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는 잠깐 처리할 일이 있어서.”
지원은 형우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전화하며 어딘가로 가 버렸다.
“…엄청 넓네요.”
“나만 따라오렴. 길은 절대 안 잃을 테니.”
천우희가 당당하게 파워워킹을 했고, 형우는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잠시 후, 큼지막한 식당 홀의 입구가 보였다.
“와아…!”
미슐랭에도 등재된 고급 뷔페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식당 주위에는 온통 고소한 냄새가 감돌았다. 양이 많은 대신 음식의 퀄리티가 떨어지는 일반 뷔페랑은 비교도 안 됐다.
음식 하나하나가 고급 음식점 급이라고 해야 하나, 심지어 초밥은 눈앞에서 회를 잘라 만들어 준다.
하지만 형우가 탄성을 내질렀던 건, 음식의 퀄리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음식 같은 건 처음부터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작가님들이다!”
형우의 시선 끝에 위치한 것은 미리 와서 식사 중이던 세 명의 작가들이었다.
“…턱 빠지겠다.”
천우희가 형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좋은 건 알겠는데, 표정 관리 좀 하고 가라. 다른 작가님들 놀라시겠어.”
“넵.”
자기 때문에 다른 작가님들이 놀라다니, 그건 절대 안 될 말이다. 형우가 재빨리 유리창을 보고 표정을 다듬었다. 그러는 김에 머리도 한번 만지고, 옷매무새도 다시금 손봤다.
천우희가 어이없다는 듯 그 꼴을 바라봤다.
“뭐 데이트 나가냐? 얼씨구, 넥타이까지.”
“데이트보다 더 설레는데요.”
형우는 오늘 양복핏으로 한껏 멋을 내고 나왔다. 오늘도 편한 캐주얼 옷차림인 천우희와 대조적이었다.
“오늘도 안 꾸미셨네요?”
“뭐라고?”
“처음 만났을 때는 막 명품 코트에 힐에 그랬잖아요.”
“와, 씨. 이래서 모르는 애들은 안 된다니까.”
천우희가 자신의 옷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이게 평범한 추리닝이 아니라 미국 아티스트가 한 땀 한 땀 손수 제작한….”
“…제가 보기엔 그게 그건데. 오히려 신발이 좀 알록달록해 보이긴 하네요.”
“알록달록이라고오?”
천우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건 섀터드 백보드야! 한정판 조던이라고!”
“조던이면 농구화잖아요. 작가님 농구도 하세요?”
“누가 농구 할 때 조던을 신어!”
농구화인데 농구 할 때 안 신는다니. 참 모순적인 신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투닥거리던 사이, 형우는 얼추 옷매무새를 다 다듬었다.
“괜찮죠?”
괜찮기는 사실 5분 전부터 괜찮았다.
“…생각해 보니 화나네. 나도 저기 모인 작가들만큼 이름있는 작간데, 나 만날 때는 너 안 그러잖아.”
“에이, 천우희 작가님이랑은 경우가 다르죠.”
“뭐가 다른데? 말 잘해라.”
“작가님은 저랑 친하잖아요.”
형우는 태연하게 대답하며, 마지막으로 소매를 한번 쭉쭉 폈다. 이제 눈 씻고 찾아봐도 더이상 매만질 데가 없었다.
“그럼 슬슬 들어갈까요?”
“…그, 그럴까?”
잠깐 사이 천우희의 말투가 변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역시 조금은 긴장했나? 그렇게 생각했다.
티 내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레 손부채를 하는 모양새가 웃겼다.
“뭐, 뭘 봐?”
“보긴 뭘 봤다고… 됐어요. 들어가요.”
* * *
“아, 안녕하세요! 작가님들. 기, 김형우라고 합니다!”
작가들 앞에 도착하자마자, 형우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름 표정 관리를 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표정 관리가 안 됐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투명한 안경이 잘 어울리는 셀러리맨 스타일의 남성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띵, 안재욱입니다.”
“안띵 작가님이라면… <너무 양심적인 보험 설계사> 쓰신 분 맞죠?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전설의 보안관> 잘 봤습니다.”
긴장한 형우와 달리, 행동 하나하나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저런 게 바로 경험 많은 작가인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김형우면 김 작가군. 유동현입니다.”
안재욱의 옆에 앉아있던 40대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유동현 작가님이면, 혹시 <종횡무진괴짜천마> 쓰신 분 아니십니까?”
“오호, 낡은 작품인데.”
