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68화 (68/200)

#67

누군가는 인간을 정치政治하는 생물이라고 정의했다.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란 권력을 분배하는 그 과정 전반을 말한다. 재력이 금을 기준으로 움직인다면, 권력이란 인간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고로, 권력이란 인간을 다루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과 금의 가장 큰 차이는 그거거든. 금은 양이 제일 중요하잖아? 많으면 장땡. 하지만 사람은 질이 중요하거든. 평범한 사람 천만 명보다 아인슈타인 한 사람이 더 위대한 것처럼. 그러니, 좋은 사람이 있으면 욕심이 안 나고 배겨?”

윤정식이 초밥을 게걸스럽게 삼켰다. 아니, 게걸스럽다는 것은 지원이 그렇게 느끼고 있을 뿐이다. 생선의 흰 살 끝을 들쳐올린 뒤 밥에만 간장을 살짝 바르는 솜씨는 게걸스럽다기보다는 마치 학습된 것처럼 고풍스럽다.

TV에서 나오곤 하는, ‘초밥 제대로 먹는 법’의 예시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니 게걸스럽게 느껴지는 건 그의 식욕이 아니라 권력욕이다.

“어때, 생각해 봤어? 내 제안 말이야.”

“사장님을 버리고 라인을 갈아타라는….”

“버리라고까진 안 했어. 그건 양심에 찔리잖아? 그냥 가끔, 그 양반이 하는 말 잘 들었다가 나한테 슬쩍 흘려주기만 하면 돼.”

말이 ‘흘려준다’지, 첩자 질을 하라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저는 사내 정치에 뜻이 없습니다. 그저 일을 열심히 하는 게….”

“나도 알아. 뜻 없는 거. 근데 있잖아, 정치는 물살 같은 거야. 어느새 빠져 있는 거지. 지금 서 수석 상황을 봐도 그렇잖아?”

“…윽.”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거야. 맞거나 때리거나 선택할 상황이면, 차라리 때리는 게 낫다고. 이거 나름 특권이다? 멍청한 놈들은 선택권도 없이 맞기만 해야 하는 게 회사라는 곳이야. 그, 네가 아낀다는 작가 이야기도 똑같잖아.”

정식이 자연스럽게 형우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 웹툰화 잘 안된 거, 내 말 한마디면 다시 프로젝트 원상 가동 가능해. 서 수석도 이번에 공적 좀 빵빵하게 쌓고 계단 좀 타고 싶잖아? 언제까지 실무팀에서 일할 거야? 편집장 달아야지.”

“…이미 편집장님이 부회장님 라인이잖습니까?”

이미 장르소설 편집부는 절반 정도 당신의 것이나 마찬가지다- 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었지만, 윤정식은 다르게 이해했다.

“아아, 그러니까 공판석이 내 라인 타는 사람이니까, 그 자리가 서 수석한테 안 올 것 같다? 의외로 야망 있네?”

“그게 아니라….”

“걱정 마. 내가 갖고 있는 빈 의자가 거기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윤정식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빈 술잔을 지원에게 내밀었다.

“내 말 알아들었으면, 잔 채워 줘.”

잔을 채워 준다는건, 내일부터는 부회장의 스파이가 되겠다는 뜻이다.

오늘처럼 출근하겠지만, 열정을 불태웠던 회사는 정치판으로 느껴질 테고, 예전처럼 그저 열심히만 일하기는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 잔을 채우면 웹툰과 관련된 일은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마음을 결정한 순간,

“여기는 손님방이라 출입이….”

“누가 사람 좀 불러요!”

“아니, 아는 사람이라니까요?”

문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쿵쿵거리는 소란을 듣던 윤정식이 눈살을 찌푸렸다.

“…중요한 순간에 시끄럽게. 안 그래, 서 수석?”

지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못 했다. 사람이 입을 벌린 채로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어어?”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죄다 익숙했다.

‘여기는 손님방이라 출입이’는 아마 카운터에 있던 사람이 한 것이겠고,

‘누가 사람 좀 불러!’는 주방장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린 ‘안에 아는 사람이 있다니까요?’는 분명, 김형우의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네요.”

“작가님? 여긴 어떻게?”

“…작가님이요? 이 사람은 누구죠?”

눈을 깜빡이는 지원을 보며, 윤정식이 언짢은 듯 물었다.

“제 담당 작가님이에요. 김형우 작가요.”

“김형우라면… 참새치?”

방금까지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실물로 본 것은 처음이다.

“…어이구! 죄송합니다, 손님!”

뒤늦게 들어온 종업원이 형우의 두 팔을 잡아끌었다.

“안 된다고 하는데도 이분이 막무가내로….”

“놔두세요. 아는 사람 맞습니다.”

