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81화 (81/200)

#80

“후우.”

학생들의 놀림 탓에 멘탈이 너덜너덜해진 형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의재 선배가 학교 안 온 게 천만다행이네요. 의재 선배까지 있었으면 진짜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났을 텐데.”

“그건 그래.”

연수의 말에 형우가 맞장구쳤다.

요즘 녀석은 만화가로 이름을 올린 게 인정되어, 형우와 마찬가지로 선취업 후학점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녀석이 최고 수혜자였다. 학교를 일주일에 한 번도 안 나왔으니.

“걔는 늘 수업 많을 때만 튀더라. 진짜 학교 날로 먹는다니까.”

“…그러는 선배도 일주일에 학교 두 번 겨우 오잖아요. 저는 네 번 온다고요.”

“어허, 고등학교 내내 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대학 타이틀인데. 그렇게 말하면 쓰나.”

“…내가 고등학교 때 왜 그랬지. 미쳤었나 봐.”

방금 교수가 열변을 토했던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라캉이 지적했듯,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모순은 인간의 욕망이 불확정성을 띤다는 것’이다.

원자의 위치를 특정하면 질량을 특정할 수 없어지고, 질량을 특정하면 위치를 특정할 수 없어진다는, 하이젤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말하는 것이 맞다.

‘직장에 다니고 싶어 직장에 온 직장인은 그 순간 직장이 싫어지고, 학교에 다니고 싶어 학교에 온 학생은 그 순간 학교가 싫어진다는 거지.’

다행히 형우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라캉은 다행히, 인간이 자신의 불확정한 욕망에 좌절하지 않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적어 놨다.

그러니까- 어떤 목표도 인간을 진정으로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허탈감에 취하기 전에 재빨리 다른 목표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연수 네 목표에 대해 이야기를 잠깐 나눠 보자는 거야.”

그 목표란 당연히, 연수가 지금 쓰고 있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황태자는 황국에 살아간다>를 말하는 거였다. 연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직 배고픈걸요.”

연수는 마치 2002년의 히딩크 감독처럼 주먹을 부르르 쥐었다.

히딩크가 말한 ‘나는 아직 배고프다.’가 월드컵에 대한 욕심을 말한 비유법이었다면, 서연수의 ‘나는 아직 배고프다.’는 직설적이고 미니멀리즘하며, 다른 방식으로 전혀 해석될 수 없는 강렬한 어조를 담고 있었다.

“오늘은 기분은 일본이에요. 연어초밥 어때요?”

그러니까, 진짜로 배고팠다는 뜻이다.

형우가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다음 수업 있잖아?”

형우와 연수가 오늘 듣는 수업은 총 세 개.

방금 들은 <정신분석학개론>과, 천병옥 교수가 하는 <현대철학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다은 교수님의 <소설창작론>이다.

심지어 <현대철학론>과 <소설창작론>은 전공과목이다. 문창과 학생들 모두가 보자마자 ‘이게 뭐야?’라며 욕설을 내뱉었던, 빈칸 없는 빡빡한 커리큘럼.

성실함 빼면 시체인 형우조차도 선취업 후학점 제도를 이용해 그냥 빼 버릴까 몇 번이나 고민했던 극악의 시간표였다.

“15분 만에 연어 초밥을 어떻게 먹어?”

“3시간 15분이거든요. 오늘 휴강이잖아요.”

연수가 휴대폰을 뒤져 공지를 보여줬다.

제목은, [금일 수업 휴강 알림]이었다.

보낸 사람은 교수 천병옥이었다.

[중요한 학회가 있어 금주의 <현대철학론> 수업을 부득이하게 휴강합니다.]

거기까지만 있으면 으랴아-! 하고 비명이라도 질렀을 텐데.

[금주의 수업내용 PPT를 미리 올립니다. 교재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며,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참고하여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의 평범성의 연구 사례’라는 제목으로 A4용지 10장 분량의 감상평을 제출하십시오. 점수는 10점이며, 기말 성적에 반영됩니다.]

‘…A4용지 10장?’

다른 교수는 그만한 분량의 글을 ‘감상평’이 아니라 ‘레포트’라고 부를 텐데.

“미쳤네.”

파렴치한 공지에 대한 형우의 감상평이었다.

* * *

세 시간의 공강은 길었다.

밥을 먹어도 두 시간이 남아 있을 정도.

“창작실 오랜만에 가 보네.”

“여기는 대체 왜 엘리베이터를 안 만들어 줄까요? 우리 등록금 가져가서 어디에 쓰는지 몰라.”

