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74화 (74/200)
  • #73

    분명 같은 설정일 텐데, 자신이 쓴 것보다 훨씬 재밌다.

    “선배 이거 어떻게 한 거예요?”

    “재밌어?”

    “재밌기도 한데, 쓰는 방법이 와….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연수는 눈을 반짝거리며, 노트북을 만지작거렸다. 자세히 보니, 화면 캡처 프로그램을 써서 화면 전체를 녹화하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보여주시면 안 돼요? 처음부터.”

    인터넷 강의를 녹화하는 학구열 넘치는 고등학교 3학년 같았다.

    * * *

    그로부터 2주 후, 한국대학교의 캠퍼스.

    “선배! 이거 봐주세요!”

    한 여학생이 남자를 향해 뭔가를 내밀었다. 주변의 학생들 몇 명이 쑥덕거렸다.

    “뭐야뭐야? 고백하는 거야?”

    “러브레터? 여기 대학교가 아니라 중학교였어?”

    “그래도 저런 거 좀 좋지 않아?”

    “…러브레터는 무슨.”

    그 무리 중에서 가장 학교를 오래 다닌 것처럼 보이는 남학생이 한숨을 푹 쉬었다.

    “뭘 주는지 잘 봐. 너희 눈에는 저게 편지로 보이냐?”

    “편지치고는 좀 크긴 하네요.”

    “좀 큰 수준이 아니잖냐.”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내민 것은 아기자기한 봉투에 담긴 자그마한 손편지가 아니라, 호치케스로 거칠게 찍어낸 두터운 A4용지였다.

    “그러니까 저건 러브레터가 아니라, 문창과 후배가 선배한테 자기 소설을 감평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그래요?”

    “어. 저 남자애 걔잖아. 작가로 <요그> 나온 애. 이름이 김형우랬나?”

    그 학생의 말이 맞았다. 형우는 연수가 자신에게 내민 A4용지를 찬찬히 살폈다.

    “…보니까 한 열 시간 정도 쓴 소설인 것 같은데. 맞지?”

    “어어? 소설 내용만 보고 그걸 알 수 있어요?”

    “다크서클 보고 알았는데.”

    연수의 얼굴은 다크서클이 광대까지 덮고 있었다. 현대화학의 정수인 bb크림조차도 그 짙은 그림자를 다 덮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어때요?”

    “잠시만 기다려 봐.”

    형우는 천천히 연수의 소설을 읽어내렸다.

    “…많이 괜찮아졌네.”

    연수에게 장르소설을 가르쳐주기 시작한 지 어연 일주일. 그사이 연수는 드디어 웹소설이 무엇인지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손가락 힘도 많이 빠졌고, 호흡도 웹소설스러워졌어. 특히 호흡을 짧게 유지하면서도 특유의 서정성을 잃지 않은 게 가산점을 줄만 해.”

    “저, 정말요…?”

    “하지만.”

    형우가 말을 이어나갔다.

    “로맨스가 엄청나게 매력 있지는 않아. 어쩌면 액션을 쓰는 게 더 나을지도.”

    “에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저는 로맨스 쓸 거예요.”

    연수가 형우의 말을 치워내듯 손을 휘적거렸다.

    “그래도 아무튼, 좋다는 거죠?”

    “…저번보다는?”

    “나쁘다 좋다 하면 어느 쪽?”

    “좋다 쪽이긴 한데….”

    “떽! 거기까지만!”

    뭔가 인색한 칭찬이었지만, 형우는 원래 글에 관해서는 칭찬에 꽤 인색하다. 이 정도면 극대칭찬極大稱讚은 아니더라도, 그다음 정도는 된다. 연수는 잠깐 숨을 들이쉬더니, 그대로 폴짝 뛰어올랐다.

    “끼얏호!”

    지난 일주일간 잠도 못 자고 했던 노력들이 다 보상받은 느낌이다. 그것만으로도 좋을 텐데, 칭찬해 준 사람이 자신이 존경하는 김형우였다.

