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72화 (72/200)
  • #71

    “다만, 11번째 컷에서 베아트리체 묘사는 조금 바꾸는 게 좋겠다. 베아트리체가 말한 ‘좋아해?’는 설렌다는 느낌이 아니라 헤럴드를 놀린다는 느낌으로 쓴 거였거든.”

    “그래? 바로 수정할게.”

    “그리고 이건 그냥 내 의견인데, 베아트리체 의상 디자인이 좀 요란하지 않아? 조금 수수했으면 좋겠는데.”

    “흐음… 요즘 트렌드 상으로 그 정도는 화려한 편이 좋아. 너무 사실주의적이면 그림의 맛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라서. 네가 정 원한다면 고치기는 가능하지만….”

    “아니야, 아냐. 네가 더 잘 알겠지.”

    흔한 말로 친구와의 공동창업은 파멸의 지름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친구인데 뭐 어때?’라는 마법의 단어 때문이다.

    작업 도중 실수를 한 친구를 나무라는 대신 ‘친구인데 뭐 어때?’라며 그냥 넘어가거나,

    반대로 친구에게 자신의 일을 떠넘기며 ‘친구인데 뭐 어때?’라고 얼버무리는 경우를 말하는 거다.

    완전한 타인이었으면 견고하게 유지되었을 공정성이, 친구라는 이름 아래서는 너무 쉽게 부서져 버린다. 당연히 이런 환경에서 작업이 똑바로 돌아갈 리가 없다.

    형우와 의재도 이런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 약속을 하나 했다. 작업을 할 때만큼은 철저하게 서로를 원작자 김형우와 만화가 서의재로 대하자는 약속이었다.

    둘은 그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그 노력 덕분인지, 런칭을 시작한 이후로 <전설의 보안관>의 웹툰은 계속해서 순위를 조금씩 올려가는 중이었다. 형우는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켜 주는 의재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작업은 지금 바로 시작할 거야?”

    “아니, 지금 스승님 안 계셔. 아마 내일 할 것 같은데?”

    “아, 오늘도 병원?”

    형우는 의재의 스승인 만화가 송의진을 떠올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방구석에서 별 낙도 없이 술이나 마시며 살던 골방 노인이었는데, 손자가 태어난 이후로는 젊은이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변했다.

    미숙아로 태어난 자신의 손자를 위해서였다. 다행히,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 같았다.

    “…곧 퇴원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맞아?”

    “응. 한 달 내로 퇴원할 수 있을 것 같다던데. 스승님 요즘 입이 귀에 걸렸다니까.”

    그것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래, 이거 내가 번 돈이니까 병원비 보태고, 며느리랑 맛난 거라도 사 먹거라.”

    “…아버지가 직접 번 돈 맞소?”

    “맞다니까, 이 자식이. 믿지를 않아.”

    “하두 속았으니 말이지.”

    송의진에게 4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받은 아들 송병구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400만 원이면 성수기일 때 한 달 내내 에어컨 고쳐야 나오는 돈인데.”

    “내가 이 정도는 되는 사람이다, 자식아. 못 믿겠으면 인터넷에 내 이름 쳐 봐!”

    송병구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진짜로 인터넷에 송의진 세 글자를 쳐 봤다.

    가장 먼저 유명 프로게이머가 나왔고, 그다음에 아버지의 이름이 뒤를 이었다.

    송의진 – 만화가

    대표작 – 1978년 데뷔작 <칠검귀>, <스트레이키즈>. 이후 <전설의 보안관>을 통해 복귀.

    관련정보 – 네이비[지식백과] -

    그 인물 사전에는 촌스럽게 V자를 그린 아버지의 사진도 올라와 있었다.

    “…진짜로 아버지 맞네. 그때 우리 집 찾아왔던 그 어린 애랑 작업하는 거요?”

    “그런 셈이지.”

    송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형우.

    처음에는 물정 모르는 꼬맹이라고 생각했지만, 함께 일을 하고 보니 진국도 그런 진국이 없었다.

    “걔가 없었으면 누가 나 같은 뒷방 늙은이한테 작업을 맡겼겠냐? 어린 애라고 괜히 낮추지 마라. 나한텐 은인이니.”

    “누가 낮췄나, 그냥 아버지에 비해 너무 어리다는 거지.”

    “아무튼.”

    그렇게 말하며, 송의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 의재한테 들어 보니, 방금 형우가 몇몇 장면에 수정을 요청했다고 했다.

    최대한 빨리 일을 마치고, 다시 작업실에 돌아가야 했다.

    “잠시만요, 아버지.”

    그대로 돌아 나서는 송의진을 송병구가 잡았다.

    “식사라도 같이하고 가시오. 애 엄마 곧 나올 텐데.”

