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 그리고 형우는 아까 조교가 찾던데, 조교실 한번 가 보렴.”
그 말을 끝으로 한다은 교수님은 평소와 같은 파워풀한 모델 워킹으로 강의실을 나섰다.
“무슨 상담이에요?”
뒤따라 나서는 형우를 향해 연수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형우는 잘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마도 이번에 받은 문학상이랑 관련된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다. 상금이 300만 원이죠?”
“교내 문학상치고는 꽤 세지.”
“흐흐, 나중에 한턱 쏴야 해요.”
“그래, 기대하고 있어. 다음 수업도 나랑 같은 거지?”
“네. <철학과 담론> 맞죠? 207호실이에요.”
“먼저 가서 자리 좀 잡아 놔 줄래?”
“헤헷, 평소처럼 앞에서 두 번째 줄 잡으면 되죠?”
“맞아.”
보통은 맨 앞자리를 선호하는 형우지만, 207호는 예외다. 그 강의실의 스피커는 교탁에 딱 붙게 설치되어 있어서, 맨 앞자리에 앉았다가는 쉬는 시간에 얼얼한 귀를 붙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탁 좀 할게.”
“걱정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형우는 조교실을 향해 걸어 나섰다. 연수는 형우의 가방을 챙겨 들었다.
“으윽?”
가방을 들자마자 저절로 그런 소리가 나왔다.
‘대체 무슨 무게가…? 부전공으로 법학이라도 듣나?’
예전에 우연히 법학과 학생의 가방을 들어 본 적이 있는데, 노트북과 함께 3kg짜리 법전 두어 개가 함께 들어 있던 그 가방의 무게가 딱 지금 느끼는 무게감과 비슷했다.
‘…돌이라도 들었나?’
돌은 아니고, 나무였다.
과거 중국의 채륜이 발명한 공법을 통해 수 차례나 가공된 나무.
그러니까, 형우의 가방에는 책이 한 열 권 정도 들어 있었던 셈이다.
‘<돈키호테>에, 셰익스피어… <홍길동전>, <그리스 로마 신화>, 이번 이상문학상 작품집에다가 <리턴 투 디재스터>까지?’
가방 틈 사이로 보이는 건, 고전과 현대, 순문학과 장르를 가리지 않은 수많은 책의 모음집이었다.
“연수연수! 수업 잘 들었어?”
그렇게 말을 걸어온 것은, 방금 함께 강의실에서 나온 태희였다.
“이잉, 나는 수업시간에 깜빡 졸았지 뭐야. 혹시 나중에 필기 좀 빌려줄 수 있을까?”
“필기?”
“응응! 너 원래 필기 엄청 열심히 하잖아.”
“...생각해 보고. 지금은 좀 바빠서.”
“바빠? 왜? 아, 그 가방 옮기는 것 때문에 그래? 그거 네 가방이야?”
“안 도와줄 거면 비킬래?”
읏챠, 가방을 들어올린 연수가 태희를 스쳐 지나갔다.
‘짜증나.’
연수는 눈치가 빠른 사람도 좋아하고, 눈치가 없는 사람도 그런대로 귀여워서 좋아한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데도 뭔가를 위해 눈치가 없는 척 구는 고태희 같은 타입은 정말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런 연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태희는 어느새 짐을 옮기는 연수의 등뒤에 딱 달라붙어서 끊임없이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연수연수, 너 이번에 형우 선배 단편문학상 받은 작품 읽어 봤어? <영웅과 나>말야.”
“어. 읽었어.”
그냥 대충 흘려들었다.
“글 엄청 잘 쓰던데.”
“어.”
“예전에도 잘 썼지만 지금은 뭔가 깨달은 듯한 느낌이랄까.”
“…응?”
그 말은 흘려 듣기가 좀 그랬다.
“형우 선배가 예전에 쓴 글을 봤다고? 네가?”
“응응. 수업 시간에 했던 거 있잖아. 그 3학년 때 썼던 구관조 이야기라던가….”
“난 또.”
형우가 3학년 때 쓴 소설은 불교적 세계관에서 십자가를 찾아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구관조 이야기를 쓴 건 다른 남학생의 소설이다.
연수는 그 점을 알았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근데 형우 선배 이야기는 갑자기 왜?”
“왜냐니? 멋있잖아?”
태희가 마치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으응?”
그 말을 들은 연수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형우 선배가 멋있다고?”
“넌 그렇게 생각 안 해?”
“전혀. 몸 상하면서 글 쓰는 게 뭐가 멋있어?”