    기분이 좋으면 웃고, 거기서 더 기분이 좋으면 폭소하면 되는데, 연수는 거기서 기분이 한 번 더 좋았다.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건, 중학교 시절 도내 격투기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끼얏호!”

    그래서 연수는 방방 뛰었다. 운동을 배운 사람답게, 그 높이가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됐다.

    “트리플 악셀!”

    내친김에 김연아처럼 묘기까지 부렸다. 세 바퀴쯤 돌았을 때, 주위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형우가 이마를 붙잡았다.

    “야, 야, 적당히 해. 서커스단 된 기분이야.”

    “기분이 좋은데 어떻게 해요?”

    “…그냥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

    다행히 주변 사람들은 연수의 행동을 단순한 퍼포먼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천재와 기인은 종이 한 장 차이랬던가, 그 말대로 한국대학교는 원래 이상한 사람이 많았다.

    개를 연구한다며 견종별로 개똥을 맛봤다가 식중독으로 입원한 수의학과 학생이나, 잃어버린 신라 시대 검술을 복원하겠다며 운동장에서 하루 종일 검을 휘두르는 60대 노교수에 비하면 공중제비 세 번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형우는 다짐했다. 다시는 사람 많은 데서 연수를 칭찬하지 않기로.

    * * *

    “후우.”

    자취방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은 형우는 그대로 커피 한 모금을 홀짝거렸다.

    손가락을 제외하고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지만, 형우의 이마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누가 뭐래도, 뇌는 인간의 몸에서 칼로리를 가장 많이 소모하는 기관 중 하나다. 평균적으로는 하루 기초대사량의 5분의 1 정도가 뇌의 몫이고, 뇌를 많이 쓰는 직업의 경우 그 정도가 늘어난다.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프로 체스선수들이 하루에 섭취하는 칼로리가 6천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고 들었다.

    게다가, 뇌는 엄청난 편식쟁이기도 하다.

    단백질도 안 되고, 지방도 안 된다. 뇌는 오직 구연산과 탄수화물만을 그 양분으로 삼는다.

    으적으적.

    형우는 미리 준비해 놨던 포도당 캔디를 씹었다. 그 옆에는 총 네 개의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카페인 섭취를 위한 커피와 에너지 드링크.

    구연산을 뇌에 집어넣기 위한 비타민 음료.

    그리고, 사포닌이 잔뜩 함유된 인삼차.

    요약하자면, 뇌를 위한 사료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시간을 잴 때도 시계보다는 비어 있는 캔의 개수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배꼽시계 대신 뇌시계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물시계 대신 에너지 드링크 시계라고 해야 할지.

    꽤 재밌는 농담처럼 보여, 나중에 소설에 써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너 그러다 죽는다.”

    등 뒤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잇, 깜짝야! 언제 왔어요?”

    “방금.”

    이렇게 된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형우는 아직도 지금의 상황에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형우는 그대로 뒤쪽을 바라봤다. 나이가 60이 넘었음에도 180이 넘는 키와 떡 벌어진 어깨는 참으로 위압적이다.

    그 정체는, 조물주보다 더 높다는 건물주이자, 15년간 복무하다 깡패의 칼에 찔려 퇴직한 전직 형사 되시겠다.

    “잘 쓰고 있냐?”

    형우가 집주인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온전히 참치 덕분이다. 정확히는, 참치가 화장실에 붙어 있었던 부적을 뜯어낸 게 계기였다.

    그 덕에 집에 종종 목격되던 귀신이 사라졌고, 귀신 탓에 떨어진 집값으로 전전긍긍하던 집주인은 아주 신이 나 버리고 만 것이다.

    “네 덕분에 귀신이 없어졌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귀신 없어졌다고 집값 올리실 건 아니죠?”

    “어이고, 내가 이래 늙었어도 전직 민중의 지팡이야. 은인한테 그런 구차한 짓은 안 한다.”

    그 이후로 종종 집주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가끔 술을 마시기도 했다.

