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86화 (86/200)
  • #85

    얼추 일이 다 마무리된 후, 형우는 뜨끈한 족발 한 팩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영감님, 족발 같이 안 드실래요?”

    “오오, 족발?”

    그렇게 대답하며 손을 흔드는 사람은, 형우가 사는 오피스텔의 건물주인 전직 형사 고덕호 영감님이었다.

    “오늘 일 벌인다면서 족발 사 온 거 보니 잘 됐나 보네.”

    “영감님 덕분이에요.”

    “연습이 헛되지는 않았구만.”

    고덕호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 형우가 연수에게 사용했던 충격 요법은 사실 고덕호에게 배운 거였다. 애초에 전문가인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엄두조차 못 냈으리라.

    “그럼 이제 이건 버려도 되겠네.”

    그렇게 말하며, 고덕호가 종이 한 장을 흔들었다.

    <연수 설득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이름의 계획표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내기를 건다

    ->내기를 받았을 때 (2번)

    ->내기를 거절했을 때 (3번)

    2. 설득한다

    ->뛰쳐 나갔을 때 (6번)

    ->울 때 (7번)

    ->설득이 성공했을 때(8번)

    3. 자존심을 긁는다

    ->내기를 받았을 때(2번)

    ->뛰쳐 나갔을 때(6번)

    ….

    그렇게, 연수의 행동 47가지를 예상해서,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7개나 미리 준비해 놨다. 거의 게임 공략집처럼 보일 정도로 세밀하게 모든 시나리오를 몇 번이나 검토했다. 고덕호 영감님의 프로파일링 경력이 큰 도움이 됐다.

    “진짜 고마워요, 영감님.”

    “으하하,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 내가 혹시 경기도 광신도집단 잡은 이야기 해 줬냐? 아주 교주한테 꽂혀서 교주 잘못을 알고서도 아니요, 아니요, 하는데. 그때 세뇌 풀려고 시나리오 짠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뭐, 아무것도 아니지.”

    “잠시, 잠시만요!”

    화들짝 놀란 형우는 고덕호의 말이 시작되기 전에 재빨리 노트를 꺼냈다.

    “그래서 내가 그때, 그 교주를 잡아다가 아주 망신살을….”

    “아하.”

    타다다닥-

    한 글자라도 놓칠세라, 분당 850의 타자속도를 유지하며 고덕호의 말들을 그대로 적어갔다. 전직 형사의 경험이 잔뜩 들어간 경험담이다. 이걸 흘려들으면 작가로서의 자격 미달이지.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분명 언젠가 써먹을 데가 있을 테다.

    “허어, 이기적인 놈.”

    한참을 이야기하던 고덕호가, 갑자기 농담처럼 그런 말을 했다.

    “제가 왜 이기적이에요?”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뭐 맞장구라도 쳐 주든가 하지, 아하 아하 하면서 컴퓨터만 뚜드리고 있으니. 쯧쯔.”

    “에이, 너무 좋은 이야기라 그렇죠!”

    “글밖에 모르는 놈.”

    “그건 맞죠.”

    형우의 대답에, 고덕호가 씨익 웃었다.

    “트롤리 문제 하나 내 볼까? 한쪽에는 네가 공들여 쓴 소설이 든 노트북이 있고 반대쪽에는 너랑 제일 친한 친구가 있다. 둘 중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어느 쪽으로 갈래?”

    “그야 당연히….”

    친구,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입이 쉽게 안 떨어졌다.

    “봐봐, 5초 넘게 고민하잖아.”

    “아니, 그게 아니잖아요.”

    “빨리 골라 봐. 친구냐 소설이냐? 솔직하게.”

    한참을 생각해도, 결론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친구냐, 소설이냐….”

    “이놈 보게. 남들이 보면 너 미쳤다고 할걸.”

    “아니거든요.”

    형우는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친구냐, 소설이냐.

    소설이냐, 친구냐.

    …혹시 나는 싸이코패스가 아닐까? 형우는 그대로 휴대폰을 꺼내 ‘싸이코패스’라고 검색했다.

    “미쳤냐?”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제야 형우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뭐야.”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도착한 의재가 형우를 째려보고 있었다.

    “뭐긴 뭐야, 이제 네 친구도 못 알아보냐?”

    “…언제 왔어?”

    “방금. 문 열려 있더라. 그나저나 방금 중얼거리던 거 뭐냐? 친구랑 소설 중에 하나를 고른다…. 그거였던 것 같은데.”

    “헉.”

    “그게 그렇게 오래 고민할 문제냐?”

    “그, 그게….”

    형우가 시선을 데굴데굴 굴렸다. 옆에서 고덕호가 웃겨 죽겠다는 듯 배를 잡고 있었다.

    “영감님! 얘 온 거 알았죠!”

    “알았으니까 그런 문제 냈지, 아이고, 배야.”

    “너무해요!”

    “그 말은 내가 해야지, 자식아. 순식간에 소설보다 못한 놈이 됐는데.”

    의재가 혀를 쯧쯧 찼다.

