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서 수석님. 끝나고 시간 있으세요? 괜찮은 중식당 아는데. 여자들끼리 한 잔 어때요?”
‘여자들’이라고 해봐야, C&N 장르소설 편집부의 직원 일곱 명 중 여자는 지원과 윤진 두 명이 전부. 그러니까 둘이 한잔 걸치자는 소리였다.
“말은 고맙지만, 오늘은 좀 일이 있어서요.”
“일이요?”
윤진이 아쉽다는 듯 지원을 바라봤다. 히잉- 이라고 말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의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 또 있는데요?”
“끝나고 작가님 미팅 있어요.”
“으음, 참새치 작가님이죠?”
윤진의 말에 지원은 조금 놀랐다.
회사마다 다르지만, C&N의 장르소설 편집자가 담당하는 작가는 보통 스무 명 정도가 평균이다. 풋내기인 윤진은 그 절반 정도인 열 명 정도를 담당하고 있지만, 수석 편집자인 지원은 평균보다도 많은 스물 여섯의 작가를 담당 중이다.
“어떻게 알았어요?”
“에이, 제가 서 수석님 하루 이틀 보나. 표정만 봐도 다 알죠.”
“표정이… 어떤데요?”
“뭐라고 해야 하나.”
윤진이 천천히 설명했다.
“일단 안띵 작가님 이야기할 때는요, 뭔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세요.”
“으흠.”
안띵 작가는 예전에 ‘소설토끼’라는 출판사에서 계약사기를 당할 뻔한 다음에 C&N으로 찾아온 케이스였다.
그러니 당연히, 계약태도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괜히 저 때문에 대박 작가 놓치면 안 되니까. 또 다른 사람은요?”
“다른 사람… 아! 성민준 작가님 말할 때는요, 약간 어조가 높아져요.”
“……그럴 만도 하죠.”
요즘 형우를 만난 이후 괜찮아졌지만, 성민준은 한때 C&N에서 제일가는 지각쟁이였다.
일주일에 두 편을 겨우 연재할 때도 있었으니, 과장 조금 보태서 민준의 집까지는 네비게이션을 끄고도 운전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형우 작가님 이야기할 때는 뭐랄까….”
“뭐랄까?”
“…그런 표정이란 말이죠?”
윤진이 지원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지원이 재빨리 표정을 관리했다.
“그런 표정이 뭔데요?”
“입꼬리가 올라간다고 해야 하나, 뭔가 기분 좋아 보여요. 둘이 약간, 비즈니사적 관계 맞죠?”
비즈니사적(busines私的) 관계.
비즈니스 관계와 사적 관계를 합친 말로, 비즈니스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불편하거나 꺼려지지 않는 관계를 뜻하는 신조어다.
말만 들으면 괜찮아 보이지만 상대를 대할 때 실수가 가장 많이 나오기 쉬운 관계이기도 해서, 별로 추천하지 않는 관계기도 하다.
“비즈니사적 관계라고요? 제가요?”
“그렇잖아요. 저번에도 편집장님이랑 한바탕 한 다음에 도망칠 핑계 찾는다고 바로 참새치 작가님이랑 미팅 잡으셨잖아요? 그게 비즈니사적 관계가 아니면 뭐예요?”
지원은 재빨리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네요.”
윤진의 지적은 한 군데도 틀린 데가 없었다. 지원의 표정을 본 윤진이 어라? 하고 한 마디 덧붙였다.
“뭐예요, 서 수석님 정말 몰랐던 거예요?”
“…그러네요. 일이 힘들 때 기껏 만나는 사람이란 게 결국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니. 좋은 건지도 잘 모르겠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한테 의지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그, 그….”
윤진의 귀가 다시금 새빨개졌다.
“저, 저도 그렇거든요오….”
누굴 말하는지는 뻔했다.
“윤진 님은 정치를 해야겠어요.”
“저, 정치요? 왜요?”
“거짓말을 하면 귀가 빨개지잖아요.”
윤진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마치 ‘신은 죽었다’ 같은,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선언의 맥락을 파악하려는 학부생의 얼굴 같았다.
‘…그냥 농담이었는데.’
또다시 자신의 농담이 별로 명중률이 높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게요, 정치인은 거짓말을 자주 하고 윤진 님은 귀가 빨개지니까 그걸 섞어서 말한 게 웃긴 부분이에요.’
라고 설명하는 것보다야, 자신의 말이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것으로 오해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그냥 그만뒀다.
골몰하는 윤진을 내버려 둔 채, 지원은 그대로 짐을 챙겨 일어났다.
“술은 나중에 먹는 걸로 해요. 윤진 님.”
“예? 아, 네!”
“아, 그래도 아까 말한 그 중식당, 혹시 테이크아웃도 되나요?”
* * *
“현주만두라고 했었지.”
양꼬치와 튀김 냄새가 가득 번지는 차이나타운의 골목, 지원은 이곳저곳을 헤맸다.
“저기네.”