“…행정실이 이 근처에 있잖아. 목소리 좀 줄여.”

연수와 형우는 투닥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그들이 가는 곳은 문예창작과 학생을 위한 창작실이다.

“선배, 그거 알아요? 컴퓨터 공학과 창작실에는 최신형 컴퓨터 있대요.”

“…최신형?”

“3000대 지포스에, 최소 i7급에 i9까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형우는 완전 컴맹은 아니었지만, 연수처럼 컴퓨터 견적을 줄줄 외울 정도로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연수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시대가 어느 땐데 컴퓨터 견적 정도는 볼 줄 알아야죠! 선배, 윈도우는 깔 줄 알아요?”

“깔려 있는 걸로 사면 되잖아.”

“아이고.”

형우가 아는 연수의 취미는 두 개였다.

하나는 방금 알게 된 맛집 탐방이고, 두 번째가 바로 컴퓨터 조립이다.

“컴퓨터 부품이란 게, 무조건 비싼 거 섞는다고 좋아지는 게 아니거든요? 음식도 막 비싼 재료만 집어넣는다고 좋아지는 게 아니듯이….”

연수가 신나서 설명했다. 컴퓨터 조립이라는 게 직업이나 작업이 아니라 ‘취미’의 영역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을 형우는 연수를 보고 처음 알았다.

“…그렇게 좋아하면 동호회라도 들지 그래?”

“그럴까 했는데, 관뒀어요.”

“왜?”

“제가 말 안 했던가요?”

연수는 예전 컴퓨터 매장에서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그래픽카드 새로 나왔다기에 견적 보러 갔는데, 갑자기 처음 보는 남자 하나가 말을 걸더라고요? 부품 이야기하면서.”

아마 제 딴에는 연수를 위해 꿀팁과 노하우를 전수해 주기 위해서 온 것이겠지만.

“…그런데 좀 안 씻은 냄새가 난다고 해야 하나. 뭐라 말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냥 후다닥 도망쳐 왔죠, 뭐.”

과연, 그 사람 입장에서는 순수한 의도였을지도 모르나, 받는 쪽에서 본다면 별로 기분 좋을 만한 풍경은 아니다. 형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형우도 요즘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몇몇 생기면서, 가끔 곤혹스러운 일을 겪을 때가 있었다.

“그날 카페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훈수 두고 갔어.”

“훈수요?”

“응. 카페 단골 같았는데, 내가 소설가라는 걸 알았나 봐. 그러다가 어느 날 와서는 소설 그렇게 쓰면 안 된다느니, 내 소설이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느니,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정말 제대로 된 소설을 쓰고 싶으면 자기가 알려 줄 테니까, 같이 밥 먹자고도 했어.”

“우와, 어떻게 했어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내가 내 글은 내가 쓰겠다고 하니까, 나보고 차별주의자라더라. 뭔 포비아라고도 하던데.”

그 내용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그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아찔했다.

“커피가 식기도 전에 카페를 나왔지 뭐야.”

그때 이후로 그 카페는 근처에도 안 갔다.

형우는 그 사람에게 ‘스타박스 관우’라는 별명을 붙여 줬다. 삼국지의 관우가 술이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따 왔듯, 스타박스 관우는 커피가 식기도 전에 형우를 카페에서 쫓아냈으니 말이다.

“지금 시대에 가장 안 맞는 속담의 순위를 매긴다면 1등은 분명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겠지?”

“2등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요.”

연수가 맞장구쳤다. 하기야, 요즘 세상에는 둘 모두 평범하게 실례가 되는 이야기고, 심각하게 되면 경찰과 삼자대면을 할 수도 있는 안건들이다.

“…그리고, 그 둘 다에 해당하는 인간이 저기 내려오는군요.”

계단 위쪽을 바라보던 연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형우도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연수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공태준.

“….”

눈이 마주치자마자 0.5초만에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계단의 폭은 넓었다.

공태준은 아래로, 형우와 연수는 위로.

셋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제 갈길을 갔다.

“후하, 저 인간이랑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공태준이 내려가는 걸 몇 번이고 확인한 후에야 연수가 이야기를 꺼냈다.

“재수 없을려나 봐. 여기에 왜 있대요?”

“…뭐.”

형우가 살짝 운을 뗐다.

“창작실이라도 들렀나 보지.”

“언제부터 공부 그렇게 열심히 했다고? 차라리 안 왔으면 좋겠네.”

