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상을 쓰겟다-67화 (67/200)

#66

송의진과 서의재.

둘이 하는 짓은 꽤나 못 봐줄 꼴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작업까지 못 봐줄 모양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세상에.”

기한까지 넘겨야 하는 웹툰 화수는 총 10화. 형우는 처음에 기존에 그렸던 웹툰을 조금 수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적어도, 그 촌스러운 연출 같은 것들이라도.

“고치라고? 싫다.”

송의진은 거절했다.

그는 만화를 고치고 싶지 않아 했다.

대신, 처음부터 다시 그리겠다 선언했다.

“…다 떨어진 줄 알았는데, 잉크가 꽤 많이 남아 있었군.”

어제까지만 해도 온몸에 힘이 들어간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노인이었는데, 지금의 송의진은 엄청나게 숙련된 장인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완고하던지. 열심히 그린 만화를 찢어버리며 ‘이게 아니야!’라고 외치면 어쩌지, 하고 형우는 고민에 빠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진짜 장인은, 애초에 나쁜 물건은 안 만든다고.”

여전히 말투는 오글거렸지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만큼의 실력 또한 갖고 있었다.

슥삭슥삭.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직선은 황야가 되었고, 어린아이 낙서처럼 그리던 동그라미는 황야에 굴러다니는 회전초가 되었으며,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옛 유행가의 가사들은 곧 베아트리체와 헤럴드가 되었다.

“아그야, 시간은 얼마나 남았다고 했지?”

“3주요.”

“3주 내에 10화라. 별거 아니군.”

송의진은 한때 ‘1인 만화공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다작多作에 능한 작가였다.

“전에는 만화 세 편을 동시에 연재한 적도 있었지. 그때는 정말 죽을 뻔했지 뭐냐. 하하.”

거짓말 같은 영웅담을 당당하게 말하는 그 노인의 등이 얼마나 든든하게 느껴지던지.

“…제가 도울 일 있을까요?”

“아그야, 가서 쉬고 있어라. 만화 모르는 놈한테 손 벌릴 정도로 이 송의진이 아직 안 죽었다. 그나저나, 다음 콘티는 멀었냐, 제자야?”

“곧 됩니다, 스승님!”

바쁘기는 방구석에 책상을 놓은 의재도 마찬가지였다. 송의진의 기준에서 형우는 ‘만화를 모르는 놈’이었지만, 의재는 ‘좀 아는 놈’ 취급을 받았다.

사실 처음에는 콘티도 송의진이 스스로 짜겠다고 했었다. 의재는 그 부분을 극구 반대했다.

“스승님.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책장을 한번 보세요.”

의재는 화실에 박힌 책장을 가리켰다. 그곳에 꽂힌 만화들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명작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고전 작품이라는 것이다.

“데즈카 오사무의 <블랙 잭>,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다 좋은 작품들이죠. 그런데 너무 옛날 것들이기도 해요. 요즘 트렌드는 솔직히 잘 모르시잖아요?”

“모르긴 내가 왜 몰라! 나도 요즘 만화 많이 봤어!”

“가장 최근에 본 만화가 뭔데요?”

“<드래곤 볼>.”

“…….”

너무 당당하게 이야기한 탓에, 형우는 순간 정말로 <드래곤 볼>이 최신작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다행히 듣고 있던 의재가 먼저 태클을 걸었다.

“…그거 95년에 완결된 작품이잖아요. 거의 30년 전 거.”

“…어험. 세월이 벌써 그렇게 흘렀나? 그래도 뭐, 요즘 애들이나 옛날 사람이나 뭐가 그리 다르겠냐?”

“저… 혹시 ‘개좋다’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강아지를 좋아한다는 뜻이지, 누굴 노망난 노인네로 보나?”

그리고 잠시 후, 송의진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개좋다’의 뜻이 ‘매우 좋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배웠다.

“고작 ‘개좋다’같은 거 하나로? 난 인정 못 한다.”

“그러면요, 쩐다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그게….”

“오진다는요? 듣보잡은? 빌드업은? 사이다는? 고구마는요?”