갑자기, 그런 말이 나왔다.
“맨날 잠도 안 자지, 바깥바람도 안 쐬서 얼굴은 거무죽죽하지, 주변 사람들 걱정이란 걱정은 다 시키는 무책임한 사람인데?”
이 말은 진심이었다.
아무리 글이 좋다고 해도 몸이 먼저다. 형우가 조금만 무리를 덜 하고 몸을 좀 보전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더 컸다
“…아무튼, 아무튼! 멋진 사람은 절대 아니야.”
그 말을 들은 태희가 뜻밖이라는 듯 되물었다.
“뭐야, 연수 너 형우 선배랑 엄청 친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
“…안 친하진 않지.”
솔직히 말하면 엄청 친하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 공태준과 얽혔던 일 때문에 형우에게 큰 피해를 줬었던지라, 차마 친하다고 대답하진 못했다.
“그거 다행이다!”
연수의 대답을 들은 태희의 입꼬리가 눈치 없이 치솟았다.
“나, 형우 선배 한번 꼬셔 보려고! 혹시 네가 형우 선배 좋아하나 싶어서 물어봤던 건데, 아니라니까 다행이지 뭐니!”
태희의 폭탄선언에, 연수는 그만 낑낑거리며 들고 오던 책들을 모두 떨어뜨릴 뻔했다.
“…꼬셔 본다고? 형우 선배를?”
“응응. 나 멋있는 사람 완전 좋아해. 들어 보니까 연애 경험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천천히 꼬시면 넘어오지 않을까?”
“너 남자친구 있잖아!”
“아 걔? 농구부에서 잘 나가는 가드라기에 한번 사귀어 봤는데 영 별로더라. 게다가 요즘은 성적도 잘 안 나오는 것 같은데.”
폭탄선언이 폭탄선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주변 사람들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잠, 잠잠잠깐만!”
잠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연수가 물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양다리잖아!”
“무슨 양다리야? 사귀기 직전에 차면 양다리 아니잖아?”
“의도가 글러먹었는데?”
“너 아까부터 계속 그런다? 혹시 너 형우 선배 좋아해? 그래서 견제구 날리는 거야? 그런 거면 내가 가서 말해 줄게. 형우 선배, 연수가 선배 좋아한다는데 혹시 아세요? 하고.”
“…뭐라고?”
“그게 아니라면 괜히 상관하지 말고. 무슨 말인지 알지?”
방해하지 말고 빠지라는 뜻이다.
태희의 피식 웃는 표정을 본 연수는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휘적거렸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당황해서가 아니라, 턱을 돌려버리려다가 참은 것이다.
“너….”
“아, 207호다! 그럼 안녕, 연수! 다음에 봐!”
방금 자신이 크게 다칠 뻔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태희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강의실을 향해 쏙 들어갔다.
* * *
“후훗.”
형우의 생각대로, 조교가 자신을 찾은 이유는 한국대학교 단편문학상의 상금 때문이었다.
무려 300만 원!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글로 한 달에 이천만 원씩 버는 애가 뭘 300만 원 가지고 그렇게 기뻐하냐고 말이다.
뭘 모르는 말이다. 아무리 부자라도 길에서 오천 원을 주우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다.
물론 늘 그렇듯이, 돈 때문에만 기쁜 건 아니다.
‘…순문학도 인정받았어!’
지난 시기 동안 장르문학만 팠던 것 같은데, 모든 물은 바다로 흐른다는 건지 순문학에 대한 이해도도 부쩍 증가한 느낌이었다.
물론 장르문학에 비하면 모자라긴 하다. 장르문학에서는 사이트 1위도 찍었지만, 순문학에서는 기껏해야 교내 문학상 대상일 뿐이니.
‘…이것도 일단 갈고닦아 두자.’
솔직히 말하면, 지금 와서 갑자기 순문학으로 U턴할 생각은 없다. 가능하다면 죽어도 장르문학을 쓰다가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순문학적인 소양이 장르에서 아예 쓸모가 없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또 아니다.
중간문학中間文學의 존재 때문이다.
흔히 SF로 불리는 공상과학소설이라던지, 일본의 작가인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파 추리 장르. 스티븐 킹의 호러 소설 같은 것.
순문학이 추구하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탐구’를 베이스로 하되, 그 표현 방식에 액션과 로맨스라는 장르적 표현 방식을 가미한 작품들이다.
그 덕택에, 이 중간문학은 양측 모두에게 큰 비판을 받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흡수될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서, 베스트셀러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이 중간문학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순문학이든 장르문학이든, 한쪽만 추구해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거지.’