“…공태준이 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학생인데. 창작실 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선배, 정론이 꼭 정답은 아니거든요?”

연수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형우가 공태준을 싫어한다면, 연수는 공태준을 거의 혐오했다.

공태준의 팔과 바퀴벌레 중 하나를 만져야 한다면 연수는 차라리 눈을 꼭 감고 바퀴벌레를 만질 테였다.

“바퀴벌레는 적어도, ‘연수가 나한테 관심 있나 봐. 내 손을 막 만지던데?’ 같은 이야기는 안 하고 다닐 테니까요.”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손을 만지긴 누가 손을 만졌다는 건지! 저는 그냥 제가 수저통에 제일 가까우니까 숟가락 돌린 것밖에 없는데!”

음, 몇 번을 생각해도 역시 공태준은 개새끼가 맞았다. 그렇게 육두문자 퍼레이드를 펼치다 보니, 어느새 둘은 창작실 앞에 도착했다.

“으윽, 노트북 가져올걸.”

본체 부팅속도를 보며 연수가 눈을 까뒤집고 시체 흉내를 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잖아.”

“선배, 저는 부팅이 30초 안에 안 되면 죽는 병이 있답니다.”

“인내심 있는 말 좀 하렴.”

“으어억.”

2분 14초 만에 컴퓨터가 켜졌다.

이 디테일한 시간은 모두 연수 덕분이었다.

“컴퓨터 공학과에는 최신형 컴퓨터 달아주고, 왜 저희는 한글파일만 겨우 돌아가는 똥컴이냐고요! 항의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부팅시간을 직접 휴대폰으로 잰 것이다.

업데이트도 없고, 로딩 도중 충돌도 없었다.

그런데도 2분이 넘게 걸렸다.

“이 정도면요, 조선컴을 넘어서 고려컴이에요.”

“…조선컴이라.”

그 말, 언제부턴가 안 썼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형우는 그대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컴퓨터 견적은 잘 모르겠고, 키보드는 좀 바꿨으면 좋겠네.”

형우가 유일하게 예민한 컴퓨터 부품이 있다면, 그건 키보드였다.

“키감(키보드 감도)이 왜 이래?”

자세히 보니 제품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키보드가 아니라 거의 곰팡이 배양 중인 페니실린 접시로군.”

창작실 벽에 분명 ‘창작실 취식 금지’라는 공지 사항이 붙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키보드 사이사이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떨어져 있었고, 몇몇 버튼은 음료수라도 흘린 건지 버튼 자체가 먹지를 않았다.

“…이건 진짜 건의를 좀 해야겠는데.”

대학생 1인 1노트북 시대라 창작실 컴퓨터를 쓰는 사람이 많이 없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부턴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노트북을 들고 등하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형우는 아쉬운 대로 컴퓨터를 켰다.

똥 같은 컴퓨터였지만, 다행히 인터넷 정도는 연결되어 있었다.

“연수 너, 요즘 소설은 어떻게 돼 가?”

“아, 그거요.”

방금까지 밝았던 연수의 표정이 비단 어두워졌다.

“이번에 승급 잘 안 됐어요. 히힛.”

연수가 쓴 <황태자는 왕국에서 살아간다>는 결국 다른 작품에 밀려 승급하지 못했다.

“<주홍빛 연애>한테만 졌으면 어떻게든 올라갔을 텐데, 글쎄. 이번에 새롭게 올라온 <후천성 설렘증후군>이라는 작품이 순식간에 치고 올라간 거 있죠? 그래도 뭐, 다음에 올라가면 되니까….”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 연수의 속은 별로 좋지 않았다.

누군가 장작을 던져놓고 화르륵, 불태우는 것만 같다.

“연수 너, 솔직히 안 괜찮지?”

갑자기 들어온 형우의 질문.

연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요. 조금 쓰리기는 한데….”

“조금이 아니겠지. 솔직히 네 작품이 저 두 작품보다 좋다고 생각하잖아. 5년이나 연구했으니까.”

“그런 생각은…….”

“했겠지, 분명히.”

갑자기 들어온 형우의 말에 연수는 조금 당황했다.

“그래서, 너한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 하나는 매운맛이고, 하나는 순한 맛이야. 골라 봐.”

“에이. 어른이 누가 순한 맛 먹어요?”

태연한 척, 괜찮은 척 연기하지만.

연수는 연기자가 아니다. 몸까지 속일 수는 없다.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그러면 솔직히 말할게.”

형우가 단호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시작했다면 단호한 편이 좋다.

“네 소설, 버리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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