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가끔 그런 상황이 있다.
나는 상대가 기억나지 않는데, 상대는 나를 알아보고 친한 듯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
‘…곤란한데.’
친한 듯 구는 상대에게 ‘난 너를 몰라’라고 말해버리면, 분명 마음이 상할 거다. 상대가 자신을 모를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상황이면 더더욱.
한 번 보고 안 볼 사이라면 모를까, 상대는 좋든 싫든 한 학기 내내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학우다. 서로 마음 상할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어, 오랜만이다! 그, 잘 지냈어?”
그래서 그냥 아는 척을 했다.
“네! 선배! 복학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인사가 좀 늦었죠?”
“하하, 그럴 수도 있지!”
연기를 하다 보니 조금 텐션이 올라갔다.
“우리 전에 어디서 봤더라?”
“기억 안 나요? 수업 같이 들었었잖아요! 말은 많이 안 했었지만.”
“아아, 맞다. 철학론 맞지?”
“저는 철학론 안 들었는데요?”
“그럼 정신분석학?”
“어, 그것도 아닌데….”
말하면 말할수록 뭔가 밑천이 드러나는 느낌이다.
‘진짜 누구지…?’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차, 자그마한 손가락 하나가 형우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안녕하세요, 선배.”
“아, 연수야.”
형우가 연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형우와 이야기 중이던 여학생도 아는 체를 했다.
“연수연수, 이제 등교한 거야?”
“그렇지. 계단에서 교수님 마주쳤어. 곧 오실걸?”
“으윽… 어쩔 수 없네. 형우 선배, 나중에 마저 이야기하는 걸로 해요!”
“아, 알았어….”
그 여학생이 강의실 구석에 앉는 것을 본 후에야, 형우는 나지막하게 연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쟤 누구야?”
하고, 슬쩍 물었다. 연수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것도 모르고 이야기한 거예요?”
“아니 상대가 나를 안다는 듯이 구는데, 거기에 대고 너 누구야? 하긴 그렇잖아.”
“하기야, 선배 성격이면 그럴 만도 하죠. 제 동기에요. 고태희.”
이름을 들어도 딱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연수가 부연 설명을 했다.
“그, 있잖아요. 3년 전 신입생 환영회에서 도라에몽 성대모사 했던 애요.”
“도라에몽 성대모사 한 애가 다섯 명은 됐던 것 같은데….”
“그건 그렇네.”
대학교 신입생들의 장기자랑 때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두 개 있다.
<기생충>에 나오는 이선균 성대모사와, 도라에몽 성대모사. 대충 한 다섯 명씩은 나온다.
적당하게 특별한 건 완전 평범한 것보다 못하다는 말의 가장 좋은 예시나 마찬가지다.
“…그거 말고 내가 알 만한 건 없어?”
“1학년 때, 쟤 사이에 두고 남자애 둘이서 싸운 적 있었는데, 그건 알아요?”
“들어본 것 같은데.”
“태희는 둘 다 그냥 친구로 지내고 있었는데, 남자애들이 지들끼리 혹해서 태희는 나를 좋아해! 한다며 싸운…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죠.”
“그 멍청이들은 바로 군대로 튀었겠군.”
“정확하네, 어떻게 알았어요?”
“뻔하지.”
형우가 피식 웃었다. 그 사이, 한다은 교수님이 들어왔다.
“애들아 안녕? 수업 시작할까?”
그 말에 맞춰 형우는 펜을 들고 안경을 고쳐 썼다.
죽죽-
교수가 화이트보드에 보드마카를 긋는 소리가 교실 전체에 가득 찼다.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이 문장을 아는 사람 있니?”
문창과 학생들 몇 명이 손을 들었다. 교수가 그들 중 하나를 지목했다.
“고태희 학생, 대답해 보세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돈키호테>를 읽어 보셨나요?”
“네.”
“재밌게 읽었나요?”
“그렇습니다. 웃긴 이야기잖아요.”
고태희의 이야기를 들은 형우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큰일 났네.’