“옛 작품이라니요, 클래식이죠!”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무협과 코미디를 적당히 섞은 퓨전 무협의 대가였다. 읽으면서 배꼽이 빠져라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던 기억이 났다.
‘…엄청 재밌게 생긴 사람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재밌지는 않네.’
웃긴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고 꼭 웃긴 사람이라는 법은 없다지만,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
“정진욱이오.”
귀찮다는 듯 그렇게 대답한 사람은 얼굴이 까맣고 덩치가 큰 사내였다. 겉모습만 본다면 작가라기보단 차라리 토목 쪽이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형우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저, 혹시 필명을 따로 쓰시나요?”
“알아서 뭐 하려고. 어차피 그쪽 작품에 비하면 별것도 아닐 텐데.”
정진욱은 형우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했다. 형우는 당황했고,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하하하, 정진욱 작가님 필명은 글고래입니다, 글고래!”
분위기를 참다못한 안재욱이 끼어들었다.
“형우 님도 아시죠? 쓰신 분!”
“……어, 그게.”
솔직히 말해서, 처음 들어 본 작품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정진욱이 코웃음을 쳤다.
“역시, 재능충 작가님이 내 소설 같은 거 읽었을 리가 없지.”
“…재능충이요?”
“아, 죄송. 말을 좀 실수했군. 재능 넘치는 작가님이라고 해야지.”
“저기요, 말을 왜 그렇게….”
“어어어… 아, 맞다! 다들 계약서는 받으셨나요?”
안재욱의 슈퍼세이브가 또다시 터졌다. 능숙하게 상황을 리드해 나갔다. 대답한 것은 유동현이었다.
“특별심사위원 계약 말하는 건가?”
“그것도 있는데, 아마 따로 비밀유지서약서를 작성해야 할 거예요. 저는 어제 미리 편집자님 만나서 받아 놨거든요.”
안재욱이 가방을 뒤져 계약서 한 장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본 형우가 질문했다.
“어라, 계약서를 어떻게 갖고 계세요? 회사 측에서 가져가는 거 아닌가?”
“이건 사본이에요. 이렇게 해 두면 나중에 계약 문제 생겼을 때 처리하기도 편해요.”
“오….”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곱씹을수록 어마어마한 꿀팁이었다.
‘진작에 알았으면 나도 고생 안 했을 텐데.’
처음에 불공정 계약을 당할 뻔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했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다들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던 모양이다.
“오, 안재욱 작가님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천우희의 질문에, 안재욱이 허허, 하고 웃었다.
“예전에 보험회사에서 일했었거든요.”
“어쩐지! 그래서 <너무 양심적인 보험 설계사>도 그렇게 디테일했던 거군요?”
“이건 비밀인데, 거기에 있는 몇몇 이야기는 진짜 실화랍니다.”
안재욱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그 모습을 본 정진욱이 언짢은 듯 미간을 구겼다.
“거참, 처음부터 똑바로 읽으면 될 걸 가지고 뭘 사본씩이나….”
“뭐, 그게 제일 좋죠!”
안재욱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정진욱의 공격을 피해냈다. 정진욱은 쳇, 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원래 저런 사람인가?’
처음에 형우는 정진욱이 자신에게 적대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자! 아무튼간에, 중요한 건 제 예전 직업이 아니라 계약서 이야기겠지요?”
정진욱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테이블에 집중됐다. 정진욱은 관심 없는 척 마카롱을 와작거리며 씹었지만, 귀가 쫑긋거리는 게 보였다.
“얼핏 보면 길어 보이는데, 요약하면 두 갭니다. 비밀유지조약이랑 저작권 관련 조항이지요.”
비밀유지조약은 당연히, 공모전의 결과를 사전유출하지 말라는 조항일 테다. 오히려 이해되지 않는 건 그 뒤의 저작권 관련 조항이었다.
“특별심사위원이랑 저작권이 대체 무슨 상관이래요?”
“아, 그게 좀 사연이 있죠.”
지금으로부터 한 30년 전쯤에는 한국에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꽤나 희박했다고 했다.
“심사위원들이 공모전 아이디어를 멋대로 강탈해 자기 아이디어인 양 빼앗아 쓰는 일도 많았다고 해요. 그런 걸 막으려고 이제 이런 조항이 생겨나게 된 거죠.”
“옛날 사람들은 양심이란 게 없었대요?”
형우의 순진한 질문에, 안재욱이 손을 휘저었다.
