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85화 (85/200)
  • #84

    …몇 시간 전. 한국대학교의 여학생 휴게실.

    딸칵, 딸칵, 딸칵.

    연수는 괜히 들고 있는 볼펜을 딸칵거렸다. 그럴 때마다 모형 참새가 위로 튀었다가 아래로 튀었다.

    “좀 조용히 좀 해요!”

    “앗, 죄송합니다.”

    “혼자만 쓰는 거야 뭐야….”

    연수는 바로 사과한 뒤에, 볼펜을 내려놨다. 참새가 책상 위를 데구르르, 굴렀다.

    그리고, 자신의 노트에 부딪혀 멈췄다.

    “…이걸 다 버리라는 거지.”

    <황태자는 왕국에서 살아간다>라고 적힌 노트.

    5년의 세월을 버티면서 그 끝이 많이 바랐다.

    “…휴우.”

    창밖으로, 삼삼오오 모여 하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라면 연수도 저 무리에 껴 있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생각할 것도 있었고, 뭔가를 생각하기엔 집보단 학교가 더 좋았다.

    ‘학교에는 침대가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연수는 자신의 설정집을 바라봤다. 만들어 놓은 스토리와 설정이 20P가 넘었다.

    ‘…그리고, 선배 말에 의하면 20P의 쓰레기지.’

    뭐, 형우가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뜻만 본다면 그게 그거다.

    “…에휴, 액션이라.”

    왜 나는 내기에 졌을까? 왜 선배는 로맨스를 버리라고 했을까? 왜 내 소설은 별로일까? 혹시 나한테는 재능이 없나? 어쩌면 형우 선배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액션은 어떻게 쓰는 거지?

    타다다닥-

    고민만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란 생각이 들어서, 일단 노트북을 두드렸다.

    가끔 사람의 청각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볼펜 딸칵거리는 소리는 엄청 신경쓰이는데, 그보다 몇 배는 시끄러운 노트북 자판소리는 그렇게 크게 언짢지 않으니.

    ‘주인공은 무술가로 설정하자. 내가 제일 잘 아는 건 역시 무술이니까.’

    질끈 묶은 머리가 어울리는 25세의 여자 무도가에 대한 설정이 손끝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칼이라면 모를까, 총 같은 게 있는 세계관이면 무술을 묘사하기가 힘들잖아. 그러니, 총이 희귀한 세계가 좋겠네.’

    멸망한 세계라는 설정이 덧붙었다. 멸망한 세계를 홀로 살아가는 무도가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아예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다.

    ‘…으윽.’

    주인공이 나아갈수록, 주인공이 강해질수록, 고등학교 때 부상 당했던 팔꿈치가 욱신거렸다. 사실 아픈 건 팔꿈치가 아니다. 기억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거다.

    ‘조금만 쉬었다 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집필을 멈췄다. 팔을 쓰다듬으며 멍하니 노트북을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위잉- 위잉-

    연수의 시야 구석에서 플라스틱 참새가 까딱거리다가, 사라졌다.

    “헛.”

    윗입술과 코 사이에 펜을 끼워 넣고 장난을 치다가 그만 떨어트린 것이다.

    “뭐야.”

    어느새 두 시간이 지났다.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멍 때리고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생각은 초코 마카롱과 딸기 마카롱 중 뭐가 더 맛있을까-

    생각이 완전히 딴 데로 샜다는 뜻이다.

    “…분위기도 잡아 본 놈이 잡는다는 건가.”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이 뭔가에 데였을 때는 막 하루 종일 바다 같은 거 쳐다보면서 철학적인 말 하고 눈물 흘리고 소리 지르고 하던데, 자신은 하루종일은 커녕 두 시간 만에 생각이 다른 데로 튀어 나갔다.

    “내 성격에 고민은 뭔 고민이야.”

    경험 많은 대학생은 한번 바닥난 집중력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마카롱이나 먹으러 가야지.”