사람들은 종종 ‘배운 소설’이나 ‘들은 소설’을 ‘읽은 소설’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같은 것이 그렇다. 쿡 찌르면 줄거리는 줄줄 읊는 사람들이 태반이지만, 사실 실제로 읽어 본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도 그런 소설인데, 대표적인 착각은 <돈키호테>를 웃긴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형우가 생각하기에 <돈키호테>는 웃긴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소설들보다 지나치게 진지하고 집요한 편이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남자의 모습으로 대표되는 돈키호테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움이지만, 딱 그 부분 뿐이다. 심지어 그 부분도 설명하니 웃길 뿐, 소설 자체의 묘사로 보면 그리 웃기지만은 않다.“…글쎄요, 저는 <돈키호테>를 별로 웃기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요.”
역시, 교수님도 똑같이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당시라면 모를까, 21세기의 현대인 관점에서는 별로 웃긴 소설은 아니지요. 저만 해도, <돈키호테>를 읽다가 몇 번이나 잠들 뻔했답니다.”
교수님의 익살맞은 말에 하하하, 하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돈키호테>를 각 잡고 읽어 본 사람이라면, 교수님의 말이 아주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것이다.
130개에 가까운 쳅터부터, 그 길고 긴 스페인 특유의 만연체까지. 형우도 그 향취에 익숙해지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고수풀을 먹는 느낌이었지.’
처음에 고수를 먹으면 비누를 왜 먹지? 생각이 들어도, 한 번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부터는 그 풀이 맛있게 느껴지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랄까.
“세르반테스에게는 아주 놀라운 별명이 하나 있죠. 혹시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작품이나 작가는 알아도, 작가의 별명까지 알고 있는 학생은 몇 없었다.
형우는 그 몇 없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
“형우, 말해 보렴.”
“세르반테스의 별명은 ‘작가들의 작가’입니다.”
“맞아요.”
요즘 흔히 쓰는 랩퍼들의 랩퍼, 선생들의 선생같은 ‘OO들의 OO’라는 표현의 원조는 세르반테스다.
정확히는, 2002년에 노벨재단에서 진행되었던 한 프로젝트에 의한 거였다. 노벨제단은 노벨 문학상 후보에 거론되었던 작가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가장 위대하다 생각하는 작가에 대한 투표를 진행했다.
그 중 50% 이상의 득표율로 당선된 것이 바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였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요즘이야 남미 문학과 아시아 문학이 득세 중이지만, 당시의 문학은 영미권이 강세였으니까요. 당연히 영미권 작가인 찰스 디킨스나 셰익스피어가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리라 예상했는데, 예상외로 17세기 스페인 문학가가 압도적인 수치로 1위를 기록한 거였으니까요.”
그 놀라운 성과에, 노벨 연구재단에서 세르반테스에게 붙여준 별명이 ‘작가들의 작가’였다.
그러니, 사후死後에 붙은 별명이었던 셈이다.
“정확하군요.”
형우의 발표를 들은 한다은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수업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로 할 겁니다. <돈키호테>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자유롭게 이야기해 보세요.”
또다시 학생들 몇 명이 이야기를 꺼냈다.
“기사도 문학에 대한 풍자와 비판입니다.”
“근대 소설의 효시입니다.”
저 정도는 인터넷에 검색하기만 해도 나오는 부분이다. 대학교 학부생이라면 다른 대답이 나올 거라 기대했는데. 한다은은 남몰래 한숨을 푹 쉬었다.
‘등단을 꿈꾼다는 애들이 아직 <돈키호테>조차 읽지 않았을 줄이야….’
하기야, 요즘 나오는 소설 읽기에도 벅찬 애들이니 이해는 됐지만, 그래도 조금 서글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김형우 학생은 좀 다른 걸 알고 있나요?”
“제 생각에는…….”
형우가 천천히 운을 뗐다.
“풍자문학이라는 것도 맞는 말이고, 근대 소설의 효시인 것도 맞습니다만… 제 입장에서는 ‘대화의 즐거움’이 소설의 중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호.”
드디어 사전적인 의견이 아니라, 개인의 의견이 나오는 건가. 한다은이 눈을 반짝거렸다.
“말해 보세요.”
“문학이란 문학 자체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다른 문학과 상호공존하거나, 혹은 비교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문학작품이 하나뿐이라면 의미가 없다.
문학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 비교됨으로써 의미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돈키호테>를 읽으면서 생각났던 작품은 <아라비안 나이트>로도 알려진 <천일야화>, 그리고 <시녀 이야기>라는 드라마의 원작으로 유명한 마가릿 애트우드의 <그레이스>입니다.”