    “친구 잘못 사귀었네.”

    의재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형우의 노트북을 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보다 열 배는 귀한 형우 노트북 님. 저는 미천한 형우의 친구 서의재라고 합니다.”

    “야, 야야.”

    “형우야 걱정 마. 만약 누가 네 노트북에 총을 쏘려고 하면 내가 대신 맞아 줄게.”

    미치겠네.

    한번 시동이 걸린 의재는 거의 5분이 넘도록 형우를 놀려댔다. 위대한 노트북이라며 ‘노트북교’를 창설하고 그 의식이라며 삼보일배를 한 후에야 그 놀림이 멎었다.

    “…그래서, 왜 왔냐고.”

    “아, 맞다. 전에 네가 부탁했던 거 있잖아. 시험 족보.”

    “아.”

    그제야 기억이 났다. 조만간 있을 중간고사를 대비해서 족보를 좀 구해 달라고 했다.

    “인마, 학교생활 열심히 한 형님이 있어서 다행이지?”

    “고맙다 의재야.”

    “그런데 너는 노트북이 더 중요하다고 하고… 하아, 인생 참 쓰다.”

    “야!”

    “됐다. 난 가련다.”

    그렇게 말하며 그대로 나가던 의재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노트북 님도 안녕히 계세요.”

    * * *

    “흐음….”

    달리는 차 안에서 형우는 의재가 전달해 준 족보들을 달달 외웠다.

    의재가 겉보기에는 좀 헤퍼 보이지만, 일단은 한국대학교의 학생이라는 건지 자료조사는 꽤나 철저했다.

    ‘한다은 교수님은 늘 비슷하고.’

    재작년에 냈던 문제는 [셰익스피어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허무’의 개념이 후대에 미친 소설적 영향을 기술하라.]와 관련된 세 개의 문제였고, 작년에 냈던 문제는 [20세기 남미 소설의 마술적 사실주의에 대해 기술하고, 당시의 시대상과 엮어 설명하라.]를 비롯한 네 문제였다. 형우는 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형우 : 올해는 아마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에서 문제 나올 듯?

    의재 : 뭐 나올 거 같냐?

    형우 : 왜 세르반테스가 현대 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가? 그런거 나오지 않을까?

    의재 : 올ㅋㅋ땡큐땡큐. 그나저나 천병옥 교수님 시험은 어떻게 하지? 임용된 거 올해가 처음이라 무슨 문제낼지 감도 안 잡히는데.

    형우 : 내가 물어봄ㅋㅋ

    의재 : 그 교수님 우리 대학에서 강의한 거 올해가 처음이잖아. 누구한테 물어보게?

    누구긴 누구야, 천병옥 교수를 잘 아는 사람들이지. 심지어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있었다. 형우는 그대로 자동차 앞좌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니, 귤 먹어요?”

    “하나만 까 주세요. 아, 형우 작가님은요?”

    “저는 됐어요.”

    운전을 하고 있는 건 학생 시절 천병옥의 애재자였던 지원이었고, 그런 지원의 입에 귤을 까서 넣어주고 있는 것은 천병옥의 딸인 천우희였다.

    “혹시 천병옥 교수님이 시험문제 어떤 식으로 내는지 아세요?”

    “응? 우리 아빠?”

    먼저 반응한 건 천우희였다.

    “으음… 잘 모르겠는데. 언니는 좀 알아요?”

    “알기야 알죠… 으윽.”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지원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천병옥 교수님은 무조건 문제를 딱 하나만 내세요.”

    “하나만요?”

    “시험기간은 세 시간이죠.”

    “…세 시간이나요?”

    “게다가 오픈북이에요.”

    “으헉.”

    형우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대학을 다닌 적 없는 천우희만이 그 묘한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야, 지금 둘이 뭐 잘못 말하고 있는 거 아냐? 문제는 많은 게 어려운 거고, 시간이 많으면 당연히 좋은 거고, 시험 중간에 책을 볼 수 있으면 더더더 쉽다는 뜻 아닌가?”

    “…그런 거라면 얼마나 좋겠어요.”

    한 문제를 세 시간 동안 풀라는 건, 교수가 생각하기에 그 문제가 세 시간짜리 문제라는 거다. 오픈북은 더 나쁘다. 책을 봐도 못 맞추는 문제라는 뜻이었으니까. 한숨을 푹 쉰 뒤에, 형우는 재차 물었다.

    “문제는 어때요? 나쁜 편인가요?”

    “난도는 높지만, 문제 자체는 좋았다고 생각해요.”

    나쁜 문제는 바닥이거나 하늘이다.

    너무 쉬워서 아무 의미도 없거나, 혹은 너무 어려워서 도전할 엄두조차 안 나게 만든다.

    의지 없는 교수는 노력하는 것이 귀찮아 바닥의 문제를 내고, 속이 좁은 교수는 자신의 우월감을 위해 하늘 같은 문제를 낸다.

    그렇다면 좋은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산山으로 비유할 수 있다. 어려워 보이지만, 충분히 노력한다면 풀어낼 수 있는 문제.