주력을 바꿀 필요는 없어도, 다른 분야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필수적이라는 거다. 그렇게 고민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207호 강의실 앞에 도착했다.
“형우 선배!”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형우에게 달려든 것은 연수의 동기인 고태희였다.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 글 좀 알려 주실래요?”
“…글을 가르쳐 달라고?”
“넵! 저 이번에 공모전이랑 몇 개 준비하는데, 선배가 좀 도와줬으면 해서요!”
형우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장르소설가인 건 알지?”
“저도 이번에 장르 소설 한번 써보려고요! 선배 잡지 보니까 투룸에서 자취한다던데! 커피는 제가 사 갈게요. 아메리카노가 좋으세요, 아니면 라떼?”
그렇게 촐랑거리는 태희를 보던 연수의 눈빛이 얇아졌다.
‘…집이라고?’
집에서의 과외는 이미 확정이 된 사안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무엇을 마실지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 꽤 몸에 밴 듯한 심리적인 전술이었다.
‘…영악하기는!’
하지만 연수는 형우가 그 청을 무조건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알기로 형우는 바빴으니까. 분명 그래야 했는데.
“난 라떼로 할까.”
예상치 못한 일이다.
형우는 아무 말도 없이 태희에게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결국 참지 못한 연수가 형우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혹시 태희가 예뻐서 그런가?
솔직히 말해서 좀 그렇긴 했다. 고등학교 내내 격투기를 해서 어깨선이 직각인 자신보다는 태희가 훨씬 여리여리했다. 심지어 쟤는 노란색 쉬폰 원피스 같은 것도 어울렸다.
어쩌면 형우는 태희를 도와준 후에, 글도 다 배웠으니 술이나 한잔 마실까? 하고 물어볼지도 모른다.
적당히 취한 남녀가 시선이 맞은 후 천천히 얼굴이 포개어지고….
“…안 돼!”
연수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형우와 태희의 시선이 동시에 연수에게로 향했다.
“…안 된다니, 뭐가?”
“둘이서는 안 돼! 나도 껴줘요! 나도 선배한테 글 배울 거야!”
연수의 선언을 들은 형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지. 잘 됐다. 둘 다 오늘 노트북 가져왔지? 바로 시작할까?”
“예? 정말요?”
태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형우와 연수를 번갈아 바라봤다.
“…진짜로 연수랑 같이 한다고요?”
“응. 이왕 스터디하는 거, 사람이 많으면 좋잖아?”
태희나 연수의 예상과는 다르게, 형우의 머릿속에는 정말로 ‘후배들한테 글을 가르친다’는 생각 외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 * *
같은 시각, 공태준은 방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왜 자꾸 지는 거지?’
정신승리도 한두 번이지, 비슷한 일이 계속된다면 그조차도 할 수 없게 된다. 지금 공태준의 상태가 딱 그랬다.
어릴 때부터 원하는 것은 다 가지고 누리며 살아왔는데, 요즘 따라 그게 잘 안 됐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잘못한 게 아닐까?”
공태준의 사고는 결국, 그 지점까지 도달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는 일마다 안 될 리가.‘
자신의 한계에 봉착하여, 자신의 잘못을 깨달으며, 자신의 세계관을 직시하기 시작한 순간.
헤르만 헤세의 말을 빌리자면, 앞으로 한 걸음만 더 도약하면 알을 깰 수 있는 성장의 순간.
똑똑,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가 공태준의 생각을 헤집어 놨다.
“아들, 안에 있어?”
공태준의 어머니인 윤정아였다.
“엄마랑 같이 외식 안 할래?”
“…안 돼. 오늘은 글 써야 해.”
태준이 삐딱하게 대답했지만, 윤정아는 그에 굴하지 않고 한 번 더 방문 너머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면 그거 끝나고, 엄마랑 같이 다른 작가들 보러 안 갈래? 오늘 출판사 소속 작가 모임이 있거든.”
사실 모임은 방금 잡았다.
시무룩해하는 아들의 기를 세워주기 위해서, 인맥을 총동원해 작가들을 끌어모았다.
“…작가들?”
철컥-
아들의 방문이 열렸다.
“장르문학 작가들도 있어?”
그 순수한 질문에, 윤정아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들을 껴안았다.
“물론이지 태준아. 네가 바라는 건 뭐든지 해 줄 수 있단다. 넌 소중한 내 아들이니까.”
그 행동은 마치, 어미새가 알을 보호하는 모습을 꼭 빼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