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82화 (82/200)

#81

“예?”

형우의 직설적인 말에, 연수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하하, 약간 좀 부족하게 쓰긴 했어도 버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그, 그래. 다시 고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고쳐서 될 문제가 아니야.”

단순히 소설의 설정이니 전개니 어쩌고 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 내용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원론적인, 기술의 문제였다.

“네 필체는 로맨스 자체가 안 어울려. 그보다는 차라리 액션을 쓰는 건 어때?”

로맨스의 주제는 사랑을 중심으로 한 갈등이다. 하지만 연수의 구성에는 그런 부분이 잘 표현되지 않았다. 본인은 획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그저 진부할 뿐인 설정이랄까.

“차라리 그것보다는 오히려 소설 중반부에 한 번 나오는 기사들간의 결투 장면이 훨씬 흥미로웠어. 그러니 차라리 그 쪽으로 소설을 써 보면 어때?”

“그 쪽이라면, 액션이요?”

“고등학교 때까지 격투기 했잖아? 그래서 그런지 묘사 자체가 상당히 디테일하고 현실적이야. 사용하는 어휘도 그럴듯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넌 액션을 쓰는 게 맞아.”

“싫어요.”

연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쓴다면 무조건 로맨스에요.”

어쩌면 형우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 높은 확률로 맞겠지.

하지만 맞는 말이라고 해서, 모두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욱하는 마음에 일단은 우겨 봤다.

“…애초에 선배가 잘못 본 거 아니에요? 저는 제 소설에서 문제 못 찾았어요. 문장도, 전개도, 진행도 나쁘지 않았다고요!”

일단, 틀린 말은 아니다.

형우도 개별적인 요소에서는 딱히 엄청난 문제라는 것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기껏 해봐야 옳고 그르고의 영역이 아니라 호불호의 영역에 속해 있는 몇 가지 뉘앙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문제없음과 동의어는 아니다.

“좋은 요소만 섞어놓는다고 좋아지는 게 아냐. 나는 네 소설을 읽는 내내 로맨스에서는 딱히 매력을 못 느꼈거든.”

가끔 그런 스포츠팀이 있다. 한 명 한 명만 놓고 보면 적당히 괜찮은 멤버인데, 막상 모아놓으니 성적이 곤두박질치는 팀. 연수의 소설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액션은 확실하게 좋아.”

연수의 소설에서 액션씬은 단 한 번 나온다. 두 기사의 결투를 표현한 두 문단짜리 묘사. 솔직히 말하자면, 소설 전체의 매력보다 그 두 문단의 임팩트가 더 강했다.

뭐랄까, 이글스 시절 류현진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중간한 전개에서도 그 부분만큼은 유달리 눈에 띄었다.

“구도도 좋았고, 디테일한 묘사도 특별했어. 내 생각에 네 재능은 그쪽인 것 같다.”

연수가 고개를 저었다.

“…좋아하는 게 재능이에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연수의 말대로 세상이 굴러갔다면 지금보다 열 배는 행복했을 테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좋아하는 거랑 재능은 달라. 그렇게 치면 토토하는 사람은 죄다 스포츠 스타가 됐겠지.”

“비꼬는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선배는 로맨스 소설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잖아요. 기껏해야 <전설의 보안관>에서 주인공끼리 꽁냥거리는 장면 몇 개 넣은 게 전부죠!”

형우가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재능이 그쪽에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쓸 줄도 모르면서 왜 제 소설을 멋대로 평가해요?”

“네 말은 두 부분에서 틀렸어.”

형우는 어쩌면 연수의 주먹이 날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하나. 읽는 재능과 쓰는 재능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영역이야. 네 말대로라면 전국의 모든 편집자들과 평론가들은 실직자가 되어야 옳지.”

연수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도 문창과에서 수학했으니만큼, 평론과 편집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냥, 지금의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말하고 만 것이다. 가끔 사람들이 아주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둘째.”

당황하는 연수를 바라보며, 형우는 천천히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난 로맨스를 못 쓰지 않아. 확실하게 말하자면, 너보다는 잘 써.”

“‘잘 쓸걸’도 아니고 ‘잘 쓴다’라고요? 써본 적도 없으면서!”

“그게 맞는 표현이니까. 내기해도 좋아.”

“…내기요?”

“챌린지 리그에 로맨스 소설을 올리는 걸로 하지. 그 결과를 보고 결정하는 걸로. 내가 진다면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네가 무슨 글을 쓰든 상관하지 않겠어. 하지만 내가 이긴다면….”

형우가 그대로 연수의 컴퓨터를 가리켰다.

“로맨스 소설은 그만둬.”