    마음이 힘들 때, 처연한 분위기에서 슬픈 음악이나 듣는 것은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평소보다 약간 과한 정도의 탄수화물은 분명 도움이 된다. 그렇게 생각한 연수는, 그대로 학교 근처 단골 카페를 찾았다.

    <두유집>

    ‘…여긴 대체 왜 커피집이지.’

    상호명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고, 두유집의 음식 특징 때문이었다.

    두유집의 사장은 과자를 위해 프랑스에 유학까지 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진위 여부는 밝혀진 바가 없지만, 그런 소문이 돌 만큼 마카롱이 맛있기는 했다. 하지만 반대로 커피는 정말 맛이 없었다.

    ‘차라리 커피점 말고 과자집을 하지.’

    오죽하면 ‘두커바’라는 말까지 있었다.

    두유집에서 커피만 시켜 먹는 바보라는 뜻이다.

    그리고 연수의 눈앞에는, 그 흔치 않은 바보가 앉아 있었다.

    고롱- 고롱.

    커피에는 손도 안 댄 채로, 코까지 골면서 쇼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두커바는 연수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형우 선배?’

    연수는 깜짝 놀라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잠에 깊게 든 형우는 그녀를 알아채지 못했다.

    ‘휴우….’

    연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난생처음으로 두유집의 맛없는 커피에 대해 감사함을 느꼈다. 커피가 맛있었다면 형우는 커피를 마셨을 테고, 그러면 잠이 들지 않았을 테니까.

    같은 학과의 학생이니 언젠가는 마주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그 마음의 준비라는 것이 안 됐다. 그대로 카페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으음.”

    형우가 몸을 뒤척였다. 그 바람에 테이블 위에 놓였던 노트가 툭 하고 떨어졌다.

    분명 아이디어 노트일 것이다. 문창과 학생치고 저 노트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앗.”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지나가던 사람이 형우의 아이디어를 짓밟기 전에, 연수는 노트를 주워 들었다.

    어디 더러워진 곳은 없나 확인하던 연수의 시선이 노트 한가운데서 멈췄다.

    “이게 왜?”

    <황태자는 왕국에 살아간다> 분석.

    그렇게 쓰여 있었다.

    연수는 앉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 내용에 그대로 매몰되었다.

    [도입부는 깔끔함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포인트를 잃어버린 느낌. 프랑스 작가인 기욤 미소의 냄새가 느껴지지만, 딱 그 정도다.]

    귀신이다. 연수는 그렇게 중얼거릴 뻔했다.

    옆에 형우가 자고 있지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도입부를 기욤 미소의 작품에서 따온 걸 어떻게 알았을까?

    […캐릭터 설정에도 딱히 참신함이 없다. 특히 <해리포터>의 헤르미온느를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한 여자 주인공은 앞니가 크다는 것까지 헤르미온느같다. 충실하게 모방했지만, 또 그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캐릭터는 모방보다는 창조의 손길이 더 중요한 영역이다. 하지만 연수는 캐릭터마저 다른 작품에서 모티브를 따 왔다.

    [9화의 장면 전개는 나름 괜찮았으나, 여전히 너무 소심하게 썼다. 연회의 범인을 끝까지 숨기는 편이 좋았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11화의 두 번째 단락에서의 복선은 4화 뒤에 회수된다. 이런 소설적인 템포는 10년 전에 유행하던 소설의 템포다. 조금 더 빨라지는 편이.]

    [캐릭터의 움직임에 대한 시간설정이 섬세하다. 인간이 걷는 속도와 뛰는 속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다만, 로맨스 소설에서는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무시해야 하는데, 지나치게 집착한다. 이건 액션에 가까운…]

    형우의 아이디어 노트는 두껍고 줄이 많은 대학 노트다. 그 노트의 절반 이상을 사용해서 형우는 연수의 소설을 분석했다.

