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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을 쓰겟다-80화 (80/200)
  • #79

    같은 시간.

    한 남자가 긴장한 표정으로 C&N이 위치한 태성빌딩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진짜, 요즘 것들은.”

    C&N 장르소설부의 편집장인 공판석. 그는 천천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종합출판사인 C&N은 편의시설로 채워진 1층과 2층을 제외한 태성빌딩의 모든 층을 사옥으로 이용하고 있다.

    3층과 4층에서는 만화와 소설 등의 장르를 주로 다루고, 5층에서는 순수문학을 취급한다. 6층에서는 해외 번역본에 대한 업무를 주로 맡고, 7층에는 대회의실과 기타 행정부서가 위치한다.

    그리고, 공판석이 지금 가려는 것은 그보다 한칸 위인 8층이었다.

    “…더럽게 높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땡, 8층입니다.

    “…계십니까, 부회장님.”

    “들어오세요.”

    반응은 바로 나왔다.

    “들어가겠습니다.”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 뒤, 판석은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돈어른.”

    C&N의 부회장, 윤정식은 그렇게 말하며 공판석에게 손짓했다.

    “뭘 그렇게 차려입고 오셨습니까.”

    “하하, 예의는 지켜야지요.”

    공판석은 오늘 윤정식과의 만남을 위해 집에서 가장 좋은 양복을 쫙 빼입고 왔다.

    그에 비하자면, 윤정식은 대충 헐렁한 면티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사람들을 붙잡고 누가 더 높은 지위의 회사원처럼 보이냐고 물어본다면, 십중팔구는 공판석을 고를 것이다.

    적어도, 그 표정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여유로워 보이는 윤정식과는 반대로, 공판석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갑을관계라는 것을 완벽하게 표상화한 듯한 모습이었다.

    “제가 이래서 사돈어른을 좋아한다니까요. 선을 잘 지키잖아.”

    “치, 칭찬 감사합니다.”

    “매형도 딱 그랬었는데. 아쉽게 됐죠.”

    윤정식이 말하는 매형은 공판석의 동생인 공재윤을 뜻했다. 판석의 동생인 재윤은 젊은 나이에 소설과 평론으로 2단 등단을 성공한,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작가였다. 판석은 요즘도 가끔 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형, 나 결혼할까 봐.”

    “결혼? 누구랑?”

    “…형이 지금 읽는 만화책 만든 출판사.”

    “멍청한 말 마. 이거 C&N에서 나온 거다. 네가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C&N이….”

    “3년 전에 출판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한 전도유망하고 내실 튼튼한 출판사지. 직원 수는 32명이고, 오너는 윤태형 회장님이야.”

    “…잘 안다?”

    “관련된 사람한테 직접 들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새로운 간판 작가를 필요로 하고 있지. 정아야, 들어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방문이 열렸다.

    앳된 미모의 여성이 그 사이로 고개를 갸웃, 내밀었다.

    “윤정아예요.”

    윤태형의 장녀이자, 지금 공판석과 이야기하고 있는 윤정식의 누나였다.

    이 결혼은 많은 것을 만들어냈다. 새로운 프랜차이즈 작가를 얻은 C&N은 공재윤의 작품을 기반 삼아 공격적으로 세를 확장해나갔고, C&N과 연을 만든 공판석은 출판업계에 들어와 인맥빨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그게 벌써 30년 전의 이야기다.

    “우리가 어떻게 연을 만든 지도 벌써 30년이네요. 세월 참 빠릅니다, 사돈어른.”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30년 전, 중학생이었던 윤정식은 어느새 훌쩍 자라 거대해진 C&N을 이끄는 부회장이 됐다.

    넘볼 수 없는 격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위압감을 느끼며, 공판석은 자꾸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고개를 가까스로 잡아냈다.

    “사사로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 본론으로 좀 넘어가 볼까요.”

    “그렇게 하시죠.”

    그렇게 말을 마쳤더니, 윤정식의 표정이 매서웠다.

    “…부회장님.”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공판석이 재빨리 뒷말을 붙이고 나서야, 윤정식은 마음에 든다는 듯이 씩 웃었다.

    권위적인 게 아니다, 권위를 부리고 있는 거다.

    권위적인 사람은 꼰대가 되지만, 권위를 부리는 사람은 카리스마 있는 리더라고 불리우는 법이다.

    “넵, 사돈어른. 혹시 공태준이라고, 기억하세요? 저희 누나 아들 말이에요.”

    “기억합니다.”

    “최근에 본 적 있어요?”

    조카라는 말 대신 ‘누나 아들’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쓰는 것만 봐도, 윤정식이 공태준을 얼마나 탐탁지 않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공판석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작년 추석 때 마지막으로 봤습니다.”

    “추석 때 가족 만나는 거 좋죠, 부럽네요. 저도 누나 아들은 여간해서는 추석 때만 만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저번 주에 만나고 말았네요.”

    가벼운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코 가벼운 주제는 아니었다.

    “…태준이, 어릴 때는 참 애가 똘망똘망 귀여웠는데. 덩치가 커지니까 아주 사고만 치고 다니는 모양이에요.”