그곳으로 가니, 60이 조금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가게 앞에서 담배를 뻐끔뻐끔 물고 있었다.
‘…가게 옆에서 흡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윤진이 추천해준 집이니 그러려니 했다.
“저기요, 만두랑 양꼬치 좀 사려는데요. 저것 좀 주시겠어요?”
“손님이우?”
지원을 보자마자, 노인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어이구, 이쁜 손님이네. 이런 공주님이 혼자 차이나타운을 오나?”
“…예?”
“하지만 음식은 잘 모르는 것 같으네. 이건 만두가 아니라 빠오즈(중국식 육즙만두)인데….”
말하는 걸 보니 미친 꼰대가 분명했다.
“잠시만요.”
지원은 한발 물러서서 상호를 살폈다.
현주만두의 ‘주’ 밑에 ㅇ하나가 자그마하게 껴 있었다.
그러니까, 현주만두가 아니라 현중만두였다.
‘짝퉁이었잖아.’
가끔 가게 하나가 장사가 잘되면, 이렇게 상호명으로 장난질을 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그대로 가게에서 나온 지원은 세 블록 뒤에서 미리 찾던 현주만두을 발견했다.
“아, 어서오세요! 뭐 찾으십니까?”
지원이 발을 들여놓자마자 주인이 나와서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만두랑 양꼬치요.”
“만두가 두 종류가 있는데, 뭘로 드릴까요?”
“빠오즈 3인분 주세요.”
“어떤 맛으로 드릴까요?”
“부추, 새우, 고기 하나씩이요. 거기에 양꼬치도 몇 꼬치 주시고요. 듬뿍 담아 주세요.”
“예이~ 어련하겠습니까! 애들아! 여기 꼬치 두 개 더 넣어 드려라!”
역시, 그 짝퉁 ‘현중만두’과는 태도부터 달랐다.
“이래서 짝퉁 말고 오리지날을 써야 한다니까.”
잠시 후, 가지런하게 손질되어 나온 음식들을 들고 지원은 차에 올랐다.
차를 타고 왔다고 하니까, 냄새가 배지 않도록 세 겹으로 포장을 해 준 데에서 또 한 번 배려가 느껴졌다.
지원은 짐을 조수석에 올려놓은 뒤에, 그대로 형우의 집을 네비게이션에 찍었다.
“…고생하고 계실 텐데. 이런 거라도 사 먹여야지.”
아까는 바빴던 통에 길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지원 또한 이미 구상이 끝난 소설의 장르를 바꾼다는 게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힘든 부탁을 해 놓고 ‘작가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난 편집자니까 당연히 기다리기만 하면 돼.’라고 생각할 정도로 인간적인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온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좁은 길 사이로 삐죽빼죽 올라와 있는 오피스텔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대학생 때는 이런 데서 살았는데.”
그 경험 덕분에, 지원은 어렵지 않게 형우의 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저번에 <요그> 촬영할 때 이후로 처음인가?”
집을 소개해 준 건 지원이었지만, 정작 와본 건 처음이라니, 뭔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며 지원은 형우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아, 오셨네요.”
피곤해 보이는 표정의 형우가 지원을 반겼다.
“다크서클이 좀 짙으시네요. 못 잤어요?”
“못 잔 건 아닌데, 좀 피곤하네요.”
‘스트레스성 피곤함’이라고 해야 하나.
“그럴 줄 알고 뭣 좀 사 왔어요. 먹고 해요.”
일하면서도 먹기 편하도록 핑거 푸드인 만두와 양꼬치 위주로 샀다.
“빈손으로 오셔도 되는데….”
“에이, 또 그러신다! 매니저가 작가 만날 때 빈손으로 오는 건요, 절대 안 되는 거예요.”
단호하게 말하는 지원을 보니 웃음이 피식 나왔다.
“…일단 맛있게 먹겠습니다.”
그렇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에, 형우는 그대로 밥상을 쭉쭉 폈다.
방은 작가의 방답게 난잡하기는 했지만, 지저분하다거나 더럽다는 느낌은 없었다. 부엌에는 꽤나 전문적으로 보이는 프라이팬과 식기 세트도 보였다.
“…칼 좋은 거 쓰시네요.”
“알아보시네요. 독일제에요.”
독일제 식칼은 지원의 집에도 없는 거였다.
“요리를 직접 하세요?”
“그렇죠 뭐, 대학교 때부터 자취했으니까. 군대에서도 취사병이었어요.”
“으음, 그러면 몸에 좋은 낙지라도 사 올 걸 그랬나. 심심하면 삶아 드시게.”
“흐흐, 배고프면 제가 사 먹을게요. 어, 만두네. 나 만두 엄청 좋아하는데.”
후훗 하고 웃으며 지원이 설명했다.
“만두는 만둔데, 정확히는 빠오즈包子라고 부르는 거예요. 우리가 흔히 아는 만두는 만터우나 샤오롱바오라고 부르고요.”