    [연수는 글을 쓰는 것도, 읽는 것도 좋아한다. 그 안에서 지식을 얻는 것도 뛰어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기 확신이 없다.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 창의력은 의미를 잃는다. 자신의 창의력을 끊임없이 의심하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것. 장점이 되어야 할 것이 도리어 재능을 죽여버리고 있다.]

    자신도 모르던 자신의 재능을 형우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말은 현수 선배나 교수님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건 소설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영역이다. 자신의 성격과 성향을 잘 알지 못하면 이런 결론은 도출할 수 없다.

    […차라리 한 번도 가 본적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보내는 건 어떨까?]

    그리고, 그 끝머리에서. 형우는 나름의 결론을 도출해 냈다. 그리고 그 뒤에 인장처럼, 두 개의 붉은 버짐 자국이 나 있다.

    코피를 흘린 자국이다.

    ‘…맙소사.’

    연수는 차근차근, 처음부터 형우의 노트 페이지 수를 셌다.

    총 50페이지였다.

    ‘…내 소설인데, 나보다 더 잘 알잖아.’

    노트를 쥔 손이 살짝 움찔했다. 직접 소설을 쓴 당사자였기에, 그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단순히 분량만 늘려 놓은 뻥튀기 평론 같은 게 아니다. 한자 한자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이다.

    ‘진짜 너무하네요, 선배.’

    이런 걸 봐 버리면, 자신의 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진다. 연수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형우를 바라봤다. 눈을 감고 있는 형우의 모습은 원래 나이보다 조금 더 들어 보였다. 햇빛을 안 보고 작업만 할 테니까, 당연한 일이다.

    ‘…난 정말로 노력했을까.’

    하나의 소설을 위해 5년간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그 시간 중에 진짜로 노력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 연수는 자신의 노트를 꺼냈다.

    30P에 달하는 <황태자는 왕국에 살아간다>의 설정집.

    어제까지만 해도 참 깊고, 방대하고, 반짝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참 볼품이 없어 보인다.

    캐릭터는 <해리포터>보다 조금 못하고, 문체는 기욤미소보다 조금 못하고, 시원함은 모 작가보다 조금 못하고, 전개는 아무개 작가보다 조금 못하다. 모난 곳도 없지만, 뭐 하나 특출나지도 않은.

    평범한 작품이다.

    그리고 평범함이란, 예술가에게는 그 어떤 말보다 더 치욕스러운 말 중 하나가 아닌가.

    “…나는 로맨스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구나.”

    만약 진심으로 로맨스를 좋아했다면, 저런 어중간한 작품은 결코 나오지 않았을 테다.

    ‘이걸 이제야 알았다니.’

    자신은 로맨스가 좋아 로맨스를 쓴 것이 아니다. 그저, 그 반대편에 있는 액션을 쓰고 싶지 않아 로맨스로 도망쳤을 뿐이다. 액션을 꿈꾸면, 무술을 생각하면, 5년 전에 잊었던 꿈이 다시 생각나니까 그게 무서워서.

    그런 이유로 가장 잘하는 것에 눈을 돌리고, 몸에 맞지도 않는 것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보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바보였네, 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형우의 얼굴을 봤다.

    평소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눈 감은 얼굴.

    지금까지 형우의 얼굴을 보면서 나이 들어 보인다고 생각한 것은 처음이다.

    ‘알았다.’

    눈을 감고 있어서 나이 들어 보이는 게 아니다. 그 반대였다. 눈을 떴을 때의 형우가 젊어 보이는 거다. 그는 종종 성인의 얼굴로, 소년 같은 행동을 한다. 꿈을 꿈으로 놔두지 않는다. 재능에 데이고,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고, 또 시작한다.

    ‘…선배,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던 연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질문이 틀려먹었다.

    형우의 노트에는 ‘연수가 할 수 있을까?’ 따위는 쓰여 있지 않았다. 그 대신,

    [연수라면 얼마나 걸릴까?]