윤정식이 제지하자, 종업원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인 뒤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갔다. 일식집 <훗카이도>가 접대의 성지가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침묵과 순종이었다.

“참새치 작가시라고요! 반갑습니다!”

윤정식이 과장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올해 회사에 커다란 수익을 가져다준 걸로 들었습니다. 제 소개를 하자면….”

“알고 있습니다. 윤정식 부회장님이시죠?”

호오, 윤정식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참새치 작가님. 혹시, 어디서 절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런 말 하긴 좀 부끄럽지만, 그렇게 잘 알려진 얼굴은 아닐 텐데요.”

“몇 번인가, 교내 잡지에서 본 적이 있었습니다.”

C&N의 부회장인 윤정식은 형우와 같은 한국대 문창과 출신이다.

“…그렇군요. 기억 났어요. 동문회에서 가끔 그런 게 오긴 했지요.”

그렇게 대답한 뒤, 윤정식은 활짝 웃었다.

“저희 회사에 큰 이득을 주신 작가이신데다가, 제 후배라니. 이거, 범상치 않은 인연인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좀 자리가 좋지 않군요. 보아하니 서 수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오신 것 같은데, 제 이야기가 끝나기를 조금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앞으로 삼십 분이면 다 끝날 텐데요.”

“안 됩니다.”

형우가 고개를 저었다.

“순서가 틀렸습니다. 제 이야기를 먼저 듣고, 그다음에 부회장님께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제 이야기는 1분이면 끝납니다. 지원 편집자님.”

그렇게 말한 뒤, 형우는 그대로 들고 온 종이를 지원에게 내밀었다.

“…작가님? 이게 뭐죠?”

“웹툰입니다.”

정확히는, 송의진과 의재가 어제 하루종일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완성한 웹툰 수정본이었다.

“이건.”

웹툰을 읽던 지원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시대에 맞지 않는 유치한 연출은 죄다 사라지고, 트렌드적인 연출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구닥다리처럼 보일 수 있는 극화체는 <전설의 보안관>의 배경인 서부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오히려 신선한 느낌까지 줬다.

촌스러운 건 사라지고, 낡은 건 고풍스러워졌다.

“…어떻게 며칠 만에?”

“헤헷, 직접 만나서 설득했거든요.”

그렇게 말한 뒤, 형우는 그대로 윤정석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실례 많았습니다. 제 용건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야기 마저 하세요.”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형우는 그대로 뚜벅뚜벅, 나가 버렸다.

‘…웹툰을 완성했다고?’

윤정석은 혼란에 빠졌다. 완성되지 못하도록 분명 수를 써 놨을 텐데. 특히 만화가 송의진은 윤정석이 직접 골랐다. 일생의 모든 열정을 연소시켜서열정 따위 한 줌도 없는 노인네였다.

‘그 다 탄 잿가루에 불을 다시 붙였다고?’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윤정석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새 웹툰을 끝까지 다 읽은 지원이, 열린 문을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오늘 술은 못 할 것 같습니다. 웹툰 관련으로 일이 생긴 것 같거든요. 저도 이만.”

열린 문틈으로 형우를 쫓아 달려 나가는 지원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둘이 나간 후,

“…어이가 없군.”

그렇게 생각하며, 윤정식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런 정식에게, 점주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사장님, 계산은.”

“사장?”

윤정식은 종업원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어디에 대고 사장이야. 나는 부회장이야, 곧 회장이 될 사람이라고. 알겠습니까?”

“히익, 아, 알겠습니다!”

마구잡이로 난동을 부리는 놈 하나 똑바로 못 막아서 일을 뒤틀어 버린 걸로도 모자라, 호칭까지 실수하다니.

“…새로운 식당을 알아봐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윤정식은 천천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송의진에 대해 알아봐. 어떻게 된 건지.”

다 탄 장작에 용케 불을 붙인 것 같다만, 그게 영원히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다시 물속에 처박으면 그뿐.

* * *

신규 웹툰 <전설의 보안관>

글 : 서의재 / 그림 : 송의진

뭔가 2% 부족한 허당 보안관 헤럴드, 무뚝뚝한 복수귀 베아트리체를 만나다?

스토리, 서부극 / 15세 이용가

♥17,586

웹툰이 완성된 지 이튿날, 웹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후우.”

이미 몇 번이나 본 내용을 재빠르게 훑은 후, 바로 댓글창으로 넘어갔다.

멍애 : 와 미쳤다 ㅋㅋㅋㅋ 전설의 보안관 웹툰화 축하드립니다!

헤럴드 : 먼저 소설 보신 분들 스포 자제부탁드립니다!!!!!!

하꼬인생 : 그림체 미쳤냐고 ㅋㅋㅋ 서부극에 극화감성까지 와… 진짜 미쳤다.

