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78화 (78/200)
  • #77

    고등학교 1학년까지, 연수의 별명은 태권소녀였다.

    스스로는 조금 촌스러운 별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예능 작가 언니가 그 별명이 마음에 든다고 밀어붙였었다.

    “신비로운 TV 스타왕! 오늘의 게스트는 바로오오오오오오! 15세 태권소녀, 서!연!수!”

    당시 최고가를 달리던 스포츠 스타 출신 MC가 그녀를 인터뷰했다.

    “아버지를 따라서 7살부터 태권도를 시작했다구용?”

    “네, 그러다가 너무 재밌어서 선수를 꿈꾸게 됐어요.”

    “그렇다면 연수 학생, 지금은 꿈이 뭐예요?”

    15살의 연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제 꿈은 태권도 선수로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저도 선수 생활 해 봐서 아는데, 이게 쉽지가 않거든요. 그래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더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응원할게요, 연수 학생, 파이팅!”

    방청객 가득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금메달이라도 딴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TV에 출연하고 2년이 흐른 고등학교 1학년, 훈련이 끝나고 휴식 도중 그녀는 갑작스러운 어깨 통증을 느꼈다.

    처음엔 별것 아닌 것 같았는데,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피로골절’이라고 했다.

    이름만 들어서는 잠을 푹 자고 일어나면 나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달랐다.

    피로골절, 말 그대로 별 다른 충격 없이 뼈가 허물어졌다는 뜻이다. 그 말은 곧, 몸의 내구도가 극한에 달했다는 뜻이었다.

    치료를 해도 재발 확률이 엄청나게 높은 질환으로, 스포츠선수들의 사신이라고 불리우는 어마어마한 질병이었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어떻게든 선수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세 번의 수술을 받았다. 네 개의 철심을 박고, 어깨부터 팔꿈치까지의 긴 흉터까지 얻었다.

    “…일단 경과를 지켜봐야곘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운동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의사는 강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그 날 아마, 엄청나게 울었던 것 같다. 소리도 지르고, 물건도 부수고.

    그 격정의 순간이 끝나니, 무기력이 찾아왔다.

    “연수야, 스포츠학과를 가서 코치를 하는 건 어때?”

    “요즘은 튜더 같은 직업도 뜨더라. 선수는 못 하더라도…….”

    좌절한 이의 귀에는 그 모든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8세부터 17세까지. 기억나는 인생의 모든 순간을 선수를 꿈꾸며 살아왔는데, 선수를 못 할 수도 있다니. 가장 먼저 공포가 찾아왔고, 그것이 우울증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무것도 할 게 없었으니까. 그렇게 하루하루 그냥 멍하니 있던 어느 날.

    “이거라도 볼래? 진짜 재밌는데.”

    새로 들어온 신입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연수는 물끄러미, 그 간호사의 손을 바라봤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건 당시 유행하던 조앤.K.롤링의 <해리 포터>였다.

    “진짜 재밌대도. 한번 읽어 봐.”

    그렇게 말하며 멋대로 책을 침대에 올리고 갔다.

    책을 읽을 기분이 아니라, 그냥 무시했다.

    그리고 다음 날.

    “혹시 해리포터 읽었니? 다음 권 줄까?”

    그 다음 날도.

    “아직도 안 읽었어?”

    그 다음 날도.

    “혹시 글 못 읽니? 내가 읽어 줄까?”

    “…읽을 줄 알아요.”

    하도 귀찮게 하는 통에, 그냥 소설을 읽었다.

    별 거 없었다.

    부모를 잃은 고아 아이가 마법사로 거듭나는, 흔해 빠진 이야기였다.

    “이런 게 뭐가 재밌다는 건지.”

    내일 간호사가 오면 읽었다고 말할 정도로만 대충 훑은 뒤에, 그대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연수에게 선언이 떨어졌다.

    “수술은 성공했습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의사의 말대로, 부러졌던 뼈는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성공은 개뿔이.”

    하지만 연수는 수술이 실패라고 생각했다. 선수 복귀가 불가능하다는 최종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아.”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지만, 연수는 그날 옥상에 올라서 아래를 바라봤다.

    뛰어내리려는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해리는 어떻게 됐을까.’

    죽는 순간에 읽던 소설의 다음 내용을 떠올리다니, 참으로 웃겼다.

    그 기억 하나 때문에 뛰어내리지 못했으니 그건 더 웃겼다. 그대로 방에 돌아가서, 책을 읽었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연수는 간호사의 옷깃을 붙잡았다.

    “<해리 포터> 다음 권 있어요?”

    “다음 권 아직 안 나왔는데?”

    “어어….”

    잠시 뭔가 생각하던 연수는, 간호사에게 부탁 하나를 했다.

    “혹시, 샤프랑 노트 있으면 좀 줄 수 있어요?”

    “샤프는 안 돼. 너 우울증 약 먹잖아.”

    “…연필도 괜찮아요.”