형우의 굳은 표정에서 진심을 느낀 연수는 잠깐 생각한 뒤,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렸다.

“기간은 2주로 하죠. 어때요?”

“2주?”

형우가 되물었다. 당장 오늘 연재를 시작한다고 해도, 2주면 14화가 한계다. 그 사이에 로맨스를 구상하고, 연구하고, 집필을 시작한다? 절대 불가능했다. 사실상 억지를 부리는 것과 다름없다.

연수는 양심이 조금 쿡쿡 찔리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손가락을 두 개만 펼쳤다. 지금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래도 할 거예요? 그렇게 묻는 듯한 표정으로 연수가 입술을 비쭉거렸다.

“왜요? 너무 짧아요? 그러면 하지 말든가.”

“아니. 그 정도면 충분해.”

“뭐라고요?”

형우의 말을 들은 연수가 진심이냐는 듯이 되물었다.

“…말도 안 되는 내기에요, 선배. 분명 후회하게 될 거예요.”

“난 가능할 것 같은데.”

“잠깐, 잠깐만요.”

그제서야, 뭔가 생각났다는 듯 연수가 말을 끊었다.

“…혹시 속임수를 쓰려는 건 아니겠죠?”

“속임수? 조회수 조작 같은 거?”

“선배라면 절대 그런 짓은 안 하겠죠. 하지만, 다른 장르를 쓸 수는 있잖아요?”

“아, 로맨스인 척하면서 판타지나 헌터물을 써서 성적을 올릴지도 모른다, 그 뜻이야?”

“맞아요. 장르라는 건 어느 정도는 가져다 붙이기 나름이니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흥분한 것 치고는 꽤 괜찮은 지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지적이기도 했다.

“…좋아. 최소한 네 소설을 이겼다는 그 <후천성 설레임 증후군> 정도의 로맨스를 포함한 작품으로 쓰는 걸로 하지.”

“그걸 어떻게 평가하죠?”

“네 눈으로 직접 평가해. 이게 로맨스인지, 아닌지.”

“제가 평가하라고요?”

연수가 눈을 빙글빙글 돌렸다.

“혹시 선배, 이길 생각 없어요?”

“아니. 이길 생각 만땅인데.”

“그런데 이런 내기를 한다고요? 좋아요, 해요.”

연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2주 만에 성적을 내는 것부터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그 다음 조건은 그냥 말이 안 됐다.

로맨스 소설로서 <후천성 설레임 증후군> 정도의 완성도를 보유할 것.

지나치게 추상적인 조건이다. 최악의 경우에도 선배 소설보다 <후천성 설레임 증후군>이 내가 느끼기에는 더 로맨스같다! 그렇게 우기면 절대 패배할 일은 없다는 뜻이다.

애초에 승패를 결정하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는 이상, 말도 안 되는 내기나 마찬가지였다.

내기란 어느 한 쪽이 이길 가능성이 있을 때 성립하는 것이므로.

“그래. 말도 안 되는 내기기는 하지.”

형우도 연수의 말에 동의했다.

“네 말대로 내기란 건, 한 쪽이 이길 가능성이 있을 때 성립하는 거니까.”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해도 늦었어요. 2주 뒤에 보는 걸로...”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내기는 이미 끝났거든.”

그렇게 말한 형우는 주머니를 뒤져 스마트폰을 꺼내 연수에게 내밀었다.

“…이건?”

“미리 써 놓으면 안 된다는 조건은 없었잖아.”

연수의 말대로, 2주 사이에 소설의 순위를 끌어올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형우는 약간 꼼수를 부려 내기 전에 미리 소설을 써 놨다.

그렇게 달성한 소설의 순위는 9위. 11위인 연수의 소설보다 두 칸이나 높았다.

그렇게, 첫 번째 조건인 ‘2주 내로 자신의 소설보다 더 높은 순위의 로맨스 소설을 만들기’는 클리어했다. 그리고 다음은 두 번째.

“완성된 소설이 로맨스 소설로서 최소한 <후천성 설레임 증후군>만큼의 완성도를 보유하고 있을 것. 맞지?”

그 부분은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이 부분만큼은 절대로 우길 수 없으니까.

형우가 쓴 로맨스가 누가 와도 우길 수 없을 만큼 객관적으로 엄청 잘 쓴 로맨스 소설이라서가 아니다. 소설이란 참 오묘해서, 누군가는 중학교 2학년이 쉬는 시간에 쓴 소설이 <해리 포터>보다 나은 글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니.

그렇기에 형우가 선택한 것은, 추상을 논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간단한 논리 퀴즈였다.