    “사고… 말입니까?”

    “얼마 전에는 학교에서 코딱지만 한 공모전을 한다기에 작가를 세 명이나 소개해 줬는데 그대로 낙선하고, 이번에는 순문학에서 안 되니까 장르문학이라도 쓰겠다는 건지. 작가들을 좀 소개시켜 달라고 그러더군요. 참, 배알도 없지.”

    솔직히 말해서, 윤정식은 자신의 조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바라는 건 많고 능력은 없는 허접. 그것이 공태준에 대한 윤정식의 평가였다.

    “욕심이 크면 능력을 그만큼 키우던지, 능력이 안 되면 욕심을 줄이던지. 우리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 애들은 참. 그런 사리 분별이 안 되나?

    케이크에서 체리만 쏙 집어 먹으려는 꼴을 보고 있으면 여간 한심한 게 아니라니까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부회장님.”

    한발 늦게 ‘부회장님’을 붙이는 공판석을 보며, 윤정식이 우습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누나가 그렇게 부탁을 하는데. 들어주기는 해야죠.”

    “작가들을 몇 명 추려서 소개해주면 될까요?”

    “아니아니, 작가들은 이미 저번 주에 만나게 했고.”

    “그걸 부회장님이 직접이요?”

    “어쩌겠습니까. 누나가 그 난리를 피우는데 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좋든 싫든 가족이고 최다 주주 중 한 명인데요. 둘 중 뭐가 먼저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것 좀 받아요.”

    윤정식은 그대로 서랍에서 종이 한 뭉텅이를 꺼내 공판석에게 휙 집어던졌다.

    “이게 제 대단하신 조카님이 쓰신 작품인데, 이번에 편집부에서 공모전 한다면서요? 거기에 좀 넣읍시다.”

    “…부탁은 알겠지만.”

    공판석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작년에도 공모전 성적이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번 행사까지 논란이 터지면….”

    “그렇지요. 타당한 지적이에요, 사돈. 공모전에 논란이 생기면 안 되는 거지요. 그래서 말인데… 편집부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을 합니까?”

    “예?”

    “글은 작가가 쓰잖습니까. 편집부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월급을 받아 가냐 그 말이죠.”

    “그야, 작가가 쓴 작품을 더 좋게… 아.”

    그제야 공판석은 윤정식의 말뜻을 이해했다.

    덮어놓고 1등으로 만들라는 뜻이 아니라, 미달이면 알아서 고쳐서 1등에 어올리는 작품으로 만들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하면 절차적으로 걸리는 것도 없고요. 출판사 손해도 없겠죠. 안 그렇습니까?”

    “그,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공판석은 재빠르게 손을 내저으며 말을 받았다. 눈치 없는 짓은 한 번이면 족했다.

    “…사돈도 바쁘실 텐데 제가 시간을 너무 잡았군요. 이제 그만 나가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고개를 살짝 숙인 후, 공판석은 뒷걸음질로 CEO실 문 바깥까지 나왔다.

    “휴우!”

    자기도 모르게 목을 쓰다듬었다. 흔히 회사에서 잘리는 걸 ‘모가지가 날아간다’라고 하는데, 공판석은 그 말이 진짜처럼 느껴졌다.

    공판석의 힘이란 C&N을 지배하는 윤가와의 인연이고, 윤정식에게 밉보이는 순간 정말로 자신의 30년은 그대로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

    “…공재윤.”

    만약 그 똘망한 동생이 살아있었더라면, 이 정도로 가시밭길은 아니었을 텐데.

    판석은 참으로 오랜만에, 15년 전 제멋대로 죽어버린 동생이 보고 싶어졌다.

    * * *

    “…스탯창.”

    한창 머릿속으로 헌터물을 구상하던 형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만약 여기가 헌터의 세계였다면, 형우의 눈앞에는 분명 그럴듯한 스탯창이 떠올랐을 것이다.

    <아이언 타이거>에 나오는 식으로 표현하자면….

    ─=─=─=─=─=─=─=─=─=─=─

    <인물 정보>

    이름 : 김형우

    직업 : 작가

    전용 특성 : 밤새우기, 수업 시간에 소설 구상하기.

    전용 스킬 : [소설 작법 Lv.5], [멍때리기 Lv.2], [김칫국 마시기 Lv.6], [테이밍 Lv.1]

    종합 능력치 : [체력 Lv.5], [지력 Lv.6], [민첩 Lv.3], [마력 Lv.1]

    칭호 : [미사역 드루이드], [참새치], […학생. 방금 ‘스탯창’이라고 말한 건가?]

    ─=─=─=─=─=─=─=─=─=─=─

    “…허억!”

    멍하니 있던 형우는 자신도 모르게 정신을 퍼뜩 차렸다.

    스탯창 대신 형우의 눈앞에 다가온 것은, 아주 이상한 표정으로 형우를 내려다보는 교양 교수님의 얼굴이었다.

    ‘…맞다, 수업 시간이었지.’