    다음 날, 간호사는 연수의 침대를 보고 놀랐다.

    곱게 누워 자는 게 아니라, 환자용 책상을 펴 놓고 그 위에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얼굴 아래엔 노트가 깔려 있었는데, 침이 흐를락 말락해서, 간호사는 재빨리 노트를 그녀의 얼굴 아래에서 쓱 꺼냈다.

    “…어린 애라 그런지 피부 진짜 좋네.”

    자기가 그렇게 엎드려 있었으면 분명 노트가 번들거렸을 텐데.

    노트에는 뭔가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파트라슈 – 황태자지만 황자의 자리에서 쫓겨나 왕국에서 살아간다. 어릴 적 꿈이 좌절당해 슬퍼하지만, 마음씨 착한 왕녀 핀치를 만나면서 점점 감각을 회복해 나간다.]

    [핀치 – 마음씨 착한 공주. 희망을 잃은 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을 삶의 모토로 삼고 있다. 당근을 싫어하지만, 당근을 키우는 건 좋아한다. 그렇게 하면 당근이 식탁에 오를 때마다 ‘내가 열심히 키운 걸 먹다니, 너무 슬프잖아!’라고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그 내용을 본 간호사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지금, 자신은 수간호사가 되고 연수는 한국대학교 문창과 학생이 되었다.

    “…예전에 수간호사 달았다고 하니까 저한테 그랬죠. 수간호사인데 왜 여자냐고. 여자면 암간호사가 맞는 거 아니냐고요.”

    “아아악! 언니! 그건 운동만 했을 때 이야기거든요? 그 이후로 공부 엄청 빡세게 했거든요!”

    부끄러운 기억이 들춰진 연수가 팔을 내저었다. 수간호사가 피식 웃었다.

    “맞아요, 그때는 진짜 놀랐는데. 소설가 되겠다고 하더니 진짜로 한국대학교 문창과에 합격할 줄은.”

    “헤헷. 제가 또 한다면 하거든요.”

    “그때 표정 엄청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좀 표정이 어둡네. 뭐 고민이라도 있어요?”

    “고민이야 늘 있죠. 곧 시험 기간이기도 하고, 또… 아! 최근에 소설 쓰기 시작했어요. 있잖아요, 그때 노트에 쓰던 거.”

    “아, 그 파트라슈랑 핀치 나오는 소설?”

    “맞아요! <황태자는 왕국에 살아간다>!”

    “7년 만에 드디어 쓰는 거예요? 내가 잘은 모르는데, 소설이란 게 원래 그렇게 준비기간이 많이 필요한가?”

    “…그게요, 헤헷.”

    연수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 학교에 다니면서도 몇 번이고 구상하고 고쳤다. 이 소설은 자신의 인생 소설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공부하고 더 배우고 더 완벽해질 때까지 준비하고 시작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게 다 변명이더라고요.”

    쓰면 대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완벽함을 핑계 삼아 안 쓰고 있었다. 완벽함이 완전함의 발목을 잡은 느낌이었다.

    핑계를 지우고 나면 그곳에 남은 생각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안 되면 어쩌지?’라는 공포심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를 수 있다. 모른다는 건 좋다. 상상력이 들어가니까. 실제로 깠는데 안에 들어있는 게 보잘것없으면 어쩌라고?

    이미 한번 실패해 본 자신이라, 또다시 실패하는 게 두려워서 도망치고 있었던 거였다.

    “수간호사 선생님.”

    “네.”

    “제 주변에 진짜 이상한 사람이 있거든요? 실패를 몇 번이나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악착같이 달라붙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요?”

    당연히 형우를 말하는 거였다.

    4학년 때까지 낸 공모전 21개. 수상은 0개.

    포부를 말하면 욕부터 먹었다. 연수는 그 모습을 꽤 오랫동안 보아 왔다.

    “…흠, 미친 사람 아닐까요?”

    “그렇죠?”

    그렇게 말하며 수간호사는 웃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면 좀 느껴지기는 해요. 아, 나도 좀 미쳐볼걸. 왜 이리 정상적으로만 살았지? 보니까, 미친놈이라고 꼭 못사는 것도 아니고, 평범하게 살았다고 꼭 잘 사는 것도 아니더라고.”

    “흐음.”

    잠시 고민하던 연수는 결심했다는 듯이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흐읍!”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눈을 꼭 감고 [소설 올리기] 버튼을 꾹 눌렀다.

    “…됐나?”

    안 됐다.

    손이 너무 떨려서 빗나간 모양이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에, 다시 심호흡을 크게 했다.

    “가자, 흐읍… 앗!”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냥 누르면 되잖아, 이렇게!”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수간호사가 버튼을 꾹 눌렀다. 지잉- 휴대폰이 한번 진동하더니

    [소설이 등록되었습니다.]라는 알림이 떠올랐다.

    “아악, 언니익! 진짜로 올리면 어떻게 해요?”