    “나도 그러고야 싶다만, 선객이 있어서 말이다.”

    송의진이 창밖을 손짓했다. 거기에는 허름한 동네에 어올리지 않는 외제차 한 대가 서 있었다. 1년 동안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으기만 해도 사기 힘든 비싼 차였다.

    병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런 차 타는 사람이 아버지를 기다려요?”

    “내가 이 정도는 되는 사람이다.”

    송의진이 피식 웃었다. 거들먹거리니 역시 기분이 좋았다. 그대로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자동차를 향해 걸어갔다.

    덜컹, 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외제차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등장한 것은 양복 차림의 한 남자였다.

    “C&N의 부회장인 윤정석입니다. 오늘 식사나 한번 하자고 모셨습니다.”

    “식사 좋지.”

    송의진은 씨익 웃으며 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고급 자동차라 그런지, 승차감부터가 아주 예술이었다.

    그렇게 20분 정도 도로를 달린 뒤, 자동차가 정차한 곳은 식당가가 아니라 고급 주택가였다.

    “여기 음식점 아닌 것 같은데?”

    “하하, 저희 집인데, 여간한 음식점보다 나을 겁니다. 들어오시죠.”

    * * *

    정식의 말마따나, 넓은 식탁에는 온갖 산해진미와 좋은 술들이 펼쳐져 있었다.

    “어이고, 집사람이 실력이 아주 좋은 모양이군.”

    “결혼은 안 했습니다. 출장 요리사의 솜씨지요.”

    “근처에 인연이 없나? 내가 괜찮은 처자들을 몇 아는데….”

    “아직까지는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술이라.”

    좀 땡겼지만, 술만 먹으면 걱정하는 며느리를 생각해 입맛만 쩝 다셨다.

    “…생각 좀 해 보지. 그나저나 이런 좋은 음식에 좋은 술이라니, 내가 좀 유명해지긴 했나 봐? 뭐, 싸인이라도 하나 해 드릴까?”

    괜히 너스레를 떨긴 했지만, 송의진은 현역에서 30년을 넘게 구른 사람이다. 기업의 대표가 소속 만화가 한 명 한 명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모르긴 몰라도 부회장이라면 실무진이 아니라 경영진일 텐데, 왜 나를 보자고 한 거요?”

    송의진은 자신의 가치를 잘 알았다.

    웹툰이 성공적이기는 하지만, 매출액으로 따지자면 아직 억대 규모도 돌입하지 못했다.

    C&N 정도의 대형 출판사에게는 그렇게 큰 돈도 아닐 터, 실무진이라면 모를까 경영진이 자신을 직접 찾아오는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회사에 대해 잘 아시는 모양이군요.”

    “출판 바닥에서는 좀 오래 굴렀거든. 원하는 게 있지? 조금 비밀스러운 걸로?”

    그 직접적인 표현이 마음에 든다는 듯, 윤정식이 빙긋 웃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시니,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하지요. 웹툰을 망치세요.”

    “…허어, 내가 맞게 들은 것이 맞나? ‘웹툰을 잘 그려주세요’도 아니고, 웹툰을 망치라니?”

    “자세한 건 회사 사정이라 말씀드리기가 힘듭니다만, 대가는 충분할 겁니다. 오천을 드리죠.”

    “…오천?”

    송의진의 눈썹이 쑥, 올라갔다.

    “저번에 웹툰 5화분을 그려 주면 200을 준다고 했었는데, 이제 웹툰을 망치면 5천을 준다라. 며칠 사이 내 값어치가 많이도 뛰었군.”

    “…지금은 웹툰이 좀 잘 되고 있지만, 앞으로는 모르는 법 아닙니까? 일시불로 오천이면 그리 나쁜 대우는 아닐 겁니다.”

    웹툰 프로젝트의 물을 흐리는 건 윤정식이 꽤 오래 준비해 온 수작질이었다.

    성공만 하면 사장파의 가장 큰 세력인 장르문학부서와 서지원을 한 번에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만약 지원이 결국 자신에게 오지 않더라도, 사장파의 사내 지지기반을 흩트려놓는 것이니 어느 정도 성공이라고 여겼다.

    그걸 위해서, 일부러 송의진을 골랐다.

    아예 자격 없는 만화가를 쓴다면 괜한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었기에, 과거에는 실력이 출중했으나 이제 완전히 퇴물이 되어버린 사람을 고른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게 계획대로 착착 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송의진의 열정에 불이 붙었다.

    그 불의 정체는 돈이었다.

    동남아 출신의 며느리가 조산해서, 갑자기 급전이 필요해졌다고 들었다. 그러니, 눈앞에 놓인 일에 열정을 불태운 거다.

    ‘배고픈 개는 뭐든지 일단 집어먹는 법이니.’