신조어의 폭풍 앞에서, 송의진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빼쭉 내밀었다.

“표준어 놔두고 왜 그런 거 쓰냐? 좋은 만화는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법이야.”

“웹툰 보는 사람 대부분은 10대부터 30대잖아요. 아무래도 아예 모르는 건 조금 문제가….”

“…세종대왕님이 슬퍼하실 거다.”

꽁해서 중얼거리는 송의진을 보며, 형우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 우리나라의 유명한 소설가인 이태준 선생님의 <문장강화>를 보면 이런 말이 나와요. 만약 비속어나 외래어가 원래 말보다 더 친숙하게 쓰일 경우에는 그 말을 사용하는 게 옳다고….”

“와, 설명충 등판.”

“뭐래, 낄끼빠빠 안 해?”

둘의 대화를 듣던 송의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명충은 또 뭐고, 낄끼빠빠랑 등판은 또 뭐냐?”

“그게요….”

“됐다, 됐어. 그거 하나하나 공부하느니, 너희들 말대로 하고 말지.”

송의진은 결국 자신이 요즘 트렌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별로 부끄럽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뭐 모를 때마다 부끄러워하면, 뭐 만드는 직업은 오래 못 해 먹지.”

가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무능력의 발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송의진의 생각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능력이고, 그걸 못하는 인간이 오히려 무능력한 거라고.

“…분업이야 많이 해 봤다. 우리 때도 있었어. 나도 지우개 칠부터 시작해서 선따기로 올라갔다가, 결국에는 만신이 되었으니.”

만신, 송의진은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것을 꽤 즐기는 듯했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과한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송의진의 작업을 지켜보던 형우는 그 만신이라는 것이 엄청나게 과한 별명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콘티를 짜는 속도보다 송의진이 콘티를 받아 그림으로 완성하는 속도가 더 빨랐던 것이다.

‘그래도 조금 과한 감은 여전히 있지만….’

어떻게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작업을 시작한 지 하루 만에 1화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오.”

형우가 짧게 탄성을 내질렀다. 사실 송의진의 스타일은 요즘 웹툰과 좀 거리가 있었다.

데포르메. 다른 말로는 간략화라고 부르는데, 만화에 등장하는 대상이 현실과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를 나타내는 용어다.

예를 들자면,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보통 눈이 크고 코가 작게 표현된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얼굴형이 되는 것이다. 미국 디즈니의 카툰 풍으로 가자면 그런 경향은 더더욱 심해진다. 아예 인간을 2등신, 3등신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그림체와 미국의 카툰풍 그림체는 현시대를 아우르는 가장 큰 규모의 캐릭터 산업이다. 한국의 웹툰 역시도 그 화풍의 영향을 꽤나 많이 받았는데, 그중에서는 미국보다는 일본의 영향을 조금 더 많이 받았다.

그 덕에, 한국의 웹툰 작가들 또한 만화를 그릴 때 눈이 크고 코가 작으며 데포르메가 많이 된 스타일로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화풍이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

송의진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만화를 그리던 사람이었다. 그림체 또한 당연히 달랐다.

펜선의 거친 느낌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극화劇畫. 그것이 송의진의 진짜 스타일이었다.

‘…역시, 잘 어울리잖아.’

형우가 쓰는 <전설의 보안관>은 20세기 후반 할리우드에서 성행했던 서부극을 기반으로 둔 웹소설이다. 이미 한 철 지난 유행을 복고풍으로 되살려낸 느낌이랄까.

거기에 마찬가지로 옛날 스타일인 극화가 만나니, 그 두 가지는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마치 잘 만든 오리엔탈 샐러드처럼.

“아니, 이렇게 그릴 수 있으면서 왜 전에는 5등신 아동 만화체로 그렸어요?”

“그게 그리기 쉬우니까.”

“아오…!”

송의진의 그림 실력이나 형우의 원작도 훌륭했지만 사실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의재의 콘티였다.