호무호무 : 송의진 작가님 제가 아는 그 송의진 작가 맞음? 80년대에 <깡소주가 어올리는 밤>이랑, <스트레이키즈> 연재하셨던 그분?

김뻥 : <스트레이키즈>의 송의진이라고?

커피콩페이지 웹툰 순위 19위, 네이비시리즈 17위. 아주 쾌적한 출발이었다. 띠링, 하고 지원의 문자가 도착했다.

지원 : 저희 내부자료로 검토해 본 결과, 보통 이 정도 지표면 3달 내로 1위를 달성하더라고요.

형우 : 정말요?

지원 : 물론이죠. 제 편집자로서의 명예를 걸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실패하면 사죄의 의미로 그랜절을 박도록 하지요.

지원 : (노란색 모자 쓴 고양이가 그랜절을 하고 있는 이모티콘)

지원 : (고양이가 광선검 들고 공중제비 도는 이모티콘)

지원 : (고양이가 츄르 거절하는 이모티콘)

지원의 답장에 형우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형우 : 대체 저런 이모티콘은 어디서 구해요?

지원 : 비밀!

…평소의 그 딱 봐도 ‘나 완전 능력 뛰어난 커리어 우먼임!’이라고 외치는 듯한 뚜렷한 자기주장 탓에 티는 잘 안 나지만, 지원은 상당히 마이너한 취향을 갖고 있는 편이었다.

애초에 가장 좋아하는 피자가 하와이안 피자라고 했으니까.

지원 : 아무튼, 이번 웹툰 대박난 거 축하드려요!

형우 : 지원님 덕분이죠.

지원 : 평소였으면 내 덕분 맞아요! 할텐데, 이번엔 아니네요. 형우님 덕분이죠. 아, 송의진 작가님이랑 서의재 작가님한테도 연락 하셨어요?

형우 : 지금 하려구요.

어느새, 지원은 의재도 ‘서의재 작가님’이라고 깍듯하게 불렀다.

‘…지금 또 작업 중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형우는 그대로 의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확히 5초 후, 의재가 전화를 받았다.

“어, 형우야. 무슨 일이냐?”

“뭐야. 작업 중 아니었어? 용케 전화 받네.”

“말도 마라. 작가가 이렇게 힘든 직업인 줄 처음 알았다. 요즘 눈도 아프고, 똥 쌀 때도 뭔가 불편하고… 미치겠다.”

“아직 아프고 불편한 정도면 괜찮은 거야.”

위로라고 한 건데, 말하고 보니 약간 꼰대같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는가. 형우는 실제로 치질 수술도 받고, 과로로 입원도 했었다.

“…인마, 너도 편집부에 전화해서 한약이라도 챙겨 달라고 해.”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에구구.”

“그래도 걱정 마라. 조만간 기적을 보게 될 테니.”

“…기적이라니? 형우 너 교회라도 다녀?”

“교회는 아니지만, 후후후… 조만간 너의 통장 위에 기적이 내리리니.”

통장에 찍힌 숫자만 보면 굽혔던 등허리가 번쩍 펴지고, 피곤했던 눈의 통증이 사라지며, 잃어버렸던 창작 욕구가 슉, 하고 돌아온다.

“이번 작품 완전 대박인 걸로 봐서, 유료화만 되면 한 화에 오백은 찍을 것 같던데?”

“미친, 한 화에 오백?”

1주일에 5일 올리는 웹소설과 달리, 웹툰은 보통 주 1회 연재가 보통이다. 형우의 <전설의 보안관>도 마찬가지다.

1회에 500이면, 한 달 수익은 2,000에서 2,500 정도.

“플랫폼 수수료랑 출판사에서 가져가는 거 제하면, 그 절반 정도 남아.”

그러면 남는 건 적게 잡아도 천만 원. 천만 원은 형우와 송의진, 그리고 의재가 나눠 갖는다.

형우는 <전설의 보안관>의 저작권을 판권판매식이 아니라 비율정산식으로 판매하였으므로, 그 천만 원 중 12%, 120만 원은 형우의 수중에 떨어진다.

그것도 지금 기준이고, 지원의 말에 의하면 웹툰은 조만간 가파르게 성장할 거라고 한다.

‘…네이비 웹툰 TOP20 작가의 평균 연봉이 15억 가까이 된다고 했지 아마….’

그중에서 12퍼센트면, 1,800만 원 정도.

‘…아무것도 안 해도 매년 1,800만 원이 수중에 떨어진다는 거야?’

웹툰화 만세! 그렇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한국대학교의 제3강의실.

“형우 선배! 웹툰 봤어요! 완전 대단하던데요?”

그렇게 말을 붙인 여학생을 보며, 형우는 좀 당황했다. 뜬금없다거나, 안 친해서가 아니다.

‘…애가 누구였더라?’

기억에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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