    그걸 알게 되자마자, 윤정식은 바로 송의진을 찾았다.

    “이 정도면 며느리의 병원비로는 충분할 겁니다. 어떻습니까?”

    송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동요하고 있었다.

    ‘역시.’

    돈으로 붙은 열정은 돈으로 끌 수 있다.

    그대로 윤정식은 쐐기를 박았다.

    “…지금까지 그려 둔 건 어쩔 수 없고, 그다음부터 망치는 걸로 하지요. 급전개도 좋고 작화 하락도 좋습니다. 아니면 뭐, 특정 종교를 비하하거나 특정 인종을 비하하는 식의 내용을 넣어서 셧다운을 내리는 것도 괜찮겠군요.”

    그 말을 들은 송의진은.

    “……뭘 멋대로 이야기하고 있나?”

    라며, 손을 내저어 윤정식의 말을 끊어냈다.

    “난 그런 짓 할 생각 없네.”

    “…뭐라고요?”

    윤정식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방금까지의 태도는 분명 동요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눈이 커지고, 손이 떨리고, 침을 꿀꺽 삼키지 않았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송의진이 동요한 건 사실이다.

    윤정식의 말 때문이 아니라, 눈앞에 놓인 술 때문에.

    “흐흐흐, 며느리에게 분명 술을 끊겠다고 했는데, 저 안동 소주를 보니 마음이 동해서 말이야. 한 병에 20만 원이 넘는 거 아닌가?”

    처음부터 작품을 망칠 생각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윤정식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천 더 드리죠. 육천입니다.”

    “싫네.”

    “칠천.”

    “십억을 준다고 해도 싫어.”

    지난날 형우와 의재를 괴롭혔던 송의진의 완고함을 마주친 윤정식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김형우 작가랑 계약이라도 맺었습니까? 위약금이 문제라면 말씀해 주시죠.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위약금이라… 있기는 하지.”

    송의진이 피식 웃었다.

    “아들놈이 그러더군. 김형우 작가랑 한 약속 어길 거면, 평생 손자 얼굴은 볼 생각도 하지 말라고.”

    “…예?”

    “부끄러운 할아버지를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던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돈 몇 푼을 위해 은인을 배신하는 할아버지는 자랑스러운 할아버지일까, 부끄러운 할아버지일까?”

    송의진이 칠천 만원을 거절한 이유였다.

    윤정식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가족의 얼굴을 보는 건 커다란 즐거움이라네. 그런 것을 보고 고작 그런 거라니. 자네 참, 박복하게 살아왔나 보구먼.”

    껄껄껄, 송의진은 그렇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지. 더 남아 있다가는, 술에 손을 대고 말 것 같거든.”

    그렇게 말하는 송의진의 모습은 더 이상 인생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 노인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목표를 갖고 완연하게 나아가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하.”

    송의진이 나간 테이블에는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꽉 찬 소주잔과, 화려하게 차려진 채 천천히 식어가는 음식들만 남았다.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는 건가.’

    그 한가운데서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윤정석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아줌마!”

    그 외침에, 가정부가 멀리서 달려왔다.

    “예, 부회장님.”

    “이거 싹 다 버려요.”

    “예? 아직 손도 대지 않으셨는데….”

    “다 버리라고요.”

    윤정석이 따박따박 이야기했다.

    인간은 크게 두 가지 타입이 있다. 불같이 화내는 사람과, 얼음같이 화내는 사람. 윤정석의 경우 명확하게 후자였다.

    “네, 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가정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 시간 동안 열심히 만든 음식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어머, 정식아. 이게 다 뭐니? 비싼 요리들을 왜 다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있어?”

    그 순간, 누군가가 윤정식을 찾아왔다.

    “…누나? 여긴 어떻게 왔어?”

    “어떻게 오긴, 내가 못 올 데 왔니?”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누나인 윤정아였다.

    솔직히 말해서, 편한 사람은 아니다.

    “…표정 보니까 또 부탁할 게 있는 모양이던데.”

    “부탁할 거야 있지. 우리 아들 부탁이야.”

    “누나 아들이라면… 태준이?”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정식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얼마 전에도 걔 부탁 들어줬잖아? 은퇴한 작가 세 명 모으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이번 한 번만 더 부탁하자.”

    “누나가 자꾸 그렇게 오냐오냐하니까 애가 자꾸 허황된 꿈만 꾸는 게….”

    “윤정식, 말조심해. 아무리 동생이여도, 내 아들 욕하는 건 용서 못해.”

    누나의 서슬 퍼런 눈빛을 본 후에야 윤정식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도대체 자식이란 게 뭐기에, 어릴 때 그토록 총명했던 누나가 이런 팔불출이 되어버린 건지.

    다시 한번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윤정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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