“에이, 설마요. 사람 사는 데야 다 똑같지. 그냥, 그때는 그래도 됐으니까 그렇게 한 거죠.”
악폐습과 폐단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간의 양심같이 애매한 것을 믿는 게 아니라 그것이 아예 불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거다.
“금연이랑 똑같아요. 나 오늘부터 담배 끊는다, 마음으로만 다짐하는 사람은 열 명 중 아홉 명이 실패하거든요? 근데 아예 담배를 못 피우는 환경을 만들면 성공할 수밖에 없는 거죠.”
“경험담인가요?”
천우희의 질문에, 안재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뭐. 저 같은 경우에는 금연할 때 아예 방 문을 걸어 잠가뒀어요. 밖에 안 나가면 담배를 못 사니까. 거의 2주간 밥도 다 시켜만 먹었죠.”
“와, 왜 그렇게까지 담배를 끊은 거예요? 건강 때문에?”
“아뇨, 그보다는 글 쓰려고 끊었죠.”
글에 집중하려고 할 때마다 자꾸 담배 생각이 나서 템포가 끊어지는 게 아주 거슬렸다고 해야 하나.
“작가에게 있어서 글 욕심이라는 게 담배 욕심보다 더 크다는 거죠. 그러니 이 저작권 계약서가 꼭 필요한 거고. 혹시 모르잖아요? 나도 모르게 남의 아이디어에 손이 갈지?”
재치 있는 말과 함께, 안재욱이 계약서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말만 번드르르하기는.”
그 말을 들은 정진욱이 코웃음을 쳤다.
“그깟 망생이들 아이디어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 난리인지. 애초에 재능이 있었으면 진작에 성공했겠죠.”
그 부정적인 태도를 참다못한 형우가 끼어들었다.
“모두가 습작생부터 시작하는 거지요. 아니면 정진욱 작가님은 날 때부터 작가였나 보죠?”
“…해도 안 되는 놈은 안 되는 겁니다. 운 좋게 뭐가 되더라도 결국 고꾸라지겠죠. 하기야, 재능 넘치는 분들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거 저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요?”
형우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안재욱조차도 형우를 말리지 않았다. 당황한 정진욱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뭐요, 지금 한번 해 보자는….”
띠리리리링-!
그 순간, 커다란 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호텔 알람이었다.
[…14시부터 16시까지 진행되는 2부 뷔페가 곧 시작됩니다. 입장 준비해주세요!]
그 소리와 함께, 멀리서 지원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다행히 안 늦었네요. 인사는 다 나누셨어요?”
“…쳇.”
정진욱은 짜증 난다는 듯이 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보든 무뢰배 외에는 어울리는 단어를 찾기 힘든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매니저 앞에서 담당 작가에게 싸움을 걸어댈 정도로 멍청한 인간은 아니었다.
“딱 14시에 입장하면 되는 거죠?”
“네.”
지금 시간은 13시 50분. 10분 정도 시간이 있었다. 형우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형우 작가님? 어디 가시게요?”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사람 많은 곳을 오니까 약간 속이 메스꺼워서요.”
그렇게 말하며 정진욱을 한 번 쓱 쳐다본 뒤, 그대로 지나쳐 걸어갔다.
“어어? 형우, 어디 가?”
오도도도, 달려간 천우희가 형우의 옆에 살짝 달라붙었다.
“뭐야, 빈정 상해서 그래?”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냥 화려한 데 오니까 좀 답답해서….”
“그럼 촌스러운 티 내는 거네?”
“호텔에 추리닝 입고 온 건 세련된 거예요? 신발도 알록달록한 거 신고?”
“알록달록이라니! 이거 조던이라니까? 한정판이라고! 자세히 봐, 이 자식, 앗!”
천우희는 자신의 한정판 신발을 강조하려는 듯이 방방 뛰었다.
“…쯧.”
그런 형우와 천우희의 뒷모습을 보며 정진욱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잠시 고민한 후에, SNS에 짧은 글을 썼다.
[Novel life]
비싼 식당을 보면 다들 음식을 먹으러 온 게 아니라 사진 찍으러 온 것 같다. 비싼 옷, 비싼 신발도 마찬가지. 남의 시선이 그렇게도 신경 쓰이나?
잠시 후, 답글 하나가 달렸다.
[Oh_sorry]
노벨라이프님도 지금 SNS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은근 비싼 식당 왔다고 자랑하는 거 아님?
‘…?’
말문이 턱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