    “글쎄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연수는 가방에서 펜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대로 형우의 노트에 펜을 쓱싹거렸다.

    “으음….”

    그 바람에 인기척이라도 느낀 건지, 형우가 몸을 뒤척거렸다.

    “흐앗!”

    연수는 재빨리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났다. 얼마나 놀랐는지, 펜을 챙기는 것도 잊었다.

    * * *

    그리고 그 참새 모양 볼펜은 알바생의 손을 통해 형우에게 전달되었다.

    “…설마.”

    잠깐 펜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형우는 혹시나 싶어 자신의 노트를 펼쳐 들었다.

    중간쯤에서 손이 뚝 멎었다.

    [연수라면 얼마나 걸릴까?] 라는 질문 아래, 노트 규격 따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당찬 필체로 휘갈겨 쓴 답변이 적혀 있었다.

    [당장!]

    평소라면 노트 줄을 지키지 않고 멋대로 쓴 글씨를 불편해했겠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선을 넘나드는 그 큼지막한 글씨가 얼마나 시원시원해 보이던지.

    * * *

    며칠 뒤, 한국대학교 본관.

    “선배.”

    하고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역시 연수였다.

    “제 소설 좀 읽어주실래요?”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라는 제목이었다. 연수의 얼굴을 보니, 아마 며칠간 고생을 하며 씨름한 티가 났다.

    형우는 천천히 소설을 읽었다.

    “어때. 새로운 장르를 써 보는 기분은?”

    질문을 들은 연수는 흐음, 하고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면 소설을 쓰는 것보다 마음을 다잡는 게 더 힘들었다. 만약 자신을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형우는 이해한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다크서클만 봐도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알겠네. 지금까지 쌓아 올린 걸 다 버리는 건, 솔직히 말해 쉬운 일은 아니지.”

    “그걸 아는 사람이 이런 걸 하라고 해요?”

    “쉽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라면 해야지. 그래서 소감은?”

    “으음.”

    연수는 예전에 보았던 한 작가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소설 쓰기란 어떤 활동이냐- 라는 질문에 그녀는 아마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소설 쓰기는 나에게 있어서 과거의 나를 대면하고 치료하기 위한 수단이다.’

    지난 며칠간, 소설을 쓰며 연수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소설을 쓰다 잠이 들 때면, 연수는 가끔 표정을 잃고 좌절해 있는 소녀를 마주했다.

    ‘여기가 텅 빈 것 같아요….’

    천천히 다가가서 그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소녀는 묻는다.

    ‘언젠가 이런 기분이 없어질까요?’

    ‘…아니, 없어지지 않을 거야.’

    연수는 대답한다.

    ‘계속해서 텅 비어 있겠지.’

    ‘그러면 어떡하죠? 너무 무서워요.’

    ‘연수야.’

    과거의 자신을 향해, 천천히 웃는다.

    ‘내 생각에, 아픈 것보다 더 나쁜 건 내가 아프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그게 뭔데요?’

    ‘도망치는 거지. 안 보이는 척하면서.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돼. 내 생각에, 가장 나쁜 건 그거인 것 같아.’

    ‘잘 모르겠는걸요.’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그렇게 말하며, 연수는 과거의 자신을 끌어안았다.

    ‘고생 많았어, 연수야. 이제는 도망치지 않아도 돼.’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눈을 깜빡이자- 그 앞에 형우의 모습이 보인다.

    슥슥- 삭삭-

    어느새 품안에서 펜을 꺼내들고 <멸망한 세계의 무도가>를 천천히 살펴보고 있다.

    “연수야, 혹시 C&N공모전에 이거 내 볼 생각 없어?”

    그렇게 말하는 형우의 펜 끝에서, 참새 한 마리가 앙증맞게 날개를 퍼덕인다.

    “넵!”

    그 모습을 보며, 연수는 기세 좋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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