“훌륭한 작품들이죠.”
“네. <천일야화>는 세헤라자데가 세계를 구하기 위해 즐거운 이야기로 잔인한 왕을 현혹시키는 이야기입니다. <그레이스>는 살인자로 지목된 하녀인 그레이스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내기 위해 정신과 의사인 조던에게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는 내용이지요.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목숨을 구하는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저는 <돈키호테>에서도 같은 걸 느꼈습니다.”
<돈키호테>를 처음 읽은 사람이 느끼는 것은, 산쵸와 돈키호테 사이에서 진행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대화다.
어떤 페이지는 소설이 아니라 시나리오 대사집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주인공인 돈키호테는 남에게 구속당하지 않고, 스스로를 위해서만 사는 인간입니다. 남들이 거대한 ‘태양’이나 ‘달’ 같은, 세상이 정해준 대단한 것들에 매달릴 때,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 중 하나를 마음에 품은 후에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진정한 자유주의자지요.”
“오호.”
한다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형우의 말은 계속됐다.
“돈키호테는 끊임없이 산초와 대화하며 자신의 포부와 꿈과 희망을 밝힙니다. 산초에게 가슴속에 별을 품는 법을 알려 주지요. 그리고 산초는 나중에 섬의 지배자가 되어, 돈키호테와의 대화에서 배운 것들을 사람에게 전달합니다. 그 순간 돈키호테의 이야기는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처럼, <그레이스>의 그레이스처럼, 오래된 질서 하에서 쇠락해가는 세상을 구하기 위한 이야기로 진화하는 것입니다.”
즐거움과 흥미, 그리고 새로운 것.
그것들이 쇠락해가는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
“많은 작가들이 <돈키호테>를 최고의 작품이라 꼽은 이유도 그런 게 아닐까요?”
그 믿음이야말로,
소설가들의 산타클로스 같은 것이다.
믿든, 믿지 않든, 어린아이들에게는 ‘그럴 수 있다’고 설명해주고 싶은.
“와아.”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형우를 바라봤다.
저번 한국대학교 리더 행사 때 연습을 한 덕인지, 형우의 발표에는 왠지 모를 힘이 있었다.
“형우 선배, 한 학기 쉬고 온 거 맞아? 완전 쌩쌩한데?”
“장르문학 쓴다기에 순문학은 손 놓은 줄 알았는데, 저게 방금 생각한 대답이라고? 준비해 온 거 아냐?”
“뭔 소리야. 이번 단편문학상 형우 선배가 탔잖아. 소식 못 들었어?”
질문을 듣자마자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 개인적 견해를 내놓았고, 자신의 의견에 힘을 더하기 위해 비교문학적인 기법까지 활용했다.
“…거의 대학원 수준인데?”
그 수근거림을 들은 한다은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끼리 비교하는 건 아주 중요한 방법론 중 하나지요. 형우 학생이 좋은 시도를 했습니다.”
단순한 발표긴 하지만, <천일야화>를 <돈키호테>랑 비교하는 건 꽤 신선한 시도였다.
“…형우 학생은 졸업 논문을 쓸 생각인가요, 아니면 졸업 작품을 낼 생각인가요?”
“졸업 작품을 낼 생각입니다.”
보통 시나 소설을 쓰는 학생들은 졸업 작품을 내고, 평론이나 연구에 마음을 둔 학생들은 졸업 논문을 쓴다.
“으음, 아쉽네요. 방금 주제로 논문을 써도 꽤 재미있는 시도가 될 텐데.”
교수가 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칭찬 중 가장 커다란 칭찬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 칭찬에, 형우는 왠지 멋쩍은 기분이 들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멋있었어요, 선배.”
자리에 앉자마자, 뒷자리에 앉아 있던 연수가 어깨를 톡톡 쳤다.
“수업 시간에 발표한 것 가지고 뭘.”
형우가 앉으면서 주변을 살짝 둘러봤다.
연수를 비롯한 학생들 중 몇 명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두 명은 좀 특이한 반응을 보였다.
‘…저 새끼는 늘 일관적이네.’
한 명은 당연히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형우를 노려보는 공태준이었고,
“오올, 선배!”
다른 한 명은 형우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고개를 끄덕이는 고태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