    집주인의 이름이 고덕호라는 것과 전직 형사라는 것도 술을 마시면서 들은 이야기다. 그때 들은 폭력단 썰이나 사이비 종교집단 이야기가 얼마나 리얼하던지.

    그중 몇 가지를 소설 소재로 쓰겠다고 했더니, 고덕호는 ‘경찰을 나쁘거나 무능하게 묘사하지 않는다.’라는 약속을 받아낸 후에 흔쾌히 수락했다.

    “…아무튼, 어르신. 이번 화는 어때요?”

    “영 깡패 같지가 않아. 너무 착하잖아?”

    집주인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최근 연재 중인 <아이언 타이거>의 최신화다.

    “어떤 깡패가 공구리를 저렇게 허술하게 치냐? 네 묘사대로 마구잡이로 시멘트를 부어 넣으면 시체가 부풀면서 금방 들킨다고.”

    “넵?”

    “저런 식으로 대충 친 공구리가 발견되면 형사들은 알아요. 아, 이건 조폭 솜씨가 아니라, 비행 청소년이나 삼류 양아치가 제 분수 어긋나는 짓을 한 거구나, 하고.”

    …꽤나 리얼한 전문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전작인 <전설의 보안관>은 배경인 서부극에 맞춰 악덕 총독이나 돈밖에 모르는 용병 집단을 악당으로 삼았지만, 이번 작품인 <아이언 타이거>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헌터물이었기에 현대의 악당 집단인 ‘깡패’를 메인 악당으로 삼았다.

    “말로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는데….”

    잠깐 망설이던 형우가 결심했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어요?”

    “자세히라면, 어느 정도?”

    “사진으로요.”

    고덕호는 잠깐 망설였다.

    “…흐음, 상당히 역겨울 텐데. 저번에는 잠도 못 잤잖아?”

    “괜찮아요.”

    “후회하지 마라.”

    잠시 후, 나갔던 고덕호는 금방 되돌아왔다.

    손에는 경찰 파일이 몇 권 들려 있었는데, 형사 시절 집에 가지고 왔던 살인 현장 검식의 사본이었다. 급하게 퇴직하면서 미처 반납하지 못했던 것들이라고 했다.

    “뭐, 요즘에는 어림도 없지만. 자, 공구리 자료가 아마 여기 어디 있을 텐데, 아, 이거로군.”

    “으허억!”

    구식 필름으로 찍은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보자마자 씨X!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가슴이 쾅쾅 뛰고 숨이 헐떡거렸다.

    “공구리를 잘못 쳐서 벽이 벌어지게 되면, 그 안에 있는 부패한 시체는 보통 이렇게 생겼다.”

    “…이게, 우웩!”

    그 이미지를 보며 꽤 많이 헛구역질했다.

    이런 걸 보면, 길 가다 노숙자 시체를 발견한 충격으로 정신과를 다녔다는 사람도 이해가 간다.

    “…저번에 봤던 것보다 더 끔찍한데요.”

    전직 형사인 그가 보여주는 범죄 현장은 늘 끔찍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중에도 공구리는 특히 좀 더 끔찍했다.

    순위를 매겨보자면, 사망 후 3주가 지난 출혈사 현장보다는 더 끔찍했고 사이비 종교집단의 집단자살 현장보다는 덜 끔찍했다.

    하지만 덕분에 느낌은 알았다.

    “보통 이 상태까지 된 건 3주 차, 혹은 4주 차로 보는데, 부패의 정도에 따라….”

    거기에, 고덕호의 설명까지 덧붙여졌다.

    이 정도면, 누구보다 효과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 테다.

    “…우욱!”

    두 번 구역질을 한 후에는, 조금 덜 효과적으로 묘사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가는 고어 소설이 되어버릴 테니까.

    “괜찮냐?”

    “괜찮아요.”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자신은 소설가, 다른 말로 하면 관찰의 프로다. 뭐든지 지켜볼 자신이 있다는 거다.