[여기서는 총의 방아쇠를 강조할 것]

[집중선은 평소의 80% 정도만]

[최대한 동적으로]

‘극화체의 거친 느낌을 살리면서도, 촌스럽지 않도록 구도와 연출을 짜냈어.’

아무리 원작의 도움이 있었다고 해도,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 구도나 시점 등이 아주 명확하고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의재는 마치 헤럴드와 베아트리체의 모험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카메라맨처럼, 그 모습을 가장 긴박한 느낌으로 적재적소에 잘 담아냈다.

당연히 코피가 터져 하늘 높이 날아가거나, 주먹만 한 혹이 나거나, 반했을 때 눈이 하트 모양으로 변하는 등의 구닥다리 연출들은 등장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의재가 할 줄 알았던 건 그뿐만이 아니다.

“잠깐 피씨방 좀 갔다 올게.”

“피씨방은 왜?”

“그린 거 스캔하려고. 그래야 채색하지.”

“…너 채색도 할 줄 알아?”

“나는 할 줄 모르지만, 할 줄 아는 사람은 알아. 저번에 알게 된 프리랜서가 한 명 있거든.”

그렇게 말하는 의재 녀석이 얼마나 든든하던지. 형우는 녀석의 어깨에 팔을 턱 걸었다.

“진짜,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무슨. 오히려 내가 고맙지 인마. 이렇게 좋은 기회까지 줬는데.”

둘의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씩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시시덕거리던 중, 의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나저나 형우 너, 지원 편집자님한테 말해줘야 하지 않아?”

“뭘?”

“일이 잘 끝났다는 거 말야.”

“헉.”

작업하는 모습을 바라보다 깜빡 잊을 뻔 했다. 형우는 재빨리 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뚜루루….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 메시지로…]

휴대폰은 받지를 않아서, 그대로 사무실 쪽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C&N 장르소설 편집부입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지원의 것이 아니었다.

“저는 김형우, 그러니까 참새치 작가인데요, 혹시 지원 편집자님 안 계신가요?”

“지원 편집자님이라면… 아까 부회장님이 부르셔서 어디 나가셨는데요. 휴대폰 두고 나가셨나 봐요.”

“부회장이요?”

부회장이라면, 자신의 소설을 인질로 잡고 지원을 겁박했다던 그 사람이다.

형우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어디로 가셨죠?”

“그, 판교에서 식사하러 가신다고….”

“혹시 어떤 식당인지 아시나요?”

“그것까지는 저도 잘….”

“알겠습니다.”

형우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을 박차고 화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의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너 왜 그래?”

“미안하다, 의재야, 송의진 선생님. 저는 바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바쁜 일…?”

의재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형우는 이미 저 멀리 달려 나가고 있었다.

“뭐지? 표정이 엄청 심각해 보였는데….”

하지만 오래 고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제자야! 다음 컷은 언제 주냐?”

하고, 송의진이 닦달했기 때문이었다.

* * *

판교 근처에 위치한 횟집의 손님방.

커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남녀가 앉아 있었다.

“서 수석, 여기 어때? 나도 마음대로 오지는 못하고, 중요한 일 있을 때마다 겨우 오는 곳이야.”

“…윤징식 부회장님. 저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진짜 모르고 묻는 건 아니잖아? 이야기는 좀 있다가 하기로 하고, 일단 밥부터 먹자. 아귀 간 한번 먹어 봐. 아주 끝내준다구.”

회사들이 많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사원을 위한 식당은 아니다. 월급쟁이들의 사정으로 오기에는 지나치게 비싸고 호화롭다.

<훗카이도>라는 이름의 이 초밥집은 식사를 위한 식당이 아니라 접대를 위한 식당이다. 판교 회사들의 굵직한 이야기 중 절반은 이 횟집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곳에 내가 오게 되다니.’

지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평소엔 꿈도 못 꾸던 곳에 와서 뿌듯함을 느낀 것이면 좋으련만, 지원이 느끼는 감정은 정반대였다.

‘…무섭네.’

오늘 지원이 이곳에 온 이유는, 부회장인 윤정식과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말이 담판이지, 결과는 뻔했다.

상대는 자신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C&N의 부회장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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