    “그래 가지고 오늘 내로 올리겠나. 내가 다른 건 다 참아도 느릿느릿한 건 못 참거든요.”

    지나가던 간호사 몇 명이 흠칫하는 걸 보니 사실이 분명했다.

    “…지금이라도 지울까? 아직 고칠 부분이 더 있는 것 같은데!”

    완벽보단 완전을 추구하겠다- 고 포부 있게 소리친 게 1분 전인데, 또다시 전전긍긍했다.

    * * *

    완벽주의자들은 사실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그저 완벽할 수 있는 일만 한 거다. 포커 게임 같은 게 딱 그렇다. 모든 게 52장의 카드로 이루어진 확률 속에서 딱딱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세상은 52장의 카드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수들이 있고,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고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략) 그런 이유로 나는 무너트리고 싶은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완벽주의적인 작가라고 칭찬한다. 완벽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고,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작가가 아니다.

    “멋진 문장이야.”

    형우는 한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그 부분에 밑줄을 죽죽 그었다. 나중에 확인하기 편하도록 포스트잇도 한 장 붙였다.

    “나중에 소설에서 써먹어야지.”

    물론 대놓고 써서 표절 시비에 휘말릴 생각은 없었다. 새로운 해석을 약간 곁들여, 내 방식대로 녹여내리라.

    “이제 대충 다 채웠나?”

    방금까지 읽던 책을 책장에 꽂아 넣으며, 형우가 기분 좋은 듯이 콧김을 훅, 불었다.

    어느새 형우의 방은 문 하나를 제외하고 온통 책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안에 있는 책들이 적어도 천 권은 될 것 같았다.

    “언젠간 다 읽어야지.”

    가끔 읽지도 않을 책을 왜 사냐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형우 생각에 그건 아주 큰 실수다.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서 읽는 거다. 작가로 살고 싶다면 일단 유명하다 싶은 건 다 봐야 한다.

    유명한 작품이 취향에도 맞고 엄청 좋은 작품으로 느껴진다면, 열심히 밑줄을 긋고 배운다.

    유명한데 이게 대체 왜 유명한지 모를 불쏘시개라면, 그래도 열심히 밑줄을 긋고 이게 대체 어떻게 인기를 끌었는지 분석한다.

    즐거운 책은 취미라고 생각하며 읽고, 더럽게 재미없는 책은 하품을 참아가며 공부라고 생각하고 읽는다. 진짜로 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통째로 베껴 적는 필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저학년 때 많이 했었지.’

    형우의 고향에는 모르긴 몰라도 공부하며 필사한 작품들이 몇 박스는 있을 거였다.

    작가가 된 후에는 혹시라도 자신의 문장 스타일이 다른 사람을 쫓아갈까 두려워 좀 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끔 엄청나게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면 몇 페이지 정도는 필사를 꼭 했다.

    맹인으로 유명한 보르헤스와 함께 남미 소설가의 최고봉으로 추앙받는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소설 비법이다.

    “마르케스, 그다음에는 스티븐 킹.”

    형우는 그대로 휴대폰을 꺼내 어플 하나를 켰다. 요즘 핫한 오디오 북 어플이었다.

    [자매들의 아버지는 그 후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아카리 씨는 건강이 나빠져 열이 오르는 날이 거듭되었다.]

    요즘 재밌게 읽고 있는 일본 만화다. 요즘은 시대가 좋아져서 만화도 오디오북으로 나오고는 했다.

    일본의 장기인 쇼기를 소재로 해서, 프로 기사인 주인공과 그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휴먼 드라마였는데, 천천히 듣고 있으면 일본 장기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동감이 넘쳤다.

    “…스물아홉, 서른.”

    오디오북을 들으며 바닥에 엎드려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몇 개 했다. 형우는 이 과정을 ‘스티븐 킹’이라고 불렀다.

    스티븐 킹은 독서를 광적으로 좋아해서, 운전을 할 때나 잔디를 깎을 때는 늘 오디오북을 듣는다고 했다. 그것도 결국 작가에게는 힘이 된다는 거다.

    ‘마르케스’, ‘스티븐 킹’ 외에도 자매품으로 ‘헤밍웨이’나 ‘셰익스피어’ 등의 작법론이 있다.

    “다음엔 뭘 하지.”

    고민하던 차에, 휴대폰이 위이잉 울었다.

    연수 : 저 선배가 말한 대로 소설 사이트에 올렸어요!!! >

    연수 : 한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그걸 보는 순간, 뭘 해야 할지 정해졌다.

    작가가 서양에만 있는 건 아니다. 동양에도 기라성 같은 작품론은 얼마든지 있단 말씀.

    그중에서 형우가 고른 것은 4대 성인 중 한명으로 추앙받는 동양의 거인, 공자 선생이었다.

    “공자께서 예기에서 이르길, 학연후지부족學然後知不足은 교연후지곤敎然後知困이라 하셨지.”

    해석하자면, 최고의 공부법은 결국 남을 가르치는 것이란 뜻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