    작가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살인자가 칼을 들고 난동을 부릴 때 사람들은 보통 도망간다. 그중에서 용감한 사람들은 그걸 말리려고 한다.

    그리고 소설가는, 그 모습을 구경한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까?’가 너무나도 궁금해서,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는 거다.

    사건에 들어가지도, 사건에서 등 돌리지도 않은 채 일정 거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적고, 활용하는 존재가 바로 소설가다.

    “그러니까, 이건 행운이죠.”

    남들은 못 보는 걸 본 것은 언제나 행운이다.

    형우는 천천히 의자에 앉아 다시 눈을 감았다.

    “공구리는 그 정도면 충분히 본 것 같고, 깡패들이 어떤 식으로 서열을 잡는지 보여주시겠어요?”

    “흐음, 이게 30년 전에 태산파 기습해서 찍었던 사진인데….”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빨랐다.

    10분 만에 자료를 다 살핀 형우가 그대로 몸을 뒤틀었다.

    “…그걸 왜 먹여요?”

    “깡패니까.”

    “먹인 것까진 그럴 수 있는데, 왜 물구나무를 서서 그런 짓을…?”

    우욱, 토가 쏠렸다.

    진한 폭력과 고어가 나올 줄 알았는데, 튀어나온 건 역겨움과 엽기였다.

    입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역겨운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깡패들에 대한 묘사를 시작했다.

    묘사를 보다 보니 다시 그 기억이 떠올라서 헛구역질을 한 번 더 했다.

    정신적으로 충격이 꽤 심했지만, 손해라는 생각은 안 했다. 다 도움이 되는 아픔이다.

    “두 번 보긴 싫으니까, 기억날 때 후딱 써야겠어요. 저는 작업할 테니, 어르신은 여기서 족발 드시고 계세요.”

    “오냐.”

    그리고, 소설을 올린 뒤.

    형우는 기진맥진한 채로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본 집주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경찰대 나온 애들도 보면 질겁하는 것들인데, 제정신이 아니군.”

    소설가라기에 샌님일 줄 알았는데, 깡이 웬만한 신입 경찰관 못지않다.

    “…흐흐, 그 정도는 해야죠.”

    땀에 흠뻑 젖은 채로, 형우가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본 전직 형사인 집주인은, 순간 약간의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광기와 열정의 중간쯤 되는 눈빛이랄까.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 나오는 지킬이나, <광염 소나타>에 나오는 주인공 백성수가 꼭 저런 모습이었을 것만 같다.

    사실 저런 눈빛은 범죄자의 눈이라기보다는, 성공한 자들의 눈빛이다. 뭔가 하나에 열중해서, 끝을 보기 전까지는 멈추지 못하는 자들의 눈빛.

    “너는 내가 보니까, 성공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겠다.”

    고덕호는 형우를 그렇게 평가했다.

    * * *

    “어라.”

    유튜브를 보던 형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웹타쿠의 소설 리뷰, 아이언 타이거?”

    실감 나는 액션 묘사를 위해 검술 시연 영상이라도 찾아볼까 해서 들어간 거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걸 봐 버렸다.

    옆에는 ‘46초 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방금 올라온 따끈따끈한 영상이라는 뜻이었다.

    “웹타쿠라….”

    형우의 소설이 웹타쿠의 리뷰를 받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당연히 <전설의 보안관>이었는데, 웹타쿠는 당시 입에 침이 마르도록 형우의 소설을 칭찬했었다.

    그 파급력이 얼마나 어마어마했던지, 형우의 독자 통계가 유의미한 수준으로 증가했을 정도였다.

    “…후우.”

    형우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찬장을 뒤져 청심환 하나를 꺼내 삼켰다.

    긴장이 조금 가시기를 기다린 뒤, 천천히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웹타쿠입니다아-!”

    활기 넘치는 인사말과 함께, 할로윈데이에나 볼 법한 스크림 가면을 쓴 남자가 활발하게 팔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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