    다시 말하자면, 도전 욕구를 자극하는 문제다.

    “오래전이라 가물가물하긴 한데… 문제 하나가 기억나긴 하네요. 아마, 소설은 어떻게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가? 그런 질문이었을 거예요.”

    “…아이고.”

    문제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다은의 문제가 학술적이고 객관적이라면, 천병옥의 문제는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이다.

    “북극점 문제네요.”

    북극점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북극 자체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빙하이기 때문에. 북극점 문제도 이와 같다.

    ‘이게 정답이다’ 할 만한 건 없지만, 거기에 최대한 가까워질 수는 있다. 마침 천병옥의 수업은 40명의 대상으로 하는 상대평가. 그 많은 학생 중,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답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한 사람이 가장 많은 점수를 얻게 되는 식이다.

    “…어렵겠네요.”

    “그냥 대충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천우희가 끼어들었다.

    “정답이 없는 문제라며. 반대로 말하면 그냥 뭐라도 써도 점수가 나온다는 거 아냐?”

    “너무 막 쓰면 총에 맞고 졸업을 못 하겠죠.”

    “너 공부 좀 한다며? 한 학기쯤 설렁설렁한다고 총 맞을 정도로 성취가 떨어지진 않을 텐데.”

    “그래도 이왕이면 좋은 학점 받는 게 낫죠.”

    “…학점은 나중에 취업자리 알아볼 때 필요해서 따는 거 아냐? 너한테 그게 왜 필요해?”

    “그건….”

    처음에는 뭐라고 반박하려고 했는데,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기껏해야 학생이니까 본문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 말밖에 생각이 안 났다.

    “너 요즘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뭐든지 열심히 할 필요는 없잖아. 열심히 해야 하는 것만 열심히 하기에도 세상은 참 벅찬 법이다, 너.”

    “…우와.”

    생각지도 못한 사람한테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 형우는 좀 충격을 받았다.

    “와, 천우희 작가님. 지금 보니 완전 어른이시네요.”

    “뭐래. 난 원래 너보다 나이 많거든.”

    솔직히 지금까지 그렇게 느낀 적은 몇 번 없었다. 오히려 좀 사춘기 꼬마애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소설 관련된 일에만 유치해지시는 건가?”

    그 말에 천우희가 콧방귀를 흥, 뀌었다.

    “사돈 남 말 하고 있네. 너야말로 소설 이야기만 하면 성격 바뀌면서.”

    “으음, 그렇기는 하네요.”

    그 부분은 형우 스스로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평소의 형우가 ‘좋은 게 좋은거지’를 신조로 삼고 사는 낙천주의자에 가깝다면, 소설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현실주의자가 된다고 해야 하나.

    “페르소나라고 하기에는 좀 짙은 감이 있지. 너 그러다 이중인격자 된다.”

    그렇게 말하며, 천우희가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탱글탱글한 제주 감귤이었다.

    “이거나 먹어. 요즘 코피 자주 쏟는다며.”

    “아, 감사합니다.”

    “비타민 C가 코피에 좋대. 예전에 유럽에서 선원들이 통에 귤을 담아서 다녔다더라.”

    천우희는 턱을 치켜들며, 그렇게 자신의 지식을 자랑했다.

    “에이, 천우희 작가님. 그 시기에 유럽에 귤이 어딨었겠어요?”

    다행히 형우가 지적하기 전에, 지원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엑, 없어요?”

    “먹었어도 사과를 먹었겠죠! 그리고 비타민 C는 코피가 아니라 괴혈병에 좋은 거일걸요.”

    “아항.”

    “천우희 작가님은 다 좋은데 가끔 2% 정도 이상하게 알고 계시더라고요. 며칠 전에는 나폴레옹이 독일 사람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니까요!”

    “아악, 그건!”

    “알아요, 알아. 히틀러랑 착각한 거겠죠? 뒤에 나온 콧수염에 대한 묘사가 없었으면 몰랐겠지만! 제가 히틀러로 고쳐 놨기에 망정이지….”

    그렇게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사이, 자동차는 어느새 고속도로를 빠져나가 시내로 들어왔다.

    “으와아….”

    창밖을 보자마자 탄성이 자동으로 나왔다. 오른편에는 대들보와 기와로 지어진 으리으리한 한옥집이 보였고, 그 뒤로는 외관부터 화려해 보이는 거대한 현대식 건물이 자리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고급 호텔인 고려호텔. 오늘은 C&N은 이 식사 자리에 다섯 명의 작가를 초대했다.

    공모전의 특별심사위원들이었다.

    “…으리으리하네요.”

    “처음 보면 다들 그래요. 저도 대한민국에 이런 데도 다 있구나- 싶던걸요? 그래도 전 양반이죠. 천우희 작가님은 글쎄, 신발 벗고 들어갔다니까요?”

    “언니!”

    형우가 약간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신발을 양손에 들고 들어간 거예요?”

    “….”

    천우희는 대답하는 대신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술을 배쭉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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