    지금은 <정신분석학개론>이라는 교양 시간이었다.

    “스탯창, 스탯창이라.”

    교수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형우는 뭔가 잘못 걸렸다는 걸 깨달았다.

    학생들이 보기에 교수라는 존재는 언제나 약간 4차원으로 보이는 감이 있지만, 그 선입견을 제하더라도 <정신분석학개론>을 가르치는 이 교수님은 담당 과목명과는 영 딴판으로 정신상태의 분석이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 유명한 악명 높은 16차원 교수님이었다.

    “…자네 이름이랑 학과가 뭐지?”

    “무, 문창과 4학년 김형우입니다!”

    “오호, 문창과라….”

    교수가 재미있다는 듯, 형우를 바라봤다.

    “스탯창이라. 어제 게임이라도 하다 늦게 잔 모양이지?”

    “…그게 말입니다.”

    “아니지, 아냐. 그럴 리 없지. 나도 예전엔 <디아블로> 같은 걸 해봤는데, 입으로 ‘스탯창’하고 외칠 일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이지.”

    이 교수님의 진짜 무서운 점은, 이런 질문이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한 학생을 꼽주기 위한 게 아니라, 진짜로 순수한 궁금증으로 나온 학구적인 질문이라는 점이다.

    교수의 자문자답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면 혹시 꿈이라도 꾼 겐가? 자네가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악마들을 물리치는 그런 꿈?”

    “아.”

    “아니면 작가라 그런가? 다른 문창과 학생 있으면 손 좀 들어보게.”

    옆에서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린 것은, 형우의 친한 후배인 연수였다.

    “문창과 서연수입니다!”

    “좋네, 연수 학생. 연수 학생도 가끔 허공에 대고 ‘스탯창’이라고 외치나?”

    “그런 적이 있기는 합니다!”

    역시, 학우는 학우가 챙긴다고. 자신을 커버쳐주려는 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요!”

    와하하-! 하고 강의실 전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형우는 자신의 후배 대한 열렬한 살의를 느꼈다.

    “한창 게임에 빠져 있을 때였는데, 주변 친구들이 유치하다고 놀려서 그만뒀습니다.”

    형우는 마치 술 마시고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미사역 드루이드]에 이어, [한국대 스탯남]이라는 별명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와하하하하-! 웃음으로 꽉 찬 강의실에서 웃지 않는 것은 딱 두 명. 형우와 교수뿐이었다. 형우의 표정은 말 그대로 죽상이었고,

    “흐음….”

    교수의 표정은 새로 나온 논문이라도 보는 듯이 아주 흥미로웠다.

    “누군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하던 걸 저 친구는 대학교 4학년 때 한다는 건가. 인생이라는 척도로 보자면 그렇게 큰 차이도 아니지. 게다가 예술이란 인생보다도 길다고 하는 법이니… 예술가란 본디 그런 법이라고 내가 이해하는 게 맞겠지. 예술가와 일반인의 정신적 차이라. 다음 논문 주제는 이걸로 할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뚜벅뚜벅 다시 연단 앞으로 걸어간 교수는,

    “정신분석학을 만든 것은 프로이트지만, 그것을 학문으로 심화 발전시킨 사람은 융과 라캉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수업을 재개했다.

    “이게….”

    뭐야, 하고 중얼거리려다가 또 교수가 와서 ‘이번에도 또 혼잣말인가? 역시 예술가로군’이라고 할까 무서워 참았다.

    긁적,

    대신 머리를 벅벅 긁으려다가, ‘아까는 멍을 때리고 이번엔 머리를 감싸 쥐는군. 로뎅의 작품을 몸으로 표현하려는 겐가? 역시 예술가로군’이라고 할까 또 무서워 참았다.

    그렇게 가시방석 위에 앉은 듯 멍하니 있다가, 겨우겨우 수업이 끝났다.

    “스탯창.”

    수업이 끝나자마자, 연수가 와서 대뜸 시비를 걸었다.

    “죽인다!”

    “꺄앗! 무서워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연수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형우의 서툰 주먹질을 슉슉 피했다.

    …요즘 나름 운동한다고 홈트레이닝도 열심히 했는데, 전직 체육인에게는 상대가 안 됐다.

    잠시 후, 형우가 씩씩거리며 물었다.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냐?”

    “잘못은 안 했죠.”

    “그런데 나한테 왜 그래…?”

    “어쩌면 수업 시간에 집중 안 하고 딴짓이나 했다며 미운털 박힐 수도 있었잖아요. 미운 놈 되는 것보단 웃긴 놈 되는 게 낫지. 그리고 애초에, 수업 시간에 다짜고짜 ‘스탯창’이라고 한 사람을 어떻게 커버를 쳐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기는 했다.

    “썩을.”

    이야기를 듣고 나니 연수에 대한 살의는 좀 누그러졌지만, ‘죽일 거야!’가 ‘죽고 싶다!’로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배, 민첩 스탯은 몇이에요?”

    “형우야! 힘 스탯 좀 찍어라!”

    지나가던 학생들마다 한 마디씩 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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