저 반응했다. 아마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거겠지. 그런 천우희를 이상하게 쳐다본 정진욱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약 통과하지 못하면, 오백만 원을 일시불로 줘.”

정진욱이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난 누구랑 다르게 솔직해서 말야. 나는 돈이 제일 좋아. 소설 쓰는 것도 그게 돈 벌기 제일 쉬운 방법이라 그런 거고.”

“좋습니다.”

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시죠.”

어차피 이판사판, 되거나 안 되거나다. 거기에 판돈 조금 얹는다고 뭐가 그렇게 달라지겠는가.

* * *

“정확하게 결정되는 건 1주일 뒤니까요, 그때까지 잘 생각해 주세요. 그럼 작가님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지원의 말이 끝난 후, 다섯 작가들은 각자 인사하고 헤어졌다.

“허어….”

형우는 아직도 명확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하늘을 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좋은 소설이란 대체 뭐… 억!’

그렇게 한참을 걷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뒷목을 잡아당겼다.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김형우! 정신 안 차려!”

눈을 떠 보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천우희가 보였다.

“이게 무슨….”

“너 방금 큰일 날 뻔했어!”

그제야 형우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형우의 앞에는 뚜껑 열린 맨홀이 아가리를 활짝 벌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이런 것도 못 보고 다녀? 아니, 아니다. 아예 말을 하지 마라.”

“네?”

“시끄럽고, 따라와.”

천우희는 그대로 형우의 팔을 질질 끌고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그 사이에 카페를 세 개 정도 지나쳤으니, 아마도 아는 카페인 듯싶었다.

“발르슈트 하나 주세요.”

들어오자마자, 천우희는 다짜고짜 하얀 음료 하나를 시킨 뒤, 그대로 형우에게 내밀었다.

“일단 마셔.”

“그럴 기분이….”

“기분 안 좋은 거 아니까, 일단 마시라고.”

천우희의 재촉에 형우는 얼떨결에 음료수를 마셨다.

“어라?”

살면서 처음 먹어보는 발르슈트는 달고, 따뜻하고, 그러면서도 부드러웠다. 뭔가 든든하게 힘이 나는 기분이 드는 마법의 음료였다.

“괜찮지?”

“어, 진짜 좋네요.”

“응. 나는 가끔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여기에 이거 마시러 오거든.”

우유의 맛과 카페의 이국적인 분위기 때문일까. 오늘따라 천우희가 꽤나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아까 걸으면서 나쁜 생각 했지?”

“도사네. 어떻게 알았어요?”

“뻔하지. 나쁜 생각은 꼬리를 잘 물거든. 좋은 생각은 꼬리가 툭툭 끊기는 데 말야.”

형우가 음료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아하, 아까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그렇지. 나쁜 생각이 끊기지 않을 땐 그냥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특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더더욱.”

왠지 속이 뭉근해져서, 홀린 듯이 음료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어라, 없네.”

어느새 잔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형우가 빈 잔을 흔들었다.

“이거 이름이 뭐였죠? 발르까지는 들었는데.”

“발르 슈트. 터키 음식인데 한국말로 하면 꿀 탄 우유야.”

“발르가 꿀이에요? 아니면 슈트가 꿀인가?”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니?”

천우희와 형우는 발르슈트를 한 잔씩 더 시키고, 좀 오랫동안 떠들었다.

“일주일이나 남았잖아. 긴장부터 풀어. 분명 잘 될 테니까.”

헤어지기 전, 천우희는 그렇게 말했다.

* * *

일주일 뒤, 최종심사위원 결정일.

“평가 기준은 저번과 같습니다. 아시죠? 20개의 소설 중, 상업적으로 가치있는 작품 다섯 개를 골라내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지원은 20개의 소설을 형우의 앞에 내밀었다.

“시작할게요.”

형우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20개의 소설들을 천천히 훑었다.

그 진지한 모습에, 주위에 모인 사람들도 덩달아 숙연해졌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괜한 시간 낭비야.’

정진욱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쯧, 소리를 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심미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녀석이다.

‘안목은 하루아침에 길러지는 게 아니지.’

그게 그렇게 쉬운 거였으면, 큐레이터는 왜 있고 평론가는 대체 왜 있겠는가?

‘운 좋아서 반짝하다 안목 없어 쓰러진 놈들이야 수두룩 빽빽이지. 저 놈도 그런 놈이리 테고.’

정진욱이 하품을 길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쓸모없는 일이다.

“……골랐습니다.”

그 사이 형우는 다섯 개의 소설을 선택해 지원에게 내밀었다.

“정말 이걸로 하시겠어요?”

“예. 번복은 없습니다.”

첫 번째 소설은 <역천무왕>이었다.

“이건….”

소설을 받아든 지원의 눈동자가 위쪽으로 향했다. 인간의 눈동자가 위쪽으로 움직일 때는 대게 무언가를 기억해내려는 순간이다. 그 말인즉.

“기억에 있는 작품이네요. 5년 전인가? 그쯤 유행했었죠. 웹소설보다는 종이책으로 더 성공했는데, 아마 5쇄까지 갔을 거예요.”

정답이라는 뜻이었다.

‘운이 좋았군.’

비기니즈 럭이라고, 누구에게나 한 번의 행운은 오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원이 두 번째 소설을 확인했을 때, 그 생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두 번째 소설은… <황금 손을 가진 의사>네요! 이것도 꽤 성공했었죠.”

첫 번째가 초심자의 행운이라면, 두 번째는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중급자의 행운?

…말도 안 되는 억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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