우기고 우겨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설을 <후천성 설레임 증후군>의 아래로 놓더라도, 결코 그 아래에 놓을 수 없는 소설이 단 하나 있다.

“…바로 이 소설이지.”

형우가 2주 전부터 쓰기 시작한 첼린지리그 9위에 랭크된 로맨스 소설의 제목은 <후천성 설레임 증후군>이었다.

“네가 아무리 우긴다고 해도 <후천성 설레임 증후군>이 <후천성 설레임 증후군>보다 못하다고는 말 못하겠…”

우당탕!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에, 형우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연수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선배, 진짜 너무해요.”

그대로, 연수는 그대로 창작실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형우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수가 넘어트린 의자를 정리했다.

“…너무하다라.”

그 말대로다.

소설을 버리라고 한 것도 모자라서, 삼류 연극 비슷한 것까지 해 가며 상대를 속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개 같은 짓이기는 했다. 애초에 일을 계획할 때부터 한 대 맞을 각오 정도는 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방금 한 말은 자신이 개새끼가 되더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연수가 뛰쳐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형우는 그대로 휴대폰을 들어 올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 *

<황태자는 왕국에서 살아간다>

연재 횟수, 18회.

구상 기간은-

‘5년.’

자신의 소설을 몇 번이나 읽었지만, 연수는 문제점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갈고닦은 문장 실력은 확실하다.

디테일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 좀 별로지 않아? 전개 너무 확확 아니야? 같은, 비판할 부분은 딱히 없었다.

물론, 구상만 했지 로맨스 소설을 직접 쓴 적은 처음이다. 하지만,

본 건 많다. 수많은 로맨스를 읽고, 수많은 순문학을 읽고.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게 분하고 억울하고 또 뒤처질까 무서워서 읽고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독서량만 보면 한국대학교 문창과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

남은 두 손가락이 천재로 유명한 조현수와, 책에 미친 사람으로 유명한 김형우다. 그보다는 약간 못했지만, 아주 엄청 못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과 견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다.

그래서 목표도 작게 잡았다.

‘내가 쓰고 싶은 글 쓰면서 즐겁게 살기.’

플랫폼 소설 1위나, 가장 주목받는 젊은 평론가 1위 같은 거창한 타이틀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 건 천재나, 미친 사람이 받는 거니까. 그래서 한 칸 낮췄다.

그리고, 소박한 목표를 향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챌린지 리그에서 적당한 순위를 기록했을 때는, 꿈에 다가간 듯해서 기뻤다.

<주홍빛 연애>에 졌을 때는 조금 슬펐지만, 그러려니 했다. 자신은 초짜였으니까, 로맨스를 더 오래 좋아해 온 누군가에게 지는 건 당연하다고 여겼다.

다음에 안 지면 되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또 져버렸다.

<후천성 설레임 증후군.>

제목부터가 무슨 10년 전 인터넷 소설 같은 이 작품은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치고 올라와서는 그 속도감 그대로 자신을 밀어냈다. 이번에는 저번에 졌을 때처럼 ‘이 사람 로맨스 엄청 오래 공부한 사람이네.’같은 변명도 못 했다.

로맨스를 처음 써 보는 형우의 작품이었으니까.

“문장도 내가 더 낫고, 전개도 내가 더 나은데.”

그런데 졌다. 왜? 독자들 눈이 다 옹이구멍이라서?

그럴 리가 없다.

“…에휴.”

작가가 독자 수준을 운운하는 순간, 그 사람은 작가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교수님이 그러셨지.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는가. 진 건 진 거다. 형우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로맨스에 소질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마치 공략을 열심히 익힌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하는 것처럼,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 느낌이었다.“지금까지 난 뭘 한 거지.”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을 때, 갑자기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 현수 선배?”

“응.”

한국대학교 문창과의 최고 인기인이자, 과탑인 조현수였다.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근데 왜 울어?”

현수의 지적에, 연수는 후다닥 눈가를 문질렀다.

“울기는 누가 울어요. 그냥 눈에 먼지 좀 들어가서.”

“오늘 미세먼지 없던데.”

“…흙먼지라도 날렸나 보죠.”

“여기 잔디 구장이잖아. 흙이 어디 있어?”

“이익, 그러려니 해요.”

“알잖아, 나 그런 거 잘 못하는 거.”

현수가 연수의 옆에 턱, 걸터앉았다. 연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배 학교 잘 안 나오잖아요.”

“마침 오늘이 오는 날이어서.”

“그러다가 우연히 절 봤고요?”

“맞아. 어쩌면 우연히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참 편리한 우연이네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연수는 천천히 창작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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