“으음….”
온통 그 ‘빠오즈’에 관심이 쏠린 형우에게는, 그 설명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식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공격적인 부추 냄새와 잘 익은 돼지고기의 부드러운 풍미가 어쩐지 처연한 느낌이 들었다.
부드러움과 날카로움, 유와 강. 온 우주의 철학이 그 안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오.”
입에 넣자마자,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영악한 요리사는 만두피 속에 예상하지도 못한 즐거움을 숨겨 뒀다.
“육즙이잖아?”
한입 가득 씹자마자, 육즙이 팍 하고 터졌다.
만두를 씹는 느낌이 초등학교 운동회 때 ‘박 터트리기’를 하는 느낌이라면, 빠오즈는 마치 물풍선이 터지는 느낌이랄까.
파식, 하고 육즙이 번져나가는 소리가 마치 어릴 적 크리스마스에 뜯는 선물상자를 소리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지원이 흡족하게 웃었다.
“진짜 맛있게 먹네요.”
“맛있으니까요, 이거 이름이 뭐라고요?”
“빠오즈요.”
“빠오즈, 빠오즈라….”
꼭 기억해야겠다는 듯, 형우가 되뇌었다. 지원이 피식 웃었다.
“흐흐, 추천받은 맛집까지 찾아가서 사 온 건데, 잘 드시니 보기 좋네요. 아, 마라 좀 얹어 드세요.”
“마라요?”
“중국식 다데기 같은 건데, 엄청 매워요.”
과연, 그렇게 먹으니 색다른 맛이 났다. 형우는 마라를 한 움큼 덜어 자신의 접시에 담았다.
“좋네요.”
폭신한 빠오즈 덕분에, 형우는 오랜만에 약간의 휴식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나저나 소설은 좀 진전이 있었나요?”
“컥!”
씹던 만두가 입에서 나올 뻔했다. 지원이 재빨리 형우의 등을 두드려 줬다.
“죄송해요, 다 먹고 말을 꺼냈어야 했는데….”
“괘, 괘, 괜찮습니다. 소설 물어보셨죠?”
솔직히 말하자면, 진전이 없었다.
문장을 짧게 줄이는 것이나, 약간의 줄거리를 수정하는 일이었으면 고민하지도 않았다. 내가 가게를 열었는데, 손님들이 그 가게의 인테리어를 바꾸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면 안 바꿀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손님이 ‘스테이크점 말고 차라리 김치찌개 집을 하는 건 어때요?’라고 말한다면 그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장르의 변경이란 그런 거였다.
‘…어쩐다.’
생각에 잠긴 형우는 자신이 접시에 놓은 만두를 다 먹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젓가락은 관성적으로 움직였다. 접시 바닥을 몇 번 치던 젓가락이 푹, 하고 집은 것은 중국식 다데기인 마라였다.
그리고 형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입에 쏙 넣었다.
“…어라?”
마라가 혓바닥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감각에, 형우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한 1초 정도는, ‘이게 뭐지?’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마라구나.’라고 알아차렸다.
그리고, ‘맵다더니 별로 안 맵….’까지 생각한 순간.
“…물, 하 쓰읍! 물, 물!!!!!!!!!!!!!!!!!!!”
미칠 듯한 작열감을 느낀 형우는 구형 정수기처럼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매움을 넘어서, 거의 아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텅 빈 1.5L짜리 생수병 두 통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후하, 후하….”
“물 더 드실래요?”
지원의 질문에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참을 만해요.”
더 마셨다가는 구역질이 나올 게 분명했다. 형우는 소매를 들어 퉁퉁 부은 입술을 슥 닦았다.
“마라라는 게… 이렇게 매운 거였어요?”
빠오즈랑 먹을 때는 미처 몰랐다.
부드러운 육즙이 마라의 화끈한 맛을 중화시켜 주었기 때문에.
“잠깐만… 중화中和?”
단어를 떠올린 순간, 뭔가 직감같은 게 왔다.
중화, 중화라.
‘…익숙한 맛 속에 매콤함을 숨긴다?’
그 순간, 형우는 뭔가를 잡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헌터물’이 만두의 익숙한 맛이라면, ‘공포물’은 호불호가 갈리는 마라의 매콤한 맛과도 같다. 그러니 그 둘을 함께 묶는다면….
‘이거다!’
머릿속에 번뜩이며 떠오른 아이디어에, 욕탕에서 뛰쳐나온 아르키메데스처럼 비명을 질렀다.
“편집자님, 혹시 오늘 시간 좀 괜찮으세요? 두 시간, 아니 한 시간 반이어도 충분해요.”
“시간은 되는데, 왜 그러세요? 갑자기 소리를 지르시고.”
“…방금 뭔가 떠오른 것 같거든요. 자신 있어요.”
여유만만한 태도로, 형우가 씩 미소지었다.
마라 탓에 입술이 퉁퉁 부어있지만 않았어도, 꽤 멋있게 느껴졌을 그런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